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est friend is a Korean lady RAW novel - Chapter 94
93회
주차를 마칠 때까지 무덤덤했던 태주의 얼굴이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차 키가 소파 위로 내동댕이쳐지더니 성난 걸음이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태주는 양주병의 뚜껑을 열어 유리잔에 그것을 쏟아 부었다.
선 채로 쓴 것을 목구멍에 밀어 넣은 그가 거실로 나와 소파 위에 앉았다.
입가로는 실소에 가까운 웃음이 번졌지만 곧 사라지고 말았다.
몇 모금을 더 삼킨 그가 이번엔 담배를 꺼내 물었다.
금연 1년을 다 채우지 못하고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인 이유는 심이지 때문이었다.
정확하게는 그녀와 밤을 보낸 다음 날 아침부터였다.
이지와 자고 싶었던 태주에게 그날은 결코 놓칠 수 없는 시간이었다.
그는 그녀의 뜨거운 눈빛이 제 본능을 허락한 것이라 확신했다.
서로 원한다면 망설일 이유 따윈 없었다.
이지의 보드라운 살결은 당연히 태주를 자극했고 드디어 자신을 향해 마음을 열어준 것은 가슴을 벅차게 했다.
하지만 그는 희열의 절정에서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듣고 말았다.
“민준이라…내가 아는 그 민준인가? 훗….심이지… 사랑한다고 했던 남자가 바로 그였군.”
뽀얀 담배 연기 사이로 허공을 응시하던 태주가 남아있던 양주를 몽땅 들이키더니 이내 유리잔을 집어던졌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지만 그는 담담히 손에 있는 담배를 입으로 가져갔다.
“기분 더럽군. 하룻밤으로 그녀를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건 뭐지? 심이지, 이젠 네 마음까지 가지고 싶군. 네 속에서 민준이란 이름을 완전히 지워주지. 나만 바라보게 할 거야. 강태주 없인 살 수 없다며 애원하게 만들 거라고!”
“안녕히 가세요. 또 오세요!”
자정이 다된 시간이었지만 손님을 보내는 해인의 음성은 여느 때처럼 활기찼다.
기지개를 활짝 편 그녀가 카운터에 놓인 TV를 켰다.
곧 손바닥만 한 것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규정상 안 되는 일이었지만 졸음을 방지하기 위해 주인여자가 특별히 허락한 일이었다.
볼륨을 줄인 채 채널을 돌려보던 해인은 주머니 속에서 진동으로 울리는 폰을 꺼냈다.
“어? 상규 오빠! 아직 안 잤어요?”
[ 아이고, 울 해인이가 열 알바 중인데 이 오빠가 잠이 오겠니? 힘들어서 어째? ]해인이 싱긋 웃었다.
“오빠가 더 힘들잖아요. 어젠 밤까지 샜다면서요? 말로만 듣던 밤샘 촬영이네요?”
[ 응. 그려. 아주 삭신이 쑤신다. 흐엉. 이럴 때 울 해인이 얼굴을 함 봐줘야 충전이 될 텐데 말이야. ]수줍게 웃던 해인의 시선이 켜놓은 TV 화면에 무심히 닿았다.
그리고 막 뉴스에 떠오른 자막 하나…….
그것은 곧 그녀의 온 신경을 빼앗고 말았다.
“오….오빠…제가 다시 전화할게요. 미안해요.”
전화기를 내려놓은 해인이 서둘러 볼륨을 높였다.
하지만 뉴스는 그 사이 일기예보로 넘어간 상태였다.
스마트폰을 다시 든 손이 재빨리 기사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애타게 찾던 것이 해인의 두 눈에 담겼다.
“이….이것은……!!!”
새벽녘, 현관문을 여는 소리에 윤설이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일하고 돌아오는 벗에게 자는 모습 보이는 것을 민망히 여겼고 해인이 돌아올 때쯤 일어나곤 했었다.
“어서 오렴. 오늘도 애썼구나.”
“윤설아…….”
평소답지 않은 반응에 윤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니? 혹시…놈팡이라도 만난 것이야?”
“그게 아니라….”
해인이 안으로 들어서더니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허면 어디가 아픈 것이니?”
도리질을 하던 해인은 침을 한 번 삼키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윤설아, 아까 뉴스를 발견했는데….. 어쩌면…. 네가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뭐…뭐라고?!”
해인이 스마트폰을 꺼내더니 저장해둔 기사를 보여주었다.
“우리나라 하늘에 슈퍼문이 떠오르는데 이번엔 개기월식이 함께 나타난대. 이런 일은 굉장히 드물어서 무려 250년 만에 일어나는 천문 축제라고 하는구나. 네가 이곳으로 올 때도 개기월식이 있었다고 했지? 그것도 그렇지만….왜 하필 250년 만일까? 네가 왔을 그 시간이랑 지금의 시간 차이가 딱 맞아떨어져. 윤설아…내 느낌이 맞는 걸까….?”
윤설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해인의 이야기엔 신빙성이 있었다.
그동안 돌아갈 방법을 찾아 헤맸지만 뾰족한 수를 발견하지 못한 터였다.
확신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새겨들을 만한 소식이었다.
“그…그날이….언제라고…하던?”
“다음달 10일이래. 15일 남았어.”
물어본 이와 답한 이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윤설은 그토록 원했던 소망 앞에서 머뭇거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매일 매일 부모님을 그리워하여 눈물로 밤을 지새웠던 그녀였다.
이 세상이 두렵기만 해 몸서리친 적도 있었다.
뜻밖의 제 마음은 곧 불효인 것만 같아 죄스러운 마음이 일었다.
하지만 그러한 자책 속에서도 그녀의 마음 한편을 꿋꿋이 지키고 있는 존재가 있었다.
민준…….
이제 너무나 커져버린 그의 존재가 윤설을 붙잡고 있었다.
해인이 잠잠히 생각에 잠긴 친구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떨군 얼굴은 비교적 담담했으나 그녀는 윤설의 복잡한 심경을 알 것 같았다.
조선에서 온 친구….
돌아가길 원했던 윤설을 돕는 것은 당연했다.
사랑하는 이를 두고 떠나야 하는 심정도 충분히 이해되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잠시 접어둔 자리에 곧 어마어마한 서글픔이 피어났다.
그 이유는 그동안 정이 들 대로 흠뻑 든 윤설과의 이별 때문이었다.
조선에서 온 친구는 참으로 예의 바르고 따뜻했다.
돈을 벌기 위해 이를 악물고 달리기만 한 해인에게 윤설은 그것만이 전부가 아님을 일깨워준 존재였다.
에 관하여 기억이랄 것도 없었던 해인이었다.
윤설은 친구를 배려하고 희생함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와 또래의 웃음으로 채워진 옥탑방은 더 이상 적막하지 않았다.
잠만 자는 공간이었을 때는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것 역시 윤설의 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삭막하기만 했단 해인의 삶은 어느새 온기를 품고 있었다.
“윤설 씨, 오늘도 잘 지냈어요?”
촬영 중반, 잠시 짬을 낸 준이 윤설에게 전화했다.
그는 화면에 보이는 연인을 향해 다정히 손을 흔들었고 그녀는 살며시 목례했다.
현대의 인사법보단 조선의 방식이 여전히 편하고 익숙한 탓이었다.
[ 오늘도 수고가 많으십니다. ]공손한 인사에 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윤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그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윤설 씨 말이 참 고맙고 귀여운 한편, 격식을 갖춘 상대처럼 느껴져서요. 친구 대하듯 편하게 해주셔도 됩니다. 음….그래야 저도 편할 듯한데….”
[ 아, 송구합니다. 허면… 식사는 맛있게 하셨….나요? ]“네.”
준이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노력하는 윤설의 모습이 귀엽고 사랑스레 와 닿은 탓이었다.
원주에서의 촬영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후반 작업에 참여하는 중이었다.
여전히 빠듯한 일상이었지만 윤설과 다시금 가까워진 거리는 비소로 마음 편히 웃을 수 있게 해주었다.
평범한 대화들이 오가던 중이었다.
자그마한 화면 속, 준을 응시하던 윤설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 저….드릴 말씀이…있습니다. ]“음… 무슨 얘기인지 궁금한데요?”
[ 그, 그것이….말씀드리기 송구하여… ]준이 싱긋 웃었다.
“우리 사이에 미안한 일이라뇨. 옳지 않아요. 마음 편히 얘기하세요.”
[…..어쩌면….조선으로…..돌아갈지도 모르겠습니다. ]준의 입가에 머물던 포근한 미소가 서서히 식어갔다.
윤설을 향해선 언제나 한결같은 그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애써 태연할 수도….잔잔히 웃을 수도 없었다.
행복에 겨워 외면하고 싶었던 날이 기어이 연인들을 찾아오고야 말았다.
평범한 일상은 더 이상 평범하지 않게 되었다.
매일 아침 연인을 생각하며 즐겁게 눈을 뜨던 이들에게서 웃음은 희미해져갔다.
날짜가 정해졌다면 흘러가는 시간의 무게가 이제까지와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하루를 허투루 쓸 수 없는 이유였다.
해인은 애써 웃음 지으며 농담으로 분위기를 띄우려 노력했고 윤설은 벗의 마음을 헤아려주었다.
점심을 먹은 후, 설거지를 마친 해인이 외출을 준비했다.
“윤설아, 나 오늘 나가서 일 그만둔다고 말하고 올게.”
남은 시간 동안 친구의 곁을 지켜주려는 결심에 윤설이 멈칫하고 말았다.
“그간 너의 노력을 잘 알거늘…. 이미 나 때문에 줄인 일을 아예 그만두려는 것이니? 아니 된다. 해인아, 그럴 것 없단다. 난 그저 조용히 왔듯이 그렇게 가면 그만이란다.”
“그거야 말로 아니 될 소리. 우리가 함께 한 우정이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니? 윤설아, 너랑 헤어지는 건 여전히 힘든 일이지만….이렇게 하지 않으면 크게 후회할 것 같아. 내 소원이니까 이해해주라. 알았지?”
해인의 눈빛은 진솔했고 윤설은 그런 벗의 마음을 차마 뿌리칠 수 없었다.
윤설은 해인이 나간 후, 자그마한 창문을 열더니 방바닥을 쓸기 시작했다.
방 안의 먼지가 빠져나간 자리로 밖의 신선한 공기가 새어들었다.
어느덧 옥탑방은 아늑한 보금자리가 되어 있었고 몇 안 되는 세간살이들은 눈감고도 찾아낼 수 있었다.
윤설이 잔잔히 미소 지었다.
‘사람의 적응력이란…..참으로 재미있기도 하고 무섭기도 한 것이로구나. 남은 시간 동안…. 내가 할 일은 해인이를 조금이라도 더 돕는 것이겠지.’
윤설이 걸레를 빨아와 화장대를 닦던 중이었다.
-똑 똑 똑-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그녀가 흠칫 놀라고 말았다.
이제껏 옥탑방을 찾은 이들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해인이는 열쇠가 있었고 준은 미리 전화를 했었다.
언젠가 음식이 왔을 땐 벗이 있어 안심했기에 지금 이런 상황은 굉장히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김윤설 씨! 안에 계신가요?”
낯선 여자의 음성이 윤설을 부르고 있었다.
제 이름을 안다면 자신을 안다는 증거였다.
윤설은 조금 두려웠지만 상대가 여자라는 것에 안도하며 조심히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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