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74
1074회. 저도 남작님처럼 높이 도약할 수 있을까요?
같은 북부의 왕국이라 해도 라미노프와 에스카토스 왕가의 색깔은 많이 달랐다. 라미노프 왕가가 북부 토종이라면, 에스카토스 왕가는 중부 출신이었다.
한대기후(寒帶氣候)인 북부의 귀족들이 대체로 다혈질에 직선적이라면, 온화한 기후의 중부 귀족들은 그보다는 조금 더 유했다.
북부인 특유의 거친 기질에, 개인 성격마저도 다혈질인 불꽃 기사단 단장 몰라트 미르 자작은 막심 체호프 남작에게 욕부터 퍼부었다.
‘무슨 일이지?’
막심 체호프 남작은 정신이 혼미했지만 몸에 밴 동작으로 환복을 했다.
몰라트 미르 자작은 막심 체호프 남작이 미처 옷을 다 갖춰 입기도 전에 밖으로 나갔다.
그의 뒤를 막심 체호프 남작이 허둥지둥 따라붙었다.
어지간히 흥분했는지 몰라트 미르 자작의 콧구멍에서 연신 하얀 김이 뿜어져 나왔다.
씩씩거리며 걷던 몰라트 미르 자작이 돌연 고개를 돌려 막심 체호프 남작을 보았다.
“너 이 새끼! 에스카토스의 첩자냐?”
“헉! 제가요? 아닙니다! 저희 아버지께서는 에스카토스 왕국과의 전투에서 훈장까지 받으셨습니다.”
“아버지가 영웅이라고 아들까지 영웅인 것은 아니지. 만약 네놈이 에스카토스와 터럭만큼이라도 관계가 있다면, 산 채로 네놈의 껍데기를 벗겨 버릴 것이다.”
“저는 에스카토스 왕국 사람들과 만난 적도…….”
막심 체호프 남작이 말꼬리를 흐렸다.
오늘 저녁 환영회장에서 에스카토스 왕국의 남작놈과 대화를 나눈 게 떠올라서다.
몰라트 미르 자작의 호흡이 거칠어지자 막심 체호프 남작은 서둘러 말을 이었다.
“오늘 저녁 환영회장에서 만난 게 처음입니다. 그들과는 따로 자리를 갖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미친 짓을 해!”
몰라트 미르 자작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기사단장이 왜 화를 내는지 알지 못한 막심 체호프 남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어, 자작님. 그런 미친 짓이라는 게 뭡니까?”
“왜 엘리오 라고아 남작에게 시비를 걸었냐 이 말이다! 네놈의 미친 짓을 목격한 귀족이 다섯이나 된다. 아니라고 할 테냐?”
“시비가 아니라 그자의 무례를 지적했던 것뿐입니다. 오히려 저는 3국의 화합을 위해 참고 또 참았습……. 윽!”
기사단장에게 정강이를 걷어차인 막심 체호프 남작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소드 익스퍼트가 전심전력으로 걷어찬 발길질을 소드 비기너가 감당하기란 무리였다.
그러나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쪼그려 앉은 막심 체호프 남작의 어깨를 기사단장의 발이 강타한 것이다.
강력한 타격에 막심 체호프 남작의 몸이 뒤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연이은 구타에 막심 체호프 남작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래도 남작에, 나찰라 중대의 중대장인데,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신음을 흘리는 막심 체호프 남작에게 몰라트 미르 자작이 달려들었다.
그냥 이대로 때려죽일 기세다.
몰라트 미르 자작이 막심 체호프 남작에게 닿기 전, 부단장이 뛰어들어 뒤에서 그를 안았다.
“단장님! 참으십쇼! 백작님이 체호프 남작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놔! 미친놈에게는 몽둥이가 약이라고 했어! 저런 놈은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고!”
“단장님이 때리면 죽습니다. 체호프 남작을 죽이실 생각이십니까?”
그제야 몰라트 미르 자작은 몸에 힘을 풀었다.
그가 흥분을 가라앉히자 부단장은 그를 놓아주고 막심 체호프 남작에게 다가갔다.
“일어나시오. 백작님이 경을 찾으시오.”
겨우 몸을 일으켜 세운 막심 체호프 남작이 얼빠진 얼굴로 물었다.
“레트만 경. 나는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오늘 환영회장에서 있었던 말다툼 때문에 그러는 겁니까?”
“맞소.”
“엘리오 라고아 남작이 왕족입니까?”
막심 체호프 남작이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부단장 바체 레트만 남작을 보았다.
라미노프 왕국과 에스카토스 왕국의 불편한 관계를 생각하면 ―설사 그가 왕족일지라도― 자신을 나무랄 사람이 없어야 정상인 까닭이다.
“에스카토스에 라고아의 성을 쓰는 왕족은 없소.”
“그런데 왜?”
뒤에서 감정을 삭이고 있던 몰라트 미르 자작이 불쑥 끼어들었다.
“모든 게 에스카토스 왕국 놈들의 농간이다. 그 농간에 네놈이 놀아난 거고. 물론 네놈이 간첩이 아니라면.”
“다시 말씀드리지만 간첩 아닙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기사단장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지 입을 다물었다.
그를 대신해 부단장이 설명했다.
“에스카토스 왕국은 히르헤라의 정보를 우리에게 다 넘겨주지 않았소. 아니, 하나만 빼고 다 넘겨주었다고 해야 하나.”
“하나가 뭡니까?”
“히르헤라의 수호자, 소드마스터를 꺾은 자, 균열의 기사, 언터처블. 그것은 단 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소. 에스카토스 왕국은 그걸 우리에게 알려 주지 않았소.”
‘헉!’
막심 체호프 남작의 입이 쩍 벌어졌다.
단순히 왕족이라 생각했는데 줄리 그린우드 남작의 말이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환영회장에서 체호프 남작이 그에게 시비를 걸었던 거요. 대륙의 패권을 좌우할 수 있는 엘리오 라고아 남작에게 말이오.”
“…….”
몰라트 미르 기사단장이 입에 고인 침을 ‘퇘!’ 뱉고 나서 말했다.
“라고아 남작은 단신으로 마족 부대를 물리친 최강의 검사다. 히르헤라에서 살아남으려면 그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수란 말이다. 그런데 고작 소드 비기너 따위가 귀족들 앞에서 시비를 걸어? 그러니 네놈을 에스카토스 왕국의 첩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놈들의 사주를 받지 않고서야 그런 미친 짓을 할 이유가 없으니까.”
뒤늦게 막심 체호프 남작은 기사단장이 자신을 첩자로 몰아가는 이유를 알았다.
라미노프 왕국이 망하기를 바라는 에스카토스 왕국의 뜻대로 휘둘렸으니 그럴 만도 하다.
“자작님, 믿어 주십쇼. 저는 에스카토스의 사주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미친 짓을 했느냐? 왜 가만히 있는 라고아 남작에게 아득바득 찾아가 시비를 걸었느냐 말이다.”
“그곳에서 알게 된 줄리 그린우드 남작의 환심을 사고 싶어서…… 그랬던 것뿐입니다. 만약 라고아 남작이 그런 존재라는 걸 알았다면 근처에도 가지 않았을 겁니다.”
“줄리 그린우드 남작?”
“예, 환영회장에서 알게 된 베일럼 왕국의 여기사입니다.”
“여기사의 환심을 사려고 라고아 남작에게 시비를 걸었다고? 그런 헛소리를 믿으라는 거냐?”
감정이 끓어오르자 기사단장은 다시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 서슬에 깜짝 놀란 막심 체호프 남작이 급히 설명을 이어 갔다.
“줄리 그린우드 남작이 라고아 남작에게 반한 것처럼 행동해서……. 라고아 남작보다 제가 더 뛰어난 기사라는 걸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황당한 눈으로 막심 체호프 남작을 보던 기사단장의 입에서 욕설이 흘러나왔다.
“미친놈.”
하지만 거친 욕과 달리 그의 표정은 눈에 띄게 풀어져 있었다.
귀족들 대부분이 그런 식으로 행동하니 납득을 해 버린 것이다.
잠시 후 기사단장과 부단장은 나찰라 중대장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
그날 밤 대귀족들에게 불려 다닌 건 막심 체호프 남작만이 아니었다.
줄리 그린우드 남작도 밤새로록 대귀족들에게 불려 다니면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설명해야 했다.
그나마 줄리 그린우드 남작의 경우 막심 체호프 남작과 달리 꽤나 정중한 대우를 받았다.
히르헤라 베일럼 왕국군 주둔지.
셀레투스 기사단.
새벽 3시쯤, 줄리 그린우드 남작은 기사단 막사로 돌아올 수 있었다.
간이침대에 쓰러지듯 몸을 누인 줄리 그린우드 남작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꽤나 피곤한 하루다.
이 정도로 대귀족들의 관심을 받기는 처음이다.
엘리오 라고아 남작의 식사 시중을 들어 준 여파가 이렇게 클 줄은 몰랐다.
고작 새우 껍질 까 주고, 가재 살을 발라 준 것뿐인데 이 정도다.
‘애나 로건은 더하겠지?’
자신과 달리 그녀는 엘리오 라고아 남작에게 뭔가 배우고 있다니 비교할 수 없으리라.
‘그러니 허버트 리베라토 공작님이 이왕자의 손을 들어 준 거겠지.’
생각하면 너무 아쉬웠다.
애나 로건에게 라고아 남작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자신이 적극적으로 움직였다면, 이왕자가 아니라 일왕자가 왕위 계승자가 될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그린우드 백작가가 베일럼 왕국 사교계의 중심에 섰을 터였다.
‘하아!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좋겠다. 그럼 내가 애나 로건의 자리를 차지할 텐데.’
망상을 이어 가던 줄리 그린우드 남작은 밀려오는 수마를 이기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줄리 그린우드 남작은 또다시 여기저기 불려다닐지 모른다는 생각에 몸단장까지 하고 기다렸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거짓말처럼 하룻밤 만에 그녀를 향한 관심은 사라졌다.
베일럼 왕국 귀족들은 셀레투스 기사단의 부단장인 애나 로건을 찾았다.
줄리 그린우드가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해 질 녘 즈음이었다.
그녀는 기사단원들이 갑자기 마력총 수리에 매달리자 단원 한 사람을 불렀다.
“오늘 마력총 검사를 받는 날이냐?”
“아니요.”
“그런데 왜들 저렇게 열심히 닦는 거지? 낮에만 해도 저러지 않았잖아.”
“소식 못 들으셨어요?”
“무슨 소식?”
“에스카토스 왕국군이 균열 감시 중이잖아요? 그런데 벌써 칠 일째 마수가 보이질 않는답니다. 에스카토스 왕국에서 마족 침공의 전조인 것 같다고, 주둔지 부대들에 특별한 주의를 당부했어요.”
“마족 침공의 전조라고?”
“예, 그래서 다들 저러는 거예요. 유서를 쓴 단원들도 많아요.”
“알겠다.”
줄리 그린우드 남작이 손짓하자 단원은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제자리로 돌아갔다.
뭔가 곰곰히 생각하던 줄리 그린우드 남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후회는 한 번으로 족하다.
그녀는 지금이 엘리오 라고아 남작에게 다가갈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
히르헤라 에스카토스 왕국군 주둔지.
베르나르도 후작가 진영.
여느 때처럼 막사에서 마나 개발서를 읽던 엘리오가 책을 덮었다.
곧이어 막사 밖에서 파비안의 음성이 들려왔다.
“중대장님. 애나 로건 경이 방문했습니다.”
“들어오시라고 해.”
잠시 후 애나 로건이 막사 안으로 들어와 꾸벅 인사를 했다.
깍지 낀 손을 탁자 위에 올리고 그녀를 빤히 보던 엘리오가 물었다.
“성공했나요?”
철벽을 세운 듯한 그의 태도에 애나 로건은 서운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네.”
애나 로건이 힘주어 답했다.
그녀는 엘리오 라고아 남작의 속도에 자신을 맞출 생각이었다.
“어려운 일인데 성공했다니 축하드립니다. 그럼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요.”
엘리오는 그녀에게 비연보(飛燕步)를 가르쳤다.
어차피 구결은 알아듣지도 못할 게 분명해 그냥 마나를 발바닥 앞꿈치(용천혈)로 밀어 넣으라 했다.
“……눈은 정면, 두 팔은 몸통 옆에 가지런히 붙이고 달리면서 마나를 방출하면 됩니다. 그럼 제비 날기(swallow flying)를 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아! 스왈로우 플라잉! 저도 남작님처럼 높이 도약할 수 있을까요?”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파비안의 드래곤 플라이와 드래곤 소드를 보면 그녀 역시 비연보를 익힐 가능성이 높았다.
“와아!”
엘리오의 말에 애나 로건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엘리오는 피식 웃었다.
“그럼, 밖으로 나가서 시연을 해 보이겠습니다.”
엘리오가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가자 애나 로건은 황급히 그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