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lasted Reincarnated Life RAW novel - Chapter 391
〈 빌어먹을 환생 392화 〉 개선
이 자리에서 무엇을 요구하고 받아낼 수 있을까.
돈? 이미 많아도 너무 많다. 으레 정말로 진귀하고 필요한 것은 돈을 아무리 많이 퍼부어도 가질 수 없는 법이라, 이제는 돈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보물도 마찬가지다. 시중에 풀린 드래곤하트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시무인의 국보 엑시드는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도 없는 물건이다. 그마저도 유진이 사용하기 위해 빌린 것도 아니었다. 엑시드를 쓰느니 라이미르아의 지원을 받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받아두면 누군가는 쓰겠지.’
당장 라이언하트에는 유진보다 엑시드를 잘 써먹을 사람들이 많았다. 토벌 중에서도 카르멘은 엑시드로 화력이 증폭되어 마왕의 정면에 설 수 있었고, 길레이드나 기온도 엑시드의 덕을 잘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윗세대에 비해 아직 마나가 넉넉지 않은 시안과 시엘이 써도 괜찮을 것이다.
더 이상 유진은 물질적으로 필요한 것이 없었다. 무기야 이미 잔뜩 가지고 있고, 마나에 대한 지원도 마찬가지다.
당장 유진은 마나 쪽으로는 세 종류의 지원을 받고 있다. 아카샤로 마나를 증폭하고, 메르로 연산을 가속하며, 라이미르아에게서는 드래곤하트와 용언의 지원을 받고 있다. 거기에 자체적으로 프로미넌스까지 펼쳐 버리면, 정신이 버티는 한 몇 날 며칠이고 전력으로 싸울 수 있다.
그렇기에 물질적인 것 외에 다른 것이 필요하다.
“음…….”
황제는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낮은 신음을 흘렸다.
용사의…… 개인의 요구를 왕권을 앞세워 들어달라. 저 말은 일종의 초법(超法) 권한을 달라는 말과 진배없었다.
‘과해.’
황제는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제국의 황제조차도 법 앞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망나니 폭군이 아닌 이상에야 군주라도 제 나라의 법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려고 든다면, 왕권을 앞세워 법과 절차를 무시할 수는 있다. 그것이 바로 황명이고 왕명이다.
‘아무리 용사라고는 하지만…… 개인에게 그만한 권한을 약속하는 것은…….’
물론 유진 라이언하트를 일개 개인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만한 특권은 과하지 않은가? 황제는 표정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유진 공. 만약 그대가 마왕이나, 그에 준하는 대적과 맞서기 위해 도움을 청해온다면, 짐은 다른 무엇보다 그대의 부탁을 우선할 것이오.”
설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멱살을 쥐고 따귀나 주먹질을 하지는 않겠지. 황제는 유진의 표정이 일그러지지 않을까 걱정하며 말을 이었다.
“물론…… 꼭 군을 동원해야 하는 부탁이 아닐지라도, 그대의 부탁이 적절하고 필요한 것이라면…… 짐은 그 부탁을 들어줄 용의가 있소. 하지만 ‘부탁’을 생략하는 것은…….”
“유라스는 상관없나이다.”
황제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듣고 있던 교황이 대뜸 끼어 들어왔다.
“빛의 용사시여. 당신께서는 지상에 내린 빛, 신인(神人)이십니다. 당신께서 명하신다면 이 미천한 종복은 감사와 기쁨으로 따르겠나이다.”
저 늙은이가 정말로 노망이 났나? 저런 말을 단둘이서도 아니고 이 자리에서 선언한다고? 황제는 두 눈을 부릅뜨고 교황을 쳐다보았다.
‘이러면 네가 곤란하겠지, 어린 것아.’
교황은 황제를 힐긋 쳐다보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빛과 용사에 대한 신앙은 진심이다. 유진이 바란다면 유라스 전체를 바치겠다는 생각도 진심이다. 하지만, 유라스만이 유진에게 휘둘리는 것보다는ㅡ 유라스와 비슷한 국력을 가진 키옐 제국도 함께 휘둘렸으면 좋겠다.
“필요하다면, 루하르도 약속하겠소.”
아만도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약속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만은 유진의 요구를 지극히 간단하게 받아들였다. 유진이 요구하는 것이 군주 이상의 초법 권한인 것은 맞다. 하지만 막말로 유진이 유라스에서 죄를 저지르고 그를 무마코자 저 권한을 행사할까? 아니면 군권을 장악해 반란을 도모할까?
“벗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이유가 없지.”
이바타도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다인돌프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롯도 그리하겠습니다.”
오가는 이야기에 황제의 얼굴이 구겨졌다.
유라스는 법보다 신앙을 우선하는 미치광이들의 제국이다. 루하르도 시조인 용왕이 건재하다는 것을 대륙에 증명하였고, 유진이 아무리 용사라 해도 ‘용감한 모론’을 함부로 대할 수 있을 리가 없잖은가?
‘그런데 너희 둘은 뭐야?’
뻔뻔하기 짝이 없는 아롯! 저 나라는 입헌군주제다. 왕가는 장식과 다름없고, 국정은 대부분이 의회가 굴리고 있단 말이다. 그러한 왕가에서 왕권이라 할 것이라고는 아브람의 정원에 무슨 나무나 꽃을 심을지를 결정하는 정도가 고작일 것이다.
그리고…… 그리고 대수림에서 온 저 원주민. 저 숲속 깡촌에 뭔 놈의 법이 있겠는가? 왕도 아니고 족장이라는 놈이 왕권은 왜 운운하나? 저 야만인은 자기가 가진 권한이 제국 황제의 권한과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시무인도 약속하겠습니다.”
부들부들 떨고 있던 오세리스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는 저렇게 내뱉은 뒤에, 황제가 그랬듯이 심술궂은 표정을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냥 해주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황제는 똥 씹은 표정을 하고서 오세리스를 노려보았다.
“용사인 유진 공이 왕권을 이용해 부당한 짓을 저지를 것이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이렇게 된 이상 혼자만 손해를 볼 수는 없다. 오세리스의 생각도 교황과 비슷했다. 본래라면 황제의 눈치를 보는 입장이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용사에게 협력하기로 약속한다면, 국가 간에 동맹이 형성되는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상식적이고……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요구라면……!”
“그건 제가 잘 판단하겠습니다.”
새끼, 결국 굽힐 거면서 왜 빳빳이 서려 드는 거야?
‘그러다 부러지는 거야 새끼야.’
유진은 망토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 움직였다. 그러자 망토 안에 있던 메르와 라이미르아가 각각 상자 하나씩을 들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저걸 보고 대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나? 의자에 걸쳐져 있던 망토에서, 갑자기 2명의 소녀가 걸어 나온 것이다.
그나마 세냐와 빼닮은 메르에 대해서는 대해서는 모두가 정체를 알았지만, 머리에 사슴의 뿔을 달고 이마 한복판에 보석을 박은 라이미르아는 다들 눈을 끔벅거리며 쳐다보았다.
“열어보십시오.”
메르와 라이미르아가 들고나온 상자는 군주들 앞에 놓였다. 교황이 가장 먼저 상자를 열었다.
“이건…….”
상자 안에는 검은 사자의 휘장이 3개 들어 있었다.
“서로 편한 것이 좋지 않습니까? 국정에 바쁘신 분들에게 제가 매번 부탁을 올리는 것도 죄스러운 일이니, 그 휘장에 약속해 주시는 것이 간편할 듯합니다.”
역시. ‘부탁’ 자체를 생략해 달라는 것인가.
황제는 여전히 똥 씹은 얼굴을 하고서 상자를 열었다. 총 6개의 휘장. 저것을 왕패(王牌)로 지정해 달라는, 발칙하기 짝이 없는 요구…….
황제는 한숨을 푹 내쉬며 휘장을 잡았다.
“알겠네.”
국가의 장들이 모였다길래, 곤도르를 시켜 제작한 휘장이다. 분위기에 따라 욕심을 부려도 될 때 써먹을까 했는데, 준비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는 어디 나갈 때 신경을 덜 써도 되겠어.’
당장 키옐에서 워프게이트를 이용할 때, 저 휘장을 보인다면 워프게이트 이용기록을 말살해 버릴 수도 있다. 정보길드가 아닌 제국 정보조직을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고, 필요할 때에는 타국의 밀정을 부릴 수도 있을 것이다.
‘정보길드만으로 헬무드의 상황을 살피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놈들은 근본적으로 장사꾼이다. 의리나 그런 것보다는 정보의 값어치를 우선한다. 그런 만큼 고가의 정보는 질이 높다만, 돈을 우선하는 놈들이다 보니 목숨을 담보로 삼아야 할 위험한 영역은 꺼려 한다.
하지만 국가의 정보조직은 돈이 아니라 충성심, 애국심 같은 신념으로 움직인다. 유진이 탐을 내는 것은, 죽음을 불사한 밀정들이 보내는 정보들이었다.
“세금 감면은 안 됩니까?”
유진은 제 몫의 휘장을 챙기며 황제를 슬쩍 쳐다보았다.
“라이언하트가 세금을 참 많이 내고 있는데…….”
“뿌득…….”
황제의 꽉 다문 입술 사이에서 어금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길레이드는 헛기침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납부는 제국 시민이라면 당연히 따라야 할 의무란다.”
“그래도 기왕이면 적게 내는 게 더 좋지 않나……. 아예 안 내면 더 좋고요.”
“뿌드득…….”
차라리 황위를 달라 하지 그러냐? 황제는 목젖까지 치솟은 외침을 간신히 삼켰다. 욱해서 내뱉은 저 말로 돌아올 대답이 두려웠다.
“……논의해 보겠네.”
황제는 최대한 확답을 피했고, 유진도 더 요구하지는 않았다.
* * *
회담이 끝나고 왕궁 밖에 나오니, 그새 넓은 정원이 새롭게 꾸며져 있었다.
어디서 옮겨 온 것인지 모를 커다랗고 화려한 분수대가 금빛으로 반짝이는 물을 내뿜었다. 그 빛나는 물을 본 순간,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교황을 돌아보았다.
“아닙니다.”
교황은 식겁하고 대답했다. 유진은 높이 치솟았다 아래로 떨어져 고이는 샘을 보고서 중얼거렸다.
“빛의 샘.”
“…….”
“어우…… 깜짝이야.”
분수대 뒤에는 플래티넘 라이온이 위용을 과시했다. 궁정 요리사들은 설치된 테이블에 바쁘게 음식과 음료를 날랐다. 촤라라락! 멜키스가 발을 구를 때마다 정원의 잔디와 흙이 매끈한 대리석으로 바뀌었다.
“나중에 원래대로 돌려줄 거요.”
덜덜 떠는 오세리스를 향해 다인돌프가 위로를 건넸다.
직접 나선 것은 멜키스뿐만이 아니었다. 로베리안과 히리두스도 연신 마법을 써가며 왕궁정원의 개조에 동참했다.
왕궁 담벽이 쭉 치솟더니, 높은 하늘까지 덮는 천장이 되었다. 천장이 벽에서 유리로 바뀌고, 마법사들은 유리창에 비치는 하늘을 도화지 삼아 알록달록한 별들을 그려 넣었다. 곳곳에 켜진 마법의 촛불은 천천히 색을 바꾸어가며 분위기를 조성했고, 대리석 바닥에는 폭신한 융단이 깔렸다.
그렇게 정원이 연회장으로 바뀌어가는 동안, 토벌대의 주역들은 연회에 걸맞은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유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지금 입고 있는 제복으로도 충분하지 않느냐 저항했지만,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는 그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항상 똑같은 제복만 입으시는데, 이럴 때에는 다른 옷을 입으시지요.”
세냐는 오늘 무도회에서 유진과의 관계를 진전시키고 싶었다. 입맞춤을 넘어서는 역사를 새로 쓸 수 있지도 않을까 생각했다.
그녀의 기준에서도 과하다 싶을 만큼 매혹적인 드레스. 등에는 옷감이 거의 없다시피 한…….
‘…….’
그만두었다. 이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 드레스를 입는다는 것. 옷감에 덮이지 않은 등짝을 드러낸다는 것은 ‘현명한 세냐’에게는 너무나도 민망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런 드레스는 다른 사람이 아닌 유진에게만 보여주고 싶었다.
시엘은 드레스의 선택조차 할 수가 없었다. 연회가 준비되는 내내, 애니실라가 시엘의 눈가를 어루만지며 울음을 참았기 때문이다. 시엘은 아무렇지도 않다며 어머니를 달랬지만, 뒤이어 찾아온 길레이드와 기온, 시안 등에게도 똑같은 걱정을 들어야만 했다.
위로와 대화가 끝날 즈음. 시안은 아만에게 붙들렸다.
“아일라를 데려올 것을 그랬군.”
“아…… 예…… 하하하…….”
“아일라가 자네 얘기를 자주 해. 편지를 주고받는다지?”
“예…… 예에. 공주님께서 꼭 답장을 해달라 하시기에…….”
“공주님이라 부를 필요는 없지 않나? 그냥 편하게 부르게, 둘만의 편지에서는 아일라를 뭐라고 부르고 있나?”
“예……? 그냥 공주님이라고…….”
“그럴 필요 없다니까. 내 딸은 말일세, 평소에 공주님이라고 자주 불리는 탓에 공주님이란 호칭에 아무런 특별함도 느끼지 않아. 내 특별히 알려주지. 아일라는…….”
아만은 시안에게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아기사슴이라고 불러주면 아주 기뻐한다네.”
“…….”
“토끼라 불러주는 것도 즐거워하지.”
시안은 꿀꺽 침을 삼켰다.
루하르의 아일라 공주와는 저번에 만남을 가졌다. 확실히…… 아일라 공주는 ‘아기사슴’이나 ‘토끼’라는 부름이 어울릴 만큼,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아름답고 귀여운 소녀였다. 저 험상궂은 야수왕의 딸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말이다.
하지만 컸다.
당시에 11살이었는데, 도저히 그 나이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컸다. 그때 보았을 적만 해도 시안과 머리 하나 정도의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시안이 기억하기에, 11살 아일라 공주의 성장상태는 17살 적의 시엘과 대등하거나 그 이상이었다.
‘거기서 더 자라 버리면…….’
시안은 식은땀을 흘리며 예비 장인 아만을 힐긋 쳐다보았다.
시안이 보기에 아만은 거인처럼 보였고, 자연스럽게 시안의 머릿속에서는 거인만큼 자란 아일라 공주가 까마득한 높이에서 시선을 내리까는 모습이 상상되었다.
“식은 언제가 좋겠나?”
“네…… 네?”
“내 딸은 자네를 아주 마음에 들어 한다니까? 자네도 아일라가 마음에 들지 않나?”
“하…… 하지만 공주님의 나이가 나이인지라…….”
“그렇다면 식은 나중으로 미루고 함께 사는 것부터 먼저 하는 것은 어떤가?”
“예……?”
“아, 걱정하지 말게. 자네보고 루하르에 와서 지내라 할 생각은 없으니. 차기 가주인 자네를 데릴사위로 들이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니, 아일라를 라이언하트에 보내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나?”
시안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 그건 제가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아일라 공주님의 의사를 존중…….”
“으하하, 사위, 내가 끔찍이 아끼는 딸아이의 의견을 묵살하는 몹쓸 아비로 보이는가? 아일라가 하도 시안 오빠, 시안 오빠를 입에 달고 살며 보고 싶다 칭얼대기에 하는 말일세!”
대체 아일라 공주는 나의 무엇이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시안은 도저히 그 이유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연회의 준비가 끝날 때까지, 시안은 아만의 어깨동무를 감당하며 아일라 공주에 대한 자랑을 들어야만 했다.
세냐는 망측한 드레스를 얌전히 넣어두고 우아한 드레스를 선택했지만, 등짝뿐만 아니라 가슴골까지 푹 파인 멜키스의 드레스를 보고서 후회와 안도가 섞인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시엘은 백장미라는 별명에 어울리는 새하얀 드레스를 입었고, 유진은 성녀들의 강요로 답답한 턱시도를 입었다. 정작 유진에게 환복을 강요한 성녀들은 사제복을 벗지 않았다.
“왜 너는 옷 안 갈아입어?”
“하멜, 제가 300년 전의 연회에서 다른 옷을 입은 적이 있습니까?”
유진은 미리 준비했을 것이 분명한 변명을 돌파할 수 없었다.
연회장이 완성되고, 옷도 갈아입었고, 분위기도 흥이 올랐지만.
연회를 곧장 시작할 수는 없었다.
“서프라이즈!”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불청객이 난입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