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94
#693화
수왕석(獸王石).
왠지 모르게 낯익은 듯한 단어. 그와 동시에 그리 오래되지 않은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칠 주야 전, 애뇌산으로 향하던 도중 야수묘왕으로부터 들었던 머나먼 과거의 이야기였다.
애뇌산이 금지(禁地)로 불리게 된 이유. 지금의 남만야수궁을 있게 만든 오독문의 존재와 남만 전체를 피로 물들인 대전쟁.
그리고…… 사라진 신물(神物).
‘입으로만 전해지는 전설 같은 이야기다. 수왕석은 천하의 모든 맹수를 따르게 할 수 있다는, 초대 궁주께서 지니고 계셨다는 본 궁의 신물이지.’
지나가듯 언급했던 야수묘왕의 한마디를 떠올린 그때.
– 보아라.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나직한 의념과 함께 망령이, 아니 이제는 수호령이라 불러야 할 존재가 천천히 옆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비로소 확인할 수 있었다.
스아아아.
눈앞을 가로막던 흑호의 동체가 움직임과 동시에 드러난 시야. 사방이 짙은 운무(雲霧)로 가득한 봉우리의 정상에 우뚝 자리 잡은 거대한 천근거석(千斤巨石)을.
‘설마.’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흑호가 나를 이곳으로 인도한 이유를. 그리고 저 거대한 바위의 정체를.
저벅.
홀린 듯 나아가는 발걸음. 천천히 흑호를 스쳐 지나간 나는, 높이만 삼 장에 가까운 바위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스아아아.
느껴진다.
천근거석을 끌어안듯 감싸 안은 알 수 없는 기운이.
이 불가사의한 땅의 가장 높은 곳에서, 흐릿한 묵광(墨光)을 흩뿌리는 그것의 모습은 신비하면서도 위험해 보였다.
마치 기나긴 세월에 파묻혀 버린, 어느 전설 속 신물처럼.
“……수왕석.”
참았던 숨과 함께 토해 낸 세 글자. 어느새 유령처럼 곁으로 다가온 흑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맞다. 오래전 한 인간의 손을 거쳐 그와 같은 이름을 얻었지.
“네가 말하는 그 인간이 혹시…….”
– 바람처럼 시원하고, 물처럼 맑으며, 나무처럼 변함없는 자였다. 내 허락 없이 자유롭게 이 공간을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기도 했고.
“네 허락 없이도? 그게 가능한 거였나?”
이곳은 자그마치 수백 년, 어쩌면 천 년 가까이 숨겨져 있던 불가사의한 공간이다.
우리가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오직 흑호의 의지에 따라 문이 열렸기에 가능했던 일. 의아함이 담긴 내 물음에 흑호가 대답했다.
– 가능하더군. 나조차도 몰랐던 사실이지만, 내 허락이 있기 이전에 이 땅을 지키는 신석(神石)이 그를 받아들였다.
나는 지금 흑호가 말하는 신석이, 수왕석의 본래 이름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동시에 녀석이 말하는 인간의 정체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는 남만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래, 끊임없는 전쟁을 반복하던 수십 개의 부족을 하나의 깃발 아래 세운 유일무이한 지도자였으니까.
‘그뿐만이 아니지.’
남만야수궁이라는 다섯 글자를 이 땅에 각인시킨 그는, 짧은 시간 등장했던 수왕석의 처음이자 마지막 주인이기도 했다.
아니, 어쩌면 주인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내 짐작은 뒤이어 들려온 의념을 듣자 확신으로 굳혀졌다.
– 그러던 어느 날, 거대한 전란(戰亂)이 일어났다. 산과 목초지가 불길에 휩싸이고 헤아릴 수조차 없을 만큼 많은 짐승과 인간의 시체가 강을 메웠지. 시간이 흐를수록 이 땅은 더 더럽혀졌고, 그럴수록 신석은 서서히 힘을 잃어 갔다.
“힘을 잃어?”
– 백수(百獸)를 다스리는 힘은 신석이 지닌 권능 중 하나일 뿐이지, 전부가 아니다. 아득한 세월 동안 이 땅의 풍요를 지켜 왔기에 신석이라 부르는 것이지.
흑호에게서 시선을 뗀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천근거석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흐릿한 묵광을 흩뿌리는 거대한 바위는 군데군데 깨지고 균열이 가 있었다.
“아무리 봐도 풍요랑은 거리가 있어 보이는데.”
거리로 따지자면…… 최소 내가 이동해 온 하남과 남만까지의 거리라고 해야 얼추 맞을 것 같다.
거무튀튀한 때깔이야 둘째치고, 신석에서 흘러나오는 이 불길한 기운은 나로서도 꺼림칙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아무리 봐도 이건 좀.’
애초에 신물이라는 게 공장 제품처럼 규격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기대치라는 게 있기 마련이다.
지금껏 내가 생각한 수왕석의 형태는 새하얗고 반짝거리는 돌멩이였지, 설악산 흔들바위도 한 수 접어 줄 만큼 크고 불길한 프레셔를 팍팍 내뿜는 이미지는 아니었다.
“……그, 아무리 봐도 풍요는 모르겠고, 왜 수왕석이라고 불렸는지는 알겠네. 이걸로 대가리 찍는다고 하면 어떤 짐승이 말을 안 듣겠냐. 아마 사람도 다스릴 수 있을걸?”
이걸 잠시나마 소유했다던 초대 남만야수궁주가 놀라울 따름이다.
도대체 웨이트를 얼마나 열심히 한 거야. 철봉에 코끼리 매달고 삼대 오천쯤 쳤나?
그리고 전설 속 인물의 삼대 측정 방식을 궁금해하는 나를, 흑호가 깊숙이 가라앉은 눈빛으로 응시했다.
– 너희 때문이다.
“뭐?”
– 한때 이 땅은 평화와 풍요로 가득했지. 모든 것은 순리에 따라 흘러갔고, 신석 역시 지금의 모습이 아니었어.
흑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깨달은 나는 문득 중얼거렸다.
“……서서히 힘을 잃은 거군. 이 땅에 인간이 살기 시작하면서.”
– 정확히는 그들이 서로를 죽고 죽이며 시작되었다고 해야겠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남만인들이 수왕석이라 부르는 신석은 이 땅과 같은 몸이나 다름없다. 곳곳에서 죽음과 파괴가 흘러넘칠수록 신석의 힘 역시 줄어드는 것이다.
“그래서 초대 궁주를 도운 건가? 삼백여 년 전, 오독문이 남만을 피로 물들일수록 신석의 힘이 줄어들 테니까?”
– 나는. 아니, 우리는…….
흑호의 눈동자에 얼핏 어떤 감정이 스쳐 지나간다. 그것은 어쩌면 그리움이었고, 혹은 후회라고 부를 만한 어떤 감정이었다.
– 돕지 않았다.
“……!”
예상치 못한 대답에 멈칫한 그때, 잔잔한 의념이 이어졌다.
– 신석을 지키는 것이 내 사명이라면, 이 땅과 함께 존재하는 것만이 신석의 의무였다. 우리는 그저 지켜보아야 했어.
“그냥…… 지켜봤다고?”
– 그래, 네가 아는 어떤 존재처럼.
나는 문득 몇 달 전 조우했던 수신룡을 떠올렸다. 수백여 년간 깨달음을 위해 수행하며 강을 지키던 미지의 존재.
실로 기이하고도 막강한 힘을 지녔던 그 이무기는, 인세(人世)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자신의 영역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렇다면.
“수왕석에 관한 전설은 도대체 뭐지? 이 땅의 사람들에게 전해진 그 전설은…….”
– 전설(傳說). 그래, 그건 말 그대로 전설이었지. 분명 존재하지만 허구로 꾸며 낼 수밖에 없던.
흑호의 청백색 눈동자에 씁쓸함이 스쳐 지나간다.
– 그는 우리의 사명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었고, 누구보다 평화를 원했다. 그래서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 스스로 수왕석을 만들어 냈지.
“……!”
– 나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그가 아무런 힘도 없는 돌을 수왕석이라 칭하고, 선택받은 영웅이 되어 부족을 통합하고, 또 다른 인간들과 맞서 싸운 끝에 쓰러지던 그 날까지.
나도 모르게 숨이 막혔다. 아득한 과거의 전설이 빼곡하게 적힌 서책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듯했다.
– 그는 그렇게 죽었다. 인간들이 수왕석이라 부르며 추앙하던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던 것처럼 사라졌고, 전쟁은 그 후로도 일백 년간 이어졌으며, 나는…….
크르릉.
흘러나오는 울음소리가 파르르 떨린다.
잡히지 않는 무언가를 좇듯, 먼 곳을 향하는 듯한 눈빛으로 신석을 응시하던 청백색 눈동자가 나를 향해 움직였다.
– 이백 년 동안 후회해야 했지.
마지막 의념을 끝으로 짧은 침묵이 흘렀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우뚝 선 채 흑호를 바라보던 내가 불쑥 입을 열었다.
“무슨 이유로?”
난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아니, 그건 처음부터 대답을 기대하고 던진 질문이 아니었다.
“전쟁이 이어지는 만큼 땅이 황폐해지고, 그만큼 신석이 힘을 잃어서? 이제는 곧 들이닥칠 일에 좁쌀만큼 남은 그 힘조차 사라질 것 같아서? 그래서 후회했나? 그때 그를 도왔어야 했는데, 하는 부질없는 후회를?”
무겁게 가라앉은 의념이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 비난인가?
“아니. 사실 별로 신경 안 써. 오히려 우릴 도와준 걸 고마워하는 편이지. 당신이 믿을지 안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신석이든, 수호령이든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다. 딱히 내게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미 수백 년 전의 일이고, 그들의 사명이 뭐든 간에 나와 일행들의 목숨을 구해 준 건 사실이니까.
그냥……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명색이 수호령치고는 치졸하고 비겁하다. 뭐, 이 정도는 괜찮겠지?”
– ……!
“안 돼? 기분 상했으면 취소하고.”
흑호가 말없이 나를 바라본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없이 불길해 보이는 형체와 달리, 그가 지닌 청백색의 눈동자는 크고 맑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 이백 년간 매일, 매 순간 후회했다. 순리를 어겨서라도 그 인간을 구했어야 했다고.
“……!”
– 무모하고 어린 인간이여. 네가 했던 말 역시 틀리지 않다. 나는 긴 세월 동안 오직 한 가지 사명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것으로 인해 잘못된 오판을 내렸지. 하지만 내게 기회를 줄 수는 없겠느냐.
“기회라면…….”
– 신석의 힘을 조금이나마 되찾고 싶다. 그리고 이번에는 과거의 잘못된 선택을 바로잡으려 한다.
스윽.
거대한 호랑이의 아가리가 천천히 벌어진다. 동시에 푸르고 맑은 기운의 결정체가 모습을 드러낸 그 순간.
띠링. 띠링. 띠링.
– 조건 충족으로 인하여 새로운 정보가 갱신됩니다!
– [애뇌산의 망령]이 [수호령]으로 변경됩니다!
– 감춰졌던 글자가 드러납니다!
– [숨겨진 성지]를 발견했습니다!
– 히든 퀘스트 발동 조건을 충족시켰습니다.
– 히든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 히든 퀘스트, [마지막 기회]가 생성되었습니다!
갑작스럽게 울러펴지는 종소리와 시스템 알림. 그와 함께 눈앞에 떠오르는 마지막 홀로그램 창.
[수신룡의 원정]으로 [고대의 신석]을 강화하시겠습니까?Y / N
이에는 이. 눈에는 눈.
그리고…….
‘영기(靈氣)에는 영기라 이건가.’
마음속으로 뇌까린 나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르다. 지금 나를 바라보고 있는 흑호. 아니, 수호령의 눈동자처럼.
“나는…….”
* * *
자리를 떠난 이들이 있다면, 자리에 남아 있던 이들도 있다.
요희와 무야호.
하지만 연못 근처에서 돌아오지 않는 한 사람을 기다리던 그들은, 그보다 빨리 찾아온 변화와 맞닥트려야 했다.
구구구궁!
흔들리는 대지와 파도처럼 출렁이는 연못의 물.
일제히 날아오르는 수백, 수천여 마리의 새와 그보다 많은 숫자의 짐승들이 풀숲에서 몸을 일으킨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쳐든 요희의 입술 사이로 희미한 경악이 흘러나왔다.
“저, 저건…….”
콰아아아아아!
하늘을 관통하듯 솟구친 빛의 기둥이, 미지의 공간을 감싸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