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46
제46화 – 왜요?
송천은 어중간한 곳이었다.
인구가 일만 어림이니 도시라 주장하기엔 작고 촌이라 부르기엔 컸다.
양 관주와의 협의를 끝내고 정오경에 소운당을 나선 나는 한 시진도 지나지 않아 보양에서 삼백이십 리가량 떨어진 송천에 당도했다. 고을을 가로지르는 개천을 따라 멋들어진 소나무들이 줄지어 있는 아름다운 고장이었다.
천년고도의 고아한 정취를 감상하며 나는 고을 안쪽으로 들어갔다. 송천엔 십자무련 중추십삼파에 속하는 정검문이 터를 잡고 있었다.
지난 일백팔십 년간 줄곧 송천과 그 일대의 지배방파로 군림했지만 당대에 창천검이라는 일대검호를 배출함으로써 정검문은 사상 최고의 성세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들의 위세는 오랫동안 그들을 위성방파 취급했던 오대세가를 능가했다. 중립지역인 보양에서 가장 많은 세금을 뜯어가는 곳도 정검문이었다.
오후의 거리는 평화롭고 고즈넉했다.
이따금 마주치는 행인들은 거의 예외 없이 내게로 눈길을 주었으나 시선을 고정시키지는 않았다. 그들의 눈엔 내가 보기 드물게 잘생긴 청년으로만 보일 터였다.
저자를 지나고 얼마 후 기석으로 정성스레 쌓은 돌담이 보였다. 담장을 따라 일각쯤 나아가니 솟을대문이 나왔다. 십 척 거인이 그만큼 큰 아들을 무동 태우고도 넉넉히 지나갈 법한 문 양옆으로 여섯 명의 경비 무사가 늘어서 있었다.
내가 접근하자 무사들이 경계 태세를 취했다. 그들 중 상급자로 보이는 사십 대 민머리가 나를 멈춰 세웠다.
“거기 서시오. 공자는 어디에서 온 뉘시오?”
명문의 문지기에 걸맞은 정중한 언사였다.
“나는 오선이오.”
공공문과 정의단을 나열하는 장황한 소개를 생략하고 이름만 밝혔더니 무사는 내 정체를 깨닫지 못한 모양이었다. 동료들을 돌아보며 그들도 같은 상태임을 확인한 그가 질문을 이었다.
“본문에는 무슨 용무시오?”
“대 문주를 보러 왔소.”
일순 무사들이 경직되었다. 그들 중 하나가 성급한 반응을 보였다.
“이제 보니 정신 나간 놈이었구나. 썩 꺼지지…….”
무사는 축객령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그의 옆에 있던 염소수염 무사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그를 잡아당겼기 때문이었다. 눈치를 챈 이는 그만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나를 상대했던 민머리 무사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질렀다.
“마, 마, 마협!”
흠, 이들은 내 별호가 절대천룡으로 통일된 걸 아직 모르나?
민머리 무사의 호명으로 비롯된 소동은 난리로 번졌다.
경비 무사 둘이 허둥지둥 안으로 달려들어가 내 도래를 보고하자마자 다급한 고함성과 뜀박질 소리가 난무했다.
나는 입문의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대문을 들어섰다. 무사들은 나를 제지하기는커녕 앞다투어 뒤로 물러섰다.
대문 너머 경내엔 수많은 이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러다 나를 보고는 다들 그대로 얼어붙었다.
문주의 처소가 어딘지는 몰랐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정면의 전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보고가 나아간 경로로 보아 그곳이 종착지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창천검은 거기에 들어있을 터였다.
하지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왼쪽에서 몇 줄기의 인영이 날아왔는데 선두에 선 자는 다름 아닌 창천검이었다. 나는 몸을 그쪽으로 돌렸다.
내 이십 보 전면에 이른 창천검이 흔들리는 눈빛을 발하며 물어왔다.
“여긴 어쩐 일이냐?”
나름 용기를 쥐어짰는지 눈빛과는 달리 한 점의 떨림도 없는 당당한 음성이었다.
“끝을 보러 왔소. 어제 어정쩡하게 끝나 제대로 매듭을 짓지 못했잖소.”
꿀꺽. 꿀꺽.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가 야밤 연못가의 맹꽁이 울음소리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창천검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간밤에 애첩한테 너무 힘을 쏟은 건가. 아니면 ‘끝’이라는 단어에 과민반응을 보이는 건가.
별로 예쁜 구석은 없었지만 나는 아무 소리도 못 하고 내 처분만 기다리는 창천검을 구원해주었다.
“어디 조용한 데로 옮깁시다. 여러 사람 앞에서 떠들 일은 아니잖소? 우리만 합의하면 되는데.”
내가 무력 행사를 할 뜻이 없음을 알리자 도처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굳었던 창천검의 면상도 조금 풀렸다.
“삼원각(三圓閣)으로 가자.”
말을 해놓고는 창천검은 발을 떼지 않고 나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나더러 앞장을 서라는 건가. 거기가 어딘지 내가 알게 무언가.
창천검과 함께 왔던 검사들 중 하나가 내게로 달려왔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이리로.”
검사를 따르며 나는 흘끗 창천검을 보았다. 곧 죽어도 안내인 노릇을 하긴 싫다는 거군. 창천검에게 조소를 날릴까 하다가 똑같은 수준이 될 것 같아서 자중했다.
삼원각은 원기둥 모양의 전각들 세 개를 뭉쳐놓은 특이한 구조였다. 어째서 그런 이름을 붙였는지 납득이 갔다.
나는 창천검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원기둥 중 하나에 들어갔다. 그를 따랐던 검사들은 뒤에 남았다.
창천검은 일 층의 밀실에 나를 들였다. 문과 벽의 두께를 보니 여간해선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을 터였다. 물론 나 정도의 청력을 지닌 이에겐 무용지물이었다. 나라면 그 안에서 아무리 낮은 소리로 속닥거려도 얼마든지 잡아낼 수 있었다.
방엔 탁자 하나와 의자 네 개뿐이었다. 정검문의 수뇌부들이 회의를 하는 장소인 듯했다.
내게 착석을 권하지 않고 먼저 자리에 앉은 창천검이 물었다.
“무엇을 원하느냐?”
나는 선 채로 되물었다.
“당신은 뭘 원하오?”
창천검은 선뜻 답을 내놓지 못했다. 칼자루를 쥔 쪽이 나임을 인정한 것이었다. 나는 칼을 휘두르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았다. 행여나 밖에서 들을세라 창천검이 목소리를 낮췄다.
“본문과 너 사이에 일어난 일은 유감이다. 나는 광풍혈사대와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악연을 종결하고 구원(舊怨)을 해소하기를 바란다.”
“유감? 고작?”
내가 삐딱하게 나가자 당황한 창천검이 즉시 꼬리를 내렸다.
“너를 적대시하고 위해를 가하려 한 행동에 대해서는 사과하마. 내 불찰이었다. 그리고…… 나를 살려줘서 고맙다.”
창천검은 이십일 전의 충돌에서 내가 진신무위를 감추고 그를 희롱했다고 착각했음에 틀림없었다. 굳이 오해를 바로잡아줄 필요가 없었기에 나는 진실을 함구했다.
“그럼 이제부터 나를 집적거리지 않을 거요? 나를 손봐달라고 십자무련에 호소하지도 않고?”
“그런 적 없다. 물론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 테고.”
“무영도수가 온 게 당신과는 무관하다고?”
“나는 다만 그간의 경과를 보고했을 뿐이다. 총사는 내가 청한다고 응할 인물이 아니다.”
그럴듯한 소리였으나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이 사안에 관한 진위 여부를 따지고 가리는 게 정검문 방문의 목적은 아니었기에 그냥 넘어갔다.
“뭐, 어쨌든 좋소. 향후 서로를 소 닭 보듯 합시다. 노파심에서 한마디 하건대 오늘의 합의를 어기고 다시 나를 건드리면 국물도 없을 거요.”
“절대로 그러지 않을 게다. 본문의 명예를 걸고 약속한다.”
협박에 굴하는 언사를 내뱉으면서도 창천검이 만면에 만족감을 드러냈다.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고 재난을 모면하게 되어 흐뭇한 것이리라. 그러나 그는 아직 안심하기엔 일렀다.
창천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문으로 향했다. 그가 문을 열기 전에 그를 불렀다.
“참! 잊은 게 하나 있소.”
“뭔가?”
나는 고개를 돌리는 창천검의 오른손을 낚아챘다. 그의 면상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뭐 하는 게냐?”
“내 친인에게 손찌검을 했더구려.”
말귀를 알아들은 창천검의 낯빛이 사색이 되었다.
“당한 만큼 갚아주는 무림의 법도에 따라 나도 당신 손가락들을 잘라야 할 터이지만 날붙이를 선호하지 않으니 다른 방식으로 하겠소.”
나는 내 손에 든 창천검의 손을 우그러뜨렸다. 창천검은 내 선력을 감당하지 못했다. 나와의 무력 차이를 감안했던지 저항도 포기했다. 나는 망가뜨린 그의 손을 놔주었다.
“이 행사에 대한 복수는 받아주겠소. 하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적으로 하는 게 좋을 거요. 애먼 이들에게 괜한 피해를 주기 싫다면.”
창천검에게서는 아무 응답이 없었다. 나는 그를 두고 혼자 밀실을 나왔다. 전각을 나가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검사들이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아무도 감히 내게 창천검의 안위를 확인하려 들지 않았다.
***
정검문 건을 처리한 나는 보양으로 돌아갔다.
개운했다. 주근깨에게 행패를 부리던 자를 혼내준 사소한 사건을 시발로 하여 산비탈을 구르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던 사태가 이제야 마무리된 느낌이었다.
나는 아직 상황이 끝나지 않았음을, 오히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임을 아직 알지 못했다.
나와 오래 떨어져 있으면 안절부절못하는 안진을 고려해 쉼 없이 경공을 전개한 덕분에 자하옥관에 이르렀을 때는 아직 한낮이었다. 송천까지 왕복하는 데 채 두 시진도 걸리지 않은 셈이었다.
별채에 가서 안진을 본 후 소운당으로 가니 양천과 석진이 술판 대신 바둑판 위에서 수담을 나누고 있었다. 한월노모는 보이지 않았지만 어디에 있는지는 명백했다. 복도 맨 끝 방에서 우렁찬 코골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가 들어섰음에도 대국자들은 눈도 돌리지 않고 반상만 노려보고 있었다. 생사대적과의 결투에 임하는 사람들처럼 표정들이 자못 심각했다.
나는 바둑판에 어지러이 얽힌 흑백의 돌들을 보았다. 형세는 고사하고 뭐가 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어린 시절 세상을 주유하다 바둑이 신선놀음이라는 말을 듣고는 노인네를 졸라 익히긴 했지만 금방 싫증이 난 탓에 배우다 말았고 그래서 내 기력은 겨우 까막눈만 면한 수준이었다.
누가 둘 차례인지 몰라도 한참을 기다렸지만 아무도 착수하지 않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사람이 왔으면 쳐다보기라도 해야 할 것 아뇨?”
둘 다 나를 무시했다. 바둑판을 쓸어버릴까 하다가 두 인간의 태도가 너무나 진지한지라 참았다.
내가 맡긴 일들을 주관하느라 여념이 없을 양 관주가 짬을 내어 나를 보러오려면 족히 반 시진은 걸릴 터였기에 나는 소운당을 나왔다. 장고가 이어진 데다 국수 급을 자처하는 고수들의 바둑을 감상하기엔 내 기력이 턱없이 모자랐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 노릇을 하느니 주근깨의 수다에 시달리는 게 나았다.
안진에게 얼굴만 비추고 갔던 내가 다시 찾자 주근깨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러면서 익숙한 호들갑을 떨었다.
“그거 아세요, 공자님? 글쎄, 옥관의 여우들이 죄다 십전공자에게 봉야를 바치겠다고 나섰지 뭐예요. 저만 빼고요. 저는 공자님께 일편단심이랍니다.”
부담스러운 주근깨의 시선을 피해 천장에서 줄을 타고 내려오는 거미에게 눈을 돌리며 나는 장단을 맞춰주었다.
“그래서 그 친구가 받아들였소?”
설마 했는데 주근깨가 고개를 끄덕였다.
“밑져야 본전이라 아무도 기대를 안 했는데 바로 수락하더래요. 그러면서 하루에 다 품을 수는 없으니 순서를 정하라고 했대요. 빨간 구슬을 뽑은 초화 년은 좋아서 입이 찢어졌어요.”
기가 막혔다. 한편으로는 양천이 한없이 부러웠다.
나를 힐끔거리며 주근깨가 죽상을 했다.
“그년들이 부러워요. 얼마나 좋을까.”
나는 주근깨를 위로했다.
“그럴 것 없소. 그녀들은 그 친구와 즐거운 시간을 갖지 못할 테니까.”
“왜요?”
얄궂은 대답을 기대했는지 주근깨의 매혹적인 눈과 입술에 심술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나도 씩 웃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