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540
#539화
살성(殺星).
모두에게 멸시받는 살수로 이 땅에 나와 마침내 하늘을 밝히는 별이 된 자.
허락된 자들만이 들어설 수 있는 울타리를 무너트리고, 강자지존(强者至尊)이라는 네 글자를 스스로 입증한 산증인.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나이와 생김새, 심지어 이름조차 모른다. 살수는 극도로 은밀하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니까.
살성이라는 이름 앞에 드리워진 장막은 수십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걷히지 않았다.
종전 직후 홀연히 사라진 살성은 오랜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세인들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발도 없이 천 리, 만 리로 뻗어 나갔다.
살성은 죽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무신에 의해 천마가 패퇴하고 십만 마병이 스러지던 날.
죽립을 눌러쓴 어느 노인이 이름 모를 언덕에 파묻고 떠난 것은 피를 머금은 애병뿐만이 아니다. 살성이라는 별호도 함께 묻었다.
그렇게 살성은 죽고, 문경은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세상은 그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신의(神醫).’
장강의 지류는 여러 개로 나뉘어 있지만, 결국 그 줄기는 하나로 이어지는 법.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문경 역시 하나의 강이었다. 고금 제일의 살수인 동시에 천하제일의 명의라는 두 개의 이름을 지닌 강.
쉽게 요약하자면…….
‘영입 대상 일 순위.’
이 정도면 나의 고잉무림호에 탑승할 자격으로는 차고 넘친다.
물론 함께 있다 보면 심심찮게 암살 시도를 당할 일이 있겠지만, 혹여나 서천마군 같은 괴물을 만나 죽는 것보다야 피똥 몇 번 싸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이 내 지론이었다.
흑묘백묘(黑猫白猫).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
첫 번째 영입 대상이 뿔 달린 귀여운 사슴이 아니라 하루에 세 번쯤 날 죽이고 싶어 하는 전직 살수라는 건 상당히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성격이 뭐가 문제야. 최강 딜에 힐러 능력까지 갖췄는데.’
그래, 그거면 됐지. 뭘.
싸구려 포션 한 병 없는 이 험한 무림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문경이 꼭 필요하다.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함께 하는 누군가가 크나큰 위험에 처했을 때, 한 번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을 테니까.
가장 큰 문제는, 확신에 찬 내가 한 사람의 존재를 간과했다는 것이었다.
“헤헤.”
“……?”
“안녕하세요. 은인.”
“……!”
안녕하세요는 시벌.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설마?’
떨리는 눈동자로 청풍을 응시하던 나는 간신히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당신이 왜 거기서 나와.”
“어어, 그게요. 아까 길을 지나가다가.”
“아니, 여기 오게 된 이유는 아는데. 그게 그러니까.”
환장하겠네. 진짜.
얼마나 당황했는지 말도 잘 안 나온다. 버벅거리는 나를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문경이 대신해서 결론을 내려 주었다.
“말했잖느냐. 한발 늦었다고.”
청풍이 맑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헤헤. 그렇게 됐어요, 은인.”
짐작을 확신으로 만들어 버리는 한 방. 잠시 침묵한 상태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내가 힘겹게 입술을 뗐다.
“이거 실화입니까?”
문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설은 아닐 게다.”
“그럼, 정말로?”
“그래. 정말로.”
“이유가 뭡니까?”
“그걸 말해 줘야 할 이유는 없지.”
“그렇긴 한데, 직접 들어야 깔끔하게 포기가 될 것 같아서 그럽니다.”
문경이 작게 혀를 찼다.
“상당히 지저분하게 구는군.”
“지저분해도 듣고 싶다면요?”
“더 깔끔한 방법을 찾아야지.”
스릉.
길게 늘어트린 소매 끝에서 은빛으로 반짝거리는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깜짝 상자처럼 튀어나온 소검(小劍)을 확인한 내가 눈을 비볐다.
“요새 피곤해서 눈이 안 좋아진 건가. 왜 이 대목에서 저게 나오죠?”
“이걸 사용하면 깔끔하니까.”
“그렇긴 한데, 주변이 지저분해지지는 않을까요.”
“상관없다. 여러 가지 방법을 알고 있으니까.”
“…….”
아마 다년간의 살수 생활로 터득한 노하우가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나는 문경이 터득한 훌륭한 노하우들을 몸소 확인할 생각이 좁쌀만큼도 없었다.
“후, 이만 가 보겠습니다.”
“가라, 영원히.”
“이따가 봐요, 은인!”
온도 차가 극심한 두 사람의 인사와 함께 돌아선 나는 내심 중얼거렸다.
‘와, 미치겠네.’
설마 청풍이 선수를 칠 줄이야. 이건 정말이지 조금도 예상치 못했던 전개다.
내가 아는 청풍이라면 지금쯤 고기만두와 야채만두를 양손에 들고 뭐부터 먹을까 고민하고 있어야 정상인데.
‘나 대신 지능 스탯을 찍은 건가……?’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우선 다른 사람들부터 발 빠르게 포섭하는 수밖에.
의방 입구에서 서성이던 혁무진이 나를 발견하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가셨던 일은 잘 풀……리지 않은 표정이시네요.”
내 얼굴을 보고 재빨리 말을 고친 혁무진이 눈을 깜빡였다.
“문경이가 안 보이는데, 그럼 설마?”
“보면 모르겠냐?”
“허어, 조장님의 제의를 거절하다니. 그 녀석이 보기보다 사리판단을 똑바로 할 줄 아는…… 게 아니라. 농담입니다. 제발 부탁이니까 주먹 좀 내려놓으십쇼.”
“농담 한 번만 더 하면 그게 네 유언이 될 줄 알아.”
뒷걸음질로 안전거리를 확보한 혁무진이 근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합니다.”
“방법?”
“예.”
워낙 자신 있는 태도로 말하니 귀가 솔깃하다. 나는 썩은 동아줄을 잡는 심정으로 물었다.
“그게 뭔데.”
“어떻게, 제가 한번 잘 타일러 볼까요? 문경이 그 녀석이 제가 하는 말이라면 껌뻑 죽습니다.”
“…….”
껌뻑 죽기는 니미. 껌뻑 죽이는 거겠지.
문경이 마음만 먹는다면 들숨 한 번에 혁무진을 변사체로, 날숨 한 번에 가루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
“무진아…….”
“걱정 마십쇼. 그래도 지금까지 쌓아 온 정이 있는데, 저와 궁 소협이 가서 설득하면 매몰차게 거절하진 않을 겁니다.”
“그게 아니야, 이 새끼야…….”
이 자식이 하다 하다 이제는 동반 자살까지 시도하려고 하네.
나는 애잔함이 담긴 눈빛으로 혁무진을 바라보았다.
“너 기방이 진짜 싫어하는구나.”
“예?”
“아니야. 어쨌든 결혼, 아니 설득 같은 거 절대 하지 마라.”
“왜요?”
“그냥 하지 마. 이 새끼야.”
혁무진이야 문경의 진짜 정체를 모르니 대화가 통할 리 없다.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녀석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쉰 나는 입을 열었다.
“너, 글씨는 좀 쓰냐?”
“글씨야, 뭐. 왕희지(王羲之)가 울고 가죠.”
“처맞고 울기 전에 똑바로 대답하렴.”
“……그럭저럭 쓰죠. 이래 봬도 어릴 적에는 나름 신동 소리 들었는데요.”
“그럼 큼지막하게 몇 장 써서 방(訪) 하나 붙여라.”
“방이요?”
“어. 기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된 인재 한번 찾아보게.”
천하는 넓고, 고수는 많다.
그리고 지금의 하남은 수많은 용과 호랑이가 득실거리는 잠저(潛邸)다.
‘공개 오디션이 별거냐.’
과거 시험도 따지고 보면 가장 전통 있는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내 유명세와 안목이라면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한 일.
나는 물밀 듯이 밀려들 지원자들을 생각하며 내심 중얼거렸다.
‘해 보지 뭐. 시바 거.’
* * *
쉬릭, 스스스슥!
난생처음 보는, 빠르고도 유연한 움직임.
손이 춤추듯 흔들릴 때마다 대침(大針)의 끝이 번쩍이고 실이 상처를 봉합한다.
복부에 큰 검상을 입은 채 서서히 죽어 가던 칼잡이가 소생의 기회를 얻기까지는 불과 촌각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어찌 저토록 어린 나이에 이 정도의 의술을……!”
“내 일찍이 이런 의생이 있다는 소문을 들어 본 적이 없거늘.”
“허어, 실로 신기(神技)에 가까운 솜씨가 아닌가!”
수염이 적잖은 중년인부터 백발의 노인까지.
한자리에 모여 아연한 낯빛으로 눈앞에 벌어지는 광경을 바라보던 의원들은 다음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끝났습니다.”
탁.
그야말로 전광석화처럼 끝난 치료. 더욱 놀라운 것은 단지 속도가 빠른 것뿐만 아니라 처치도 완벽하다는 사실이었다.
경악으로 입이 쩍 벌어진 의원들이 막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어, 어찌 이렇게.”
“이보게!”
청년이라고 부르기에는 앳되고, 소년이라 칭하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묘한 분위기를 띤 한 사람.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난 문경이 입을 열었다.
“아직도 남은 환자가 있습니까?”
서로를 바라본 의원들이 동시에 앞다투어 고개를 저었다.
“그, 그건 아니네만.”
“그, 그렇고 말고. 전부 자네 덕분이지.”
이 어린 의생이 보여 준 놀라운 광경은 이것이 처음이 아니다.
한 시진 전쯤이었나. 어디서 경상자를 데려오더니, 누워 있던 환자들을 한 번 훑어보고서 대뜸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금방 끝나겠군요.’
그러고는 환자들을 하나씩 붙잡고 치료를 해 나가는데, 그 속도와 처치가 어찌나 신속하고도 완벽했던지 호통을 쳐서 내쫓고자 다가왔던 의원들이 자리를 뜨지 못할 정도였다.
‘천하에 이런 의술이 있었단 말인가.’
‘도대체 누구지?’
하여 정체를 묻고자 지금까지 기다린 것인데, 돌아오는 어린 의생의 대답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그럼 되었군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자, 잠깐만 기다려 보게. 자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일세!”
“스승의 함자가 어찌 되시나? 혹시……!”
밀려드는 질문 공세에 문경은 고개를 까딱 숙여 보였다.
“시간이 된다면 떠나기 전 한 번 들러 환자들의 상태를 살펴보지요.”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때는 아닐세!”
“저 친구 붙잡아!”
“미안하네! 하지만 이대로 보낼 수는 없어!”
쉬익! 쿵!
하지만 필사적으로 몸을 날린 의원들의 손은 허공만 휘저을 뿐이었다.
상대의 옷깃에 스치기는커녕 바닥을 나뒹군 그들이 얼떨떨해하던 그때, 문경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앉아 있던 자리에 각 환자에게 맞는 약방문을 남겨 두었으니, 살펴보시고 그대로 치료하십시오.”
“뭐, 뭣이? 약방문?”
“어디야! 어디 있어!”
명의의 약방문은 의원들에게 있어 절세고수가 남긴 무공 비급과 같은 것.
반쯤 눈을 뒤집어 깐 의원들이 수십 장의 약방문을 두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는 사이, 조용히 밖으로 나와 걸음을 옮기던 문경은 불쑥 입을 열었다.
“나와라.”
스윽.
작은 소음과 함께 커다란 기둥 뒤에 숨어 있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앗.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
“역시 대단해요. 이번에는 속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헤헤.”
해맑게 웃는 청풍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문경이 물었다.
“무슨 무공이지?”
“보법이요.”
“그건 나도 안다.”
“아, 미미보(美美步)라고 이름 붙였어요.”
“미미보?”
“네에. 우리 미미 이름을 따서 지었어요. 멋있죠?”
반짝거리는 눈빛에 돌아온 것은 냉랭한 대답이었다.
“……우습기 짝이 없는 이름이군.”
“앗. 아아.”
잔뜩 풀이 죽은 청풍을, 문경이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응시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미미보라는 이름은 우스울지 몰라도, 저 움직임에 담긴 묘리(妙理)는 그렇지 않다.
‘뱀의 움직임을 따서 무공을 창안하다니.’
대부분의 무림인들은 하나의 무학을 완전히 이해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만으로도 일평생을 보낸다.
하지만 눈앞의 어린놈은 그 어려운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해냈다.
자신의 것으로 만든 후에 완전히 재창조한 것이다.
‘이 녀석…… 대종사(大宗師)의 그릇이다.’
천재는 진태경뿐만이 아니었다. 아니, 어떤 의미로는 진태경을 훌쩍 뛰어넘는 부류의 천재다.
‘검성, 괴물을 키워 냈구려.’
내심 중얼거린 문경이 여전히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청풍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왜 내게 손을 내밀었느냐?”
“음. 은인이 너무 대단해서요.”
“진태경이 대단하다?”
“네. 예전에는 은인이 얼른 따라오길 바랐는데…… 지금은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군.”
문경은 무슨 뜻인지 즉각 알아차렸다.
지금껏 누구와도 견줄 수 없던 천재가, 처음으로 호승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내게 무공을 배울 속셈이더냐?”
“아니요. 안 가르쳐 주셔도 돼요.”
“뭐라?”
“옆에서 보고 배울게요. 그걸로도 충분해요. 헤헤.”
“……!”
순간 멈칫한 문경이 이내 피식 웃었다.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놈이 아닌가. 보고 배운다니.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의 무공을.
하지만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앗. 웃었다.”
“……그런 적 없다.”
“진짠데요. 웃으셨는데.”
“이 어린놈이 감히.”
“앗. 화낸다.”
“……놈.”
“만두 드실래요?”
소검을 뽑을까, 말까. 망설이던 문경은 청풍이 내미는 만두를 받아 씹었다.
그 맛이, 꽤 나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