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902
#901화
정적.
작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그야말로 완벽한 정적이 대연회장에 내려앉았다.
오직 한 사람을 향해 부릅떠진 수많은 눈동자와 함께.
‘지금…… 뭐라고?’
‘도대체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사람들은 동시에 같은 의문을 품었고, 자신들의 시선 끝에 있는 한 청년의 모습을 통해 조금 전 들었던 ‘그 발언’을 떠올릴 수 있었다.
‘죽일 거면 죽이고, 살릴 거면 살리십시오. 그게 폐하 주특기 아닙니까.’
이 자리의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큼 또렷하게 울려 퍼진 그 한마디.
한 번, 두 번, 열 번을 의심하며 기억을 되짚어도 변함없는 현실에 사람들은 체통도 잊은 채 멍하니 입을 벌렸다. 혀끝에 감도는 욕설을 간신히 삼켜 내며.
‘이런…… 미친놈.’
사실 미친놈이라는 표현조차도 저 청년, 진태경이 벌인 짓거리에 비하면 한참이나 부족한 것이었다.
면전에 대고 도발했다.
비아냥거렸다.
다른 누구도 아닌 황제에게.
물경 수만에 이르는 정적들을 추수하듯 베어 버리고, 대국을 설립한 태조(太祖) 이후 가장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한 저 찬탈자에게.
‘미쳤군. 정말이지 제대로 미쳤어.’
품계가 낮아 말석에 앉아 있던 관리들은 물론이요, 정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고관대작들마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상황.
반역(反易)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 만행이니 머지않아 벌어질 일은 불 보듯 뻔했다.
죽고, 죽고, 또 죽을 것이다.
진태경과 그 일가(一家)는 물론, 연관이 있는 모든 이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금의위가 주도하여 작성할 그 살생부(殺生簿)에는 전혀 상관없는 몇몇 사람의 이름도 포함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이제는 죽고 없는 선황의 충신들.
상산왕을 진정한 후계자로 생각하는 일부 세력이 표적이 될 거란 사실은 그리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증거? 명분?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증거도, 명분도 어차피 만들어 내면 그만이다.
고문 기구에 살과 근육이 찢겨 나가는 고통에 몸부림치다 보면 그 어떤 충의지사(忠毅志士)라 해도 죽음을 애걸하게 되니까.
황실 휘하의 고문 기술자들에게는 거짓을 진실로, 진실도 거짓으로 바꿀 수 있는 기술이 있었고, 과거 동창에게 주어졌던 그 역할은 금의위로 넘어온 지 오래였다.
즉, 칼자루는 오직 한 사람에게 달려 있었다.
황제.
이제 그의 명령 한 마디면 모든 것이 끝난다.
이미 진태경이 벌을 내릴 명분을 쥐여 준 이상, 곧 황제가 휘두를 칼날이 무엇을 베어 내도 이상하지 않았다.
설령, 그 마지막 목표가 상산왕이라 해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으득.
이 믿을 수 없는 상황을 모두 지켜보고 있던 대소신료 중 일부는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삼키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 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내심 상산왕을 지지하거나, 혹은 연판장에 이름을 적어 반정을 꿈꾸는 이들.
그런 이들에게는 이 모든 상황이 끔찍한 재앙처럼 느껴졌다.
진태경이 상산왕의 빈객 자격으로 황실에 발을 들인 이상, 상산왕 역시 책임을 피할 수 없을 테니까.
‘허, 허허. 이렇게 천명(天命)이 대국을 떠나는구나.’
반정에 관련된 계획을 모르는 이들은 원망스러운 하늘을 개탄했고.
‘원래의 계획에 어긋났지만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된 이상 지금 당장이라도 나서야…….’
연판장에 서명한 이들은 각오를 다지며,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상황을 지켜보는 마삼보를 주시했다.
그의 지시가 떨어지는 즉시 행동을 개시하기 위해서.
하지만 다음 순간.
“그래, 그대의 말이 옳다.”
긴 침묵을 깨트리며 울려 퍼진 황제의 한마디는, 다시 한번 모두를 충격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성군(聖君)이 되고자 하는 자는 바른말을 하는 이를 벌하지 않는 법이지.”
“……!”
“……!”
“태원진가의 진태경.”
고요한 적막의 중심에 선 황제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천자의 이름으로, 네가 짐에게 저지른 무례를 용서하마.”
용서.
분명 용서라고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수만 명을 무참히 도륙했던 그가.
역모와 대숙청을 일으켰던 그 잔혹한 황제가.
다시 한번 할 말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절대자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서는.
정면으로 마주한 황제의 얼굴에서, 미처 숨기지 못한 감정의 편린을 읽어 낸 진태경은 마음속으로 뇌까렸다.
‘그래,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
앞서 황제를 도발했던 것은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만약 실패한다면 반정군이 사전에 계획한 모든 것이 뒤틀려 버릴지도 모를 만큼.
‘그렇기에, 바로 지금이어야 했다.’
그리고 그 위험천만한 도박의 결과는 성공이었다.
위험했던 만큼 중요한 열쇠를 얻었고, 황제의 대답은 설마 했던 마음속 의문을 해소해 주기에 충분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용서라…… 말도 안 되지.’
단 하나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진태경은 조용히 뒷말을 삼켰다.
사방에 흩어져 있던 퍼즐들이 하나씩 맞춰진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터질 것 같던 머릿속이 서서히 맑아지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마음은 새로운 길을 비추고 있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모든 의문점이 정리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도대체 어째서?’
진태경은 황제를 향해 전음을 흘려보냈다.
아니, 정확히는 흘려보내려고 했다.
때마침 이 자리에 도착한 누군가가 아니었다면.
“그토록 자비로운 성군이 되고자 하신다니, 듣던 중 반가운 이야기로군요.”
“……!”
황제보다 진태경이, 그리고 진태경보다 백연의 반응이 조금 더 빨랐다.
불과 다섯 장밖에 떨어지지 않은 어딘가.
늙수그레한 목소리와 함께 아무런 인기척도 없이 나타난 창백한 피부의 노인은, 황제를 향해 읍하며 말을 이었다.
“승하하신 선황 폐하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스륵.
천천히 들리는 고개와 함께 길게 자라난 백발이 흔들린다.
오랜 세월을 간직한 회색빛 눈동자에 황제의 굳은 얼굴이 담기고, 군데군데 갈라진 입술 사이로 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신, 동창장인태감(東廠掌印太監) 위충(魏忠)이 황제 폐하를 뵙나이다.”
* * *
위충을 본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어릴 때 봤던 어느 고전 영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방대한 판타지 세계관에, 마왕이 지닌 힘의 원천인 어떤 목걸이를 부수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다종족 용사 파티.
그리고 그 중심인물 중 하나인 늙은 마법사.
“……간달프?”
무릎까지 닿을 것 같은 백발에 회색빛 눈동자까지.
사실 굳이 따지자면 ‘매우 아픈 간달프’에 가깝긴 하지만, 어쨌든 닮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로 인한 약간의 애로사항이 있다면, 저 생각이 나도 모르게 육성으로 튀어나왔다는 거다.
‘아.’
상황을 인지하고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늦었다.
황제는 물론이고, 잠시 다른 곳을 향했던 모두의 시선이 내게 꽂혀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중에는 매우 아픈 간달프, 아니 위충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자네가 말로만 듣던 바로 그자로군.”
뭐라 대답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던 내가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실소를 흘린 위충이 다시 황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참으로 무례한 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폐하.”
하지만 황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위충을 응시하던 그가 입을 연 것은, 주위의 공기가 차갑다 못해 얼어붙을 무렵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슬슬 사람을 보낼까 했는데…… 오랜만이군, 창공(廠公). 그간 무탈했나?”
“제법 긴 시간 동안 요양한 끝에 이렇게나마 거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황제 폐하의 은덕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지요.”
“짐의 은덕이라. 확실한가?”
“내로라하는 명의들도 소신의 목숨을 장담하지 못했는데, 이리 나아진 것을 보면 하늘의 뜻이 있어서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전부 하늘의 자손이신 폐하의 은덕이라 생각합니다.”
“안타깝군. 짐이 보낸 어의(御醫)의 조언을 따라 탕약을 제조했다면 더 빨리 병마를 이겨 낼 수 있었을 터인데.”
“송구합니다. 하오나 황실 어의가 지어 온 탕약은 소신의 늙은 몸뚱어리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요양을 택했나이다. 하온데…….”
위충이 문득 수심이 드리워진 얼굴로 황제를 살폈다.
“소신이 실로 오랜만에 뵈어서 그런 것인지, 폐하의 용안(龍顏)이 과히 좋지 않아 보입니다. 혹여 강건하셔야 할 옥체에 병마가 깃든 것은 아니신지요.”
“……!”
순간, 그렇지 않아도 굳어 있던 황제의 눈매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
“걱정할 필요 없다. 그대가 우려할 정도는 아니니.”
“그렇다면 참으로 다행입니다. 이렇듯 관용을 베푸시는 성군이 되셨으니 만세(萬世), 만만세(萬萬歲)까지 천하를 다스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느껴진다.
황제와 창공.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쉼 없이 주고받는 보이지 않는 칼날이.
그리고 어느덧 황제에게서 흘러나오고 있는 거대한 기운이.
우우우웅.
주위의 대기가 요동친다. 비교적 가까이에 있던 몇몇 관리들은 오한을 느끼는 것처럼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몸을 떨었다.
비록 황제라는 후광에 가려져 있으나, 그 역시 초인의 영역에 접어든 한 사람의 초절정 고수.
하지만…….
‘창공은, 저자는 달라.’
처음 그가 나타난 순간부터 깨달았다.
간달프를 닮은 저 창백한 피부의 노인이, 이 자리의 누구보다도 고수라는 사실을.
‘심지어는 백연조차도.’
초절정 고수 간의 전투란 그야말로 찰나지간에 생사가 갈리는 법.
불과 다섯 장 남짓한 거리까지 접근했었음에도 창공의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미 선수(先手)를 빼앗겼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이제야 알겠네. 마삼보가 그토록 자신하던 이유를.’
내가 느낀 바에 의하면 창공과 소교의 무위는 비등비등한 수준.
이러한 상황에서 아직 대연회장에 자리하지 못한 적천강과 그 외의 전력이 반정군에 합류한다면, 소교를 손쉽게 쓰러트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소교조차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아마도 다른 곳에서 상산왕을 호위하고 있겠지.’
상산왕은 매우 중요한 열쇠다.
반정군과 황제, 그 어느 쪽이라 하더라도 결코 적에게 빼앗겨서는 안 되는 존재.
그리고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한 것은 나 혼자뿐만이 아닌 듯했다.
“폐하. 근래 들어 비바람이 기승을 부려서인지 오늘따라 유독 날씨가 서늘한 모양입니다. 저 가엾은 신하들을 위해서라도 관용을 베풀어 주심이 어떠하신지요.”
공손하면서도 여유롭게, 동시에 뼈 있는 말을 담아 부르르 떨고 있는 신하들을 가리킨 창공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한데, 상산왕 전하와 회임하신 후궁 마마께서는 어찌하여 보이지 않으십니까? 명실상부한 황실의 일원이신 그 두 분이야말로 황제 폐하와 더불어 이 자리를 빛내 주셔야 할…….”
“그 입 다물어라, 위충.”
딱딱한 음성으로 창공의 말을 끊어 낸 백연이 앞으로 나서려던 그 순간.
“그만.”
손을 들어 그를 멈춰 세운 황제가 서늘한 눈빛으로 위충을 응시했다.
“창공은 신경 쓸 것 없다. 두 사람 또한 이미 이곳으로 오고 있으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드디어 언젠가 이 광활한 대국을 통치하실 후계를 뵙게 되겠군요.”
“그래, 그렇게 될 것이다.”
둘 중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또한 구태여 묻지도 않았다.
자신들이 마음에 담은 진정한 후계자가 누구인지. 상대가 생각하는 후계자는 누구인지.
다만 그들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 연회가 무르익기를. 도화선의 불꽃이 끝까지 타들어 가기를.
그리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기. 두 분 대화도 대충 끝나신 것 같은데. 조심스럽게 한 말씀만 드려도 됩니까?”
황제가 대답했다.
“무엇이냐.”
“별건 아닙니다. 이제 저기 저 상석 쪽으로 가실 것 같은데. 이참에 저도 자리 좀 옮겨 주십사 하고요. 웬만하면 창공 어른 옆자리가 좋겠네요.”
“……자리를 옮겨 달라고?”
얼어붙어 있던 대소신료가 한마음 한뜻으로 나에게 찢어 죽일 듯한 시선을 쏘아 보내는 동안, 잠시 할 말을 잃었던 황제를 대신해 창공이 입을 열었다.
“그,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나는 최대한 당당하고 멋있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위쪽 자리가 반찬 가짓수가 더 많아 보여서요.”
물론, 딱히 멋있어 보이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