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47
#146화
모든 만남에는 헤어짐이 있는 법.
눈에 익은 육두마차가 가까이 다가오자 주표가 손바닥만 한 뭔가를 내게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오늘 만남에 대한 과인의 보답이다.”
“어이쿠, 뭐 이런 걸 다…….”
건네받아 자세히 살펴보니 일종의 황금 메달이다.
표면에 구름과 용이 섬세하게 음각된 그것은 햇빛을 받아 번쩍 빛났다.
띠링.
– 퀘스트 대상이 오늘의 만남을 매우 흡족해합니다!
– 퀘스트 보상으로 [상산왕의 증표]를 얻었습니다!
“과인의 증표다. 혹시 따로 원하는 물건이나 소원이 있다면 증표를 들고 찾아오너라. 내 힘이 닿는 데까지 들어줄 터이니.”
“오.”
교환 쿠폰이네.
중국집 쿠폰은 스무 장에 탕수육 대짜인데, 이건 무려 상산왕의 교환 쿠폰이니까 각종 영약이나 보물로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안 그래도 무기가 하나 필요하긴 한데.’
열화신단을 흡수한 덕분에 공력은 충분한 상황.
다만 쓸 만한 창이 없다는 게 아쉽던 차다. 다른 무기들은 처음부터 거의 일회용 젓가락처럼 쓰고 버리는 수준이었으니까.
‘아예 지금 확 바꿔 버려?’
순간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미 큰 위기는 넘겼다. 급할 것 없는 상황에 왕의 증표를 무기 하나와 교환하기에는 너무 아깝다.
“감사합니다. 저 이거 되게 갖고 싶었던 건데.”
허리를 꾸벅 숙이자 주표가 까치발을 들고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그대가 좋아하니 나도 기쁘다.”
“…….”
이거 되게 기분 묘하네. 귀여우니까 봐준다.
그사이 우리를 데려다줄 마차가 멈춰 섰다. 마차에 오르려는 내게 주표가 손을 흔든다.
“조심히 가게! 다음에 또 와!”
다음에는 네가 와야지, 인마.
새해 첫날, 그러니까 원단(元旦)까지는 고작 보름 남짓 남았다. 아마 그때쯤 어린 왕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이만.”
“다녀오겠습니다, 전하.”
마차가 워낙 크다 보니 입구도 넓다. 나와 홍진은 나란히 마차에 올랐다.
“……응?”
아니, 잠깐만. 너무 자연스러워서 넘어갈 뻔했네.
나는 황당한 마음을 담아 홍진을 바라봤다.
“뭡니까?”
“응? 왜요?”
“이거 태원진가 가는 마차인데요.”
“알아요. 그래서 탄 거지.”
“예?”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이참에 진 소가주님과 이야기를 한번 나눠 봐야 하지 않겠어요?”
빙긋 웃은 홍진이 손가락을 튕기자 관리 한 명이 바람처럼 달려왔다.
“도지휘동지. 분부하실 일이라도?”
“선약도 없이 방문하는데 선물이라도 듬뿍 가져가야지. 미리 전령을 보내서 정중히 인사드리는 것도 잊지 말고.”
“명을 받들겠습니다!”
이풍도 휘하의 장수에게 지시를 내렸다.
“귀빈이시다. 태원진가까지 모셔다드려라.”
“충!”
두 사람의 명령에 자그마치 백 명에 달하는 병력과 급하게 꾸려진 사절단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광경에 뒤따라 오르려던 청풍이 작게 박수를 쳤다.
“우와.”
그토록 염원하던 근위대 굿즈 세트를 손에 넣은 그는 당분간 태원진가에 머무르기로 했다.
이풍이 나를 향해 고개를 까딱 숙였다.
“사숙을 부탁드리겠소.”
“별말씀을.”
그런 말을 굳이 듣지 않아도 이쪽에서 먼저 친하게 지내고 싶은 상대다.
청풍을 징검다리 삼아 화산파와의 관계를 돈독히 한다면 태원진가의 앞날도 화창할 게 분명하니까.
‘재밌는 놈이기도 하고.’
청풍이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풍 사질, 난 걱정하지 말아요! 진 공자랑 같이 있으면 재미있는 일이 자꾸자꾸 생기거든요!”
“……혹시 싶어서 말해 두는데, 사고만 치지 마십쇼.”
“네!”
대답은 잘한다.
나는 남아 있는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희는 어떻게 하기로 했어?”
산서오문의 후기지수들이 우물쭈물 대답했다.
“원단이 다가올 때까지 홍화객잔에 묵을 계획입니다.”
“본가에 다녀오기에는 워낙 시간이 빡빡하기도 하고…….”
“사실 돌아갈 엄두도 안 납니다.”
“지금 돌아가면 아버지께서 절 죽이실지도 몰라요.”
우울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다.
하긴, 지금쯤이면 전날 있었던 일에 대한 소문이 날개 달린 말처럼 퍼져 나가고 있을 테니 그럴 만도 하다.
나는 녀석들을 보며 혀를 찼다.
“원단까지는 얌전하게 있어라. 문주님들께는 나중에 말 잘해 놓을 테니까.”
“저, 정말이십니까?”
“그 대신 너희도 각자 잘하고. 무슨 얘긴지 알지?”
“성운표국…… 예, 알겠습니다.”
이미 대세는 거스를 수 없다. 이제는 이 녀석들도, 산서오문의 문주들도 그 사실을 알 것이다.
앞으로는 그저 태원진가의 밑에서 최대한 몸집을 불리는 수밖에.
“그래, 그럼 수고들 하고 원단에 보자.”
“네?”
“왜, 뭐.”
“저, 저희도 가는 길인데요.”
“어디. 홍화객잔?”
“예.”
나는 황당해하는 녀석들에게 한마디를 날렸다.
“이거 태원진가 급행이야.”
쾅!
문이 닫히기 무섭게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여섯 명이 앉아도 넓었던 내부다. 나와 청풍, 그리고 홍진 세 사람은 각자 몇 자리씩을 차지하고 푹신한 좌석에 몸을 기댔다.
“여기서 살아도 될 것 같아요.”
행복한 웃음을 띤 청풍이 말을 이었다.
“할아버지와 살 때는 풀이나 돌 위에서 잤거든요. 이제는 그렇게 못 살 것 같아요.”
문명을 접한 원시인이 따로 없네.
그 말에 홍진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그럼 공자께서는 줄곧 화산에 살았던 건가요?”
“네. 엄청 어릴 때부터요. 하지만 화산에서 태어난 건 아니래요. 예전에 할아버지께 여쭤본 적이 있는데, 화산에 온 건 제가 서너 살 때라고 들었어요.”
그렇겠지. 검성이 아무리 엄청난 고수라지만 육아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초절정 고수가 된다고 남자 가슴에서 젖이 나오지는 않을 테니까.
“…….”
아냐, 초절정 고수라면 혹시 몰라.
검기, 검강도 쓰는 괴물들인데 젖 정도야 나올 수 있지.
나는 호호백발 할아버지가 갓난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우웩.”
“은인, 괜찮으세요?”
“진 공자.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잠깐 속이 메슥거린 것뿐이에요.”
“어머, 그러면 안 되지. 자, 내 무릎에 누워요.”
“…….”
확 그냥 무릎을 부숴 버릴까 보다.
내가 눈으로 쌍욕을 퍼붓자 홍진이 입을 가리며 웃었다.
“호호, 역시 진 공자는 놀리는 재미가 있다니까.”
미인이 저런 말을 했다면 나도 따라서 헤헤 웃었을 텐데, 홍진은 명백한 남자다. 얼굴에 하얗게 분을 칠하고 입술에 뭘 발라도 그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내관 출신이라고 했지.’
내관이면 내시 아닌가?
예전에 듣기로는 내시라고 해서 꼭 고자는 아니라던데. 하지만 홍진이 달린 놈인지 안 달린 놈인지 구분할 방법이 없다.
“진 공자.”
“예, 예?”
“지금 어디 보고 있어요?”
“아, 뭐가 묻은 것 같아서 그만.”
젠장, 걸렸네.
무림인은 아닌데 눈치가 절정 고수 급이다. 홍진의 하체에서 시선을 뗀 나는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이풍 대협은 어쩌다가 군문에 들어가게 된 겁니까?”
“이 첨사? 당연히 무과에 급제해서 들어온 거죠. 그 후로는 쭉 탄탄대로였고.”
“역시 화산파 속가제자라 다르긴 하군요.”
“영향이 없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에요. 고작 십 년 만에 정삼품 도지휘첨사가 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거든.”
“정삼품이라면……?”
“정삼품이 뭐예요? 먹는 건가?”
높은 직책인 건 대충 알겠는데 딱 거기까지다.
영 감을 못 잡는 나와 청풍에게 홍진이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고위직이죠. 각 성에 겨우 넷밖에 없는 데다가 이 첨사 같은 경우는 품계로 군부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요.”
홍진이 손가락을 하나씩 꼽았다.
“총사령관인 도지휘사, 그 아래가 나. 그리고 세 번째가 이 첨사. 물론 모두의 위에 계신 분이 상산왕 전하시고.”
“도지휘사요?”
“곧 은퇴를 앞둔 분이죠. 대장군의 아들로 태어나 약간의 공을 세웠고 뇌물을 엄청나게 좋아하시는.”
부패한 군인이군. 생계형 비리가 일상이 되어 버린.
총사령관이라는 인간이 그 모양이니 근래 산서성 치안이 엉망이었던 것도 충분히 설명이 된다.
“지금의 도지휘사는 무능해요. 항산검문이 무너지자마자 마적 떼가 활보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그렇게 무능하면 차라리…….”
잘라 버리지 그러십니까, 라는 말을 내뱉기 전에 꿀꺽 삼켰다. 내가 뭐라고 남의 직장 일에 관여를 하나. 그것도 고위 공무원들인데.
이런 내 반응에 홍진이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도지휘사는 황상께서 직접 임명하세요. 해임도 마찬가지고.”
“아.”
“뭐, 그래도 그 이상의 욕심은 없으니 다행이죠. 나도 뇌물 좋아하니까 욕할 처지는 아니고.”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각종 뇌물 수수 혐의에 결백을 주장하는 정치인들은 TV에서 많이 봤지만 홍진 같은 경우는 처음이다.
“왜요, 내가 그렇게 청렴해 보였나?”
“아뇨. 뇌물 좋아하실 것 같긴 했는데…….”
“이렇게 대놓고 말할 줄 몰랐다?”
“뭐, 그렇죠. 솔직히 지금 살짝 당황했습니다.”
“진 공자. 그거 알아요?”
홍진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나, 물건이 없어.”
“예?”
“고자라고.”
“…….”
이거 뭐 어떻게 대답해야 하냐. 짐작은 했지만 이런 폭탄 발언을 갑자기 던질 줄이야.
창밖을 구경 중이던 청풍이 궁금한 듯한 얼굴로 대뜸 끼어들었다.
“고자가 뭐예요?”
“……제발, 제발 입 좀 다물어.”
고추가 없다잖아, 고추가!
일분일초가 느릿하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유감입니다.”
“유감일 것까지야. 살다 보면 없는 사람도 있고, 있는 사람도 있지. 안 그래요?”
“그……렇죠.”
존경스러운 마인드에 괜히 나까지 숙연해진다.
그 와중에 고자의 뜻을 모르는 원시인 놈은 눈치도 없이 자꾸 떠들어 댔다.
“은인, 고자가 뭔지 알려 주시면 안 돼요?”
죽어도 안 알려 줄 거다. 절대.
알려 줘 봤자 ‘와, 저 고추 없는 사람 처음 봐요!’ 이딴 소리 지껄일 확률이 99.99%니까.
하지만 홍진은 의연했다.
“고자는 고추가 없어요.”
“와, 저 고추 없는 사람 처음…….”
“아, 닥치라고!”
헉, 깜짝 놀란 청풍이 헛숨을 들이켰다.
“으, 은인.”
“진정해요. 진 공자. 산에서 살다 왔으면 그럴 수도 있죠. 그리고 뭐, 내가 하루 이틀 고자로 살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말이 너무 심하잖아요.”
“제가 잘못한 거예요? 정말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어깨 펴. 아직 달려 있잖아.”
고자 수십 년 짬밥이 어디 가는 게 아니구나.
진정하라는 듯 손을 내저은 홍진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어 갔다.
“내가 내린 결정에 대해서는 후회한 적 없어요. 일가 피붙이가 굶어 죽어 가는 마당에 뭐든 못 하겠어. 안 그래요?”
“암요. 그렇죠.”
“저도, 저도 그랬을 거예요!”
지금은 홍진이 무슨 말을 하든 맞장구쳐 줘야 한다. 나와 청풍은 대역 죄인이 된 기분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난 청렴하진 않지만 신의를 저버릴 만큼 비겁한 놈은 아니에요. 그랬다면 지금까지 전하를 모시지도 않았겠지.”
홍진이 흐릿한 시선으로 창밖을 응시했다.
“오래전 선황(先皇)을 곁에서 모셨었죠. 제게 상산왕 전하를 보필하라는 명을 내리셨어요.”
“선황께서요?”
죽은 전대 황제가 그런 부탁을 했을 정도라면 그때 역시 내관 중에서도 상당한 고위직이었다는 뜻이다.
고개를 끄덕인 홍진이 말을 이었다.
“변방으로 귀양 아닌 귀양을 왔지만…… 지금은 이 정도로 만족해요. 충분히.”
말과는 달리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빛이 스며들어 있다.
야망? 희망? 그것이 품은 의미를 알아차리기도 전에 빛은 사라졌고, 마부의 조용한 음성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태원진가가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