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est friend is a Korean lady RAW novel - Chapter 59
58회
직설적인 물음이었지만 그 속엔 상대를 향한 배려가 여전했다.
윤설은 제 마음을 추스르며 가만히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사실은…… 저를 마주하시는 것이 불편하실까 봐 오지 않으려고 했습니다만…..”
윤설은 제 마음과 동일한 그의 마음을 안쓰럽게 느끼고 말았다.
따지고 보면 그가 잘못한 건 없었다.
준은 촬영 내내 친절히 대해주었기에 모든 것이 낯선 그녀에겐 참 고마운 존재였다.
윤설은 그런 이에게 보답하진 못할망정 오히려 그를 불편하게 만든 것은 아닌지 미안함이 앞섰다.
“실은…. 저도 그랬습니다만…. 제가 오히려 님을 불편하게 만든 건 아닐지…..”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형이 오랜만에 바람을 쐬자고 해서 오긴 했지만…. 윤설 씨가 잘 지내시는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부담은 갖지 마세요.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니까요.”
윤설의 시선이 그에게 살짝 닿았다가 되돌아왔다.
그 사이, 준은 머그잔 하나를 그녀의 앞에 가까이 놓아주었다.
따끈한 김을 올리고 있는 건 유자차였다.
준이 제 입가로 커피 잔을 가져가더니 한 모금을 삼켰다.
“마지못해 나오긴 했지만 막상 와보니 참 좋네요. 이렇게 경치 좋은 곳도 참 오랜만인 것 같아요. 가끔씩은 형 고집이 쓸 만하다니까요?”
따끈한 차를 한 모금 삼킨 윤설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윤설 씨는 이런 곳에 자주 와보셨나요?”
“아, 아닙니다. 실은…. 처음입니다.”
“그러시군요. 요즘 다들 바쁘게 살다보니 이런 여유를 갖기도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몇 마디 대화가 오간 후, 어색함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어갈 주제를 찾지 못한 이들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저쪽에서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흘러왔다.
해인과 윤 매니저는 할 말을 쌓아둔 사람들처럼 연신 대화와 웃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싱긋 웃던 준이 커피 잔을 들었다.
“해인 씨를 만나고 나서 형 안색이 참 좋아졌어요. 그동안 저 때문에 고생이 많았거든요. 일이 바빠 연애도 제대로 못해본 형에게 미안함이 컸는데…. 좋아 보여서 한편으론 기쁘네요.”
윤설이 내심 놀라고 말았다.
준이 느끼는 마음은 자신이 느끼는 그것과 동일했다.
벗이 자신 때문에 손해 보는 것이 못내 미안했고 이제야 밝은 낯빛을 볼 수 있어서 기뻐하던 그녀였다.
조금은 불편해하던 윤설의 마음이 스르륵 녹아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생각은 각기 다른 법이었다.
그 가운데 자신과 똑같은 마음을 마주한다는 건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준과는 유독 그런 일들이 많은 편이었다.
서로가 생각하고 공감하는 것들은 같은 방향일 때가 많았다.
“실은…. 저도 그리 여기고 있었습니다. 벗에게 늘 신세만 지는 것이 못내 미안했는데 밝아진 얼굴을 보니 이제야 마음이 놓이는 듯합니다.”
“벗이요?”
“예에. 잘못된…. 것이라도….?”
준이 싱긋 웃기 시작했다.
“아닙니다. 그런 단어를 정말 오랜만에 듣는 것 같아서요. 왠지 정감이 간다고나 할까요? 항상 느꼈지만 윤설 씨는 정말 특별한 분이세요. 옛 것의 소중함을 간직한 분은 흔치 않거든요. 윤설 씨와 대화할 때면 저 역시 그 시절의 어느 한 자락에 가 있는 기분이 들어서 마음이 포근해집니다.”
“과…과찬……이십니다.”
칭찬의 말에 윤설이 부끄러운 듯 시선을 떨구었다.
또다시 적막이 흘러들자 두 사람이 말없이 찻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바람이 둘 사이를 휘감아 살랑거리더니 금세 사라졌고 덩달아 춤추던 나뭇잎들과 강의 물결은 흐느적거리다가 제자리를 찾아갔다.
“윤설 씬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머그잔 속의 노란 유자를 응시하던 윤설이 고개를 들었다.
“저는…. 해인이와 휴식을 취했습니다.”
“그러셨군요. 참, 두 분 함께 지낸다고 하셨죠? 부럽습니다. 친구랑 함께 사는 건 어떤 느낌일지 가끔씩은 궁금했거든요. 경험하지 못한 것은 언제나 동경의 대상이 되는가봅니다. 두 분은 어떻게 만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담담히 대답을 이어가던 윤설이 곧 흠칫 놀라고 말았다.
준에겐 진실을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제 존재를 드러낼 순 없는 노릇이었다.
당황한 마음이 급히 대답을 찾기 시작했다.
“해, 해인이는…. 어려운 때에 저를 도와준 은인입니다.”
“은….인….이요?”
준이 윤설을 또렷이 응시하자 그녀의 가슴이 방망이질하기 시작했다.
설렘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눈빛은 무언가 더 속 깊은 얘길 듣고 싶어 하는 것만 같았다.
윤설이 자책하는 순간이었다.
“은인이란 말 또한 흔치 않은데….. 두 분 사이에 뭔가 특별한 일이 있으셨던 모양이군요. 그러고 보니….촬영 때 말입니다. 카메라 앵글 안으로 들어오셨던 그날….윤설 씨의 눈빛이 많이 쓸쓸해보였는데…. 해인 씨가 위로해주시는 걸 보면서 두 분은 마음속의 깊은 고민까지 나눌 수 있는 사이가 아닐까 생각했었습니다. 이제야 매치가 되는군요. 윤설 씨에겐 부러운 점이 많습니다.”
민준이 옅게 미소 짓자 가슴을 쓸어내린 윤설이 곧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저를 부러워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저는 그럴 만한 사람이 못 됩니다.”
“평생을 살면서 속 깊은 얘기까지 나눌 수 있는 친구가 하나라도 있다면…… 그건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요? 그런 면에서 윤설 씨는 제게 부러운 분입니다.”
“허면……”
“제겐 그런 친구가 없다는 뜻이죠. 그러고 보니 참 삭막한 인생이네요.”
커피를 한 모금 삼키는 준의 모습이 어쩐 일인지 쓸쓸해 보였다.
‘내가 너무 모질게 군 것일까……? 이렇게 올곧은 분께 어찌 좋은 벗이 하나도 없단 말인가?’
어색한 상황 속에서 두 사람이 말없이 차를 마셨다.
윤 매니저와 해인은 일어날 생각이 없는 것처럼 여전히 수다와 웃음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강 쪽에서 요란스런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처음 듣는 굉음에 윤설이 귀를 막은 채 몸을 움츠리자 준이 재빨리 일어서더니 주변을 살폈다.
소리의 근원을 알아낸 그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제트스키를 처음 보신 모양이군요? 소리가 좀 요란하죠?”
티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돌발 상황에선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윤설이 어색한 제 행동을 간신히 바로잡으며 어쩔 줄 몰라 하자 준이 싱긋 웃었다.
“우리 구경할까요? 저기에요.”
“예에?”
“어서요. 처음 보시는 거라면 꽤 흥미로울지도 몰라요.”
윤설은 나서는 것이 두려웠지만 준을 따라 일어섰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의 말에선 신뢰가 느껴졌고 이번에도 믿어보기로 마음먹은 참이었다.
앞장선 준이 손짓하자 윤설이 가만히 걸음을 옮겼다.
곧 두 사람이 정면을 바라본 채로 나란히 섰다.
서로가 조심스러워 가까이 다가서진 못한 상태였다.
윤설은 제 앞에 펼쳐진 푸름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처음 보는 강물은 그 깊이와 폭을 알 수 없어 두렵긴 했지만 탁 트인 전망은 가슴을 시원케 해주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건너편에 서있는 나무들은 더없이 푸르렀고 어디에선가 꽃향기가 은은히 스며들고 있었다.
꿈결 같은 풍경이 신기해 즐거이 여기던 이에게 갑자기 아까의 그 굉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꺄악!”
“윤설 씨, 괜찮으세요?”
휘청거리던 규수의 몸뚱이를 사내가 재빨리 붙잡았다.
윤설의 팔에 곧 준의 온기와 악력이 동시에 전해지기 시작했다.
민망함을 느낀 그녀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고, 고맙습니다.”
“다치진 않으셨죠?”
윤설이 고개를 끄덕이자 준이 비로소 미소를 드러냈다.
안도감이 감도는 사이, 저 멀리 나갔던 제트스키가 두 사람을 향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려오고 있었다.
두려움을 느낀 윤설이 제 몸을 준의 뒤로 숨겼다.
살기 위한 본능적인 행동이었지만 그녀의 모습은 준의 마음에 설렘을 드리우기 시작했다.
민준이 뒤를 돌자 윤설이 동그래진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서로의 시선이 잠시 스치는 찰나, 준이 제 두 손으로 그녀의 귀를 막아주었다.
윤설의 두 눈이 당황으로 물들었지만 그녀는 곧 빠른 속도로 물살을 가르는 것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준의 손에 의해 굉음이 차단되자 곧 윤설의 호기심이 편안하게 작동하기 시작했다.
후대로 넘어온 그녀에겐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신기할 뿐이었다.
가끔은 두렵기도 했지만 조선의 호기심 많은 규수에겐 천상과도 같은 기분이 잦았다.
준이 일러준 것은 이름조차 생소해 따라 부르기도 힘들었지만 지금까지 본 것들 중에 단연 돋보였다.
물 위를 달린다는 건 제 아무리 상상력이 풍부했던 윤설이라고 해도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었다.
그 때문에 그녀는 헛것을 본 것은 아닌지 몇 번이나 제 눈을 비벼보았다.
‘세상에……어찌…. 이런 일이….. 저기에 탄 이는 신선이 아닐까? 어찌 물위를 저리 달릴 수 있단 말인가……이곳은 진정 꿈결 같은 일들이 천지로구나. 언젠가….조선으로 돌아간다면…이곳은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 천상일까? 아니면….꿈결일까….?’
윤설의 귀를 감싼 준의 손이 설렘으로 가만히 떨렸다.
하지만 그 떨림은 오직 그의 마음에서만 감지되는 진동일 뿐이었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에 두 눈을 비비더니 곧 동그랗게 뜨는 윤설이 담겼다.
매니저의 요청을 못 이기고 따라 나온 준이었다.
그에게 오늘은 윤설을 만나는 마지막 날이었다.
아니, 누가 시키진 않았지만 스스로가 그렇게 결심했었다.
서로의 마음이 합했다면 더없이 행복한 일이겠지만 거절의 대답은 또한 더없이 아팠다.
준은 허탈함에 몸서리쳤지만 한편으론 그녀의 뜻을 존중해주는 것이 남자다운 마음이라고 여겼었다.
하지만…… 이 순간, 그의 마음이 변해가고 있었다.
‘이 사람을 지켜주고 싶다. 그녀의 곁에 아무도 없다면….나를 싫어하지 않는다면….윤설 씨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이토록 순수한 사람이라니…… 이 사람과 함께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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