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386
386회. 왜 도와주십니까?
연적하는 구천노도 심통의 말을 흘려들으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해거름 무렵의 거리는 스산해 보였다.
사실 자신을 해치려고 한 사람은 큰어머니 백미주다.
연무백과 연승백, 연설주는 그녀의 자식일 뿐 직접적인 원한은 없다.
물론 넓은 의미로 보면 그들의 삶을 망친 것도 복수라 할 수 있다.
백미주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파괴했으니까.
하지만 양이화는?
그녀의 ‘양가장’은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을 맞게 된 격이었다.
삼장불립. ‘와룡장, 백가장, 양가장을 없애 주겠다’고 한 사람은 총채주 파천마군이다.
그때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연씨에 대한 복수는 의미가 없을 시기였다.
하지만 백미주에 대한 반감으로 파천마군이 던진 떡밥을 물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천하를 떠돌며 유명교 십두마병과 싸웠다.
파천마군은 약속대로 삼장을 짓밟았다.
그것으로 복수가 일단락됐다고 믿고 굳이 떠올리려 하지 않았다.
배다른 형제자매에게 심법 구결을 가르쳐 준 것은 어쩌면 연민 때문인지도 모른다.
양이화에 대한 복잡한 감정도 그 연장 선상이리라.
그녀가 베푼 친절이 자신의 과한 복수를 일깨워 주었다고나 할까.
상념에 잠긴 연적하를 보며 심통이 한마디 던졌다.
“그게 다 공자님 마음이 여려서 그런 겁니다. 저였으면 모조리 죽였을 겁니다. 자비를 베푸시고 죄책감을 느끼시다니 이해가 안 갑니다.”
“이해가 안 가겠지. 아직 이월밖에 안 됐으니.”
“그걸 농담이라고 하신 겁니까?”
“왜? 너무 어려워서 웃음이 안 나와?”
연적하의 진지한 물음에 심통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진짜 웃긴 얘기가 뭔지 들어 보시렵니까?”
“자신 있으면 해 봐.”
연적하의 도발에 심통은 그동안 귀동냥으로 들었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그걸 시작으로 두 사람은 목이 쉬도록-시답지 않은-농담 대결을 펼쳤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
언제부터인가 두 사람은 묵묵히 술잔만 비웠다.
어둑어둑해지자 주루는 빈자리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손님들로 가득 찼다.
창밖을 내다보던 심통이 지나가듯 물었다.
“오늘은 고성촌에서 주무실 생각이십니까?”
“왜?”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이셔서요.”
“아!”
연적하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목이 쉬도록 떠들었는데 정작 중요한 이야기를 빼먹은 것 같다.
“나 당분간 연가무관에 있기로 했어.”
“예? 왜요?”
“오늘 개관식 열리기 전에 불청객들이 와서 한바탕 싸웠다고 하더라고.”
“불청객요?”
“어, 철혈방에서 무관을 다른 데로 옮기라고 시비를 걸었대. 그러다가 싸움이 났다나.”
“허, 그래서 연가무관이 철혈방과 싸우기라도 한답니까?”
“그럴 생각인가 봐.”
“연씨들을 도와주시려고요?”
심통이 한심하다는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원수의 사정이 어쩌고 하더니 끝내는 도움을 줄 생각인가 보다.
“제자는 물론 도와줄 사람도 없더라고. 개관하자마자 망하게 둘 수는 없잖아?”
“공자님이 쓰던 검도 억지로 바꿔가고. 무공도 곶감 빼먹듯 빼먹어 가고는 입 싹 씻은 사람들인데, 망하게 두지 왜 도와주십니까?”
“양 부인이 착하더라고.”
“양 부인이라뇨?”
“연무백의 처 말이야. 양가장에서 시집온 사람.”
“그러니까, 공자님 말씀은 그 사람이 착해서 도와주시겠다는 겁니까?”
기막혀하는 심통에게 연적하는 연회장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거기서 일하는 여자들은 내 근처에도 안 오더라고. 그런데 양 부인이 직접 와서 더러운 자리를 싹 치워 주고 새 음식을 내줬어. 그리고 바빠서 그랬다고 미안하다는데 가슴이 찡하더라. 진짜 좋은 여자야.”
“…….”
연적하의 말에 심통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그의 얼굴을 보고도 잘 대해 주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연무백의 운이 좋았군.’
아니, 이건 고작 운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기연이다.
“연 관주가 처복은 있었던 모양입니다?”
“나도 그런 생각을 했어. 양 부인이 잘해 주니까 너무 미안해지더라고.”
“양가장 때문에요?”
“어. 내가 망하게 했잖아.”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하십쇼. 양가장이 줄을 잘못 섰던 겁니다.”
“오늘 알았는데 둘째 형도 팔이 잘렸더라고.”
묵은 감정을 털어 낸 연적하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형’ 소리가 나왔다.
“연승백요? 그 싸가지 없던 둘째 말씀이십니까? 그러다가 언제고 경을 칠 줄 알았습니다.”
“궁장에 세운 와룡장이 망해서 정의맹으로 갔던 거래. 그러다가 팔도 잃고.”
“연씨들이 공자님을 원망하던가요?”
“무백 형은 그런 것 같지 않더라고. 둘째 형은 뭐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심통은 그제야 연적하가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야. 나도 똑같은 놈이야. 내가 피해 본 것만 알지 남의 사정에는 관심 없다고.
연가장의 몰락과 외팔이가 된 연승백이 어지간히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그걸 알지만 뭐라고 해 줄 말이 없었다.
가족들 간의 일에 제삼자가 나서는 건 상당히 껄끄러운 일인 까닭이다.
그래서 심통은 화제를 돌렸다.
“언제까지 빈객으로 계실 겁니까?”
“오래는 못 있어. 나도 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
연적하는 일이 빨리 정리되기를 바랐다.
무당파에서 술법도 마저 배워야 하고, 적월 공취산도 잡으러 가야 했다.
“차라리 제가 철혈방을 없애 드릴까요?”
심통이 연적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만약 그가 원한다면 정말 그렇게 해 줄 생각이었다.
부방주와 당주들만 죽이면 철혈방은 다른 사파들에게 뜯어먹혀 사라질 터였다.
“내가 요즘 적선 수행을 하면서 느끼는 게 많아. 나쁜 일은 쉬운데 착한 일이 어렵더라고.”
“철혈방은 어차피 나쁜 놈들입니다.”
“그래, 알아.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심 노인도 전에는 정말 나쁜 놈이었다는 걸 잊지 마.”
“쩝, 오래 못 있으신다니 해 본 말입니다.”
“이건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무관들의 밥그릇 싸움이야. 철혈방이 절대악도 아니고. 무슨 말인지 알아? 걸리적거린다고 그들을 죽이면 그 업보를 고스란히 감당해야 돼.”
“하지만 구경만 하려고 빈객이 된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응징은 괜찮아. 그건 마땅히 받아야 할 대가니까.”
“무당파에서 그러던가요?”
“아니, 그냥 내 깨달음이야. 권선징악이라는 말도 있잖아.”
“알겠습니다. 그런데 아십니까? 공자님은 진짜 무당파 도사 같으십니다.”
“술맛 떨어지니까 도사 얘기는 그만해.”
“아, 예, 예.”
심통이 건성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달려가서 칼질 몇 번 하면 끝날 일을 왜 어렵게 배배 꼬는지 모르겠다.
***
낙양.
철혈방.
부방주인 거력신도 주연신이 사망검 이철원에게 탁자 위에 있던 벼루를 집어 던졌다.
이철원은 벼루를 보고도 피하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벼루보다 더한 게 날아올 거라는 것을 알아서다.
퍼억-.
이철원의 이마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이 병신 같은 놈! 네놈이 철혈방의 이름에 먹칠을 해? 그깟 촌구석에 뭐 뽑아 먹을 게 있다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가서 그런 개망신을 당해!”
“용서해 주십쇼.”
“용서? 용서는 집에 가서 네놈 가족들에게나 받고. 여기가 어디라고 용서 운운하고 지랄이야! 이 새끼야! 저런 병신을 왜 외당 당주 자리에 앉혔지? 씨벌!”
주연신의 주먹이 ‘쾅!’ 하고 탁자를 후려쳤다.
이철원의 옆에 서 있던 총관 천뢰도 조유백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씩씩거리던 주연신이 조유백에게 시선을 돌렸다.
“연가무관이 뭐 하는 곳이냐?”
“부방주님, 혹시 언사에 있던 와룡장을 기억하십니까?”
“참월검객?”
“예, 연가무관의 관주는 참월검객의 장자로 와룡장의 장주였습니다.”
“와룡장에나 처박혀 있지……. 아, 월하선자에게 빼앗겼나?”
“맞습니다. 그 뒤 와룡장은 궁장으로 옮겨 갔는데, 그걸 파천마군이 작살 냈습니다.”
“녹림 총순찰과 은원이 있어서 그랬다지? 그놈이 고성촌에 숨어든 것이냐?”
“그렇습니다.”
“흐음!”
주연신의 입에서 묵직한 침음성이 흘러 나왔다.
상대가 와룡장의 장주였다면 사망검이 당한 것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와룡장은 한때 무림세가에 견줄 정도로 성세를 구가한 적이 있어서다.
물론 연적하가 등장하면서 쫄딱 망했지만 말이다.
“연가무관의 관주인 연무백은 와룡검객으로 불릴 정도로 뛰어난 무인 입니다.”
“그래서?”
“아니,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조유백은 차마 이철원의 편을 들지 못하고 찌그러졌다.
상대가 와룡검객이라 해도 철혈방의 외당 당주가 터지고 온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연가무관의 전력은 어찌 되느냐?”
“관주와 무술 사범, 해원상방의 연설주가 칼을 좀 씁니다. 그리고 정가장의 장주와 무인이 일곱 명 있지만 신경 쓸 정도는 아닙니다. 다만…….”
“다만?”
“조금 전에 들어온 소식입니다만 연가무관의 빈객 중에 무당파 제자가 있다고…….”
“지금 무당파 제자라고 했느냐?”
“예, 속가제자라는 말이 있는데 아직 정확하지 않습니다.”
“허! 그런 개 같은 일이 있나. 오늘 개관식을 했는데 벌써 빈객이라고?”
“우리에 맞서겠다는 것을 대대적으로 드러낸 모양입니다. 낭인도 모은다고 하더군요.”
“미친놈. 사죄를 청해도 받아 줄까 말까 한데. 뭐? 빈객에 낭인까지 끌어모아? 정말 전쟁이라도 치르겠다는 건가? 싸우겠다는 건 확실한 것이냐?”
“이미 낙양에 소문이 파다합니다. 연가무관에서 낭인을 모집한다고.”
“낭인이야 있으나 마나 한 놈들이니 상관없는데……. 무당파 제자가 문제로군.”
“무당파 제자의 정체를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하루나 이틀이면 어떤 놈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제길, 그런 수모를 당하고 이틀이나 더 기다리라는 것이냐?”
“부방주님,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고 했습니다. 하물며 상대가 무당파 제자라면 더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주연신의 질책에 조유백은 납작 엎드렸지만 할 말은 했다.
낙양과 무당파의 거리는 대략 칠 일.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인지라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일까지 빈객이 누군지 알아내라. 그리고 외삼당 당주들에게 낭인들을 압박하라고 해라. 연가무관을 돕는 놈은 끝까지 용서하지 않는다고.”
“예. 삼살문과 귀도방에도 협조를 요청할까요?”
삼살문과 귀도방은 낙양의 사파로 평소 상부상조하는 관계였다.
“고작 고성촌의 무관 하나를 치는 데 그들까지 부르라는 말이냐?”
“와룡장이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한때는 낙양을 주름잡던 명가(名家)입니다. 드러나지 않은 인맥이 있을지도 모르니 대비를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조유백의 말에 주연신은 잠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당파 제자까지 끌어들인 걸 보면 과연 만만치 않은 상대가 될 듯도 하다.
“알겠다. 늦어도 모레까지, 쓸 만한 놈으로 스무 명씩 보내 달라 해라.”
“예.”
조유백이 넙죽 절을 하고 뒷걸음질 쳐 물러갔다.
홀로 남은 이철원을 노려보던 주연신이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연무백의 무위가 어느 정도나 되더냐?”
“속하보다 한두 수 위였습니다.”
“나와 비교하면?”
“부방주님께서 반 수나 한 수 위에 계실 겁니다.”
주연신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반 수나 한 수, 아슬아슬하지만 결국 자신이 이길 거라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