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202
203. 막내가 너무 강함 (9)
***
하은성은 그를 알게 된 뒤 처음으로 자신의 채권자에게 염려를 느꼈다.
“저기··· 요원님.”
키르그자일을 제압한 곳에서 잠시 헤어졌던 그들은 델이 있는 바다 위에서 방금 전 재회했다. 민준은 그 잠깐 사이 델에게 접근했던 해룡 한 마리를 혼쭐 내고 쫓아버린 모양이었다.
그런데, 민준을 마주한 하은성의 감각에 묘한 게 잡혔다.
“괜찮으세요?”
말을 해 놓고 아차 싶었다. 상대는 윰투스가 신으로 섬기는 무시무시한 존재다. 바로 어제 도시 하나를 초토화시키는 위엄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런 대단한 사람··· 아니, 어쩌면 사람도 아닐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런 대단한 존재를 걱정하는 게 말이나 될 일인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음, 뭐가?”
대꾸하는 민준의 얼굴은 여느 때처럼 표정을 읽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하은성은 그에게서 약간의 활기를 느꼈다. 생동감이 느껴진다고 할까? 지쳐 보였던 기미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여기까지만 고려하면 더욱 그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민한 드래곤이 질문한 이유가 있었다.
“냄새가···.”
“무슨 냄새?”
하은성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피 냄새가 아주 진하게 나서요. 지금까지 싸우고 돌아오실 때마다 비슷한 냄새가 나긴 했는데 오늘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이 진하게 나요. 코가 떨어질 것 같이요. 혹시 제 눈에는 안 보이지만 어디 다치신 게 아닐까 해서.”
민준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고, 하은성은 역시나 괜한 질문을 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번에는 얼굴도 보지 못한 그 칼리세나르라는 해룡이, 민준에게 두드려 맞는 도중에 피를 아주 많이 흘린 모양이다.
아, 그러고 보니 어디선가 비슷한 이름을 들어 본 것 같은데. 칼리세나르···. 기시감 속에서 몇 번 이름을 읊조리다가 곧 의식의 저편으로 치워 버린다. 민준이 말했기 때문이다.
“저 용은 이미 치료해 줬군.”
그는 하은성의 곁에 얌전히 앉은 키르그자일을 보았다. 하반신을 그을렸던 드래곤은 민준이 급하게 사라진 뒤 하은성과 함께 비교적 느릿한 속도로 여기까지 날아왔다. 다행히 못 날 정도로 다치지는 않았던 것이다. 도착하고 나서는 윰투스가 가뿐하게 치료를 해 줬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뇌는 지속된 상태였다. 민준은 아직 이 행성의 고룡 호구조사를 끝내지 못했기에, 해결할 용무가 남은 셈이었다. 저 용에게 용무가 남은 건 하은성도 마찬가지였다.
‘이 몸의 주인에 대해 좀 더 물어봐야겠어.’
대체 어쩌다가 창천에게 붙잡혀서 그 고초를 당한 걸까?
그리고 어떤 드래곤이었는지를 알면 아직도 영혼이 깨어나지 않는 이유, 혹은 실마리라도 알 수 있을지도. 또한 이 몸이 수배되었다고 하니 신상에 대해 알아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말이다.
“이쯤이 좋겠어.”
민준은 일행 모두가 발을 딛고 있는 청회색의 대지를 내려다보았다.
바다 위에 부유한 델의 몸. 그는 표면에 손바닥을 가져다 댄다. 그리고 방금 전 칼리세나르에게서 흡수한 생명력을 자극했다.
—!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담지 못했을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그의 체내에서 요동친다. 순수하게 여과한 고밀도의 생명력. 한계까지 농축된 그것을 자신이 쓸 만큼 남기고 나머지는 델에게 주입하기 시작했다.
‘몸의 노화가 시작되었으니,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지만···.’
거센 폭포수처럼 생명력이 엔델리온의 몸 안으로 쏟아진다. 이번 한 번의 주입으로 해결될 사이즈가 아님을 민준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녀를 깨울 정도는 될 것이다. 이런 큰 몸을 노출시킨 채 정신까지 잃고 있는 건 너무 위험하다. 각성시킨 다음 폴리모프 상태로 육지 어딘가에서 쉬게 놔둘 생각이었다. 그사이 민준은 고룡 사냥을 계속하고.
잠시 후.
쿠르르르!
죄인과 사제, 두 드래곤은 그들 밑의 대지가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마치 옅은 지진처럼.
민준은 밟고 선 촉수를 향해 묻는다.
“정신이 들어?”
***
“정신이 드니?”
동철은 TV 소리와 뒤섞인 레이크필드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낯선 병실이었다. 1인실인지, 주변에 사람이라고는 그와 엘프밖에 없었다.
“사장님···!”
지끈거리는 두통. 인상을 찌푸린다. 그런 고블린과 눈이 마주친 엘프는 희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깨어났구나.”
“네··· 읍!”
허리를 세우려는 그를 만류하며 레이크필드가 말했다.
“괜찮다. 더 누워 있어라. 의사들 말이 이상은 없다고 하는데, 그래도 오늘은 이대로 쉬는 게 좋겠다. 네가 쓰러진 이유가, 내가 짐작하는 게 맞다면 말이야.”
마지막에 덧붙인 말이 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고블린은 곧 의문을 잊었다. 그대로, 시선이 벽에 걸린 TV에 멎는다. 오늘 사건을 특종으로 다루고 있었다.
-···오늘 오후 7시경, 서울시 장충구 S 호텔에서 발생한 테러 사건 사망자 중 열여섯 명의 신원이 추가로 확인되었습니다. 이로써 현재까지 확인된 사망자의 수만 총 78명에 달하며 중상자를 포함한 부상자는···.
레이크필드는 옅은 한숨을 흘렸고, 동철의 얼굴 역시 딱딱하게 굳었다. 고블린이 묻는다.
“누님은요?”
“캐시는 병원 수속 때문에 잠시 원무과에 내려갔단다.”
그는 병상에 누운 동철의 어깨를 두드리며 칭찬했다.
“정말 잘했어. 사격을 가르친 보람이 있더구나.”
캐시를 노리던 백세균을 ‘누구보다 빨리’ 포착하여 총격을 날린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워낙 많은 사람들이 죽은 뒤라, 말하면서도 엘프의 표정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고블린도 마찬가지였다.
“경위님은요···?”
이번에도 호칭을 잘못 골랐지만 레이크필드는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지금 그런 게 중요한 상황이 아니니까.
“박 의원은 큰 상처 없이 멀쩡하다. 지금 응급실에 있어.”
“네? 응급실이면··· 크게 다친 거···.”
레이크필드는 어두운 안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는 정팔 곁에 있어 줄 수가 없었다. 테러 때문에 갑자기 환자들이 밀려들어서 가족 외 인원은 출입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그건, 다시 말해서.
“가족들이 크게 다쳤단다.”
정팔의 피붙이들이 그곳에 있다는 뜻이었다.
-···테러리스트 일부의 신상이 파악되었습니다. 현장에서 범인들을 지휘한 것으로 알려진 백세균 용의자의 사진입니다. 평범한 자영업자로 보였던 그가 사실은 흑마법사였으며, 이런 끔찍한 사건에 연루되었고, 심지어 지휘까지 했다는 혐의가 알려지자, 용의자를 알던 이웃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하며···.
화면에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테러 현장에서는 복면 때문에 생김새를 볼 수 없었지만, 지휘관 역할을 한 흑마법사라면 두 사람의 머릿속에 동시에 떠오르는 자가 있었다.
“저 사람이···.”
“그래.”
레이크필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캐시를 노렸던 그놈이다.”
또한 그림자 괴물을 조종하며 현장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을 죽인 흑마법사이기도 하다.
엘프의 눈동자에 숨길 수 없는 분노가 일렁인 그 순간.
‘아!’
고블린은 입을 쩍 벌렸다.
그가 병실에서 눈을 뜬 뒤 세상은 평소와 다름없는 속도로 움직였다. 모든 게 정상적으로 보였다. 생각의 속도가 가파르게 가속되는 기현상은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또 하나의 ‘능력’은 아직도 활성화된 상태인 것 같다.
고블린의 눈에는 보인다. 엘프의 몸에서 뻗어 나가는 가느다란, 붉은 선.
호텔의 치열한 격전에서 봤던 것처럼 굵고 진하지는 않았다. 그것들보다 훨씬 세밀하고 부드러운 실선이 레이크필드에게서 뻗어 나와 그가 보는 TV를 향했다.
고블린은 적잖게 당황했다. 저 선이 닿은 대상을 예외 없이 공격하는 사람들을 보아 왔기 때문이다. 설마 사장님이··· TV를 부수려는 건가?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레이크필드가 광분하며 권총을 꺼내 TV를 쏴 버리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는 그저 선명한 감정을 표정에 담은 채 화면을 바라볼 뿐이었다. 거기에 비친, 백세균이라는 이름의 흑마법사를.
그 모습을 응시하던 동철은 깨달았다.
‘아··· 설마.’
고블린은 레이크필드가 온몸으로 표현하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오늘 봤던, 서로를 죽고 죽이던 사람들이 쏘아내던 것보다는 다소 약한 감정이었다. 하지만 근원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때처럼 한 사람의 격렬한 감정이 향하는 대상을 저 붉은 선이 이어주는 것이다.
‘그렇구나.’
지금 동철은, ‘혐오’를 보고 있었다.
***
개인 사정으로 오늘 행사에 불참했던 최판석 의원은 매우 빠르게 응급실에 도착했다. 환자 가족이 아니면 출입이 금지된 상황이었지만 그는 예외였다. 오크 의원들이 테러에 희생된 오늘, 그들을 대표하는 실세를 감히 막아 세울 병원 관계자는 없었다.
예상했지만 응급실 내부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침상을 가린 커튼 뒤로는 처참한 비명이 울려 퍼졌고, 바닥에는 닦지 못한 핏자국이 군데군데 보였다. 의료진들은 혈흔에 얼룩진 가운과 간호복 차림으로 급하게 사방으로 뛰었다. 모퉁이마다 배치된 작은 의자에는 보호자들이 주저앉아 절규하거나 훌쩍였다. 최판석은 고통스럽게 숨을 들이켰다. 이곳에 떠도는 좌절, 분노, 슬픔의 입자에 자신이 푹 적셔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주변을 살피던 그는 곧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박 의원!”
그곳에는 한때 박정팔이었던 오크··· 라고 부르는 게 더 적합할 것 같은 남자가, 반쯤 무너진 자세로 앉아 있었다.
최판석은 정팔 곁으로 다가가 앉는다. 한 손을 들어 올렸다가 그것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망설였다. 하지만 곧 정팔의 어깨 위에 얹는다. 뭐라고 말을 함부로 꺼내기 힘들었다.
이미 정팔의 상황은 간략하게 전해 들었다. 이 남자에게 어떤 위로를 건네야 하는가?
모르겠다.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의원은, 가슴 속에 차오른 마음을 그대로 입에 담기로 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히 짐작도 못 하겠네.”
정팔은 어디로도 향하지 않은 시선을 고정시킨 채, 부서진 파편 같은 목소리를 흘렸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당연히 와야지.”
핏발이 선 눈으로, 정팔은 허공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최판석 역시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 정적을 먼저 깬 것은 정팔이었다.
“···얼마나 죽었습니까?”
최판석은 아는 바를 말했다.
“여섯이 죽고, 열하나가 중상일세.”
순간 정팔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상자가 그것밖에 안 된다고? 현장에서 그가 본 부상자만 해도 수백 명이다. 아니, 지금 당장 자신의 가족만 세어도···.
“······!”
곧, 정팔은 최판석이 말한 숫자의 뜻을 깨닫는다. 실소를 흘리고 싶었지만 그럴 기운도 없었다.
정팔은 현장에서 죽은 ‘사람’의 수를 물었고, 최판석은 현장에 있던 ‘오크 의원’의 사상자 수를 답했다.
또다시 대화가 끊겼다. 최판석이 어떻게 말을 이을지 고민하던 찰나, 내장 깊숙한 곳에서 토해 내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곳엔 간호사가 흰 시트로 덮인 침상을 밀고 지나가고 있었다. 그 뒤를 중년의 오크 남성이 기듯이 걸으며 따라갔다. 여보! 여보! 아, 제발··· 여보! 사람의 소리가 아닌 듯한 절규가 울려 퍼지고, 그걸 들은 다른 보호자들은 숨을 죽이거나 오히려 더 큰 소리를 내며 울었다.
시신을 뒤따르며 울부짖는 남자의 얼굴을 최판석은 알아보았다. 사적인 자리에서도 몇 번 만난 적 있는 오크였다. 이경숙 의원의 남편이군. 그는 머릿속의 사망자 숫자를 7명으로 바꾼다. 그녀가 사망함으로써 오늘 대한민국 의회의 오크 여성 의원 중 절반을 잃었다. 애초에 두 명밖에 없었으니까.
그때 정팔이 말했다.
“여기 오는 구급차 안에서 제 둘째 형님이··· 가물가물한 의식 속에서도 그러시더군요.”
현장에서 겨우 즉사를 피한 박정팔의 형제 중 한 명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최판석은 이야기에 집중한다.
“뭐라 하시던가?”
“오늘 여기에 애들을 데려오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라구요. 호텔 행사장에 미성년자는 출입 금지라는 사전 안내가 없었으면 어떡할 뻔했냐고.”
“······.”
오크의 문화를 생각하면 이런 행사에는 젖먹이부터 조부모까지 사돈 팔촌 모두가 모이는 게 맞다. 하지만 장소의 한계를 이유로 주최 측은 참석 자격을 18세 이상으로 못 박았고 인원에도 제한을 두었다.
정팔은 왼쪽 눈에서 핏덩이를 흘리며, 맞잡은 손을 벌벌 떨면서 중얼거리던 둘째 형을 떠올린다.
“그게 다행이라고··· 차라리 다행이라고. 주문처럼 몇 번이나 반복해서··· 그러시더군요.”
그때, 요란한 구급차 소리가 울려 퍼졌다. 현장의 사상자가 워낙 많았기에 나눠서 도착하는 것이다. 바쁜 고함 소리가 오가더니 구급 대원들이 급하게 이동 침상을 밀고 들어왔다.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 사이 비명이 터졌다.
이번에 실려 온 사람은 오크 남자였다. 그는 형언할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묶인 상태에서도 몸을 미친 듯이 뒤트는 통에, 그나마 붙어있는 다리 하나는 연체동물처럼 침대 밖으로 툭 흘러내렸다. 그의 다른 다리가 붙어 있어야 할 쪽에는 처참하게 파괴된 흔적만 남아 있었는데, 마치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남자의 몸 위를 밟고 지나간 듯한 참상이었다. 근육은 짓이겨졌고 으깨진 뼈 단면이 그대로 드러났다.
연신 비명을 지르는 그의 피투성이 얼굴은 이목구비를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너져 있었다. 최판석 의원은 남자의 의복을 보고 경호원이라 판단한 뒤, 눈길을 돌렸다. 머릿속의 카운트는 변하지 않았다.
그때, 정팔이 텅 빈 목소리로 물었다.
“범인들은··· 누구였습니까?”
아마 뉴스 같은 것을 볼 정신도 없었으리라.
최판석은 그에게 설명했다.
“인권연대로 추정되네.”
정팔은 한참을 침묵하다가, 그 단어를 입 안에서 굴리듯 중얼거렸다.
“인권연대.”
어미가 생략된 그 한마디는 질문 같지는 않았다.
마치 예상을 한 듯한 어조였다.
“······!”
다음 순간.
정팔의 온몸에서 폭발할 듯한 기세가 터져 나왔다. 다 타고 남은 잿더미 같던 표정에 일순간 불꽃이 일었다. 그것은 만지면 핏기가 묻어 나올 듯한, 새빨간 날것의 분노였다.
“···인권연대!”
최판석은 상대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놀라서 굳었다. 정팔은 으르렁거리며 외쳤다.
“인권연대! 또요! 또 말입니까?”
그는 호흡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토하듯이 말했다.
“또 그들입니까? 지겹습니다. 의원님은 지겹지 않으십니까? 그들의 이름을 제가 언제부터 들었는지 아십니까? 의원님은 아마 저보다도 오랜 세월 접하셨을 겁니다. 천하에 상종 못 할 쓰레기들. 악독한 테러리스트. 수도 없는 무고한 사람을 희생시킨 악마들. 그런데, 어째서··· 대체 어째서···!”
정팔은 절규하듯이 외쳤다.
“왜 아직도 그들이 존속하도록 ‘놔두는’ 겁니까?!”
놔둔다.
방치한다.
그 표현의 생략된 주어를, 최판석은 짐작할 수 있었다.
“인권연대는 테러리스트입니다. 오랜 시간 존속된 집단이고, 타깃으로 인외종족만 노리지요. 희생자는 주로 오크입니다. 네, 우리가 그들의 목표가 되어 왔습니다. 놈들이 얼마나 대단한 테러리스트냐고요? 지금까지 국가 하나도 전복시킨 적이 없습니다. 그들 중 드래곤 슬레이어가 탄생했다는 소식도 들은 바 없습니다. 그냥 오크만 납치하고, 고문하고, 죽일 정도의, 그런 수준의 무력인 겁니다. 전 세계에 지부가 있다고 한들, 실행력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집단인 겁니다. 그건 다시 말해서!”
그의 두 눈이 이글거리며 불탔다.
“강대국들이 총력을 동원하면, 혹은 그 나라들을 뒤에서 움직이는 고룡이 나서면··· 충분히 뿌리 뽑을 수 있는 집단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최판석은 비난하는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는 걸 안다. 그는 잠자코 정팔의 울분을 들었다.
“신 같은 초월적 존재가 세상 모든 끔찍한 재앙을 없애 달라는 희망 같은 건 없습니다. 네,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아요. 하지만 신이 우리를 돕지 않는다면, 우리라도 서로를 도와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지금까지 보고만 있습니까?!”
거친 숨을 토한다.
“왜냐면··· 당하는 게 그들이 아니니까요! 오크가 죽어도 국가의 존속을 흔들 정도는 아니니까요. 고룡의 재산 피해도 미미한 수준이니까요. 몇십 년 전 유럽의 해츨링이 죽었을 때 고룡들이 머리를 맞대고 흑마법 학파 하나를 뿌리 뽑은 것과 너무도 차이가 납니다. 그건 울타리 안의 존재가 다치고, 죽고, 존엄이 손상당한 사건이었던 거죠. 그래서 나섰습니다. 하지만 오크는 아닙니다. 애초에 그들 기준으로 오크는 ‘우리’가 아닌 겁니다. 오크는 울타리 밖의, 선 밖의 존재들이니까요.”
정팔은 두 눈을 감는다. 그리고 떨리는 호흡을 억누르며 둘째 형의 말을 떠올렸다.
아이들을 데려오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이야기.
“오늘 이 끔찍한 현장에 우리 아이들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들 역시 언젠가는 타깃이 될 겁니다. 저는 그 애들에게 지금과 같은 끔찍한 세상을 물려줄 수는 없습니다.”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 준비하면서 정팔은 다짐했다. 물론 그는 오크의 권익을 위해 싸울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의정 활동은 궁극적으로, 종족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공통의 선을 지향해야 했다.
혐오는 그것의 대상이 된 자들이 사회에 섞이는 것을 두려워하고 그들끼리 뭉치는 결과를 낳는다. 정팔은 오크의 분리와 고립화가 지속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는 오크가 다른 이들과 섞이기를 바랐고, 그 방법은 모든 종족이 공유 가능한 선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오크 역시 다른 종족에게 피해를 주는 부분이 있을 것이며, 오크가 배척당하는 객관적인 이유 역시 존재할 터. 그런 영역 역시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하지만 정팔은 오늘, 그 신념이 바뀌는 것을 느꼈다.
“결국은, 우리에게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달콤한 꿈에 빠져 있던 자신에게, 세상이 조소 섞인 목소리로 묻는 것 같았다.
이제, 정신이 드는가?
드디어 헛된 망상에서 벗어났나?
“네, 이제야 정신을 차렸습니다. 비로소 현실이 바로 보입니다. 오크를 울타리 안으로 들여보낼 의도가 없다면, 그들이 울타리 너머 우리 영역을 침략해서 불태우지 못하게 막기라도 해야 합니다. 감히 함부로 건드릴 수 없도록 힘을 키워야 합니다. 그들에게 공포를 심어 줘야 합니다.”
그 방법은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정팔은 오크에게 충분한 힘을 주기 위해 앞으로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을 것이라 결심했다.
폭력이든, 계략이든, 연줄이든, 뒷배든. 그 무엇이 되었든 간에.
그는 이어서 당선 전에 했던 다짐을 떠올린다.
국회의원으로서 강한 의지, ‘강철 같은 마음’을 품은 채 최선을 다해 매일을 살아가겠다는 의지.
그 결의는 가슴속에서 형태를 바꾸었다. 강철은 분노로 정련되고, 연마되며, 담금질된다. 정팔은 그의 가슴속에 날카로운 한 자루의 검이 벼려지는 것을 느꼈다.
오늘 부모와 손위 형제 다수를 잃고, 지금도 잃어 가고 있는 이 오크는 자기 자신을 앞으로 동족을 위해 사용될 무기로 인식했다.
그리고 기왕 사용될 것이면, 아주 강력한 무기가 되어야 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