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859
#858화
이럴 때는 시스템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진다.
그 지랄 맞은 업데이트만 아니었더라면, 지금쯤 특유의 맑은 종소리와 함께 홀로그램 창이 떴을 텐데.
띠링.
– 퀘스트, [상산왕 일병 구하기]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셨습니다!
– 퀘스트 완료 보상이 주어집니다!
– 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뭐 이런 식으로.
하지만 문득 떠올린 상상과는 달리 현실은 고요했고, 수십여 명의 금의위로부터 흘러나온 냉엄한 살기(殺氣)는 바늘처럼 내 전신을 쿡쿡 찔렀다.
“그만하면 됐으니까 적당히 하고 갈무리해라. 자꾸 이러면 나도 기분이 더러워지잖아.”
한 마디를 툭 던진 나는, 나뭇가지를 박차고 지면으로 떨어져 내렸다.
아니, 텅 빈 허공을 마치 계단처럼 밟으며 걸어 내려갔다.
“허공답보(虛空踏步)……!”
누군가의 탄식이 귓가에 닿는다. 예리한 칼날 같던 금의위의 기세가 흔들리는 것이 피부로도 느껴지는 듯했다.
‘공력 소모는 끔찍하지만, 확실히 이것만 한 게 없지.’
제아무리 적의를 띤 상대라 해도 이런 광경을 본 이상은 감히 이빨을 들이대지 못한다.
허공답보는 초절정 고수들만의 전유물이니까.
사박.
그리고 사뿐히 지면을 밟으며 내려선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서럽게 울부짖는 한 마리의 짐승이었다.
“으허엉, 조장니임!”
“멈춰. 오지 마. 입 다물어.”
“어디 갔다가 이제 오신 겁니까! 제가 얼마나 무서웠는데!”
“…….”
이 새끼가 기껏 분위기 잡아 놨더니.
한숨을 푹 내쉰 나는 자꾸만 껴안으려는 혁무진을 밀어 내며 대답했다.
“아, 그만 좀 징징대. 버리고 간 적 없으니까.”
“예?”
“그냥 위에서 한숨 잤어. 피곤해서.”
장장 열흘이 넘도록 이어진 강행군이다.
삼 갑자의 공력과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신체 능력으로도 수면욕은 이길 수 없었다. 사실 지금까지 버틴 것부터가 기적에 가까운 일이긴 하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한 척후와 불침번. 일행들의 상태 체크 및 관리. 거기에 더해 심적 부담감까지.
아마도 신의의 만류와 적천강의 도움이 아니었더라면 강소성에 도착하기도 전에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몸도 성치 않은 상황에서 사흘에 반 시진 꼴로 잤으니까.
그렇게 개고생을 해 가며 목적지에 도착한 직후, 금의위보다 한발 앞서 도착했다는 확신이 들자 잠이 쏟아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주무셨다고요? 그것도 나무 위에서?”
“어. 길에서 자면 입 돌아가잖아. 곯아떨어진 상태에서 습격당할지도 모르고.”
“그럼 저는요?”
“너? 너 뭐?”
“아니, 저는 왜 길 한복판에 던져 놓고 혼자서 안전한 곳에서 주무셨냐는 거죠.”
“누구는 길을 지키고 있어야지. 그리고 안 던졌어.”
“그럼요?”
“내려놨어. 조심스럽게.”
사실 대충 내던졌다. 하도 힘들어서.
약간의 거짓이 섞인 내 대답을 들은 혁무진이 입을 딱 벌렸다.
“저는 입 돌아가도 상관없는 놈입니까?”
“입이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는 남자. 그게 바로 혁무진 아니냐.”
“습격당할 수도 있다면서요!”
“그 소리를 듣고 내가 깨어나겠지. 지금처럼.”
“하마터면 죽을 뻔했잖습니까! 촌각만 늦게 일어나셨으면 저는 완전히 죽은 목숨이었다고요!”
“그래서 촌각 일찍 일어났잖아. 살았고.”
“세상에. 조장님 진짜 사람 맞습니까?”
저게 내 등에 업혀 코까지 골며 자던 새끼가 할 말인가 싶지만, 나는 한 줄기 자비를 발휘해서 넘어가 주기로 마음먹었다.
워낙 강행군이기도 했고, 또…….
조금 전 보았던 녀석의 모습이, 상당히 감명 깊었으니까.
“잘했다.”
불쑥 내뱉은 칭찬에, 혁무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예?”
“잘했다고. 이런 상황에서도 버틴 거.”
“……!”
“그래도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라. 도저히 이기지 못할 것 같으면, 한 걸음 물러서서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야지.”
혁무진의 어깨를 두드려 준 나는 천천히 돌아서며 덧붙였다.
“그렇지? 금의위 나으리.”
허공에서 시선과 시선이 부딪친다.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무덤덤한 눈동자. 동요하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내 등장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있던 선두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앞길을 막아서다니. 실로 무모하기 짝이 없군.”
“아저씨. 말조심해. 나 아직 숱 많아.”
“무슨 헛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대는 지금 황명(皇命)을 받드는 금의위와 맞서고 있다. 알고 있는가?”
“설마 모르겠냐?”
“알겠다. 그렇다면 역모(逆謀)를 인정하겠다는 거군.”
역모?
이게 그렇게 되나.
잠시 고민하던 나는 앞서 내뱉은 말을 정정할 필요성을 느꼈다.
“음. 그럼 아까 했던 말 취소.”
“……?”
“잠깐 가던 길에 피곤해서 잠을 잤는데, 때마침 당신들이 지나가고 있던 거지. 어때, 이거 괜찮냐?”
앞서 들었던 칭찬 때문인지, 살짝 감동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던 혁무진이 잽싸게 대답했다.
“제가 듣기에는 괜찮은 것 같은데요.”
“그렇지?”
“예. 설득력이 있잖습니까. 풍진 노숙 하는 사람이 한둘도 아니고.”
“네가 뭘 아는구나. 하긴, 우연이라는데 뭐 어쩔 거야.”
“그럼요. 강소성이 지들 땅도 아닌데.”
“잠깐만. 그건 사실이지 않냐? 어차피 강소성이든 어디든 대국에 속한 영토일 텐데.”
“어라, 그게 그렇게 됩니까?”
“아니야? 내가 아는 상식으로는 그런데.”
“조장님이 그런 상식도 있으셨습니까?”
“개새끼가.”
“죄송합니다. 여하튼 일단 기억해 뒀다가 나중에 남 노인께 물어 보…… 어, 그런데 다들 어디 있어요?”
내가 막 대답해 주려던 찰나. 사내가 한 박자 먼저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짓거리들이냐.”
“아, 미안. 잠깐 다른 얘기 좀 하느라. 그나저나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강소성도 당신네들 땅 맞지?”
“천하의 강산은 모두 지엄하신 황제 폐하께서 다스리시는…… 아니, 도대체 내가 왜 이런 걸 대답해 줘야 하는지 모르겠군.”
“서로 돕고 살면 좋지 뭘.”
“그만!”
우리의 정신없는 대화를 듣다 보니 멘탈이 흔들린 모양이다.
나는 어느덧 서릿발 같은 기세를 뿜어내는 사내를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거기 금의위 나으리, 정 천호(千戶)라고 했지? 왜 그렇게 퍽퍽하게 굴고 그래. 막말로 여기서 붙어 봤자 서로 득 볼 것도 없는데.”
스릉.
대답 대신 서늘한 날붙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등에 메어 놓았던 거대한 태도(太刀)를 뽑은 정 천호가 딱딱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대가 누구인지는 상관없다. 금의위는 황상 폐하의 명을 따를 뿐, 황명에 반하여 앞길을 막아선다면 죽음뿐이다.”
스아아아아.
보이지 않는 기운이 그를 중심으로 뻗어 나온다. 지극히 정순하면서도 무거운 기파(氣波)를 느낀 나는 마른 입술을 핥았다.
‘이것 봐라…….’
처음 봤을 때부터 짐작은 했지만, 정 천호라 불린 저 사내는 상당한 고수였다.
아니, 일반적인 기준에서는 상당하다는 표현마저도 부족할 것이다. 그는 내가 내심 품고 있던 편견을 깨트릴 정도의 실력자였으니까.
‘아직 초절정의 벽은 넘지 못한 것 같지만, 어림잡아도 절정의 끝자락.’
관과 무림은 언제나 가까우면서도 멀다.
무림은 대국(大國)이라는 울타리 안에 존재하는 하나의 숲이지만, 그 안에는 용과 호랑이 같은 맹수들이 득실거린다.
그러나 정작 관에 속한 이들 중, 제대로 된 고수는 지금까지도 몇 보지 못했다.
일반 병졸들은 삼류에서 이류, 무관들은 끽해야 일류였으니 군문(軍門)에 몸담은 이들 중 절정 고수는 흔치 않았다.
‘그마저도 대부분이 무림에 몸담았던 이들이었지.’
전(前) 사천성주의 호위장은 유명한 낭인 출신에 사실상 개인 경호원에 가까웠고, 산서성 도지휘첨사(都指揮僉事)라는 요직을 맡고 있는 이풍은 화산파의 속가제자에서 무과를 통해 군문에 투신한 케이스다.
그런데…….
‘저 정도 수준의 고수가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비록 내 견문(見聞)이 그리 넓은 편은 아니지만, 명색이 초절정 고수답게 척 보면 금방 견적이 나온다.
그리고 내 시선으로 확인한 정 천호는 무림인 특유의 흔적이 조금도 묻지 않은, 그야말로 장군이라는 두 글자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쏟아부은 듯한 인물이었다.
‘심지어 공력까지 정순하고.’
더 놀라운 것은, 다른 금의위들조차 예외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십 대로 보이는 젊은이부터 사십 언저리로 보이는 중년인까지. 각자의 수준 차이는 있지만 그들 중 대부분이 절정 고수라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절정 고수만 수십이라…….’
어지간한 중견 문파와 맞먹는, 아니 그 이상의 전력.
천자의 손발 노릇을 하는 금의위답게 그만한 이름값을 하는 것인지, 혹은 천자가 아닌 누군가에 의해 길러진 것인지는 나중에 생각해야 할 문제다.
나는 서로 얻을 것이 없는 이 팽팽한 대치를 계속해서 이어 갈 생각이 없었으니까.
“기세는 좋은데, 각자 들고 있는 그 흉한 물건들은 곱게 집어넣는 게 좋을 거야. 다치기 전에.”
경고와 함께 발걸음을 뗀 순간.
슈확!
강맹한 파공성과 함께 코앞으로 쇄도한 빛줄기를, 나는 부드럽게 감싸 안듯이 잡아채어 날아왔던 방향으로 쏘아 보냈다.
푹! 쿠웅!
단말마 대신 땅을 타고 전해지는 진동.
미간 정중앙에 화살을 박아넣은 채 쓰러진 준마(駿馬)의 말안장에서 뛰어오른 궁수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손에 든 그거, 곱게 집어넣으랬지.”
“……!”
“너 때문에 죽은 거야. 이 동물 학대범 새끼야.”
마치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땟국물 가득한 몸을 긁적이고 있던 혁무진이 말했다.
“왜 저 사람 때문이에요? 조장님이 죽이신 거잖아요.”
“굳이 따지면 그게 맞지. 그런데 무진아.”
“예.”
“너도 죽일 수 있어.”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했네요.”
“그래, 알았다.”
여느 때와 같은 평화로운 대화였지만, 이미 장내의 분위기는 팽팽하다 못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라 있었다.
푸륵. 푸르륵.
수십 필의 말들이 거친 숨을 뿜어낸다. 있는 힘껏 고삐를 움켜쥔 손들은 새하얗게 물들어 있었고, 그들이 내뿜는 기세는 흔들릴지언정 갈무리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선두에, 정 천호가 있었다.
“끝내 건너서는 안 될 강을 건너는구나.”
“아직 그 강을 건너진 않았지만, 그거랑은 별개로 다들 자신 있나 보네. 제아무리 한 가락 하는 실력이어도 나랑 붙으면 좋은 꼴은 못 볼 텐데.”
“나와 저들이 믿는 것은 일신의 무예 따위가 아니다. 지엄하신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드는 신하로서의 충심(忠心)일 뿐.”
“당신, 이름이 뭐지?”
“정호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순순히 이름을 알려 준 정 천호, 아니 정호군이 나를 향해 되물었다.
“그대는?”
“진태경.”
지금 이 대답은 내가 한 것이 아니다.
나와 정호군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동시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갖추었다.
저벅.
내리깐 시선 속, 기억 속에 존재하는 마지막 모습보다 훨씬 커진 누군가의 발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제는 어린아이를 넘어, 보다 성숙해진 목소리도 함께.
“오랜만이구나. 태원진가의 진태경.”
상산왕 주표.
훌쩍 자라난 용의 핏줄이 나를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손에 쥐고 있던 무언가를 건넸다.
‘이건.’
밀서(密書).
그 은밀한 단어가 뇌리를 관통한 순간. 상산왕 주표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서명을 부탁한다.”
“…….”
아니 씨발,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