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Daughter Is the Final Boss RAW novel - Chapter (130)
130화
어두운 밤, 상하이, 상해항.
드높은 크레인 끝에 선 에르제베트는 아래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모자를 잡아 누른 채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거대한 선박 한 척이 항구로 진입하고 있었다.
입항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저게 다 몇 명이람.’
에르제베트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 사이에 사람이 아닌 것이 여럿 섞여 있다는 것을.
고용된 듯한 마법사나 사냥꾼은 물론, 용병으로 보이는 인물까지 포진했다.
오롯이 에르제베트 한 명을 의식하여, 수백 명에 달하는 사람을 끌어들인 것이다.
‘파편이 한곳으로 모이고 있다.’
에르제베트는 선박을 유심히 살폈다.
저 안의 어딘가에 파편이 섞여 있었다.
아마도 눈을 피해 밀수입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근처 항구에서 저렇게 파편을 실은 선박이 목격된 것이 수차례였다.
‘의식을 시작할 셈이야.’
파편을 모아, 의식을 치른다.
그렇게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예정보다 일의 진행이 한참 빠르다는 것이다.
분명 에르제베트는 파편을 다수 탈취, 파괴했을 텐데.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그래도 충분한 양의 파편을 모은 게 아닐 테니까.’
파편이 더 부서지면 의식을 치르는 데 지장이 생길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어떻게든 괴물을 부활시키고, 그 뒤에 회복 수단을 찾으려는 생각 같았다.
오랜 시간 공들인 탑이 무너지는 건 저들에게 최악의 시나리오니까.
‘기회.’
말인즉슨, 파편을 조금만 더 부수면 아예 부활을 저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운이 좋다면 한데 모인 파편을 전부 부술 수도 있었다.
조금만 무리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때였다.
“놀랍군.”
뒤에서 들려온 낯선 목소리.
에르제베트는 반사적으로 뒤를 도는 동시에, 팔을 휘둘렀다.
쭉 뻗은 손에서, 눈에 보일 정도로 압축된 푸른 마나가 일렁거렸다.
마법.
목소리가 들린 곳에서 공기가 폭발했다.
쩌엉!
목소리의 주인은 가까스로 그것을 막아 냈다.
그 과정에서 비록 뒤로 밀려나긴 했으나.
아슬아슬하게 크레인 밖으로 떨어지진 않았다.
이윽고 낮게 깔린 구름이 이동하며, 달빛이 드리웠다.
에르제베트는 그제야 상대를 똑바로 볼 수 있었다.
“너.”
본디 순백색이었을 갑옷은 빛을 발해 회색으로 바뀌었다.
전신을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그 안에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닌 괴물.
방금의 마법을 막고 부러진 검이 얼핏 보였다.
“오랜만이네. 설리번. 아직도 기사 행세하고 있는 거야?”
“반대로 묻겠다. 마녀.”
갑옷을 입은 괴물, 설리번은 에르제베트를 똑바로 노려봤다.
눈을 덮은 가리개 너머로, 증오에 들어찬 눈동자가 보였다.
“어찌 살아 있는 거냐?”
“살아 있으면 안 돼?”
“너는 분명 죽었을 터.”
짙은 증오에 가려져서 그렇지, 설리번의 눈동자 너머에는 옅은 공포가 자리하고 있었다.
에르제베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일이 설명해 줘야 해?”
“아니. 필요 없다.”
설리번은 자세를 낮추고 검을 들었다.
까마득한 크레인 위임에도 흔들림 없는 모습.
에르제베트는 그대로 서서 설리번과 마주했다.
“어떻든 벨 생각인 건 변함이 없으니.”
“혼자서? 힘들 텐데.”
“이야기는 전해 들었다.”
설리번은 검 끝을 에르제베트에게 겨눴다.
“상당히 약해진 것 같더군.”
“아무리 약해져도, 너 하나 못 잡을 정돌까.”
“방금 마법에서 느꼈다. 사냥은 나 홀로 충분하다.”
“괴물이 사람 잡는 걸 언제부터 사냥이라고 했을까?”
“닥쳐라. 괴물.”
에르제베트와 설리번의 시선이 교차했다.
둘은 서로를 가만히 노려보고 있었다.
먼저 시선을 피한 건 에르제베트 쪽이었다.
“됐어. 나 힘들거든.”
“그럼, 내가 간다.”
설리번이 자세를 낮췄다.
크레인을 밟고, 똑바로 뛰어온다.
상당히 빠른 속도.
에르제베트는 가볍게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비겁한!”
설리번이 급정거해야 했다.
에르제베트의 뒤에는 분명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에르제베트는 유유히 검이 닿지 않는 거리로 물러났다.
허공을 밟고 선 모양새.
“그렇게 싸우고 싶어?”
“네년의 목을 자르면, 모든 게 해결될 테니.”
“너 자꾸 까불면, 진짜 죽는다?”
설리번은 몸을 움찔 떨었다.
갑옷의 틈으로 매섭게 몸을 찔러 오는 적의.
에르제베트는 정말 설리번을 죽일 수 있었다.
말 그대로 힘을 빼기 싫어서 살려 두는 것뿐이었다.
“참. 그 돌팔이한테 전해.”
“돌팔이?”
“리치 있잖아.”
“무엇을?”
에르제베트는 싱긋 웃으며 자신의 하얀 목을 톡톡 두드렸다.
“목 간수 잘하고 있으라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에르제베트의 신형은 사라졌다.
설리번은 허망한 듯 검을 내렸다.
* * *
불카누스의 대표, 백상명이 괴물이었다는 사실은 공표되지 않았다.
정부와 사냥꾼협회 측에서 큰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고 하고 정보를 차단한 것이었다.
하긴 나였어도 옆에 있는 사람이 괴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불안할 것이다.
“괜찮으십니까?”
“그럭저럭. 나쁘지 않다네.”
병원, 1인실.
입원한 강철이는 오른팔을 고정한 채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강철이는 굳이 내가 병원을 찾은 것을 기꺼워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나 때문에 일에 휘말린 거야.’
플리른으로 무기를 제작해 달라고 주문한 건 나였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팬텀에게 붙잡힌 것도 결국 내가 자초한 일이었다.
미래를 바꿨기에 일어난 참사.
회귀 전에, 강철이의 두 팔은 멀쩡했다.
“왜 그리 침통한 얼굴인가. 누구 죽었나?”
“그건 아닙니다만.”
“인상 좀 펴게나. 안 그래도 아들놈이 야단법석을 떨어 대서 죽겠어.”
“아버지!”
문이 쾅 열렸다.
식겁한 강철이가 옆을 돌아봤다.
“문 좀 살살 열어라!”
“어디 안 아파요?”
“니가 문을 쾅쾅 열어 대니 심장이 아프다. 이놈아.”
“아, 알았어요.”
강대호는 금방 쭈그러들었다.
밖에서 아무리 호쾌하고 든든한 형이어도, 집에선 그냥 아들이구나 싶었다.
강철이는 강대호와 내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대호가 그렇게 말하던 동생이 자네일 줄이야.”
“대호 형이 평소에 제 얘기를 하던가요?”
“했지. 난생처음 졌는데, 분해 죽겠다더군.”
“악!”
강대호는 몸서리치며 도망쳤다.
대련에서 질 때마다 의연한 척했는데.
내심 분했던 모양이다.
강철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오른팔은 어떻다고 합니까?”
“섬세한 작업은 무리지만 재활을 병행하면 생활에는 지장이 없다던데.”
“……죄송합니다.”
“자네가 왜 죄송한가?”
“제가 플리른으로 무기 제작을 의뢰해서 이렇게 된 거 아닙니까.”
“어허.”
강철이는 인상을 찡그렸다.
진심으로 기분이 상했다는 얼굴이었다.
“그런 소리 말게. 자네 탓이 아니니.”
“……알겠습니다.”
“그 괴물은 내가 왼손잡이라는 걸 몰라 다행이야.”
강철이는 멀쩡한 왼손을 쥐락펴락했다.
망치를 잡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마음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좀 늦어지긴 하겠지만, 자네가 주문한 건 만들 수 있을 걸세.”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닙니까?”
“뭘. 재활의 일환이지. 기껏 소재도 찾았는데 말이야.”
“재활을 대장간에서 하는 걸 알면, 대호 형이 질색할 겁니다.”
“허허! 그놈은 나한테 그런 말 못 해. 이으라는 가업은 안 잇고 복싱하겠다고 도망친 놈이 무슨.”
몰랐던 이야기다.
조금 궁금하긴 했다.
“아무튼 조만간 플리른의 물량이 풀릴 걸세.”
“설마 독점하고 있을 줄은 몰랐지만 말입니다.”
“그렇지. 무슨 연유로 그것을 쌓아 두고 있었는지 원.”
강철이는 고민하는 듯 보였다.
대장장이로서 플리른의 사용처가 달리 어디 있을까 고민하는 것 같았다.
괴물을 부활시키는 게 목적이라고 알릴 수도 없으니, 일단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나 확실한 건, 두 번째 불행이 머지않아 찾아올 거라는 것이었다.
* * *
미국 워싱턴 D.C.에는 명소가 하나 있다.
첫 번째 균열이라고도 불리는, 붕괴의 시작점.
명소라고 불리기에는 그다지 좋지 못한 사건이 일어난 곳이었다.
그래도 많은 학자가 다녀갔고, 관광 목적으로 찾는 사냥꾼이나 일반인도 많았다.
특히, 관광객 중에는 한국인도 다수 섞여 있었다.
“여기가 바로, 첫 번째 균열 생성 지점입니다.”
“오오.”
붕괴의 시작점 근처는 부산스러웠다.
새로운 건물을 시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멀쩡한 건물들도 다소 최근에 지어진 것 같았다.
관광객들은 가이드의 안내를 따라 밑을 내려다봤다.
그곳에 있는 것은.
“이거 설마, 발자국?”
“네. 맞습니다. 이게 처음으로 균열을 만들었다는 괴물의 발자국입니다.”
“와. 무슨 크기가.”
거대한 발자국이었다.
인간의 것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공룡, 아니 그보다 수십수백 배는 거대한 것이 땅을 디뎠던 흔적이었다.
경이로운 광경을 배경으로, 관광객들은 기념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가이드는 아무도 듣지 않는 설명을 이어 나갔다.
“여기서 누가 홀로 괴물과 싸웠는지 아시나요?”
“검성이요!”
“맞아요. 똑똑한 친구네요.”
유일하게 가이드의 말을 듣고 있는 건 한 어린아이뿐이었다.
가이드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패키지여행이라는 게 항상 이렇다.
귀담아듣는 사람은 없지만, 설명을 하는 게 일.
그래도 오늘은 한 명이라도 청자가 있는 게 어딘가.
“검성 님은 여기서 혼자 균열에서 나온 괴물과 맞서 싸웠다고 해요.”
“멋지다!”
“그렇죠. 멋지죠. 혹시 꼬마 친구는 검성 님과 싸운 괴물 이름도 알까요?”
“어, 몰라요!”
“미국에서는 게이트 크래셔(Gate Crasher)라고 불리는 괴물이에요. 우리 말로 번역하면 불청객, 무단 입장자 같은 뜻이랍니다.”
“와!”
아이는 괴물 이야기에도 눈을 빛냈다.
괴물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었다.
가이드는 사람들을 통솔하고 사람이 몰려 있는 조각상 쪽으로 이동했다.
검 한 자루를 들고, 거대한 괴물과 마주하고 있는 노인의 조각상이었다.
“여기 있는 이 괴물이 아자누스라는 괴물입니다.”
“아까는 게이트 크래셔라고 했잖아요!”
“흔히 그렇게 불리는데, 정식 명칭은 이쪽이 맞아요. 이름이 보고되기 전에 지은 이름이 게이트 크래셔랍니다.”
가이드는 아이에게 아자누스와 검성의 싸움을 간략하게 이야기해 줬다.
사실 제대로 아는 바는 없고, 대부분 여행사에서 지어낸 것이었다.
아이는 그것을 진짜라고 믿는지 가이드의 말을 집중해서 들었다.
한참 이야기를 해 주고 있는데, 가이드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어? 사냥꾼인가?’
마법사처럼 로브를 푹 눌러쓴 누군가였다.
그는 다른 사람과 전화를 하는 듯 보였다.
“파편은 무사히 도착했나?”
-그래. 의식만 치르면 된다.
“마녀는? 상해항에서 발견됐다면서.”
-그건 설리번이 맡는다더군. 너는 네 일을 해라.
“검성이 올까?”
-백상명을 통해서 유인하는 게 최선이었겠지만, 지금은 그것밖에 방법이 없지.
“알았다. 아자누스만큼은 할 수 없을 거야.”
-그런 게 됐다면, 애초에 이 고생도 안 했을 테니.
가이드는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5개국어를 할 수 있었지만, 난생처음 듣는 언어였기 때문이다.
“어, 어! 거기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그는 경비들의 제지를 무시하고, 선을 넘어 첫 번째 균열이 발생한 지점으로 걸어갔다.
돌발행동에 관광객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주변을 살핀 그가 중얼거렸다.
“괜히 첫 번째 균열이 이곳에 생긴 게 아니었군. 공간 자체가 불안정해.”
“이보세요! 거기는 출입 금지라니까요!”
그를 끌어내기 위해 경비가 다가가던 순간.
돌연 그는 걸음을 멈췄다.
로브 너머의 무언가와 눈이 마주친 것이었다.
그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괴, 괴물?”
“쉿.”
그는 조용히 하라는 듯, 입술에 검지를 올렸다.
경비에게서 눈을 돌리고, 땅을 짚었다.
이윽고 사람들은 경악했다.
위이이잉-!
돌연 울려 퍼지는 사이렌 소리.
균열의 경고였다.
그의 머리 위로, 수십 개의 균열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