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964
#963화
부우우우!
밤공기를 뚫고 울려 퍼지는 의미 모를 뿔피리 소리를 들으며, 진무경은 문득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몸뚱어리를 움직이는 것이 의지인지 본능인지.
서걱!
허공을 가로지르는 섬광.
빛을 뿌리며 휘둘린 검에 또 하나의 적이 쓰러진다.
헤아릴 수도 없이 숱한 반복에 따라 전신에 각인된 움직임은, 핏물을 흘리며 비틀거리는 와중에도 정확한 궤적을 그려 내고 있었다.
쉭, 푹!
등 뒤에서 쏘아진 돌격창을 피해 내고, 역수(逆手)로 쥔 검을 옆구리 사이로 찔렀다.
“커헉.”
귓가에 닿은 단말마.
진무경은 억눌린 신음을 토해 내는 적의 가슴에서 검을 뽑아냈다.
허물어지는 시체를 뒤로한 채 또 다른 먹잇감을 찾아 달려 나가는 그의 눈은, 믿을 수 없게도 고요하게 감겨 있었다.
그러나…….
‘선명하다.’
보이지 않아도 느껴진다.
아니, 보이지 않기에 오히려 주위의 모든 것이 더욱 생생하게 와닿았다.
어둠.
빛 한줄기 스며들지 않았던 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이 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강해지기 위해서, 때로는 미치지 않기 위해서 검을 휘둘러야 했다.
시각이 무뎌진 만큼 다른 감각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예리해졌고, 그것은 곧 기감(氣感)의 비약적인 상승을 뜻했다.
“주, 죽여!”
“고작 한 놈이다! 놈을 쓰러트린다면……!”
퍼걱!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외침이 뚝 끊긴다. 끝없는 아수라장 속, 이제는 몇 번째인지도 모를 적을 쓰러트린 진무경은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지럽다.
몸뚱어리는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고, 정신은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몽롱하다.
그가 마조라는 강적을 상대하며 얻은 것은 찰나의 깨달음뿐만이 아니었다.
극심한 내상.
온통 뒤틀리고 찢어진 오장육부와 혈도가 내지르는 비명이 귓전에 울리는 듯했다.
물론 진무경 자신도 알고 있었다.
마조를 쓰러트린 것은 천운(天運)에 가까웠다는 것을.
목숨을 도외시한 철무백과 위팽의 도움과 두 번 다시 펼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완벽한 일격.
그리고 마지막으로 강기와 맞설 수 있는 신병이기(神兵利器)의 존재까지.
셋 중 하나라도 어긋났다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진무경이 아닌 마조였을 것이다.
하지만…….
‘빌어먹을.’
아무런 대가 없이 주어지는 결과는 없다.
울컥, 솟구치는 핏물을 삼키며 진무경은 숨을 삼켰다.
자꾸만 손아귀에서 미끄러지려는 검자루를 다시 한번 굳게 말아쥐고, 자신을 포위한 채 두려움과 분노가 섞인 숨결을 토해 내는 적들을 모든 감각으로 느꼈다.
쉴 새 없이 울려 퍼지는 쩌렁쩌렁한 함성과 비명 너머에서 들려온, 누군가의 희미한 목소리도 함께.
“어서, 어서 가게.”
늙수그레한 그 음성의 주인이 누구인지, 진무경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안 갑니다. 아니, 못 갑니다.”
진무경은 감았던 눈을 떴다. 이마에서 흐른 피로 붉게 물든 시야 속, 한쪽 무릎을 꿇은 채 헐떡이는 철무백과 위팽의 모습이 보였다.
“돌아갑니다. 모두 함께.”
굳은 의지가 담긴 진무경의 대답에 위팽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거보십시오. 제가 뭐랬습니까. 진씨 가문 사람들 고집 하나는, 흡.”
쿨럭. 투두둑.
말을 잇지 못하고 핏물을 쏟아내는 위팽의 모습에 진무경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같은 토혈(吐血)도 색과 내용물에 따라 위급함이 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위팽의 상태는, 정신을 잃지 않는 것만으로도 기적에 가까웠다.
“젠장. 피만 몇 됫박을 쏟았더니 이제는 고작해야 한 줌이구먼.”
아무렇지 않은 듯 천연덕스럽게 말해 보지만, 사태의 위급함은 위팽 그 자신도 안다. 그는 자꾸만 감기려는 눈동자에 애써 힘을 주며 진무경을 바라보았다.
“이 공자. 한마디만 해도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더 이상 말씀하지 마십시오. 최대한 기력을…….”
“무경아.”
“……!”
순간 덜컥 굳은 진무경을 바라보며, 위팽은 피에 젖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가라. 고집 그만 부리고.”
“…….”
“나도, 여기 계신 철 대협께서도, 그리고 너 스스로도 알 것이다. 무엇이 최선인지는.”
진무경은 이를 악물었다.
“아직,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 돌아갈 수 있다.”
위팽이 부드럽게 덧붙였다.
“너 혼자서라면.”
“그게 무슨……!”
“더 늦기 전에 떠나라. 지금이라면 충분히 퇴로를 뚫을 수 있을 거다.”
아군의 피해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적진 깊숙이 파고들어 전투를 벌인 것은 옳은 선택이었으나, 한편으로는 뼈아픈 패착이기도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백의 적들이 주위를 둘러싼 채, 호시탐탐 때를 노리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위팽과 철무백은 그 잔인한 현실을 정확히 직시하고 있었다.
항산을 호령하던 늙은 호랑이도, 귀신 같은 검술을 펼치던 절정의 검객도 더는 없다.
호랑이의 발톱은 부러졌고, 귀검의 검술은 으스러진 팔과 함께 사라졌기에.
그것이 단 한 순간, 일세를 풍미했던 전대의 마두(魔頭)의 손을 묶기 위해 그들이 각오한 대가였기에.
하지만…….
“너는, 무경이 너만큼은 살아야 한다.”
“자네가 태원진가의 이공자이기 때문이 아닐세.”
위팽과 철무백은 금방이라도 꺼질듯한 눈을 들어 진무경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들의 눈동자에 비친 청년의 이름은 진무경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살려야 할 희망이요, 언젠가 수십, 수백 배로 적들에게 되돌아갈 복수 그 자체였다.
“살아라. 어떻게든 살아남아.”
“그리고 돌아오게. 우리에게, 저놈들에게.”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四季)는 변함없이 반복된다. 그 시간 속에서 사라지는 것은 사람뿐이다.
그렇기에 위팽은 믿었다. 철무백은 확신했다.
오늘 자신들에게 일찍 찾아온 이 겨울이, 언젠가는 적들에게도 찾아갈 것이라고.
앞으로 수많은 이들을 지켜낼 태원진가의 젊은 검귀가, 놈들을 쓰러트릴 것이라고.
“그러니…….”
위팽은 희미한 미소와 함께 진무경을 바라보았다.
과거 청년이 소년이었던 시절, 검을 가르쳐 달라며 찾아왔던 그 모습을 떠올리며.
“당장 이 자리를 떠나라. 진무경, 아니 진천대주.”
“……!”
“이건 본가의 상급자로서 내리는 명령이다.”
순간 말문이 막힌 진무경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도 안다.
무엇이 최선인지. 더 많은 이들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하지만 발걸음은 떨어지지 않았다.
처음 검을 들었을 때, 무(武)와 함께 배웠던 그 가르침을 진무경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의협(義俠).’
강자를 누르고 약자를 돕는다.
불의를 외면하지 않으며, 신의를 목숨처럼 지킨다.
그것이 협객이라 했다. 올바름을 외치는 정파의 무림인이 가져야 할 자세라고 배웠다.
그저 검이 좋아서, 강해지기 위해서 무공을 익혔으나 그 두 글자에 실린 무게와 의미는 잊어 본 적이 없었다.
‘무엇이 최선인가.’
위팽과 철무백이 말하고, 진무경 스스로도 적을 쓰러트리면서도 마음속으로 끝없이 되뇌었던 그 생각.
그리고 진무경은 불현듯 깨달았다.
“두 분이 하신 말씀은 틀렸습니다.”
스륵.
감았던 눈을 뜬 그의 발끝이 피에 젖은 땅을 짓눌렀다.
피로와 고민이 뒤섞여 파르르 떨리던 검 끝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적들을 향해 겨누어졌다.
“무엇이 최선이며 최악이냐를 생각하기 이전에, 한 가지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쉭, 서걱!
조심스럽게 접근해 오던 유목민의 상반신이 비스듬히 갈라진다. 돌격창과 함께 주인의 몸뚱어리를 베어 낸 새하얀 검신을 타고 핏방울이 굴러떨어졌다.
“무엇이 옳은가.”
진무경은 물 흐르듯 움직였다. 찰나의 깨달음이 서서히 녹여진 검을 타고 흐릿해졌던 푸른 검기가 넘실거렸다.
촤아악!
몽글몽글한 피 안개가 맺힌다. 단 일 검으로 세 명의 케식을 베어 낸 진무경은 숨이 끊긴 시체의 손에 들려 있던 신월도를 빼앗아 흩뿌렸다.
“무엇이 후회하지 않을 선택인가.”
쐐액! 푹!
공간을 가로지르는 한 줄기의 빛. 그 끝에 남은 비명조차 들리지 않는 죽음.
각궁에 활시위를 매기고 있던 누군가의 죽음을 신호탄 삼아, 주변을 빽빽하게 포위하고 있던 적들이 억누르고 있던 두려움과 분노를 터트리며 일제히 달려들었다.
쉬쉬쉬쉭!
슈확! 캉!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섬광.
날아드는 비도를 쳐낸 진무경을 향해 십여 자루의 돌격창과 신월도가 짓쳐 들었다.
피핏!
뜨겁다. 나부끼는 바람에 핏방울이 뒤섞인다.
머리로는 피할 수 있었으나 몸이 그것을 거부한다. 전신 곳곳을 스쳐 지나간 날붙이의 흔적에서 불같은 통증이 일었다.
아니, 그것은 어쩌면 진무경이 스스로에게 느낀 실망과 분노일지도 몰랐다.
아주 잠시나마, 올바름이 아닌 최선에 대해 생각했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이것만이, 옳은 선택이다.’
복잡하던 머릿속이 맑게 갠다. 진무경은 온 힘을 다해 이를 악물었다.
으적.
입 안에 감도는 피비린내.
고통이 또 다른 고통으로 잊혀진다. 조금씩 흐려지던 정신이 되돌아온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츠츠츠.
작은 파도처럼 넘실거리던 푸른 검기가 하나로 뭉쳤다.
검을 쥔 자의 의지에 따라 잇고, 융화되고, 이내 하나가 되어 아름다운 궤적을 그렸다.
이제는 망자가 되어 버린 어느 늙은 마두가 보았다면, 크게 소리 내어 웃었을 만큼 완벽한 궤적을.
솨아아악.
바람이 지워졌다. 서늘한 한기(寒氣)가 어둠 속을 갈랐다.
진무경을 향해 쏘아지던 열 명의 케식 십인장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눈을 부릅떴다.
더불어, 마침내 이해할 수 있었다.
마지막 순간, 마조가 무엇을 보았는지.
그 강대한 무위를 지닌 괴물이 어떤 감각을 느꼈는지.
스릉.
유형화된 기운으로 빛나던 돌격창이, 신월도가 신음했다.
힘없이 사그라지는 각자의 기운과 함께 토막난 애병의 파편을 바라보며, 열 명의 절정고수는 기울어지는 시야를 느꼈다.
“거, 검귀(劍鬼)…….”
푸화아악!
허공을 물들이는 짙은 피 분수.
투두둑.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리는 찐득한 핏물 아래, 푸른 파도와 같은 일격으로 열 마리의 새를 떨어트린 진무경은 나직이 뇌까렸다.
“그 약속, 지켜 주마.”
청파낙조(靑波落鳥).
이름 없던 일격의 첫 먹잇감이 된 늙은 마두를 떠올리며, 진무경이 얼어붙은 적들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딘 그 순간이었다.
“누구와 무슨 약속을 했는지, 나도 들어 볼 수 있겠나?”
“……!”
진무경의 전신이 덜컥 굳었다.
갑작스럽게 들려온 낯선 목소리의 주인은, 불과 일장밖에 되지 않는 거리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놈은…….”
“자무카 칸이시여!”
누군가의 외침이, 아니 너나 할 것 없이 사방에서 터져 나온 그 부름이 진무경의 목소리를 파묻는다.
‘자무카.’
목소리와는 달리 익숙한 이름이었다.
본대보다 앞서 산서성을 침범한 일천의 선봉대를 궤멸시켰던 그 날, 가장 강했던 유목민 전사가 죽음을 맞이하며 남긴 말은 아직도 뇌리에 또렷하게 남아 있었으니까.
‘그분께서, 자무카 칸께서 네놈을 벌할 것이다. 혈육, 친구, 터전. 모든 것을 빼앗고 불태울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마침내 자무카를 대면한 진무경은 깨달았다.
그 저주나 다름없던 말에는, 일말의 과장조차 없었음을.
“자네로군. 그 검귀가.”
자무카.
초원의 절대자가 진무경을 향해 걸음을 뗀 바로 그 순간.
드드드득.
작지만 또렷한 진동이, 모두의 발끝을 통해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