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lasted Reincarnated Life RAW novel - Chapter 238
〈 빌어먹을 환생 239화 〉 레헤인
“잘못했어.”
유진은 자기변호 따위는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듣는 시늉이라도 할 테지만, 저 상태의 아니스에게는 무슨 말을 하건 소용이 없으니 잘못했다는 말이나 빠르게 뱉어두는 것이 옳았다.
“무엇을 잘못한 것인지는 압니까?”
아니스의 얼굴에는 3개의 곡선이 그려져 있었다.
방긋 웃는 눈. 방긋 웃는 입술. 눈웃음이 짙어 눈동자는 잘 보이지 않았는데, 오히려 그것이 유진의 몸을 두려움에 떨리게 만들었다. 저 감긴 눈꺼풀 너머의 눈동자가 얼마나 섬뜩하고 차가울지를 전생의 경험으로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흠…….”
모론이 괜히 헛기침 소리를 냈다. 그는 남자와 전사의 의리로서 유진을 변호하고 아니스의 분노를 누그러트리는 데에 일조하고 싶었다. 그러자 아니스가 고개를 까딱 기울이고서 모론을 쳐다보았다.
“…….”
모론은 숨소리까지 참았다.
그는 전생에서 하멜 이상으로 아니스에게 시달렸다.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니스가 모론에게 시달렸다 해야 할 것이다. 모론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식하게 앞으로 뛰쳐나갈 때마다. 아니스는 욕설을 내뱉으며 모론의 뒤를 따라야만 했다. 모론이 미친 듯이 도끼와 망치를 휘두르는 것을 지켜보다가, 만약 모론의 몸에 상처라도 생기면 즉시 기적을 일으켜 모론을 치료해야만 했다.
두려워하지 않는 모론의 용기는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에 큰 도움이 되기는 했다. 하지만 그 수많은 전장의 선두에 선 모론이 팔다리가 멀쩡히 달리고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스가 모론이 죽거나 병신이 되지 않도록 기적을 남발했기 때문이다.
성흔의 고통과 스트레스와 짜증과 분노가 극에 달할 때. 아니스는 참지 않고 감정을 폭발시켰다. 그 살벌한 감정의 화살은 거의 대부분 모론과 하멜에게 향했었다. 그러니 모론은 아니스의 저런 모습이 익숙하고 반가웠다. 그렇다 해서 눈치 없이 웃어대며 아니스를 얼싸안지는 않았다. 아무리 모론이 등신이라지만,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
모론은 계속 숨소리를 참으며 고개를 돌렸다. 지금 이 상황이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무언의 주장이었다. 유진은 그런 모론에게 작은 배신감을 느꼈다.
‘끼어들지나 말지, 왜 괜히 헛기침 소리나 내면서 아니스를 자극하는 거야? 개 같은 등신.’
무릎이라도 꿇어야 하나?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 유진은 머뭇거리면서 아니스를 힐긋힐긋 쳐다보았다.
지금 셋은 탑의 최상층에 있었다. ……설원의 차가운 바람이 박살 난 창문과 벽에서 휘몰아치고 있다.
모론 때문이다. 유폐의 마왕이 강림했을 때. 그를 느낀 모론은 말릴 새도 없이 창문과 벽을 박살 내고 날아가 버렸다.
가비드 린드먼을 공격했을 때, 내심 뒷수습을 걱정하기는 했다. 다행히 가비드는 검은 안개를 데리고서 요새를 떠나 버렸다. 그리고 아니스가 최선을 다해 신내림을 연기했고, 유라스의 교황이 성검과 계시를 인정했다. 모론도 유진의 어깨를 쾅쾅 두드리고 끌어안으면서 헬무드의 공작을 공격한 것을 긍정해 주었다.
덕분에 다른 왕들이 유진에게 돌발적인 행동을 따질 수 없게 되었다. 키옐의 황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이기는 했지만, 수호기사인 알체스터 드라고닉마저 은근히 유진을 보호하려 들자 더 이상 유진을 압박하지 못했다.
‘그 새끼 눈깔 뜬 것 보면 언제고 다른 일로 꼬투리를 잡아댈 것 같은데. 뭐 지금은 알 바가 아니고…….’
유진에게 불만을 드러낸 것은 키옐의 황제뿐만이 아니다. 나하마의 술탄도 노골적으로 유진을 노려봤었다.
뭐 놀랄 일도 아니었다. 유폐의 삼마인 아멜리아 머윈은 대놓고 술탄과 결탁하여 힘을 보태고 있지 않은가. 그 외에도 항마연합의 총장과 시무인의 국왕이 유진을 뚫어져라 쳐다보기는 했는데, 그 시선의 이유도 지금의 유진이 알 방법은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까?”
“흡.”
아니스가 고개를 까딱 기울이며 물었다. 눈웃음으로 감겨 있던 눈이 살짝 뜨여서 유진을 응시했다. 그 눈동자는 유진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싸늘하고 두려웠다……. 유진은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숨을 삼켰다.
“하멜. 당신의 무모하고 모자라고 병신 같은 짓에 왜 제가 피해를 입어야 합니까.”
“잘못했어.”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알고서 잘못했다고 말하는 겁니까? 하멜, 당신이 진심으로 뉘우치지 않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당신과 저는 아주 오랜 인연을 맺은 사이이고, 저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당신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잘못했어.”
“그러니까 무엇을 잘못했다는 겁니까?”
“가비드를 공격한 거…….”
“그게 왜 잘못인지 말해보십시오.”
머릿속으로는 공격의 이유가 납득이 되는데, 그것을 입 밖으로 내기에는 굉장히 힘들었다. 유진이 머뭇거리자, 아니스는 보란 듯이 코웃음을 치며 이죽댔다.
“거 보십시오. 하멜, 당신 스스로도 공격의 이유를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건, 당신의 공격이 굉장히 감정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다른 누군가에게 이유를 조리 있게 설명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 새끼가 꼴 받게 하잖아…….”
“하멜! 지금 당신의 발언이 저를 꼴 받게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나와는 달리 많이 배운 네가 꼴 받는다는 말을 하는 것은 조금 그렇지 않나…….”
유진의 중얼거림이 끝나기도 전에, 아니스의 손에 들린 플레일이 쏘아졌다. 쭉 늘어난 쇠사슬의 끝에 달린 아다만티움이 유진의 머리를 깨버릴 듯이 날아왔다. 유진은 기겁하며 머리를 꺾어 플레일을 피했다.
“왜 피하는 겁니까!”
“맞으면 죽어!”
“엄살떨지 마십시오. 그 육체가 전생의 비실비실한 몸보다 건강하다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멜은 비실비실하지 않았다.”
“모론, 당신은 그냥 닥치고 계십시오. 그리고 뭐가 비실비실하지 않았다는 겁니까? 하멜은 툭하면 피 흘리고 쓰러져서 절 힘들게 했었습니다.”
“그렇게 될 때까지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싸운 하멜은 위대한 전사였다.”
“그냥 닥치라니까요.”
아니스가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쏘아붙였고, 모론은 얌전히 입술을 다물었다.
“하멜. 당신이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야 드문 일도 아니었으니 그러려니 넘길 수도 있을 겁니다. 300년 전에는 그래도 되었습니다. 까놓고 말해서…….”
“까놓고도 조금 그렇지 않나…….”
“정말 뒈지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제 말을 끊지 마십시오.”
“미안해.”
“어쨌든…… 으흠, 솔직히 말해서. 300년 전에는 당신이 죽어도 베르무트 님이 있었습니다.”
그 말에 유진의 입꼬리가 쭈욱 내려갔다. 아무리 그래도 저 말을 본인 앞에서 말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베르무트 님이 있었으니까, 당신은 적당히 무모해도 괜찮았습니다. 당신이 무모하게 굴다가 일이 곤란해져도, 베르무트 님이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뭐 저도 있고, 세냐도, 모론도 있었고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하멜, 저번에도 말했을 텐데요? 이 시대에서 당신은 베르무트 님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너무한다 정말.”
“저는 당신의 생각 머리 없는 행동이 더 너무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가비드 린드먼이 유폐의 마왕의 뜻을 어기고 당신을 죽이려 했다면 어쩌려고 했던 겁니까?”
“유폐의 칼이자 기사라는 것에 자부심이 넘치는 새끼야. 그런 짓은 절대로 안 해.”
“그건 무조건 확신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가비드를 공격해서 당신은 대체 무엇을 얻은 겁니까?”
붕붕…… 아니스가 플레일을 휘두르며 쏘아붙였다. 그녀의 머리 위에서 매섭게 회전하는 아다만티움이 살벌한 빛을 번뜩였다. 유진은 그 궤적을 놓치지 않으며 꿀꺽 침을 삼켰다.
“여러 확신을 얻었지. 우선, 내가 바벨에 가지 않는 한 가비드와 유폐의 마왕은 내게 간섭하지 않을 거야. 그 유폐의 마왕이 바벨을 나와서 날 조질 일도 없을 거고, 가비드가 날 억지로 바벨로 끌고 갈 일도 없겠지.”
“처음부터 그걸 알아보고자 덤빈 것은 아니잖습니까?”
“아니 글쎄, 아니스, 너도 그 새끼 무릎 꿇고 있는 것 봤잖아. 머리에는 뭘 처발라서 기름이 번들거리고 자로 댄 것처럼 각져 있는데, 보고 있으니 막 걷어차고 싶고…… 아무래도 발로 차는 것보다는 검으로 썩둑 자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결국은 감정적인 이유로! 하멜! 충동을 통제하지 못하는 인간이 개새끼와 다를 것이 뭡니까?”
“이제는 하다 하다 사람을 개새끼 취급하는군…….”
“아닙니다, 하멜. 당신은 개새끼에 가깝지만 아직 개새끼는 아닙니다. 자, 하멜, 기도합시다. 양손을 모으고 뉘우칩시다.”
아니스는 친절하게도 먼저 시범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유진이 보는 앞에서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아쥐고, 경건한 표정을 하고서 두 눈을 감았다.
“제가 원하는 것은 잘못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앞으로 그러지 않겠습니다, 라는 미래로 전해질 약속입니다. 자, 따라 하십시오. 앞으로는 이런 무모한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앞으로는 사랑하는 아니스를 곤란하게 만들지 않겠습니다…….”
[시스터!]‘원한다면 당신의 이름도 뒤에 덧붙이도록 하겠습니다.’
[저, 저는 그런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정말로? 정말로 원하지 않는 겁니까?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빛께서는 스스로를 속이는 거짓말쟁이는 천국에 갈 수도 구원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정말로 그렇습니까? 크리스티나, 당신의 구원은 하멜과 둘이서 불꽃놀이 하나 보는 것으로 충분할 만큼 자그마합니까? 저는 아닙니다. 저는 욕심이 많으니까, 하멜과 당신이 하지 못한 많은 역사를 만들고 나서야 구원받았다 생각할 것입니다.’
[시스터! 처음과는 말씀이 다르십니다.]크리스티나가 비명을 질렀지만, 아니스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사랑하는’이란 말도 해야 해?”
“당신이 저를 싫어하고 미워한다면 빼도록 하십시오.”
“나도 아니스와 하멜을 사랑한다.”
“한 번만 더 그 주둥이를 멋대로 열었다가는……!”
“아니스 너, 솔직히 내 걱정보다는 네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망신스러운 일을 해서 더 화가 난 거지? 그렇지?”
“알면서 뭘 묻는 겁니까? 하멜, 제 나이가 햇수로만 따지면 300살이 넘습니다. 그런데! 당신 때문에 까마득한 후손뻘 여럿 앞에서 날개를 펼치고, 몸을 떨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계시를 받았다고 부르짖었습니다. 당신은 가비드와 투닥거리느라 보지 못했겠지만, 제가 그러는 동안 유라스의 성직자들ㅡ 저를! 성인이라 추앙하며 제 모든 행적과 내뱉었던 말을 성경으로 배웠던 꼬마 성직자들이, 저를 어떤 눈으로 보았는지 아시기나 합니까?”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니스는 기도를 맺고 있던 양손으로 얼굴을 뒤덮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유진도 반발하지 않고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니, 아니스에게 너무했다 싶기는 했다. 미리 언질조차 주지 않고 가비드를 공격한 것은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앞으로는 이런 무모한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앞으로는 사랑…… 사랑하는 아니스를 곤란하게 만들지 않겠습니다.”
“사랑이라는 말을 굳이 두 번 말한 것은 저를 2배 사랑한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제 안에서 듣고 있는 크리스티나도 사랑한다는 것입니까?”
“말을 더듬은 거야…….”
“하멜, 당신이 진심으로 뉘우치는 것 같으니, 저도 사랑, 사랑하는 하멜을 용서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스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플레일을 내려놓았다.
“유진 님은 지조 없는 새끼예요.”
메르가 망토 사이로 고개를 내밀며 중얼거렸다. 마치 죽어버린 것처럼 칙칙한 눈동자에 유진은 무거운 죄책감을 느꼈다.
“저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어요. 언젠가 세냐 님이 봉인에서 풀려나신다면, 저는 세냐 님에게 여태까지 보고 들은 모든 것과 제가 겪은 수모를 하나도 빠짐없이 들려드릴 거예요.”
“마음대로 하십시오. 세냐도 양심이 있다면 저를 비난할 수 없을 겁니다.”
“어째서 비난하지 못한다는 거죠?”
“잘 생각해 보십시오. 당연하지 않습니까? 세냐는 가슴에 구멍이 뚫리기는 해도 죽지 않았습니다. 봉인되었다뿐이지 살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어떻습니까? 제 뼈는 이미 수백 년 전에 산산조각 나 성유물로 박제되었고, 제 피와 살은 후대 성녀들을 위한 거름이 되었습니다…….”
아니스는 울적한 표정을 하며 제 끔찍한 과거에 대해 늘어놓았다. 그러자 메르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입술만 뻐끔거렸다.
“비록 지금은 저와 여러 적성이 맞는 크리스티나에게 깃들어 있습니다만, 제 존재가 성불하지 못한 망령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저는 바람 앞의 촛불과 같은 존재라 언제 갑자기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불완전합니다. 또, 만약 크리스티나가 제 존재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거부하기라도 한다면…….”
[시스터, 시스터! 저는 결코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디 슬픈 이야기는 하지 말아주십시오.]아니스는 크리스티나의 비명이 즐거웠다.
“저는…… 수백 년 전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바라던 그 무엇도 이루지 못하고 허무히 사라져 버리겠지요. 설령 그럴지라도 저는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를 도둑고양이 취급하는 메르 메르데인 당신도, 제 행적을 비난할 세냐도, 저를 붙잡지 못한 하멜도……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흙은 흙으로, 먼지는 먼지로. 그 말대로, 저는 흙과 먼지로 돌아가 하늘에서 제가 사랑했던 이들의 행복과 안식과 성원을 기도할 것입니다.”
아니스는 거기까지 말하고서 의도적으로 말을 한 번 멈추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제 존재가 망령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저는 당신들을 사랑합니다.”
모론이 굵은 눈물방울을 쏟았다. 메르도 코를 훌쩍거렸다. 유진은 슬픈 표정을 지으며 아니스에게 다가오더니, 양팔을 벌려 아니스의 몸을 끌어안았다. 망토 안의 메르도 몸을 삐죽 내밀고서 아니스에게 매달렸다.
“제가 잘못했어요. 아니스 님은 심술궂지만, 그래도 좋은 분이셔요. 저도 아니스 님을 사랑…… 사랑해요.”
“나도 아니스를 사랑한다.”
모론도 울면서 그 거대한 팔로 아니스와 유진과 메르를 한 번에 끌어안았다.
그 여러 포옹 속에서 아니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 *
다음 날.
유진은 라이언하트에게 배정된 저택의 방에서 눈을 떴다.
아니스, 아니, 크리스티나와 함께한 모론과의 대화는 늦은 새벽까지 이어졌지만, 의심은 받지 않았다. 300년 전에 마왕과 맞섰던 대영웅, 용감한 모론이 지금 시대의 용사와 성녀에게 조언을 해주겠다는데 누가 의심하겠는가?
거기에 모론은 잠도 자지 않고, 나이트마치에 참가한 라이언하트 전원을 아침 일찍부터 초대했다. 친구, 위대한 베르무트의 후손들에게도 조언과 덕담을 해주기 위해서였다.
‘그 등신이 괜한 말은 하지 않겠지…….’
새벽부터 모론에게 당부는 해두었다. 유진이 하멜의 환생이라는 사실은 알려져 있지 않으니, 부디부디 말조심을 하라고 말이다.
어젯밤 떠난 가비드 린드먼과 검은안개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모론은 내심 그를 경계하고 있었다. 성문 앞에서 말한 것처럼, 가비드가 이 넓은 설원 어딘가에서 흉계를 꾸미지 않을까 진지하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유진은 가비드가 그런 짓은 벌이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자부심과 충성심으로 가득 찬 놈이다. 치욕 때문에 물러갔다고는 해도, 그를 앙갚음하고자 흉계를 꾸밀 리는 없었다. 만약 가비드가 검은 안개를 몰고서 요새를 덮치기라도 한다면? 유진이 생각하기에 그건 애초에 경계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얼씨구.”
유진은 성벽에 산책을 나왔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지금 유진의 곁에는 크리스티나도 없었다. 일단 크리스티나의 국적은 신성제국이고, 그녀의 직위는 빛의 주교이며, 모든 주교는 유라스의 광명사제단 소속이다. 그렇다 보니 지금 크리스티나는 광명사제단 쪽에 가 있었다.
요새의 밖에는 나름대로 각을 잡고 훈련이 진행 중이다. 아롯의 마법병단과 나하마의 던전 계파 마법사들의 합작. 소환마법으로 불러들인 몬스터의 군세가 기사단과 격돌 중이다.
지금 몬스터를 상대 중인 것은 항마연합의 기사들이다. 그리고 그 뒤쪽에는 연합 소속 치유술사들과 유라스의 성직자들이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 중이었다.
나름 열심히 하고 있기는 한데, 유진이 보기에는 그리 눈에 차지 않았다. 애당초 마물과 몬스터는 규격부터가 다르다. 그리고 마족이 내뿜는 마기에 홀린 몬스터와의 일반 몬스터의 흉포함은 비교가 되지 않으니, 저 전투 훈련은 보기에만 그럴듯할 뿐이다.
어쩔 수 없다고는 생각했다. 아만 루하르가 말했던 것처럼, 이 나이트마치는 대륙 대부분의 국가의 대표가 모인 것에 의의를 두고 있다. 특히 어제는 유폐의 마왕이 직접 왔다 가기도 했으니, 지금 요새의 성에는 왕들이 골머리를 싸매며 앞으로의 정세를 떠들고 있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기사들을 방치해 둘 수도 없으니, 일단은 훈련을 시킨다. 시답잖은 훈련이지만 다른 기사단과 전력을 비교하며 우월감은 가질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기사들의 헤드헌팅도 이뤄질 것이고, 모인 용병단과 전속계약을 맺거나 기사작위를 내리기도 할 것이다.
“재미없는 구경을 하는군.”
기척은 숨지 않고 다가왔다. 유진이 별 반응을 하지 않으니, 목소리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가만히 보고 있으니 재미가 없지는 않습니다.”
유진은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보았다.
멀대처럼 키가 큰 사내가 유진을 빤히 보고 있었다.
시무인 격랑 기사단 단장. 십이걸의 퍼스트.
오르투스 하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