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rd of the Alter Lands RAW novel - Chapter 162
162화. 까다로운 심사관이 걸린 영주님
카민이 머지않아 인지도 자동사냥을 할 수 있겠다며 기뻐하고 있던 시각.
마법 학회의 본부가 있는 에스페스 제국 동부의 대도시 라스페스에서는 ‘케이서스 상 심사부’에 속한 마법사들이 열띤 토론을 펼치는 중이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현재 제국의 상황은 좋지 않습니다.”
심사부장인 칼버그의 말에 다들 침음을 흘렸다.
제국 또한 왕국과 다름없이, 아니 오히려 더 많은 마계의 문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와중에 연말 파티까지 준비해야 하는 상태입니다. 굳이 갈라드리엘 왕국까지 가서 검증을 해야겠습니까?”
“그래도… ‘케이서스 상’은 초대 아카데미 학장이자 제국 건국의 공신인 대마법사 루탈린 케이서스 경의 유언에 따라 만들어진 연구 후원 제도입니다. 또한 저희 마법 학회에서 주관하는 것이고요.”
케이서스 상 심사부에 속한 마법사들은 제국 아카데미 라-스페스의 마법학 부문 교수들이기도 했다.
그런 만큼 제국의 상황이 어떻든 심사는 공정하게 이뤄져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현재 그들에게 주어진 업무는 너무 과중한 상태였다.
마계와의 전쟁, 아카데미 교육, 거기다 연말 파티에 있을 케이서스 상 수여식 준비까지.
이런 상황에서 난데없이 저 먼 갈라드리엘 왕국까지 출장을 가야 하는 상황이 내킬 리 없었다.
“그렇다면 콘드릭 경께서 심사관을 맡아 주시겠습니까?”
괜히 입을 열었다가 왕국까지 출장을 가게 생긴 콘드릭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
장기 출장을 다녀온다고 해서 업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동안 못 한 수업은 휴일에 몰아서 보강해야 했고, 출장 도중에도 전쟁 자문이 들어오면 통신구를 이용해 회의에 참여해야 했으니까.
게다가 논문 심사라는 것 자체가 막중한 책임감을 떠맡는 일이었다.
아무리 제국 최고의 마법사 중 한 명이더라도 괜히 일을 떠맡는 것이 좋을 리 없었다.
“제 전문은 포션화학입니다. 아무래도 마공학과는 거리가 좀 있지요. 더 적절한 분이 심사를 맡으시는 게….”
“크흠.”
“엇험.”
콘드릭의 말에 마공학 관련 교수들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갈라드리엘 왕국까지 가기 싫은 건 그들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런 마법사들을 한 차례 둘러본 심사부장 칼버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일은 논문 심사이기 때문에 왕국에 계시는 마법사분들께 부탁을 드릴 수도 없습니다. 결국, 심사부 소속 중 누군가는 출장을 가야만 합니다.”
그때였다.
웬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이번 심사는 제가 맡지요. 이 중에 가장 한가한 것은 저이니까요.”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칼버그가 살짝 당황했다.
“시이나르 경께서 심사를 맡으시겠다고요?”
“왜 그런 반응이죠? 저는 자격이 없는 건가요? 저도 엄연히 심사부 소속입니다만.”
그녀의 말에 여기저기서 눈알이 굴러갔다.
‘그야, 그렇긴 하지만….’
‘갑자기 저 귀차니즘 만렙 엘프가 왜 나선다는 거야?’
‘이번 논문 심사가 귀찮은 일이긴 하지만, 학계에서 화제가 되는 상황인데.’
‘설마. 저 사이코가 가서 깽판을 치려는 건가?’
심지어 심사부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젊은 마법사들은 다른 의미로 당황했다.
‘학회 소속의 시녀가 아니었나?’
‘묘하게 고급스러운 차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런데 왜 지난 1년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은 거지?’
‘심지어 아카데미에서는 본 적도 없는데, 심사부 소속 마법사라고?’
잠시 당황했던 칼버그는 관록이 있는 마법사답게 재빠르게 반응했다.
“으음.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시이나르 경께서는 좀처럼 연구실을 벗어나지 않으시는 성격이니 의외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왕국에 방문했던 게 갈라드리엘 서부 대전쟁 때니 대략 50년이 지났으니까요. 마침 출장지인 하알룬이란 영지가 서부 대전쟁의 잔해 위에 세워진 도시라면서요? 그래서 흥미가 생겼을 뿐이에요.”
“으음. 그러시군요.”
그녀의 말에 서부 대전쟁 당시를 떠올린 노마법사들과는 달리 젊은 마법사들은 경악하며 그녀의 얼굴을 다시 확인했다.
‘아니, 저 얼굴로 갈라드리엘 서부 대전쟁 참전자라고? 그러면 지금 대체 몇 살이란 거야? …아!’
그제야 그들은 아카데미 내에서 전설로 전해져 내려오는 사이코 엘프 마법사에 대한 소문을 떠올렸다.
‘저, 저 사람이 그 사람이었구나.’
우아함의 대명사인 엘프족의 이단아.
악마의 머리통을 때려 부수는 배틀 메이지 엘라나.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번 논문 심사는 시이나르 경이 맡으시는 걸로.”
칼버그의 선언에 노교수들은 속으로 안타까움을 표했다.
‘하엘린 페이지와 마주크 레브론이라 했던가?’
‘젊은 마법사들이라 들었는데… 험한 꼴을 보겠군.’
‘경력도 없는 마법사들이니 수상 가능성도 절반 이하로 떨어진 셈이야.’
다행히 카민의 로비는 자기도 모르는 위기의 순간에 빛을 발했다.
‘받아먹은 게 있으니 미리 에스쿼스 경에게 언질을 줘둬야겠군.’
***
“영주님, 라스페스에서 연락이 왔어요.”
“라-스페스요? 제국 아카데미 말입니까?”
“아뇨. 라-스페스가 아니라 라스페스라고 마법 학회의 본부가 있는 제국의 도시예요. 뭐, 아카데미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영지명이니 오해하는 게 당연하긴 해요.”
“아아.”
생각해 보니 지도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나는 그냥 아카데미의 위치를 표시해 놓은 줄 알았는데, 도시의 이름도 같은 모양이었다.
“시연 때문입니까?”
“네. 심사관이 배정됐다고 연락이 왔어요. 12월 첫째 주 안으로 도착할 거라고 하네요.”
빨리빨리, 신속 정확의 나라에서 살던 나로서는 환생하고 나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이런 점이었다.
날짜를 딱 정해 주지 않고, 이렇게 심하면 한 달 단위로 뭉뚱그려서 일정을 알려 준다.
작위 수여식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미리 가서 기다려야 했고.
“12월 첫째 주 안으로 도착한다는 말은 11월 말에 올 수도 있다는 뜻이겠죠? 마법 학회에서 하는 일이니까요.”
“네. 그렇죠.”
귀족들이 언급하는 12월 첫째 주라면 늦어지는 일이 다반사지만, 마법사가 언급하는 12월 첫째 주라면 11월 말이나 12월 3일 안쪽일 확률이 높았다.
처음에는 이걸 몰라서 가레스와 함께 황당한 일을 많이 겪었었지.
그래도 준비가 안 되어 있으면 지랄발광을 해 대는 귀족들과는 달리, 마법사들은 그러려니 하는 편이긴 했다.
하지만 하엘린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문제는 이번 논문 심사관이 굉장히 까다로운 분이라는 점이에요.”
“까다롭다고요? 좋지 않은 소식이군요.”
“네. 시연을 여러 번 시킬 수도 있고, 논문 내용에 대해 꼬치꼬치 따져 물을 가능성이 높아요. 저희는 충분히 대비되어 있지만….”
문제는 마법진 모형을 만드는 것.
내가 직접 하면 문제는 없을 텐데, 그게 안 되니 문제였다.
“영주님께서 방법이 있다고 했으니 믿고는 있지만… 어떻게 하실 계획인지 들어 볼 수 있을까요?”
“음. 일단은 이렇게 해 볼 생각입니다.”
내 설명을 들은 하엘린이 당황했다.
“그게 정말인가요?”
“예.”
“…가능할까요? 엘라힘 씨에게 비전 검술을 가르친다니.”
“예.”
요 며칠간 점심에는 메르티를 상대하고, 오후부터는 게헤른의 밑에서 엘라힘과 함께 대장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 결과, 깨달았다.
마법진 모형의 제작을 이 녀석에게 맡기면 될 것 같다고.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한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했다.
바로 엘라힘이 비전 검술을 익혀야 한다는 것.
‘뭐, 심사관이 까다롭게 굴면….’
정 안되면 내가 해야지, 뭐.
10만 길은 소중하니까.
***
“영주님께서 직접 마차를 받으러 가시겠다고요?”
“그렇네. 안 그래도 자네는 할 일이 많지 않나.”
하알룬은 왕국의 다른 지역보다 일교차가 심하다.
그렇다고 영하까지 떨어지거나 하는 일은 없지만, 겨울에 접어든 만큼 방한 대책이 필요하다.
급하게 지은 남부 유민들의 집이나 오래된 하알룬 주민들의 집을 보수해야 할 일거리가 많은 만큼 목수 총관리 책임자인 오스발이 가장 바쁜 시기이기도 하고.
“그렇긴 합니다만… 영주님께서 직접 가시더라도 전문가인 제가 따라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엘라힘을 데려갈 생각이야.”
“엘라힘을요? 흐음.”
기사인 내가 어느 정도 대장 기술을 알듯, 목수도 대장장이도 서로의 영역을 어느 정도 할 줄 아는 게 이 세계다.
“어차피 중요한 건 냉동, 냉장 장치니까.”
“하긴 그렇겠군요. 카틀로프 공방에 주문했으니 짐마차 자체의 품질은 문제없을 겁니다. 오히려 저보다 엘라힘이 가는 쪽이 더 낫겠군요.”
“그럼 그렇게 알고 있도록.”
“예. 안 그래도 따뜻한 남부에서 온 사람들이라 집이 춥다는 민원이 많았는데 다행입니다.”
“그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자네가 각별히 신경 좀 써 주게.”
“예, 영주님.”
***
하알룬으로 이주한 뒤로 엘라힘은 점점 활기를 잃어 갔다.
처음에는 게헤른을 가까이서, 그것도 혼자 모시게 된 것에 기뻐했다.
?엘라힘, 하알룬으로는 너만 데려가겠다.
라문을 포함한 다른 도제들의 질투 어린 시선에 마치 수제자로 뽑힌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하지만 이게 마냥 좋은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
하알룬이란 영지는 엘라힘의 예상보다 더 낙후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게다가 하알룬에 도착한 게헤른은 고급 기술을 가르쳐 주기는커녕 잡다한 농기구나, 병사를 위한 창칼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당연히 엘라힘은 그런 그를 도와야 했고.
사실 지금으로선 딱히 할 만한 일이 없기도 했다.
하알룬 마탑은 아직도 완공되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마공학이란 게 마탑과 연계해서 연구해야 하는 분야인 만큼 엘라힘은 하알룬에 온 뒤로 제대로 수련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실력이 퇴보하는 느낌이야.’
게다가 하알룬 마탑이 완공되더라도 영지의 상황상 바르둠 마탑에 비하면 한참 뒤처질 게 뻔했다.
연구비도 인력도.
영주 카민 리스트레토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는 항상 푸념했다.
-아, 돈이 부족하군….
그는 맨날 돈, 돈, 돈이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걸 잘 아는 엘라힘은 하알룬에서의 생활이 지금도, 또 앞으로도 크게 달라지기 힘들 거라 여길 수밖에 없었다.
마공학자의 꿈을 지닌 그는 자연히 모든 일에 의욕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게헤른이 그를 불렀다.
“이번에 카민과 함께 엘튼 타워에 가기로 했다.”
“예?”
“카틀로프 공방에 주문한 마차를 찾으러 가야 한다고 하는구나. 그 때문에 너를 데려가겠다고 하는데… 오랜만에 그의 얼굴도 볼 겸 나도 같이 가기로 했다.”
“아, 네.”
“카틀로프는 왕국에서 손꼽는 마차 장인인 동시에 마공학에 조예가 깊은 자이기도 하고. 네게도 좋은 자극이 되겠지.”
게헤른의 말에 엘라힘의 눈이 반짝였다.
‘역시 스승님의 옆에 붙어 있으니 이런 기회도 오는구나.’
카틀로프 장인을 직접 만날 수 있다니.
아직 장인의 자격을 갖지 못한, 도제에 불과한 엘라힘으로서는 아주 귀한 기회였다.
“네, 준비하겠습니다!”
그렇게 기대에 찬 채 카민, 게헤른과 함께 여행길에 오른 엘라힘은 첫날부터 날벼락을 맞게 되었다.
“예? 뭐라고요?”
“엘라힘. 여정 동안 카민에게 검술을 좀 배우도록.”
“…검술을요? 전 대장장이입니다만?”
“스승의 말을 거역할 셈이냐?”
게헤른의 말에 엘라힘은 입을 꾹 다물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지시였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