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826
#825화
텔레포트 마법과 함께 터져 나온 아득한 섬광.
그것이 시작이었다.
주위의 공간이 일그러진다.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끔찍한 압박감이 심장을 움켜쥐고, 제3의 허공으로 빨려 들어간 관절과 근육이 비명을 내지른다.
‘흡.’
숨이 막혔다. 고통스러웠다.
불과 몇 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 마치 며칠이라도 된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끊어지려는 의식의 끈을 붙잡고 매달렸다.
까득.
견뎌야 한다. 반드시 버텨야 한다.
오직 그 일념(一念)으로 이를 악물었다. 시야를 물들인 휘황한 빛줄기 사이로, 쉴 새 없이 뒤집히는 땅과 하늘이 스쳐 지나갔다.
드넓은 황야. 초승달처럼 굽이진 언덕으로 이어진 사막.
수백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가 순식간에 지워지고, 거칠게 요동치던 섬광이 빠르게 사그라졌다.
그리고 마침내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을 때.
화아악.
공간이 갈라졌다. 그 틈새 너머로 조금 전의 섬광과는 다른 새로운 빛이 스며들었다.
아니, 새로운 것은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이건…….’
보인다. 느껴진다.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어스름한 빛과 축축한 새벽 공기.
바람에 섞인 모래알, 거기에 더해 마력(魔力)만이 지닌 특유의 끈적하고 불쾌한 감각까지.
‘됐다.’
나는 직감했다.
이 위험천만한 시도가 성공했다는 것을.
대마도사가 발휘한 텔레포트 마법이 마력의 방해를 뚫고 정해진 좌표로 우리를 인도했다는 것을.
그리고 마침내 도달한 그 낯선 공간 너머에, 그토록 찾아 헤매던 한 존재가 있었다.
도플갱어(Doppelganger).
“……!”
허공에서 맞닥트린 시선. 동시에 커지는 눈동자.
나는 도플갱어를, 도플갱어는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세상이 멈춘 것처럼 시간이 느릿하게 흘렀다.
그러나 이미 해야 할 일을 알고 있는 몸은 시간과 공간을 거스르며 나아갔다.
슈확.
창날을 타고 좌우로 갈라진 바람이 귓가를 스친다.
손아귀에 틀어쥔 백염(白炎)의 창대를 뒤로 젖히자, 뼈가 어긋나는 소리와 함께 예상치 못했던 통증이 밀려들었다.
우두둑.
불안정했던 텔레포트 마법의 후유증이다.
고작 수백 미터를 이동했던 도플갱어의 블링크 마법과는 달리, 수백 킬로미터를 뛰어넘은 위험한 시도의 대가는 고스란히 몸뚱어리가 치러야 했다.
‘빌어먹을.’
호흡이 끊기고 손끝이 흔들린다. 창날 위로 내달리던 열양지기가 몸의 이상을 눈치채고 주춤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기우(杞憂)에 불과했다.
지금의 나는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툭.
강한 힘이 실린 단단한 손이 등을 짚었다. 스켈레톤 킹의 또렷한 음성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 가라.
그 순간.
후웅!
나는 쏘아졌다.
텔레포트 마법이 벌린 공간의 틈새를 찢고,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잠시 주춤하던 열양지기가 들불처럼 일어나 창날을 휘감았다.
화륵.
뜨거운 열기가 퍼져 나간다. 십여 미터의 공간이 단숨에 지워진다.
그리고 그 끝에, 이 예상치 못한 상황 앞에서 눈을 부릅뜬 채 선 도플갱어가 있었다.
“이……!”
무슨 말을 하려 했을까. 무슨 말이 그토록 하고 싶었을까.
하지만 그 누구도, 심지어 놈조차도 그 뒷말을 들을 수 없었다.
아니, 이을 수 없었다.
콰아아아!
파도처럼 터져 나온 청백색의 화염이, 채 끝맺지 못한 외침과 함께 도플갱어의 몸뚱어리를 집어삼켰다.
* * *
도플갱어는 몸부림쳤다.
그것은 지금껏 겪었던 무수한 죽음 중에서도 손꼽힐 만큼 끔찍한 고통이었고, 진정한 의미의 화마(火魔)였다.
서걱. 화아악.
상반신을 비스듬히 가르고 지나간 창날과 함께, 용암 같은 기운이 도플갱어의 전신 곳곳으로 스며들어 몸부림쳤다.
죽음과 동시에 빈 자리를 차지한 생명력을 계속해서 갉아먹으며.
피를 증발시키고, 살과 뼈를 녹이며.
“크아아아악!”
도플갱어는 고통에 찬 비명을 토해 냈다.
몸 안으로 침투한 화염은 이미 십여 개의 목숨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끊임없이 회복되는 살과 뼈가 소방관 역할을 해 주지 않았다면, 지금 이 순간조차도 죽어 가고 있었을 것이다.
“끄으으.”
실핏줄이 터져 나가 붉게 물든 눈동자.
도플갱어가 고통 어린 신음과 함께 허리를 편 그 순간.
쐐액, 푹!
비틀거리던 몸을 가누기도 전에 날아든 무언가가 미간을 관통한다.
뒤로 기울어지던 신형이 지면에 닿기도 전에 부활한 도플갱어가 황급히 옆으로 몸을 날렸다.
푸푸푸푹!
아슬아슬하게 몸뚱어리를 스치며 지면에 틀어박히는 새하얀 무언가.
그것들의 정체가 뼛조각이라는 것을 파악한 도플갱어가 고개를 들었다.
더없이 익숙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질적인 기운을 지닌 존재가 그를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저놈은……!’
스켈레톤 킹.
한낱 언데드 몬스터에게는 과분한, 그러나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기운이 실린 검신이 번뜩였다.
서걱!
예리한 절삭음.
[영웅의 검]이라는 이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휘황한 빛을 흩뿌리는 마력이 손목을 가른다.격통과 함께 물러난 도플갱어가 사나운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감히 언데드 따위가……!”
무수한 몬스터가 존재하는 마계(魔界)에서도 언데드의 위치는 맨 밑바닥.
이미 지고한 영역에 오른 뒤에야 스스로 언데드가 되기를 선택한 리치(Lich) 같은 존재가 아니라면, 언데드는 한낱 병졸에 불과했다.
아니, 분명 그럴 터였다.
퍼걱, 촤아아악!
눈부신 검광과 함께 터져 나오는 핏물.
순식간에 또 한 번의 죽음을 맞이한 도플갱어가 이를 악물었다.
‘빌어먹을.’
짧은 공방이었지만 내심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스켈레톤 킹은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눈앞의 저 변종이, 평범한 언데드의 한계를 깨트리고 높은 격에 다다른 존재라는 것을.
하지만…….
‘저 괴물만큼은 아니지.’
스켈레톤 킹을 피해 훌쩍 물러난 도플갱어의 시선이 빠르게 움직였다.
깊숙이 가라앉은 그의 눈동자에, 한 자루의 창을 지팡이 삼아 거칠게 호흡을 몰아쉬는 진태경의 모습이 비쳤다.
‘마지막으로 봤던 것과는 다르다. 놈도 한계 이상의 힘을 사용한 것이 분명해.’
도플갱어는 우둔하지 않다.
아니, 여느 인간이나 몬스터와 비교해도 월등하게 교활했다.
지난 수십여 년간 미카엘 실베르트라는 허수아비의 뒤에 숨어 세상을 주무를 만큼.
그리고 조금 전 갑작스럽게 나타난 진태경의 일격 앞에서도, 지크프리트 바스만의 영혼을 다른 것으로 바꿔치기할 만큼.
‘깃들어라.’
콰아아.
도플갱어를 중심으로 휘몰아치는 강렬한 바람. 심상치 않은 기세를 느낀 스켈레톤 킹이 지면을 박차며 손을 뻗었다.
슈확!
팔의 뼈 일부가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공간을 갈랐다. 마치 암기처럼 날아든 새하얀 뼛조각들이 도플갱어의 전신에 틀어박혔다.
아니, 스켈레톤 킹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피를 흩뿌리며 쓰러져야 했을 도플갱어의 신형이,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지워지기 전까지는.
팟.
사라졌다. 말 그대로 눈 깜빡할 사이에.
그리고 그것은 한 가지 사실을 의미했다.
마법.
‘블링크(Blink)?’
스켈레톤 킹은 불현듯 찾아온 깨달음과 동시에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그러나 찰나의 순간 허를 찔러 시야를 벗어난 도플갱어는, 이미 그다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그그극.
느려진 세상 속에서 마나가 격동한다.
그 중심에는 생전 위대했던 대마도사의 모든 것을 탐욕스럽게 집어삼키고, 흡수하여 자신의 배를 불린 몬스터가 있었다.
‘에어 슬래시(Air Slash).’
그 순간.
슈화아아악!
스켈레톤 킹을 향해 빗발치는 바람의 칼날을 바라보며, 도플갱어는 확신했다.
저것이 당장 저 변종을 소멸시키지는 못하더라도, 잠시나마 전투 불능 상태로 빠트릴 수 있을 만큼 위력적인 마법이라고.
이 지긋지긋한 싸움을 끝낼 수 있으리라고.
하지만 착각이었다.
스켈레톤 킹이 순간적으로 도플갱어를 시야에서 놓쳤듯이, 도플갱어 역시 한 사람의 존재를 망각하고 있었으니.
화륵.
십여 미터 위 허공에 떠올라 있던 도플갱어는, 문득 자신을 향해 솟구치는 열기를 느꼈다.
그제야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제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던 누군가가 떠올랐다.
‘이런 미친……!’
헛숨을 삼킨 도플갱어가 황급히 마나를 되돌린 순간.
후욱.
스켈레톤 킹을 집어삼킬 듯이 떨어져 내리던 광풍(狂風)이 산들바람이 되어 흩어졌다. 동시에 반투명한 방어막이 도플갱어의 전신을 겹겹이 뒤덮었다.
그리고 공간을 가로질러 날아든 눈부신 섬광이, 마침내 방어막의 표면과 맞닿은 그때.
콰직!
도플갱어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볼 수 있었다.
수십 겹의 실드 마법을 파고드는 한 줄기의 불꽃과, 산산이 부서지는 마나의 방패를.
꽈아아앙!
발화. 분쇄. 폭발.
세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났고, 허공을 물들인 청백색의 화염과 함께 거대한 충격파가 사방을 후려쳤다.
구구구구궁!
지면까지 고스란히 전해지는 충격을 느낀 스켈레톤 킹은 찰나의 순간 생각했다.
어쩌면 지금의 일격으로, 도플갱어는 가장 귀중한 영혼 중 하나를 잃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러나 진태경은 아니었다.
힘든 와중에도 젖 먹던 힘까지 끌어 올려 일격을 날린 그는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맑은 종소리가, 왜 지금만큼은 들리지 않는지.
‘아직, 아직이다.’
놈은, 도플갱어는 아직 대마도사의 힘과 영혼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진작 힘차게 지면을 박찼어야 할 두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바닥난 심력(心力)은 그의 의식을 자꾸만 무저갱으로 끌어당겼고, 지금 이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십여 개의 움직임과 공격 루트는 실현할 수 없는 상상에 불과했다.
다만, 눈빛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친구가 있을 뿐.
쾅!
찰나의 순간 허공에서 교차된 시선.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진태경의 눈동자에 담긴 뜻을 읽어 낸 스켈레톤 킹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지면을 박차고 솟구쳤다.
허공을 가득 메운 매캐한 연기 사이로.
폭발의 중심에 있을 도플갱어를 향해.
츠츠츠츠!
황금빛 마력이 검신을 타고 흘러넘친다.
무리한 텔레포트 마법의 여파로 인해 평소의 절반도 되지 않는 위력이었지만, 눈부신 검광(劍光)은 거침없이 하늘을 갈랐다.
짙은 연기를 베어 내고 그 너머에 있을 적을 향해 쏘아졌다.
쉭!
한 줄기의 섬광.
그 첨예한 일격의 끝에.
서걱!
분수처럼 터져 나오는 선홍빛 핏물이 있었다.
* * *
비록 서서히 흐릿해져 가는 시야였지만, 똑똑히 보았다.
허공을 가로지르는 스켈레톤 킹의 일격을. 그리고 핏물과 함께 솟구친 누군가의 팔을.
‘베었다.’
틀림없다. 새하얗고 가느다란 저 팔은 도플갱어의, 정확히 말하자면 이미 삼 년 전 놈에게 흡수당한 대마도사의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응당 떨어져야 했을 목도, 터져 나와야 했을 비명도 어디에도 없었다.
만약 또 다시 시야에서 사라진 도플갱어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다면, 한바탕 고함을 내질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분노를 표출하는 대신 억눌렀다.
남의 것처럼 낯선, 피로에 지친 목소리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네가 무슨 도마뱀이냐, 이 씨벌놈아?”
천천히 몸을 돌리자, 폐허 한가운데에 서 있는 도플갱어의 모습이 보였다. 깔끔하게 절단된 한쪽 어깻죽지에서는 피가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머리로 하자. 팔이나 다리 말고, 네 머리통. 어때?”
“그건 곤란할 것 같군.”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대답한 도플갱어가 말을 이었다.
“앞으로의 일을 위해서는, 대마도사의 영혼이 반드시 필요하거든.”
뭐?
나도 모르게 반문하려던 그 순간.
우우웅.
놈을 중심으로 거대한 기운이 맥동했다.
아니, 폐허 전체가 살아 있는 생물처럼 몸을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