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70
#669화
일다경(一茶頃). 아니, 어쩌면 촌각(寸刻).
뇌옥의 모든 상황이 정리되기까지는 차 한잔 마실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허기짐으로 반쯤 광폭화가 진행된 태산이 계단을 막고, 나를 선두로 야율목과 칠묘호가 나아가자 백족 전사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나로서는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최대한 신속하게 뇌옥을 빠져나가야 하는 사정도 있었지만, 아직 중단전(中丹田)의 효용을 완전히 깨닫지 못한 나로서도 슬슬 한계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구속구를 끊는 데에 엄청난 심력(心力)을 소모한 와중에 한 차례의 짧은 전투까지, 속이 울렁거리고 가슴이 아파 오던 차에 등장한 태산은 천군만마나 다름없었다.
“우워어어어!”
음. 사실 저 정도면 헐크에 가깝나.
그리고 적들의 빠른 투항에는 초절정 고수인 내 존재뿐만 아니라, 음산하기 짝이 없는 태산의 중얼거림이 크게 한몫했다.
“%#$%&^&%^&%^#$!”
“허억!”
굶주림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
백족 전사들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속사포처럼 내뱉으며 다가오는 태산의 모습이 공포, 그 자체였겠지만 나는 저 주문의 실체를 잘 알고 있었다.
“오리구이 매채구육 어향육사 경장육사 산니백육 회과육 고노육 장우육 동파육 마파두부!”
“…….”
“궁보계정 향고유채 왕만두 규화계 탕초리적! 으아아아아!”
음.
놈들이 한어(漢語)를 알아듣지 못해서 참 다행이다. 어쩌면 신들린 듯이 음식 이름을 외치면서 천천히 다가오는 게 더 무서울 수도 있겠지만.
“배애고오파아아아아아!”
“히이이익! 사술이다! 저 괴물이 사술을 쓰려 한다!”
“항복! 항복하겠소!”
저 새끼 최소 남만 한정 사이어인.
반응만 보면 배고파가 아니라 에네르기파인 줄 알겠다.
물론 그런 내 생각과는 별개로 배고파의 효과는 확실했고, 이에 굴하지 않고 앞으로 나선 몇몇 용기 있는 놈들마저 태산에게 박살 나면서 상황은 끝났다.
“두려워 말라! 돌겨역!”
“할 수 있다! 놈을 쳐라!”
앞으로 나선 놈들은 중원에서도 그럭저럭 초일류 취급받을 만큼 괜찮은 실력자들이었다.
그들이 가진 유일한 문제는 상대가 영 좋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퍽! 콰지직!
우두둑!
통나무처럼 굵은 팔다리가 휘둘려지자 사방으로 튕겨 나가는 신형들.
그 모습을 확인한 백족 전사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병장기를 내려놓았고, 야율목과 칠묘호는 아연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왜. 뭐.”
“아니, 그. 공력 금제 당한 거 아니었나?”
“아. 금제 당했지. 지금도 못 써.”
“……그런데 어떻게.”
“나는 말하자면 길고, 저놈은 그냥 타고났고.”
인간의 신체는 기본적으로 한계가 있는 법인데, 시스템으로 그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은 나와 달리 태산은 자연적으로 발생한 괴물이다.
공력이 없는 상태에서도 일류 고수 정도는 쥐잡듯 때려잡을 수 있을 정도로.
‘어릴 때 감마선에 노출되기라도 했나.’
나름 합리적인 의심이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나는 이미 전의를 상실한 채 스스로 무장을 해제한 백족 전사들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자. 우선 여기부터 정리하자고.”
* * *
결론부터 말하자면, 투항한 백족 전사들은 살아남았다. 정확히는 야율목이 그들을 살렸다.
투둑. 털썩.
점혈(點穴) 당한 몸뚱어리가 의식을 잃고 쓰러진다.
며칠 전 애뇌산으로 향하는 길에 면식을 익힌 칠묘호가 그들을 한곳에 모아 뇌옥에 처박았고, 우리는 지체하지 않고 지상으로 이어진 계단으로 향했다.
철벅.
“아까도 말했지만…… 후회할 거야.”
걸음과 함께 불쑥 던진 한마디.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아들은 야율목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일 없다.”
“이미 얼굴도 훤히 드러난 마당에, 놈들이 정신을 차리게 되면 누구 이름부터 댈까.”
야율목은 남만야수궁의 소궁주니 더 말할 것도 없고, 칠묘호 역시 묘족을 대표하는 전사들인 만큼 얼굴이 제법 알려진 자들.
부족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저들 중 일부는 이미 이들의 정체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 사실이 밝혀지는 건 시간문제야. 입을 막았어야 했어.”
“상관없다.”
“상관이 없긴, 염병하고 있네. 이 길로 도주할 것도 아니라면서 상관이 왜 없어? 만약 여기 남아 있으면…….”
“정체가 밝혀지겠지. 당장 목숨이 위태롭지는 않겠지만 대회의의 결정을 거스른 대가를 톡톡히 치를 테고.”
“이런 말 해서 미안하긴 한데, 혹시 좆 되는 취미 있냐? 뇌옥에 갇히는 게 버킷 리스트야?”
“버귀…… 발음하기도 힘들군. 나로서는 그게 뭔지 잘 모르겠지만, 이미 감수하고 벌인 짓이다.”
야율목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비록 부족은 다르지만 오랜 세월 같은 땅에서 함께한 남만인이다. 만약 동족을 죽인다면, 우리도 괴물이 되어 버리는 거야.”
야율목의 말을 듣고 있자니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오직 복수를 위한 괴물이 되어 버린 그가.
‘백상.’
그래, 어쩌면 이것이 인간과 괴물의 차이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덧없는 목숨을 희생시키지 않는 것. 그러나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모두 죽였어야 했어.”
“살인을 좋아하는군. 한족들은 다 너처럼 그 모양인가?”
“미친놈. 내가 마두(魔頭)라도 되는 줄 아냐? 이건 그냥…….”
“그만하면 됐다. 말 안 해도 이미 알고 있으니까.”
“뭐?”
고개를 돌려보니, 야율목이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우리가 걱정돼서 그런 거겠지. 널 구하려다가 곤경에 처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
“비록 중원과 언어는 다르지만, 벗이라는 단어는 남만에도 있다. 어쩌면 너와 내가 어느덧 그런 사이가 되었을지도 모르겠군. 아니면 나 혼자만의 착각이든지.”
“……!”
빌어먹을. 도무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할 말을 잃은 그때, 끝없이 위로 이어져 있던 계단이 끝나고 마침내 뇌옥의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원후.”
야율목의 부름에 고개를 끄덕인 중년인이 앞으로 나선다.
원숭이를 닮은 그가 커다란 열쇠 꾸러미를 차례대로 꽂자, 묵직한 소음과 함께 거대한 철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구구구궁.
서서히 열리는 철문 너머로 은은한 달빛이 새어 들어온 그때, 야율목이 품에서 자그마한 목갑 두 개를 꺼냈다.
“공력의 금제를 풀 수 있는 해약(解藥)이다. 백족의 비전으로 만들어진 물건이라 두 개밖에 구하지 못했지만, 공력을 회복한 너라면 능히 다른 이들을 이끌고 남만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이들이라면 혹시?”
“노인과 부상자라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경계가 매우 취약하더군. 적어도 그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철두철미한 백 숙부답지 못했어.”
야율목의 대답과 동시에 나는 볼 수 있었다. 완전히 열린 철문 너머로 의식을 잃은 채 백호의 등에 실려 있는 두 사람을.
“주군! 남호!”
반가운 얼굴들을 발견한 태산은 헐레벌떡 뇌옥을 빠져나갔고, 나는 복잡한 표정으로 야율목을 응시했다.
“너…….”
“가라. 우리가 가급적 최대한 시간을 끌어 줄 테니. 물론 길어야 반 시진 안에 발각되겠지만 약간의 도움은 될 거다.”
모르겠다.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만약 이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와 태산, 단둘이서 자력으로 뇌옥을 탈출할 수는 있었어도 결코 지금처럼 신속하게 남만야수궁을 빠져나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내게 있어 내궁 어딘가에 억류되어 있던 남호와 사마표의 존재는, 만근의 철구 이상으로 강력한 구속이었으니까.
‘어쩌면 그 과정에서 다시 사로잡혔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나를 도왔다. 자신들이 위험에 처할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그 덕분에 나는 악수(惡手)를 무를 수 있는 두 번째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고맙다.”
지금까지 미처 하지 못했던 감사 인사에, 야율목과 칠묘호. 그리고 뇌옥 밖에서 백족 전사들로 위장하고 있던 이들까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고마워할 필요 없소.”
“그럼. 그저 남만이 당신에게 진 빚을 갚은 것뿐이지.”
“애뇌산에 제 형이 있었습니다. 은공 덕분에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지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이들이 나를 도왔고 누군가는 은공이라 부른다.
나는 그 모두의 얼굴을 한 사람, 한 사람 눈에 담았다.
그리고 야율목의 손에 들린 목갑을 받아들고 흐릿한 달빛 아래로 걸음을 내디뎠다.
사박.
축축하게 젖어 있는 땅을 밟은 그 순간.
띠링.
– 처형 집행 전까지 뇌옥 탈출(완료)
– 퀘스트 성공 조건을 달성하셨습니다!
– 퀘스트, [남생크 탈출]을 성공적으로 완료했습니다!
– 퀘스트 완료 보상을 지급합니다!
– 막대한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 레벨 업!
– 일부 부상과 상태 이상이 해제됩니다!
귓가를 파고드는 퀘스트 알림과 함께, 오직 나만이 느낄 수 있는 시원한 바람이 전신을 휩쓸었다.
솨아아아!
꼬박 하루가 넘는 시간 동안 뻣뻣하게 굳어 있던 근육. 아직 턱없이 부족한 중단전의 힘을 억지로 끌어올리느라 피로가 누적된 전신이 회복되고, 마지막으로 하단전(下丹田)을 옭아매고 있던 힘이 힘없이 녹아내린다.
후우.
크게 내뱉은 날숨에 열양지기로부터 흘러나온 열기가 뒤섞였다.
그런 내 모습에 무언가를 느낀 듯, 야율목과 칠묘호가 눈을 크게 떴다.
‘놀랍기도 하겠지. 아직 해약은 복용하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미주알고주알 설명해 줄 생각도, 시간도 없는 상황이다.
태산에게 간식이라며 목갑 안의 단환을 던져 준 나는, 정신을 잃은 사마표에게도 나머지 하나를 먹였다.
화륵, 스르륵.
열양지기에 의해 물처럼 녹아내리는 단환. 액체로 화한 단환이 그대로 목을 넘어가자, 약간 창백했던 사마표의 얼굴에 혈색이 돈다.
‘생각보다 상태가 괜찮긴 하지만…… 당분간은 무리하면 안 돼.’
남호야 그렇다 치고 믿음직한 전투원인 사마표가 제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건 큰 단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곳을 빠져나갈 가망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내가 투항하기 전보다 낫다.
‘척후대를 제외한 다른 대원들의 신병을 확보했고, 약간의 깨달음도 얻었으니.’
거기에 더해, 야율목은 생각지 못했던 호의를 다시 한번 더 베풀기까지 했다.
“이 녀석과 함께 가라.”
그르릉.
익숙한 울음소리.
슬픈 눈으로 평생을 함께한 친구이자 주인을 바라본 백호가 나를 향해 등을 내밀고 있었다.
“무야호는 남만에 존재하는 백호 중에서도 영물로 불리는 녀석이다. 나와는 형제와도 같은 아이니, 부디 잘 챙겨 줄 거라 믿는다.”
낮게 가라앉은 야율목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다는 듯, 백호가 내 손을 핥고는 코를 대고 킁킁거린다.
그런 녀석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은 야율목이 한 방향을 가리켰다.
“이만 가라. 우리가 처음 만났던 장소에서 곧장 동북쪽을 향해 달리면 척후대와 조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퍽.
타격음과 함께 덜컥 흔들리는 신형. 허물어지는 야율목의 몸을 받아 든 원후가 나를 향해 씩 웃었다.
“말 안 해도 아실 거라 믿소.”
“당신들…….”
“소궁주를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