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grapher Gil seung woo RAW novel - Chapter 53
55화 군식구
뭘 어떻게 해야 되느냐는 눈으로 에브리아가 날 바라보고 있다. 이미 촬영장은 세팅이 완료됐고 정은호 감독은 스탭과 얘기를 나누며 포스터 시안을 즉석에서 정하고 있다. 난 그녀의 앞으로 걸어가 다리 사이 앵글로 가장 유명한 영화포스터를 보여줬다.
“아마도 이런 컨셉으로 사진을 찍을 거예요. 다리만 나오니까 어려운 촬영은 아닐 겁니다.”
정은호 감독은 내게 다가와 대충 그림을 보며 말을 꺼냈다.
“엉덩이까지 보이면 영화 주제와는 맞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러니까 너무 섹스어필이 될 것 같아. 그래서 그냥 허벅지부터 발목까지만 쓰려고.”
“되게 다리를 가까이 잡으시네요. 양면하고 위쪽까지 다리로 덮는다는 생각이신가 봐요.”
“응 다리 사이에 검은 옷을 입은 민태가 우울한 표정으로 렌즈를 응시할 거야. 어떻게 며칠 밤낮을 고생한 것보다 현장 아이디어가 더 좋은 거 같냐. 그리고 검은 스타킹을 착용하고 싶어. 말해줄 수 있지?”
정은호 감독은 에브리아를 보고 싱긋 웃고는 내게 말했다. 난 에브리아의 매니저가 된 기분으로 그녀에게 이 상황을 알려줬고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탭이 어딘가에서 짧은 스커트와 검은스타킹을 들고 왔고 에브리아는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촬영장으로 나왔다.
촬영이 시작되고 정만종 선생님의 목소리가 촬영장에 울려 퍼졌다.
“거기 모델분 조금 더 앞으로, 다리 벌리고·· 좀 비대칭이니, 왼 다리를 좀 더 바깥쪽으로 빼면 좋겠는데. 승우야 가서 좀 봐 드려.”
난 선생님의 말씀에 그녀에게 다가가 다리 위치를 조정했다.
“배우분 표정이 좀 이상한데·· 은호 씨, 어떤 표정 요구한 거야?”
“어머니의 폭력에 주눅 들었지만, 반항기가 있는 표정 요구했습니다.”
“그냥 주눅 든 표정이다. 눈빛을 좀 사납게 가봐. 이봐 은호 씨 얼굴 꼭 정면 샷 찍어야 해? 이런 경우에는 좀 비스듬히 가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
“즉석에서 생각한 시안이라서요. 선생님이 마음에 드는 대로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치마 때문에 다리가 가린다. 좀 들어 올리고. 승호야!”
촬영 어시에서 모델 관계자가 된 느낌이네. 난 에브리아에서 치마를 손으로 살짝 올리라는 말을 전했다.
“민태야! 표정 진지하게 안 할래. 지금 눈동자가 어디에 가 있니.”
정은우 감독이 소리치자 치마를 따라 올라갔던 배우의 눈이 되돌아왔다. 마침내 촬영이 끝나고 사람들은 결과물을 확인하기 위해 모였다.
“이야, 이게 훨씬 난데? 승우 씨 덕분에 좋은 포스터 만들겠어. 사진 한 장에 모든 게 다 나타나 있잖아. 어머니의 폭력에 뒤틀린 아들의 분노같이 말이야.”
정은호 감독이 사진을 보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자 배우분이 입을 열었다.
“너무 보여주는 거 같지 않아요?”
“우리는 좀 보여줘도 돼. 선생님 덕분에 좋은 거 건지고 갑니다. 만수무강 하십시오.”
정은호 감독은 모델료인데 많이는 못 챙겼다는 말을 하며 봉투를 하나 내밀고는 유쾌한 작별 인사를 남기고 촬영장을 떠났다. 정만종 선생님은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 사람 영화 좋거든. 관객들한테는 잘 먹히지 않지만, 감정을 소름끼칠 정도로 디테일하게 잡아내는 면이 마음에 들었다.”
“선생님께서 직접 연락하신 건가요?”
“응, 그랬지. 저 친구 영화 보고 멋져서 내가 연락을 했지. 포스터를 너무 대충 만들어놔서 좀 걸리더라고. 그 때부터 저 친구가 영화를 찍을 때마다 내가 러닝개런티로 포스터를 찍어주고 있단다.”
“런닝개런티요? 뭐 흥행할 때마다 돈을 받는 식의 그런 거죠?”
“응, 조건이 백만 명이 볼 때마다 삼백만 원씩 주기로 했지. 아직 받아본 적은 없구나. 아직 최고 기록이 11만 명이야. 가야 할 길이 멀어.”
선생님은 이런 식의 사진 촬영을 자주 하시는 편이다. 돈은 되지 않지만, 자기만족을 위한 사진을 찍는다고나 할까. 영효 선배는 이런 선생님의 행동을 상업 사진 안에서 나름의 재미를 찾으시고 계신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저 놈도 어서 써봐야 하는데.”
정만종 선생님은 스튜디오에서 가장 비싼 레드 드래곤 카메라를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고 계셨다. 현재 경훈 선배가 열심히 카메라의 제대로 된 이용법을 알기 위해 노력 중이다. 경훈 선배 말로는 한 달 내로 시범 촬영이 가능한 수준까지 지식을 익혀 모두에게 알려주겠노라고 말했다.
“경훈 선배가 매일 붙잡고 씨름 중입니다. 사용법이 좀 까다롭나 봐요.”
“그런 점에서 보면 저건 내게는 맞지 않아. 난 들고 다닐 수 있어야 카메라라고 생각하는데 저 놈은 너무 크니까 말이다. 아, 그런데 아까 그 외국 아가씨는 누구지?”
처음부터 설명하자면 너무 사연이 길어서 난 간단하게 대답했다.
“제가 아는 모델 아가씨인데 사정이 좀 있어서 제 소속사에 연락을 했습니다.”
“뭐 내 기준으로 볼 때 일터에 애인을 데리고 오는 건 나쁘지는 않다만.”
아니 선생님 그건 굉장히 나쁜 행동입니다. 난 응원을 보내는 선생님의 눈빛이 부담스러워 자리로 돌아갔다. 매우 예쁜 다리를 보여줬던 에브리아가 자리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난 감독님에게 받은 돈을 그녀에게 내주었다. 그녀가 이게 뭐냐고 물었다.
“조금 전 찍은 사진 모델료래요.”
에브리아는 자기는 한국에 오기 전 돈을 받았다며 돈을 받으려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3개월간 일하는 조건으로 2천 달러를 받고 이곳에 왔단다. 대신에 한국에서 진행해서 받는 모든 돈은 자신을 불러준 에이전시의 몫이고 자신은 그 계약에 만족한다는 의사를 전했다.
“아니, 이건 그래도.”
난 다시 주려고 했다가 생각을 바꿨다. 혹시 에이전시와 연락이 닿으면 문제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마 실장님이 잘 알아보신다고 했으니 곧 답변이 오겠지. 점심 식사를 하고 점심 스케줄을 진행할 때쯤 기다리던 전화가 왔다.
“네, 마 실장님. 알아보셨어요?”
– 좀 복잡해진 거 같습니다. 에이전시가 사라졌어요. 사업자등록도 취소되고. 에이전시 대표가 사기 문제로 수사 중입니다. 설명해 드리자면 허위로 모델 에이전시를 만들어서 투자자를 끌어 모은 뒤에 도망치다가 걸린 모양입니다. 지금 곁에 계신 분은 우즈베키스탄에서 투자자들 보여주기 식으로 계약한 분이고요.”
“에에! 그럼 이 분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 일단 3개월 단기 비자로 들어오신 분이라 사무소장의 인가만 받으면 근무처를 변경할 수는 있습니다. 일단 한 번 이곳으로 모셔오겠습니까? 저희랑 일을 같이하는 모델 에이전시 분을 모시고 얘기를 나눠보죠.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난 에브리아에게 이 말을 간단하게 설명해줬다. 원래 계약했던 회사가 갑자기 사라져서 일할 곳이 없다는 말을 하자 에브리아의 얼굴은 울상이 됐다. 내가 일단 아는 사람을 통해서 일할 곳을 알아본다니 그녀는 또 눈물을 흘렸다. 정말 눈물도 많은 애다. 난 그녀를 붙잡고 마 실장님이 있는 제이필터 뮤직 본사로 향했다.
“아이고 우리 길 작가님 오셨습니까!”
본사의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유수민 대표가 나를 꼭 끌어안으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나도 꾸벅 인사를 하고 회의실에는 마 실장님과 낯선 여자분 그리고 왜 남아있는지 모르겠는 대표님과 나와 에브리아가 자리했다.
“안녕하세요. 티에이 모델 컴퍼니 소속의 이희연 매니저입니다.”
낯선 여자분이 자기소개를 했다. 그녀는 에브리아를 자세히 볼 수 있냐고 내게 말했고 에브리아는 당연히 허락했다. 이희연 매니저는 에브리아의 서 있는 모습을 보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좋지 않은 징조다.
“부탁으로 이곳에 오긴 했는데 좀 어렵겠네요. 저 말고 다른 에이전시 분들도 비슷한 생각일 겁니다. 이분은 모델치고는 너무 작아요. 170cm도 안 돼 보이는데·· 이러면 힘들죠. 게다가 단기 취업 비자를 지닌 분이니 밑바닥부터 키우기도 모호하고요. 아무튼 힘들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불러주셨는데 죄송합니다.”
칼 같은 거절에 난 당황했다. 이 문제를 해결할 방도는 없는 건지 고민이 든다. 그 때 유수민 대표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 이 매니저 말도 일리는 있는데 그래도 저 분 마스크가 뛰어나잖아, 몸매도 좋고. 어떻게 안 될까?”
“유 대표님 말은 알겠는데 그래도 우리 패션계 쪽 일을 잡아주기는 힘들어요.”
“허허, 이걸 어쩐담. 일단 알겠어요. 오늘 시간 내줘서 고맙고 나중에 또 보죠. 그리고 마 실장.”
“네, 대표님.”
“홍보팀 가서 훈철이 좀 오라고 해.”
난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만 바라보고 있는 에브리아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녀는 풀죽은 얼굴로 고향에서 일할 때도 항상 그게 문제였다고 내게 고백했다. 난 뭔가 우리 눈에 예뻐 보이는 모델이라 더 정감이 가고 좋았는데. 곧 이어 김훈철 팀장이 들어오자 유수민 대표가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우리가 여자 외국 모델 쓸 일 있을까?”
“네? 갑자기 그게 무슨.”
“있는지 없는지만 좀 말해봐.”
“있죠. 언루트 이번 화보에 공주 역할 맡을 여자분 필요하죠.”
“그럼, 김 팀장 촬영은 언제지?”
날 힐끔 쳐다본 김훈철 팀장이 입을 열었다.
“길 작가님하고 아직 스케줄 조율이 안 끝나서요.”
“그럼 길 작가님, 일단 이 모델 아가씨 근무처를 우리 쪽으로 돌리겠습니다. 아무래도 시간이 촉박하니 다른 모델 에이전시로 들어가기는 힘들 거 같아요. 어떻습니까?”
“그렇게 해주시면 고맙죠.”
“제가 다른 소속사 사장들에게 CF 쪽이나 뮤직비디오, 화보 같은 일거리 좀 얻을 수 있으니까 심심치 않게 활동할 수 있을 겁니다. 생각해보니까 다른 친구들이 외국 모델 키가 너무 커서 우리 애들이 왜소해 보인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나요.”
와, 이 분은 대체 뭘 믿고 이렇게 해주시는 걸까. 내가 모르는 면을 발견했나? 역시 한 회사의 수장이라 그러신지 일 처리가 화끈하시다. 난 최대한 시간을 마련해서 언루트의 화보 촬영을 앞당기는 거로 감사의 인사를 했다. 적어도 2~3일 내로 에브리아의 근무처가 이곳으로 바뀔 거라는 말을 들은 뒤 난 그녀와 함께 회사를 나왔다.
··응?
아직 심각한 문제가 하나 더 남아 있었다.
***
“그러니까 이 아가씨가 갈 곳이 없다고?”
어머니가 심각한 얼굴로 날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나도 양심이 있지 대표에게 잠자리와 식사까지 요구할 배짱은 없다. 에브리아의 말을 듣자니 계약할 때 숙식 제공을 보장받고 왔다고 하니 어디 머물 곳도 없을 것이다.
“한 3개월 있을 건데, 알다시피 얘가 우리말도 못 하고.”
“19살이라고 했나. 뭐 어쩌겠니, 나도 딸 하나 가지고 싶었는데 잘됐네.”
아아 고맙습니다, 어머니. 근데 정말 딸처럼 우리말을 하나하나 알려줘야 할 거에요. 다행히 어머니가 군식구가 늘어나는데도 별 불만 없이 받아줘서 고마웠다. 너무 오지랖이 넓은 거 아닌가 고민도 했지만 영어도 못 하는 외국 애를 밖에 방치한다는 게 더 마음에 걸릴 것 같아서 내린 결단이었다.
“그럼, 뭐 서재 비워줄까?”
거실에 있던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난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일단 내 방에 묵게 하게. 짐만 좀 빼야지 뭐. 어차피 형 조금 있으면 동계 훈련 간다고 한 달 이상 집 비울 거 아니야.”
어머니는 에브리아를 향해 밝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에브리아, 웰컴.”
“임자·· 소련, 소련.”
그렇게 우리 집에는 단기 외국인 하숙생 한 명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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