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192
제192화 – 해가 지기 전에는 돌아오겠소.
뜻밖의 위기였다.
대머리 사내, 제트의 동공에서 폭사되는 감정은 질투였다. 그는 빨강 머리를 마음에 두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빨강 머리만큼이나 직선적인 성격임이 틀림없었다. 그가 불문곡직 내게 해코지를 할 거라는 데 손목도 걸 수 있었다.
한 줌도 남지 않은 선력을 박박 긁어모아 대머리의 기습에 대비하려는데 빨강 머리가 몸을 돌려 그와 나 사이를 가로막고 나섰다. 나를 보호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 반대였다.
“표정을 보아하니 이 사람을 치려는 모양인데, 그러지 않는 게 좋을걸. 그랬다간 네 목이 달아날 테니까.”
“그자는 누구냐?”
“동방에서 온 신이야.”
“뭐?”
“진짜야. 너도 봤잖아. 카투를 순식간에 쓰러뜨리는 거. 카투만이 아냐. 요 하루 사이에 라쿠와 프라고도 한 방에 날려버렸다고. 신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어?”
“…….”
“그러니 자중하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거야. 사로 말로는 우리 일곱이 한꺼번에 달려들어도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운 괴물도 이이에게 상대가 안 됐다니까. 너도 네 눈으로 봐서 알겠지만 황당무계한 소리로 치부할 순 없잖아. 안 그래?”
“그게 사실이라도 나를 이기진 못할 거다. 잡는 게 불가능할 테니.”
“자신 있으면 한번 해보든가. 하지만 그러다 탈이 나면 전적으로 네 책임이야.”
“……그자가 나보다 강하다고 꼬리를 치는 거냐?”
“갑자기 왜 딴소리야. 꼬리를 내릴 거면 그냥 내려. 엄한 사람 물고 늘어지지 말고.”
“너는 자존심도 없냐?”
“이게 그거랑 무슨 상관이야?”
“두고 보자, 로디.”
“뭘 두고 봐. 이번 행사만 끝나면 널 볼 일은 없어.”
“행사라니?”
“동방의 신은 여기 놀러 온 게 아냐. 잡술을 쓰는 쥐새끼를 잡으러 왔대. 그 쥐새끼를 잡는데 협조하기로 했어. 너도 도와야 돼.”
“어떻게?”
“네 관할하에 있는 왕국들의 대가리들을 오리 신전으로 불러 모아. 최대한 빨리. 보우와 코마에겐 이미 말했어. 다른 세 사람에게도 통보하라고 했고.”
“그 쥐새끼만 잡아주면 동방으로 돌아간대?”
“나도 몰라. 하지만 그런다면 어떻게든 붙잡아야지.”
“미쳤냐?”
“죽을래?”
때마침 달려온 사로가 두 남녀의 입씨름을 중단시켰다. 빨강 머리가 대머리와의 공통 관심사를 문자로 옮겼다. 나는 일이 끝나는 대로 동방으로 돌아갈 거라는 의사를 분명히 밝힘으로써 대머리의 손을 들어주었다. 사로의 글을 본 대머리가 반색하자 빨강 머리는 심통이 났다. 나는 그저 피곤했다.
***
우리는 정상의 높이가 이십 장도 안 될 듯한 산에 올랐다. 산이라기보다는 언덕 같았다.
사로는 마차를 타고 오는 내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사십 년 이상 서방을 배회하는 동안 가장 가보고 싶었으나 원을 이룰 수 없었던 성산(聖山)을 드디어 방문할 수 있게 된 기쁨에 평생 제 고장에서만 살다가 늘그막에 명소 유람에 나선 촌로처럼 들뜬 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와보니 휑뎅그렁한 공터뿐인지라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서방에서 으뜸가는 권위를 자랑하는 신전이라는데 원통형의 기둥 두 개가 전부였다.
그러나 그 공터에 운집한 인사들은 소수의 통역관들을 제외하면 하나같이 서방세계의 내로라하는 거물들이었다. 빨강 머리는 그들의 태반이 왕들이고 나머지도 그들에 필적하는 세력을 가진 영주들이라 했다. 이미 내 소문을 들었을 터인지라 다들 바짝 긴장한 채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행사를 주관한 빨강 머리가 나를 대리해 팔십 명 남짓한 대중을 상대로 일장 연설을 했다.
모두들 사전에 사로가 나누어준 양천의 초상화를 손에 들고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 초상화들은 서역을 떠나기 전 나우가 준비한 것이었다. 사로가 그간 그걸 넣은 목궤를 지고 다녔다.
이제 타우린은 분란을 일으키기 어려워질 터였다. 초상화들이 대량으로 복제되며 수백만, 수천만 쌍의 눈이 그를 지켜볼 터이기 때문이었다.
서방에 온 지 며칠 만에 튼실한 감시망과 천라지망을 구축한 나는 성과를 자축했다. 사로와 빨강 머리의 공이 컸다. 특히 사로가 큰 역할을 해냈다. 그가 없었다면 이토록 수월하게 일이 풀리지는 않았을 거였다.
탐탁지 않았던 첫인상을 회상하며 나는 사팔뜨기 노인의 노고에 감사를 표했다. 사로는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보름 가까이 그림자처럼 붙어 지내며 동고동락했음에도 그는 여전히 나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빨강 머리의 수완이 탁월해서가 아니라 내가 사대마왕의 셋을 처치함으로써 획득한 신적 권위 덕분이었다. 아무도 빨강 머리를 통한 내 지시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디에나 직접 보지 않으면 믿지 못하는 위인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빨강 머리가 연설을 마치자마자 누군가 소리쳤다.
“정말로 동방신이 그대들 모두의 합을 압도하는 무력을 지녔소?”
빨강 머리가 발끈했다.
“내 말을 못 믿겠다는 거야?”
“어찌 감히 그럴 리 있겠소. 나는 다만 마왕들을 일격 즉살했다는 동방신의 신위를 직접 보고 싶었을 뿐이오.”
빨강 머리가 콧방귀를 꼈다. 그러더니 제멋대로 결정했다.
“좋아, 보여주지.”
어느 정도 각오하긴 했으나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전개였다.
칠성의 무위는 사대마왕에 약간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둘이면 가볍게 다룰 수 있을 테지만 셋만 되어도 비등할 터이고 넷은 버거웠다. 생사투를 전제로 쌍방 전력을 다할 시 다섯 이상은 내 입장에서 필패에 필사였다. 천마의 마력을 동원할 수 있다면 모를까 현재의 상태로 그들 전부를 감당하는 건 절대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여기서 물러서는 모습을 보이면 기껏 쌓아 올린 탑이 한순간에 허물어질 터이기에 참으로 난감했다. 이런 사태를 예상하고 미리 구상해두었던 방안들 중 어느 것도 타개책이 되지 못할 터였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지만 속으론 애를 태우고 있는데 빨강 머리가 숨통을 트여주었다.
“나는 빠질 거야. 이이는 손짓 한 번에 라쿠, 프라고, 카투를 뭉개버렸어. 괜히 힘을 시험한답시고 덤벼들었다가 내가 비명횡사하면 누가 책임질 거야?”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거한과 꼬챙이 노인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나도 빠지겠소.”
그러자 번개 사내 제트를 제외한 삼인도 재빨리 그들에게 동조했다.
나는 빨강 머리의 머리를 쓰다듬고 싶었다. 이다지도 기특할 수가.
빨강 머리의 대활약(!)으로 고비를 넘기는가 싶었는데 아직 상황이 종료된 것은 아니었다. 꺼져가는 불씨를 살린 건 다름 아닌 빨강 머리였다.
“이러면 너무 싱겁잖아. 이렇게 하자. 우리 중 파괴력만 따지면 최강인 코마가 이이를 치는 거야. 일절 반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은 후에 말이야. 동방신과 나는 무지무지하게 막역한 사이니까 내 부탁을 들어줄 거야.”
대머리 제트가 조건을 추가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로디. 그에게 나를 잡아보라고 해라. 그러면 이들도 수긍할 거다.”
나는 제트의 의도를 간파했다. 나를 띄워주는 척했지만 실은 정면충돌로는 자신이 없으니 자기의 특기로 나를 망신 주려는 속셈이었다.
“알았어. 얘기해 볼게.”
빨강 머리가 사로를 부르더니 땅바닥에 열심히 글을 썼다. 사로가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번역했다.
“들어주겠다고 하시오. 다만 대머리에 관해서는 다른 방식으로 처리하겠소. 덩치가 나를 공격하면 어디든 달아나라고 이르시오. 그러면 내가 그의 팔찌를 쪼갤 테니까.”
사로가 땅바닥에 쓴 답변을 읽은 빨강 머리가 모두에게 내 뜻을 알렸다. 장내는 이내 조용한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다.
십 척 장신의 거한과 대머리지만 흠잡을 데 없는 미남인 제트가 나와 이십여 보의 거리를 격하고 나란히 섰다.
주관을 자처한 빨강 머리가 치켜들었던 손을 내리자 거한은 내게로 도약하며 철퇴를 휘둘렀고 대머리 제트는 뒤쪽으로 쏜살같이 내뺐다. 그리고 다음 순간 둘 모두에게서 비명과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난 상황을 느리게 묘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거한. 쇠사슬에 매달려 수직으로 떨어진 그의 철퇴는 내 정수리를 강타했다. 하지만 미증유의 거력을 담은 쇠뭉치는 내가 두른 여덟 겹의 기방을 깨트리지 못했다. 물론 나도 충격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지난 닷새간 내상이 말끔히 아물었고 제트에게 지공을 발한 직후 선력을 모조리 두부의 기방에 투여했음에도 전신의 뼈마디가 울렸다. 실로 가공스러운 괴력이었다.
하지만 나를 찌그러뜨리기엔 삼 푼의 힘이 모자랐다. 하여 나는 꿋꿋이 버티고 선 반면 기방의 반탄력에 자신의 힘을 고스란히 되돌려 받은 거한은 ‘악’ 소리와 함께 나뒹굴었다. 그는 단지 쓰러지기만 한 게 아니었다. 칠공에서 피를 뿜어내는 양이 누가 봐도 중상이었다.
중인의 귀엔 동시에 나온 걸로 들렸을 테지만 대머리 제트의 경악성은 극미한 차이나마 거한의 비명보다 먼저 튀어나왔다.
나는 그가 뒤로 몸을 날린 순간 지공을 쏘아냈다. 기실 선정의 통찰안으로도 그의 움직임을 포착하기는 쉽지 않았다. 너무 빨랐기 때문이었다.
하여 나는 약간의 꼼수를 썼다. 그가 피신할 경로와 거리를 예측하고 겨냥점을 제한한 것이었다. 이는 철괴를 희롱하던 그의 수법을 보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계산 자체가 불가능했을 터였다. 거기에 더해 타우린이 광구를 타고 도주할 경우 퇴로를 막기 위해 강구했던 비책이 안성맞춤으로 먹혔다. 한마디로 운이 따랐다.
각설하고 왼 손목에 둘렀던 팔찌가 내 정밀한 타격에 산산조각 나자 경악성을 토해낸 제트는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얼이 빠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심사를 헤아린 듯 모두들 숨소리조차 조심했다.
푸드득.
장내에 깔린 살얼음판 같은 고요를 나무에서 일시에 날아오른 산새들이 깨뜨렸다.
***
다들 나를 초대하겠다며 아우성을 쳤다. 빨강 머리는 그들의 청을 묵살했다. 그러면서 내가 자기의 성에 머물 거란다. 십 년이고 백 년이고. 제트는 침울한 기색이었으나 열패감 탓인지 어깃장을 놓지 못했다.
나는 의기소침해진 대머리 사내를 달래주었다. 사로를 시켜 내가 당분간 그와 단둘이서 서방을 돌아다니다가 쥐새끼를 잡는 대로 동방으로 돌아갈 거라 전하자 빨강 머리는 울상을 짓고 대머리는 언제 풀이 죽었냐는 듯 파안대소했다. 단순하고도 유쾌한 사내였다.
내 의사 표명에도 동행을 강력하게 요구하며 달라붙는 빨강 머리를 떼어놓은 나는 사로를 안고서 북녘으로 비상했다. 성산에 오기 전부터 계획했던 행선지가 있었다. 나는 일을 벌인 김에 사대마왕 중 ‘파이라’, 즉 ‘유령’이 출몰한다는 섬에 가서 마무리를 지을 작정이었다.
섬이라고 했지만 남북으로 사천 리가 넘게 뻗은 대도(大島)였다. 전날 용왕과 비무를 벌였던 칼리를 능가하는 크기였다.
그다지 넓지 않은 해협을 건넌 후 나는 해안선을 오른쪽으로 타고 올라갔다. 대략적인 위치는 알지만 사로도 초행길이라 했다. 그래서 길을 잃을 염려가 없는 경로를 택한 것이었다. 유령의 본산은 섬 북단의 고원지대에 있었다.
목적지에 거의 도달했을 때 먼동이 터왔다.
사로는 나를 따라 고원에 오르지 않고 아래에 남기로 했다. 대놓고 토설하지는 않았지만 서방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금지(禁地)라는 고원의 악명에 겁을 먹은 기색이었다.
솔직히 나도 조금 꺼림칙했다. 위에서 무언가 귀에 거슬리는 미음이 휘돌았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바람 소리일 테지만 사이(邪異)하게 흐느끼는 양이 흡사 귀곡성 같았다.
“그럼 여기서 기다리시구려. 유령을 만나건 말건 해가 지기 전에는 돌아오겠소.”
나는 사로를 두고 홀로 고원으로 날아갔다. 방금 전 그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될 것임을 알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