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642
642
김규환 본부장은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면서 말했다.
“이사님 말씀대로 에틸렌 생산 설비를 갖추려면 최소 수천억 원의 자금이 추가로 들어가게 될 겁니다.”
부정적인 반응에 김인철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래서 반대라는 거야?”
화가 난 듯한 모습에 김규환 본부장은 김인철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도록 애를 쓰면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반대라기보다는 지금 당장은 여러모로 무리인 것 같으니, 일단 장기 계획으로 미루어 두고 나프타 생산량 증설에 집중하자는 겁니다.”
“그게 그거 아니야!”
한쪽 손바닥으로 앉아 있는 소파 팔걸이를 세게 내려치면서 버럭 언성을 높인 김인철은 눈을 부라리면서 말했다.
“늘어난 시장을 먼저 선점하는 것이 핵심인데 머뭇거리다가 다른 업체한테 기회를 빼앗긴다면 김 본부장이 책임을 질 거야!”
“그렇지만 자금이…….”
“예정되어 있는 회사채 발행 액수를 늘리거나 금융권에서 융자를 받으면 되잖아.”
“하지만 그건 나프타 생산 시설 증설에 쓸 자금이지 않습니까?”
계속 말대꾸를 하자 김인철이 짜증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에틸렌 생산 시설까지 포함시켜서 프로젝트 규모를 크게 키우자고 이야기를 하지 않나!”
“말씀대로 한다면 자금 부담이 엄청날 겁니다.”
김규환 본부장이 난색을 표했지만 김인철은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계속 매출이 늘고 있고 신용도가 좋아 낮은 금리로 자금을 빌릴 수 있으니, 그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거야.”
4분기 연속 흑자를 기록하면서 자금 흐름이 원활한 건 사실이었지만 수조 원이 투입되어야 될지도 모르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너무나도 성급하게 결정하는 것 같아 김규환 본부장은 불안감이 들었다.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상황을 알아보시지요. 결정하는 건 그 뒤에라도 늦지 않을 겁니다.”
완곡한 설득에도 불구하고 김인철은 도통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사사건건 훼방만 놓는다고 생각하는지 자연스럽게 올라가는 목소리에 짜증이 섞였다.
“뭐가 그렇게 말이 많아? 내가 상사라는 걸 잊었나? 명령을 내리면 그에 따르는 것이 마땅히 자네가 할 일이지, 앉아서 입만 나불거리는 게 아니라고.”
아무래도 이 이상 반대하다간 언성만 높아졌지 해결 방법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김규환 본부장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뱉고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때서야 김인철은 만족한 표정을 짓고는 한쪽 팔을 내저으며 말했다.
“더 할 이야기가 없으면 그만 나가 봐.”
“예.”
김규환 본부장이 소파에서 일어나 머리를 살짝 숙였다가 바로 하고는 다른 간부들과 함께 밖으로 나가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앉은 김인철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짧게 혀를 찼다.
“쯧.”
계획된 대로 나프타 설비만 증설을 한다면 아무리 성공적으로 프로젝트를 끝내더라도 결국에는 죽은 둘째 형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것밖에 안 됐다.
어떻게든 둘째 형의 그림자를 지워 내 버리고 오롯이 공功을 자신이 차지하기 위해서는 프로젝트 내용을 처음부터 뜯어 고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고심 끝에 생각해 낸 것이 나프타 설비 증설에 그치지 않고 후속 공정인 에틸렌 생산 설비를 갖춰서 원료인 원유를 가지고 각종 화학제품까지 생산하는 수직계열화를 이루어 내는 거였다.
이렇게 된다면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중간재인 나프타가 공급 과잉이 되어 판로가 막히더라도 생산물량을 자체적으로 소화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하루빨리 태일정유에서 자신의 위치를 공고하게 만들고 큰형인 김성균 건설 사장하고 후계자 경쟁을 벌이기 위해서는 한시가 급한데, 돕지는 못할망정 태클을 걸려고 하니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업무 파악이 다 끝나면 저 자식부터 쳐 내야 되겠군.”
어차피 비정유 부분을 완전히 손에 틀어쥐고 마음대로 휘두르기 위해서는 인사 정리는 필수적이었다.
소파에 앉아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나며 심복인 차민성 대리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이사님, 잠시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말해 봐.”
“오전에 본사 박상빈 비서실장님이 직접 구치소로 찾아가 수감되어 있는 임동원을 만났다고 합니다.”
임동원은 음주 운전으로 위장해서 둘째 형이 탄 벤츠 차량을 8톤 화물 트럭으로 받아 버린 자였다.
앞에 놓인 찻잔을 집어 들어 입으로 가져가던 김인철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박 실장 이 사람이 진짜!”
미리 계획했던 대로 이미 모든 걸 다 자백해 검찰 조사까지 마무리된 상황에서 박상빈 비서실장이 뭣 때문에 구치소로 가서 임동원을 만났는지 굳이 듣지 않아도 뻔했다.
“다행히 임동원이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그렇게 넘어갔더라도 박 실장이 마음먹고 파고들기 시작한다면 입을 열게 만드는 건 시간문제지 않겠어.”
“…….”
오랫동안 김종원 회장 옆에서 온갖 굳은 일을 도맡아서 처리해 온 박상빈 비서실장이었기에 아무리 뒤처리를 확실하게 했다고 해도 안심할 수가 없었다.
이미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넘어가면 좋을 걸, 굳이 뒤져서 자신의 발목을 잡으려고 하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입술을 짓씹은 그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초조하게 눈을 굴리다가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안 되겠군.”
시선을 들어 앞에 서 있는 차동민을 바라보았다.
“허튼소리를 지껄이지 못하도록 임동원의 입을 막아 버려.”
바로 말뜻을 알아차린 차민성 대리는 순간 움찔했다.
탐욕을 채우고 치부를 감추기 위해 계속해서 손에 피를 묻혀야만 하는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살짝 광기마저 내비치는 김인철의 눈동자에 차민성 대리는 정색을 하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자칫 박상빈 비서실장님이 더 의구심을 가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뒤를 캐고 있는 가운데 진실을 밝힐 중요한 열쇠를 쥔 임동원의 신변에 갑자기 이상이 생긴다면 의도적인 살인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상관없어. 그래 봤자 명확한 증거를 찾지 않는 이상 날 어쩔 수는 없을 거야. 그것보다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안 요소를 없애 버리는 것이 더 급해.”
단호한 태도에 차민성 대리는 무겁게 머리를 숙이면서 대답했다.
“말씀대로 일을 처리하겠습니다.”
“놈이 언제 마음을 바꿀지 모르니까 최대한 빨리 마무리를 짓도록 해.”
“알겠습니다.”
옆으로 비스듬히 기대어 한쪽 팔로 턱을 괸 자세를 한 김인철은 성난 바다처럼 사납게 일렁이는 속마음을 여과없이 그대로 드러낸 채 흉흉한 기세를 뿜어내었다.
이른 아침.
리조트 본채와 따로 떨어진 방갈로Bungalow 침실에 있는 커다란 통유리창 너머로 햇살이 아른거렸다.
하늘거리는 레이스 커튼 무늬가 실내에 약한 그림자를 드리우자 동그스름한 선을 그리고 있는 소현의 어깨가 아래위로 살짝 오르내리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새소리에 잠에서 깬 혁권은 눈처럼 하얀 등을 보인 채 누워 있는 소현의 모습에 살짝 미소를 짓고는 그녀의 뺨에 키스를 했다.
“으음.”
몸을 조금 뒤척이며 눈을 뜬 소현은 그를 보곤 배시시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언제 일어났어요?”
“조금 전에.”
애정이 듬뿍 담긴 눈빛으로 혁권이 내려다보자 그녀는 화장을 지운 얼굴을 보여 주는 것이 부끄러운지 시트를 잡아당기면서 말했다.
“아이 참. 부끄럽게.”
“예쁘기만 한데.”
“됐거든요.”
시트로 몸을 가리면서 침대에서 일어난 소현은 곧장 욕실로 들어갔다.
“먼저 씻을게요.”
“그래.”
이내 시원한 물소리가 들리자 혁권은 바지를 챙겨 입고 한쪽에 있는 냉장고에서 작은 생수병을 꺼내 몇 모금 마시고는 걸음을 옮겨 바다가 보이는 통유리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온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방갈로 앞 잔디밭을 조금만 걸어 나가면 황금빛 모래사장이 깔린 아름다운 해변이 펼쳐져 있었다.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 침실 탁자에 올려 둔 스마트폰 벨이 울렸다.
띠리릭. 띠리릭.
즐거운 시간을 방해하는 소리에 혁권은 미간을 찡그리고는 스마트폰을 집어들었다.
-보스, 저 함단입니다.
어쩐지 다급해 보이는 목소리에 혁권의 얼굴이 굳어졌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혹시 텔레비전을 보실 수 있으시면 CNN 속보를 확인해 보십시오.
의아한 표정을 지은 채 그는 리모컨을 찾아 한쪽 벽에 설치되어 있는 LED 텔레비전을 켜고는 채널을 맞췄다.
그러자 긴급 뉴스 속보라는 자막과 함께 사막 한가운데 마치 핵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시커먼 버섯구름이 하늘 높이 피어오르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이란의 지원을 받는 후티 반군이 오늘 새벽 UAE와 사우디아라비아를 향해 대규모 탄도미사일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대부분 요격에 성공했습니다만, 그중에 한 발이 아부다비 외곽에 위치한 공군 기지에 떨어졌는데, 하필이면 무기 저장소를 맞추는 바람에 대폭발이 일어났습니다.
“으음…….”
설명을 들은 혁권은 자신도 모르게 낮은 침음성을 내뱉었다.
-아직 UAE 정부의 공식 발표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현장 화면으로 볼 때 상당한 사상자가 발생했을 걸로 보입니다.
그가 봐도 시커먼 연기가 하늘을 온통 뒤덮고 있는 모습이 심상치가 않아 보였다.
-본국이 공격을 당했으니 그동안 교착 상태에 빠져 있던 후티 반군과 아랍 연합군의 전투가 다시 격화될 가능성이 클 겁니다.
“당연히 그렇게 되겠지.”
이렇게 얻어맞았는데 가만히 있는다면 스스로 국가와 왕실의 자존심을 짓뭉개는 것이 될 터였다.
그럼 자연스럽게 거의 휴전 상태였던 전선戰線에 거센 불길이 휘몰아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전쟁의 참화를 온몸으로 감당해야 되는 예맨 주민과 군인 들한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혁권 같은 이들에게 이건 큰 비즈니스 기회였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쉰 혁권은 귀에 대고 있는 스마트폰을 고쳐 쥐면서 말했다.
“남부저항군에 보내 주기로 되어 있는 물자 선적을 최대한 앞당기고 추가로 탄약과 군수품을 언제든지 예멘으로 가져갈 수 있게 준비해 놓도록 해.”
-바로 조치해 놓겠습니다.
“그리고 예멘에 있는 UAE군 사령관이 누구라고 했지?”
-알 알라비 중장입니다.
“그쪽하고 접촉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
-알겠습니다.
몇가지 더 지시를 내리고 통화를 끝내자 샤워를 하러 갔던 소현이가 커다란 수건으로 머리를 돌돌 말고 욕실에서 나왔다.
“전화하는 중이었어요?”
자리를 비켜 줄까 하고 묻는 소현에게 혁권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막 끝낸 참이야.”
방금 씻고 나와서 그런지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비누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급한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
“응?”
소현의 긴 손가락이 혁권의 미간을 살살 쓸었다.
“여기 완전 깊이 파여 있는데, 자꾸 그러면 벌써부터 주름 생겨요.”
그러자 혁권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소현이 눈은 못 속이겠네.”
“안 좋은 일이에요?”
“그런 건 아닌데 휴가 끝날 때까지 함께 못 있을 것 같아.”
“어쩔 수 없죠. 대신 다음에는 나하고 오래 놀아 줘야 돼요.”
“그럴게.”
한쪽 팔로 가느다란 소현의 허리를 잡아 가까이 끌어당긴 그는 사랑한다는 말을 하며 입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