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860
#859화
“외람되지만,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머리를 나란히 한 채 나아가던 수하의 말에, 정호군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스스로 외람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면, 처음부터 꺼내지 말거라.”
“천호(千戶)!”
깊게 가라앉은 눈빛과 딱딱하게 굳은 표정.
벌써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동고동락한 수하다. 정호군은 이미 듣지 않고도 그가 할 말을 알고 있었다.
“네 마음은 충분히 짐작하고 있다. 지금 이 상황이 못마땅한 거겠지.”
“못마땅한 정도가 아닙니다. 천호께서는 저 무뢰배들을 이대로 지켜만 보실 겁니까?”
등 뒤를 힐끗 노려보는 수하의 시선 끝에는, 천천히 이동 중인 마차 한 대가 있었다.
미세하게 열린 창문 틈새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웃음과 대화 소리에, 수하는 물론이고 주위의 금의위들 또한 표정이 굳어졌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명령만 내려 주신다면…….”
수하는 말꼬리를 흐렸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을 알아채지 못할 정호군이 아니었다.
“한바탕 혈전이라도 벌일 셈이더냐.”
“천호께서 우려하시는 바는 저도 압니다. 하지만 하늘 같은 황명(皇命)에 반하는 역도의 무리를 이대로 놔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가만히 놔두지 못한다면. 그자를 쓰러트릴 자신은 있고?”
“그건…….”
수하는 문득 말문이 막혔다.
비록 군문(軍門)에 속한 몸이지만 그 역시 무공을 수련한 한 사람의 무인.
지금쯤 마차 안에서 웃고 떠들고 있을 ‘그자’를 떠올리니 쉽게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태원진가의 진태경.
아니, 열화신룡(烈火神龍) 진태경.
‘아직 젊다고 말은 들었지만, 저 정도일 줄이야.’
금의위에는 천하 각지의 온갖 정보가 들어온다.
그러나 열화신룡에 관한 온갖 이야기들은, 곳곳에 심어 놓은 세작(細作)들을 통하지 않더라도 익히 들어 보았을 만큼 유명했다.
몰락한 무가의 후손.
오직 일인전승(一人傳承)으로 장장 삼백여 년간이나 이어져 내려온 열화문의 후계자.
산서 땅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던 망나니는 불과 이 년 남짓한 짧은 시간 만에 신룡이라 불리게 되었고, 현재 무림을 뒤흔들고 있는 격랑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러나 진태경이 이토록 특별해질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누가 뭐라 해도 단 한 가지뿐이었다.
‘그 무위(武威).’
모든 것에는 한계가 있고, 무공이라 한들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진태경은 이미 그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그런 그가 화산신룡 청풍과 함께 이룡(二龍)이라 불리며 천고의 재능이라 칭해지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정호군의 수하가 긴 침묵 끝에 이런 대답을 내놓은 것 역시도.
“분하지만…… 현재의 상황으로는 대적하기 어렵습니다.”
“알고 있다면 되었다.”
정호군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지엄한 황제의 명을 받드는 금의위로서는 치욕스러운 결론이었지만, 군인으로서는 옳은 대답이다.
승패(勝敗)에 대해서는 언제나 냉정해야 한다.
일말의 자존심으로 그릇된 판단을 내린다면, 그 전투는 결코 승리할 수 없다.
다만 어느 경우에서도 금의위가 잃지 말아야 할 태도는, 어떠한 강자 앞에서도 굴복하거나 물러서지 않는 것이다.
“너의, 아니 너희 모두의 마음을 안다.”
정호군은 나직이 말을 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받은 황명은 상산왕 전하를 황도까지 모셔오라는 것이었다. 최대한 은밀하게, 아무런 잡음도 없이.”
“…….”
“만약 상산왕 전하께서 검을 내려놓으라 명하시지 않았다면, 나 역시 맞서 싸웠을 것이다.”
하지만 상산왕 주표의 행동은 금의위 모두를 대경하게 만들었다.
황실의 고귀한 피를 이어받은 이 어린 왕은, 강호의 무뢰배를 손수 일으켜 세우는 것으로도 모자라 소지하고 있던 은패(銀牌)에 친필 서명까지 받길 원했으니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이 사안에 관한 결정은 우리의 몫이 아니니, 이에 대하여 더는 논하지 말라.”
조금의 반박조차 허락하지 않는 단호한 목소리에, 수하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주호군의 말이 맞다.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상산왕을 황도까지 데려오는 것뿐이다. 천자를 향한 충심(忠心)과 권한은 다른 의미다.
그리고 애써 불만을 억누르는 수하를 향해, 주호군은 재차 말을 이어 갔다.
이번에는 오직 한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전음(傳音)으로.
– 해 주어야 할 일이 있다.
크게 뜨여진 눈으로 주호군을 바라보던 수하가 이내 입술을 달싹였다.
– 하명하십시오.
– 황도에 계신 지휘사(指揮使)께 가거라. 네가 직접.
– 지휘사께 말입니까?
지휘사는 곧 금의위의 수장.
온갖 거물들이 득실거리는 황도의 고관대작(高官大爵) 중에서도 손꼽히는 영향력과 실권을 지닌 것이 바로 금의위 지휘사였고, 그가 지닌 강대한 권력은 오직 한 사람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 그 말씀은…….
수하는 말을 끝맺지 않았으나, 뒤에 이어질 말이 뜻하는 누군가의 신분은 두 사람 모두가 알고 있었다.
천자(天子).
이 광활한 대륙의 주인.
옥좌에 앉아 수많은 신하와 백성을 굽어보는 거인.
그리고 그들 금의위가 존재하는 이유이자,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대상.
그렇기에 지휘사에게 소식을 전하라는 정호군의 말은, 곧 천자에게 보고를 올리라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 천호께서는…… 제가 어찌하길 원하십니까.
– 지금 즉시 떠나라. 그리고 곧장 지휘사를 찾아뵙고 이렇게 말씀드려라.
정호군은 천천히 전음을 이어 갔다.
– 당신께서 예측하신 대로, 불청객들이 끼어들었다고.
– ……!
– 가거라. 멀리 나가지는 않겠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뜬 채 정호군을 바라보던 수하의 입가에 문득 희미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예측. 분명 예측이라고 했다.
그 두 글자면 충분하다. 어째서인지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던 상관에 대한 불만도, 구겨진 금의위의 자존심도 완벽하게 회복되었다.
– 충(忠)!
차마 소리 내어 외칠 수 없는 힘찬 군례(軍禮)와 함께, 말과 한 몸이 되어 바람처럼 사라지는 수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정호군은 내심 중얼거렸다.
모든 것은 금의위의, 아니 지엄하신 천자(天子)의 손바닥 위에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 * *
감각이란 곧 시야와 같다.
눈앞의 것만 본다고 해서 주위의 풍경이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 것처럼, 나는 대화를 나누면서도 예리한 감각을 통해 사방에서 전해지는 모든 정보를 받아들였다.
울창한 풀숲 사이를 총총 뛰어다니는 날짐승들의 기척.
마차를 호위하듯, 아니 포위하듯 감싼 금의위들의 주위로 감도는 냉랭한 공기.
그리고…….
빠르게 멀어지는 말발굽 소리 역시도.
“그대에 관한 소식은 계속해서 전해 듣고 있었다. 그 믿을 수 없는 무용담(武勇談)을 들을 때마다 과인의 가슴이 벅찰 지경이었지.”
“과호흡 증상이면 좀 걱정인데. 마침 제가 잘 아는 의원 하나 있으니까, 전하도 이번 기회에 진찰 한 번 받아 보세요.”
“이렇게 과인을 걱정해 주니 참으로 기쁘구나. 허나 누구인지도 모르는 의원에게 몸을 맡기는 것은 황실의 예법에도 어긋나는 일. 황도에 도착하면 어의(御醫)가 있으니…….”
“그럼 어쩔 수 없네요. 하긴, 신의(神醫) 어르신께서도 지쳐 있으니 그게 낫겠어요.”
“잠깐. 지금 누구라 했는가?”
“신의요.”
“받겠다! 꼭!”
“황실의 예법은요?”
“법은 어기라고 있는 것이다.”
제아무리 고귀한 황족이라 해도 결국은 어린아이.
나는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조잘조잘 떠들어 대는 상산왕 주표에게 적당히 맞장구쳐 주며, 그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홍진을 향해 전음을 흘려보냈다.
– 놈들이 어딘가로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아무리 봐도 척후는 아닌 것 같네요.
무공을 익히긴 했으나, 절정의 경지까지 이르진 못한 홍진은 전음 대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 주위를 둘러싼 금의위들을 다분히 의식하는 행동이었다.
– 소식을 전하러 간 것이 분명한데, 어디로 간 것 같습니까?
어디서 꺼무위키라도 봤는지, 주표가 신의에 대해 줄줄이 읊어 대는 사이 홍진은 손가락을 붓 삼아 허공에 글자를 써 내려갔다.
황도(皇都).
좋지 않은 소식이지만,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바다.
애초에 금의위는 대국의 황제가 수족으로 부리기 위해 창설한 집단.
특히나 상산왕 주표에 관련된 모든 사안은 황제의 귀로 흘러 들어갈 것이 틀림없었다.
‘황도라…….’
좋아한다. 복숭아는.
하지만 무림에서의 황도란 그야말로 천하의 중심을 뜻했다.
아니, 황제라는 지위가 가지는 의미가 바로 그러했다.
광활한 천하를 다스리는 만백성의 주인. 천자가 머무르는 곳이 바로 천하의 중심이며 용의 둥지다.
‘물론 지금 같은 경우에는 호랑이굴이지만.’
황도에 직접 가 본 적은 없지만, 풍문은 꽤 자주 들었다.
하늘을 찌를 듯이 높게 솟은 거대한 건물들.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탄성을 자아내는 아름다운 명승고적(名勝古跡)과 운하를 통해 넘쳐흐르는 재물들.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물자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천하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지상낙원이 따로 없다.
단 한 가지만 빼면.
‘천자와 황도를 수호하는, 백만의 금위군(禁衛軍).’
만 명도, 십만 명도 아니다.
무려 백만이다.
대륙 놈들 특유의 허풍이 들어갔다는 사실을 감안해서 그 절반이라고 쳐도, 황도인 절강성의 인근에만 약 50만이 넘는 대군이 도사리고 있는 셈이다.
‘그 정도면…… 시벌, 감도 안 잡히네.’
나도 모르게 바짝 마른 입술을 핥았다.
개인적으로도 도저히 이러고 싶지는 않지만, 사천에서부터 줄곧 뇌리를 떠나지 않던 불길한 예감은 어쩔 수 없었다.
‘만약 황제와 암천이 모종의 관계를 맺었다는 짐작이 사실이라면?’
그에 대한 답은 고민해 볼 필요도 없었다.
좆 되는 거지. 뭘.
백만에 달하는 금위군이 겹겹이 에워싼 황도로 진입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장이다.
살아 있는 신이나 다름없는 천자가 명령만 내린다면, 사방에서 무수한 칼날이 날아들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천자로서는 그리 길게 말할 필요도 없다. 손가락으로 우리를 가리키며 딱 한 마디만 하면 된다.
해로운 역적이다.
“…….”
상상만으로도 오금이 저리는 상황.
내가 말없이 입을 다물자, 마차 한구석에 쭈그러져 있던 혁무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렇게 똥 씹은 얼굴을 하고 계세요?”
“……무진아.”
“예. 조장님.”
“넌 매번 말하는 태도는 조심스러운데,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왜 이렇게 대담하냐.”
“제가 또 상남자 중의 상남자 아니겠습니까. 상남자 열 명분의 몫을 하는 십상남자(十上男子) 혁무진! 그게 바로 접니다.”
“…….”
진짜 미친 새낀가.
말 대신 눈으로 혁무진을 향해 쌍욕을 퍼붓던 그때, 어느새 말을 멈추고 우리의 대화에 귀 기울이고 있던 상산왕 주표가 나직이 탄성을 흘렸다.
“십상남자라, 역시 그대의 수하답게 범상치 않은 별호로군.”
“……?”
“……?”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일 터. 십상남자 혁무진이라 하였더냐?”
눈을 깜빡이던 혁무진이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예, 예. 상산왕 전하. 하온데 외람되게도 소인의 별호는 십상남자가 아니라…….”
“자, 여기에 서명하거라.”
“예?”
“사양할 필요 없다. 십상남자 혁무진. 이는 네 가문 대대로 이어질 영광이니라.”
“…….”
“…….”
혁무진은 주표에게서 건네받은 동패에 자신의 새로운 별호를 새겨 넣었고,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지랄 났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