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235
234화 대계를 세우다
사천당가 심처에 마련된 원형 탁자, 사천의 대계를 좌우할 자리에 속속 사람들이 모여 자리를 잡았다.
사천당가의 가주 당천기와 곤륜파의 천원진인, 천경진인.
청성파의 장문인 청경진인이 자리를 잡았다.
이름만으로 쟁쟁한 이들 사이에 나 또한 자리를 했다.
당천기 가주가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표정이 좋아졌구만. 뭔가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예.”
“호오? 구뤠에? 좋은 일이라…… 혹 가문의 처자들이 자네를 졸졸 따라다니던?”
“예, 뭐…….”
“하하하! 마음에 드는 아이가 있으면 이야기하시게.”
“아뇨. 괜찮습니다.”
“……우리 집 애들이 뭐가 어때서!”
갑자기 당천기 가주 눈빛이 위험하게 번뜩였다.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짝사랑만 십 년째인 놈에게 뭘 바라시는 건지 모르겠다.
이래 봬도 지금까지 마음에 담은 님은 단 한 명뿐이다.
사천당가 사람들이 선망하듯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나를 기쁘게 한 것은 천상과 이어져 사부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는 점이다.
‘천마 사부님뿐이지만.’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지만, 찬찬히 이야기를 나눌 여유가 없었다.
당장 눈앞의 일을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기쁜 날이다.
[약이라도 먹었냐?]“…….”
기쁜 날……이지?
[아니면 딱지라도 뗐냐?]역시 천마 사부다.
분명 악의 없이 던지는 말인데 수위가 높다.
아무래도 푼수마냥 실실 웃고 다니는 건 내 인생에 허락되지 않는 일인 것 같다.
어쨌든 이쯤에서 현실로 돌아와야겠다.
나는 표정을 가라앉혔다.
“정색하는 거 보소?”
“…….”
***
어찌저찌 영양가 없는 말들을 나누다 보니 적당히 분위기가 풀어졌다.
쉽게 꺼낼 이야기가 아니다 보니 나름 나쁘지 않은 분위기 전환이 되었다 싶다.
그때였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가?”
“예?”
“보아하니 신중하게 기회를 보고 있는 듯해서 말일세.”
청경진인이 이어 이 자리에 모여 있는 다른 이들에게도 시선을 돌렸다.
“표정들을 보아하니 어째 이 자리에서 소외된 것은 나뿐인 것 같구먼.”
“아하하…….”
“걱정 말고 말해 보게. 당 가주와 곤륜파가 이미 알고 수긍한 내용이라면 내가 못 받아들일 일은 아닐 듯싶으이.”
연륜이라는 걸까?
역시나 청성파 장문인 자리를 공으로 앉아 있는 건 아닌 모양이다.
아무리 봐도 청경진인은 당영진이 독에 녹아 핏물로 화하는 것을 보며 꽤나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모습이다.
‘하지만 천마신교와 손을 잡을 수 있겠냐는 말을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겠지.’
뒷간에 들어갈 때의 마음과 나올 때의 마음은 다른 법이다.
‘당 가주 앞에서 보였던 못난 모습은 한 번으로 족해.’
나는 좀 더 진중해질 필요가 있다.
더 이상 혼자 날뛰던 때의 내가 아니다.
제대로 나를 세운 채 상대를 대해야 한다.
특히나 이번 일은 더더욱 신중해야 한다.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이지.’
청경진인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앞으로 정파를 이끌어나갈 신성을 보는 눈빛이었다.
그런 내가 천마신교를 이끄는 위치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그 충격이 적지 않을 것이다.
허면 어떻게 첫 단추를 끼워야 하는가.
잠시 고민을 한 나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진즉 이야기 드렸던 부분이지만, 당영진에게는 배후가 있습니다.”
“들었네. 이미 했던 말이 아닌가. 이번에 문제를 일으킨 도적 연합은 물론 구파와 오대세가에도 그 배후의 손길이 닿아 있다고 했지.”
당시에는 당영진이 사공패에게 하는 수작질을 목도시켜야 했기에 자세히 설명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그 정도가 아닙니다. 확인된 바에 의하면 종남파의 장문제자가 혈교의 대법을 받았었습니다.”
“……뭐라?”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는지 청경진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부릅뜬 눈에는 여러 감정들이 떠올랐다.
놀람이 반이라면, 나머지 반은 불신과 분노가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그중 분노의 감정에 집중했다.
‘남아있네.’
현재 청경진인이 느끼는 분노의 방향은 여러 방향으로 갈라져 있다.
같은 구파를 모함하는 이야기를 하는 나에 대한 분노도 있었지만, 사공패를 죽음으로 몰고 간 세력에 대한 분노 역시 상당했다.
청경진인은 아직 사공패에 대한 감정을 다 내려놓지 않았다.
내려놓으려 노력한 것 같지만, 내려놓지 못한 채 가슴 한구석에 남겨진 것이 겉으로 드러날 정도였다.
‘할 만하겠어.’
“호북의 덕풍 윤가는 무당과 종남에 직계 혈족을 제자로 보냈습니다. 그중 한 명은 현재 사망했으나, 둘 다 혈교의 대법을 받았습니다.”
“으음……. 소림에서 죽었다는 그 장문제자를 말하는 것인가?”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
당시 그 일 때문에 구파의 회동이 열리기도 했었다고 들었으니 장문인이라면 분명 보고를 받았을 것이다.
“예. 그가 맞습니다. 사실상 덕풍 윤가 자체가 혈교의 대법으로 이뤄진 가문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가문이 덕풍 윤가 하나뿐일 것이라 낙관하지 않습니다.”
“허어…….”
“혈교가 정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아득히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를 염두에 둔다면 어쩌면 현 종남파 장문인 역시 혈교의 뜻을 따르는 사람일지 모릅니다.”
“너무 나간 생각이 아니…….”
“직접 보셨잖습니까.”
“……으음.”
무례한 일이지만 나는 청경진인의 말을 끊으며 현 상황을 주지시켰다.
청경진인은 쉬이 믿으려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부정하지도 못했다.
실제로 사공패가 넘어가는 광경을 보았고, 사천당가가 뒤집힐 뻔한 것도 목도했다.
구파 중에도 이미 혈교의 손아귀에 떨어진 곳들이 존재할 수 있다.
청경진인은 힘겹게나마 이 가정을 받아들였다.
‘한 번 더 충격을 주자.’
“혈교조차 수족에 불과할지 모를 정도로 그들의 세는 강합니다. 황궁 내에도 그들의 영향력이 있을 정도입니다. 심지어 현 황제마저도 그들의 행보를 알고 있으면서 직접적으로 손을 쓰지 못할 정도죠.”
“허, 허허…….”
어쩌면 구파에 혈교의 뿌리가 내려져 있다는 말보다 더 충격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당천기 가주 역시 크게 놀란 모습을 보였다.
“사실인가?”
“제 조부께선 관직에 오르셨던 분으로 함자는 자 자, 염 자 되십니다. 무림과도 연이 있으신 분이라 들어보셨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기억에 있네. 연자염. 연자염이라……. 관리이면서도 무림과 터울 없이 교분을 나누는 사람이라지?”
“예. 현재 조부께선 황궁의 비밀조직인 용린대를 이끌고 계십니다. 무림과 황궁을 어지럽히는 암중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황제조차 궁 밖에 사람을 두고 움직여야 할 정도입니다.”
당천기 가주가 뭔가 감을 잡은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럼 납득이 돼.”
“뭐가 말인가?”
“도적 연맹이 장강을 먹었네. 한데 군부에서는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아. 간신배들이 뒷돈을 처먹고 황제의 눈과 귀를 가린 정도라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군. 황궁조차 녀석들이 좌지우지하는 수준인 걸세.”
“……미친.”
적들이 얼마나 크고 거대하면서도 은밀한지 알아야 한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증거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앞으로 이어질 싸움에서 정파가 열세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그래야 다음 행보를 이을 수 있다.
“게다가 얼마 전에는 천마신교조차 그들의 손아귀에 넘어갈 뻔했습니다.”
“허허……. 이젠 무서울 정도군.”
계속되는 충격에 익숙해졌는지 천마신교의 일에 대해서는 조금 놀라는 정도로 그치는 모습이다.
천마신교에 대한 반응이 적다는 건, 그 반향 역시 적게 이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첫 단추가 잘 끼워졌다.
그런 와중 청경진인에게서 예상했던 문의가 이어졌다.
“헌데, 천마신교라니? 그쪽의 일은 어찌 알았나?”
“제가 직접 그 일에 개입해서 막았으니까요?”
“자네가?”
“어쩌다 보니 그리되었습니다.”
“어쩌다 보니……라니, 자네…….”
“현재 제가 천마신교를 이끄는 위치에 있습니다.”
순간 청경진인의 눈가에 불신이 어렸다.
명백한 의심의 눈초리다.
하지만 그 정도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약했다.
‘됐다.’
아마 이야기의 서순이 달라졌다면 지금 내게 향하는 것은 의심의 눈초리가 아니라 살기가 담긴 검이었을 것이다.
[많이 약아졌구나.]‘예이 예~.’
머릿속에서 천마사부의 말이 들려왔지만 애써 무시했다.
동시에 청경진인을 향해 쐐기를 박았다.
“제가 나서지 않았다면, 안휘의 일을 기점으로 벌어질 정사대전 중에 천마신교의 발호가 이어졌을 겁니다. 그 전에 당영진의 수작질대로 일이 진행되었다면 사천이 무너졌을 것이고요. 정파는 안휘와 사천을 잃은 상태에서 양쪽으로 공격을 당했을 겁니다. 게다가…….”
“……정파는 내부에 문제를 품고 있지.”
“예. 결국 지리멸렬하다 무림은 놈들 손에 넘어갔을 겁니다. 꽤 오랜 세월 암약하던 놈들이 힘을 휘두르는 것을 보면 준비가 다 갖춰진 상황일 테니까요.”
“끄응…….”
청경진인은 현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충분히 받아들인 모습이었다.
“좋네. 허면 자네가 하고 싶은 말의 요지는 무엇인가?”
나는 자세를 바로 하며 입을 열었다.
“천마신교를 움직여 사천을 칠 생각입니다.”
“그게…… 무슨?”
청경진인은 내 말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모습이다.
지금까지 줄곧 적들의 위험성에 관해 이야기해 놓고, 정작 그들이 바라는 대로 움직이겠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 반응을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나는 신뢰를 얻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천마신교가 사천을 공격하는 ‘척’하겠다는 겁니다.”
“공격하는 척?”
“지금까지 제가 본 놈들의 움직임은 내부의 불화를 키워 스스로 상잔해 무너지도록 만드는 방식이었습니다. 그토록 강한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의 움직임이 저들의 행동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게 천마신교의 사천 침공이란 건가?”
“예. 저들은 천마신교가 중원을 공격하도록 계획했습니다. 천마신교가 저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자신들에게 수작질을 건 중원에 분노를 느껴 침공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그야…….”
“일단 관망할 겁니다.”
지금까지 그들이 해온 방식을 생각하면 분명 그리 움직일 것이다.
사천무림과 천마신교의 싸움으로 혼란스러워지는 것은 저들로서도 바라마지않는 일이다.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라 여길 것이 분명하다.
‘저들이 다음 포석을 두지 않도록 일단 움직임을 묶는다. 그리고 그사이 내부 문제들을 최대한 해결한다.’
이게 나와 당천기 가주가 머리를 맞대고 짜낸 계획이다.
하지만 청경진인은 걸리는 부분이 있는지 문제점을 지적했다.
“허나, 천마신교의 행보는 정파의 결집을 부를 걸세. 저들이 그것을 경계할 것이라 생각하진 않는가?”
“저는 저들이 그것을 바라고 있다 추측하고 있습니다. 암습을 하기엔 최적이기 때문이죠.”
“끄응…….”
“정파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비롯한 무림은 미증유(未曾有)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진인.”
적의 규모도 그 실체도 알지 못한다. 그 마수가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파악할 수도 없다.
깊은 고민에 빠져 있던 청경진인이 이를 악물며 나를 바라보았다.
“한 가지 확답을 듣고 싶네.”
“경청하겠습니다.”
“자네는 천마신교를 이끄는 위치에 있다고 했네. 허먼, 차후 천마신교의 움직임도 제어할 수 있겠는가?”
상황이 이리되니 어쩔 수 없이 손을 잡는다 하더라도, 천마신교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만에 하나 일이 잘 풀린다 하더라도 마지막에 천마신교가 칼을 거꾸로 잡는 상황을 염려하는 것 같다.
사천에 터를 잡고 있는 문파의 수장으로 당연한 걱정이다.
“제가 살아있는 한, 천마신교가 다시 사천을 침공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믿겠네.”
청경진인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써 청성파 역시 뜻을 합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