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 Me Up! RAW novel - Chapter 194
195. 검은 씨앗(3)
이튿날 저녁.
나는 델핀이 제공해준 막사 내에서 현황을 보고받고 있었다.
“이곳에 교단군이 축성한 요새가 있소;’ 아델이 탁자 위에 펼쳐진 지도의
한쪽을 가리켰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절벽으로
양쪽이 막힌 틈새에 사각형의 목상이 세워져 있다.
“보다시피,여길 뚫지 못하면 열쇠가 있는 부유도의 지하로는 내려가지 못 하오. 정찰 결과,주둔 병력의 숫자만 3천. 성벽 높이는 8m에,해자까지 파 놓았더군. 한 달만에 만들었다고는 믿을 수 없는 요새지.”
아델이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괴었다.
내일 오전에 치러질 전략 회의를 위해 이 사내는 내게 미리 브리핑을 해주고 있었다.
꽤 친절한 성격이었다.
‘요새라.’
그 전의 임무들이 수비에 치중했다면, 이번에는 공격하는 측이 된 것 같다.
알이 부화하기 전까지는 열쇠를 모두 모아야 할 테니까.
저게 깨어나면 진짜로 골치가 아파 진다.
“당신이 도와준다는 이야기는 들었소. 아주 큰 도움이 되겠지.”
아델은 선망이 엿보이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이 남자는 아시니스 가문의 분가인 라다스테리 가문의 2남이자,현 파견 대의 주요 참모진 중 하나라고 한다.
라다스테리.
내가 처음 왔을 때 잡아먹은 태생 4성의 여기사,셰이의 성씨였다.
혹시나 해서 가문에 셰이란 여자가 있는지 물었으나,아델은 그런 이름은 듣지 못했다면서 고개를 저었다.
가능성은 한 가지.’
영웅으로 뽑힐 시 타오니어에서의 기억이 삭제되거나 덮어 씌워지는 것 같다.
셰이뿐만이 아니라,프리아의 하녀 였다고 하는 네리사까지 떠올려보면 명확했다. 프리아가 전혀 알아보질 못 했으니.
‘타오니어에 남은 4성과 5성이 1명씩.’
그렇다면,눈앞의 사내는 타오니어의 유력한 4성 후보였다.
본가의 계승자를 제외한 분가 출신 중에는 가장 우수하다고 했고.
물론 5성 후보도 어렵지 않게 추측 할 수 있다.
델핀 폰 아시니아.
나는 아델이 그녀에 대해 평했던 말을 떠올렸다.
‘제국 최강.’
할기온이나 란티아,슈텐베르크 같은 경우는 대를 이어져 내려오면서 피가 희석됐지만, 아시니스는 순수 혈통을 거의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강함의
차원이 다르다고 한다.
40층 전투에서 델핀이 있었다면 전
세가 진즉 바뀌었을 거라고도 했지. ‘그 꼬마가 5성 후보?’
뭐,나중에 가면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이어지는 아델의 설명을 마저
들었다.
우리에게 주어질 역할은 간단하다. 본대가 요새의 정면을 치면,옆으로
우회하여 내부에 침입,진형을 흔들어 놓고 성문을 여는 것이다. 정석적이면 서도 효과적인 전술이었다.
“요새가 뚫리면,즉각 황녀 전하와 대장님을 비롯한 정예 병력이 조인들의
거점으로 침투할 것이오. 영웅분들은 그때 본대와 합류하여 잔여 병력을 소탕해주시면 감사하겠소.”
“잔여 병력을 소탕?”
나는 말을 이었다.
“요새에 남아있으라 이건가?” “그렇소.”
아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하에선 조인들의 격렬한 저항이
있을 것이오. 그런 위험한 역할을 영 웅들에게 맡기고 싶진 않군. 우리도 자존심이 있는 만큼,그대들에겐 모든 것을 떠넘기진 않겠소.”
나는 팔짱을 꼈다.
의미는 명확했다. 요새 공략전이 끝 나고,열쇠 탈취를 위해 지하 침투가 시작되면 우리들은 일선에서 빠지라는 뜻이다.
‘그건 좀 곤란한데.’
쟤네들끼리 열쇠를 가져을 수 있다면 괜찮겠지만,그럼 우리가 소환될 이유가 없다.
분명 어디선가 어긋날 것이다.
일단 잠자코 있기로 했다.
구태여 갈등을 만들 필요는 없으니.
나중에 일이 수틀리면 나서도 된다.
그때는 누가 뭐라 지껄이든 우리 할 일을 하면 되겠지.
“이번엔 예전 같은 추태는 보여드리지 않을 생각이오 대장님이 계시다면……
“그렇게 강해?”
“보면 알게 될 것이오.”
아델은 자부심이 어린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뭐,제국 최강이라니 강하기야 강하 겠지. 이 녀석은 내가 싸우던 모습을 직접 본 만큼,델핀의 무력은 나와 비 교해서도 전혀 뒤처지지 않는 것 같다.
‘기대되는군.’
한 번쯤은 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대기실에 영웅으로 합류할 만한 요소가 있는지.
만약 내 기대에 충족된다면 적극적 으로 꼬셔볼 생각이었다. 단순 NPC 보단 영웅으로 끌어들이는 편이 임무 공략이 쉬우니.
“그나저나,영웅분의 동료는 다 어디 가셨소. 막사 바깥에도 없는 걸로 알고 있소만,여기에도 안 계시지 않소?”
“걔네들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공략이 시작되면 돌아올 거니까,신경 안 써도 돼.”
“원래 있던 곳이라면…… 설마 다른 차원을 말하는 것이오?”
“비슷하지.”
아델은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우리가 심상치 않은 존재라는 것은 알고 있겠지.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지고,볼 때 마다 달라진다.
‘원래 있던 곳으로 갔다.’
딱히 변명은 아니다. 사실이었으니까.
1파티가 전용 막사로 들어오자 임무 상태가 갱신되었던 것이다. 임무와 대 기실의 시간 비율이 1 대 1로 고정되 었고,영웅도 안팎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나는 상황 전달을 위해 남았고, 나머지 멤버들은 기본 브리핑과 전투 준비를 위해 대기실로 돌아간 상태였다.
암케나는 아예 게임을 꺼버렸고 말이지. 아마 파티원들은 에디스 쪽과 이야
기를 나누고 있을 것이다.
요새 공략전에는 다른 파티도 참가
하게 될 테니까. 에디스를 주축으로 한 1공격대는 본대에 속해서 대규모 전 투를 지원할 예정이었다.
나는 막사 구석을 보았다.
아델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타원형의 차원문이 푸른 빛을 발하고 있다.
저곳을 통하면 대기실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상한 임무이긴 하네.’
원래 픽 미 업에서 나오는 임무들은 토벌이나 생존,공•수성 같은 단순한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식으로 복 잡하게 꼬아놓은 형태의 임무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이 계정은 처음부터 그 랬다.
5층에서 생존이 뜨질 않나,10층에 서 시체들이 부활하질 않나. 20층에 선 면역 몬스터가 나오기나 하고,35 층에선 바다 사냥 같은 수상한 스테 이지가 등장했다. 니플헤임과 비교해 도 정상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나는 머리를 저었다.
아무리 나라도 임무 방식에는 간섭 할 수 없었다.
임무 수행 외에 선택지가 없다면, 쓸데없는 생각은 굳이 할 필요가 없다.
“내일 오전의 회의에는 파견대의 모든 간부가 참석할 것이오. 영웅분들의 자 리도 만들어 놓았으니, 부담없이 자신의 의견을 말씀해주시오.”
아델은 말을 마치고는 막사를 떠나 갔다.
나는 부유도의 지도가 펼쳐진 테이블
위에 다리를 올렸다.
“흠 ”
아마,내일 있을 회의에서 내가 의 견을 낼 기회는 없을 것이다.
은인이든,뭐든 우리는 수상한 곳에서 온 이방인이었으니까.
델핀도 예의상 나를 회의에 참석하게 해줬지만,그 이상은 배려할 수 없겠지.
우리를 우대한다면 분명 간부진들 사이에서 안 좋은 소리가 나온다.
부대의 사기와 운영을 위해서도 우 리는 놈들이 정하는 계획에 따라 움 직이게 될 것이다.
‘프리아도 마찬가지네.’
그 녀석도 입장은 비슷하다.
제국에 의해 신분을 뺏기고 밀려난
신세.
황족으로 존중받고는 있지만,그 이 상의 권한은 없는 상태였다. 심지어 내일의 회의에서도 자리가 없다고 하 니까,얼굴마담에 가까운 처지라고 할 수 있었다.
뭐,별 불만은 없다.
어차피 여기 오래 있을 것도 아니고.
일시적인 협력 관계일 뿐이다.
용무가 끝나면 헤어지고,쓸모 있다면 재차 관계를 다지면 된다.
나는 막사의 입구를 닫은 뒤,테이 블로 돌아왔다.
아침이 오기 전 할 일이 있었다.
‘변수가 어디서 생기느냐인데.’
요새 공략 전 시점인지,아니면 침
투할 때에 문제가 벌어지는지. 상황에 따라 행동 지침을 정해둬야
한다. 우리가 운용할 수 있는 실질 병 력은 에디스의 1공격대와 1파티.
,어디…….1
나는 지도 위에 깃털펜을 가져갔다. 그리고 다시.
다음날 오전이 되었다.
나는 간단히 아침을 먹은 뒤,갑옷을
입고 칼집을 찼다. 생각 같아선 자기 들끼리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 두고 싶지만,그래도 기본적인 게 있잖아.
참석자는 나 하나.
나머지 멤버들은 저녁에 다른 파티와 함께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다.
회의 장소는 델핀의 대형 3층 막사 였다.
밖에 아무도 없는 걸 보면,내가 가장 마지막인 것 같다.
“멈추시오.”
입구를 지키고 있던 병사 두 명이 막아섰다.
나는 델핀에게 받은 통행증을 내밀 었다. 병사가 통행증과 내 얼굴을 유 심히 훑어보더니 말했다.
“한 이스라트,맞소?”
“그래.”
“들어오시오.”
앞을 가로막은 창이 치워졌다. 뭐지,이 새끼들은.
나는 두 명의 얼굴을 보았다.
둘 다 눈빛이 이상하다. 마치 늪지
처럼.
흐리멍덩하게 굳어 있었다.
일단 막사로 들어왔다.
넓은 내부에는 아무도 없었다. 쥐새끼 하나조차 보이지 않았다. 회의 장소는 막사 3층의 별실.
나는 계단을 타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아무도 없는 것은 여전했다. 저번에
왔을 때 지나쳤던 호위 병사들도,차와 음식을 나르던 하녀들도 깨끗하게 사 라졌다.
그리고.
익숙한 냄새가 코끝을 타고 올라왔다.
걸음을 서둘렀다.
빨리 3층으로.
층수를 오를수록 냄새가 더욱 짙어 지고 있었다.
“후후.”
여자의 높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제국 최강이라더니,별거 없잖아?” 나는 칼집에 손을 가져갔다.
언제라도 뽑을 수 있도록.
막사 3층의 복도에 을라,숨을 죽인
채 천천히 걸어갔다.
“그 잘난 백룡혈이,무의 아시니스가
이 정도였나?”
주륵.
인간의 팔로 추정되는 살더미에서 피가 뿜어졌다.
피는 복도의 하얀 카펫을 붉게 물들 이며 내 발밑까지 흘러왔다.
‘……하아.’
나는 이마를 짚었다. 복도에는 인간의 시체가 산을 이루고 있었다.
그중 형태가 보전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성별도,체격도,나이도 알 수 없다. 전부 믹서기에 갈린 것처럼 고 기토막이 되어 있었으니까.
나는 복도 구석에서 낯익은 반지를 발견했다.
반지를 주워들었다. 피로 범벅이 된 반지 표면에는 고풍스러운 글자로 _백 통의 좌수, 라다스테리’라고 씌어 있다.
나는 시체 더미를 자세히 살폈다.
뼈와 내장,살점과 핏덩이가 어지럽게 섞인 토막 안에서 은빛 갑옷의 파편을 찾을 수 있었다.
누구 것인지는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죽었다.
무언가 저항을 한 흔적도 없다.
단 한 순간에,여기 있는 모두와 함께
찢겨져 죽은 것이다.
“그러게 곱게 말할 때 이쪽으로 왔
어야지. 위대하신 황자 전하를 버리고, 그깟 배신자년한테 붙어먹어?”
여자의 목소리는 문 너머에서 들려 오고 있었다.
전략 회의가 벌어질 곳이었던 막사 3층의 별실 안쪽에서.
나는 문 옆의 벽에 슬쩍 선 뒤,조용히 검을 뽑았다.
’한 번에? 아니면 천천히?’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이내 무의미 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막사 앞에 있던 병사들의 반응과 복도 밖까지 울려오는 목소리.
이미 알고 있잖냐.
’에라이,망할.’
내가 이렇지,뭐.
쉽게 가는 법이 없어.
쾅!
나는 문을 걷어찼다.
부서진 나뭇조각과 함께 문이 활짝
열렸고,별실의 풍경이 드러났다.
“억,허억,끄으윽……
누군가 바닥을 기고 있었다.
옷은 거의 다 찢어져 반나체가 된 상태.
하얀 머리칼의 반이 불에 랐고,깨진 가면 안쪽으로 피투성이가 된 얼굴이 엿보였다.
델핀이 었다.
“기어라. 그래,계속 기어. 벌레처럼. 구차하게 기어라! 아하하하하!”
그 뒤를,짙푸른 로브를 눌러쓴 한 여자가 지켜보고 있었다.
[Danger!] [슈텐베르크의 가주] [페르세네 리델 폰 스트라베론 Lv.???]여자의 광기에 찬 눈이 나를 향했다.
뒤이어 붉게 덧칠된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이게 누구야. 우리의 영웅님 아니 신가.”
여자는 델핀에게 다가가더니,가볍게 손짓했다.
델핀의 몸이 보이지 않는 손에 붙들린 것처럼 떠올랐다.
“마침 처형식을 하고 있었지. 잘 왔다, 영웅님. 자칭 제국 최강이라는 년이 추하게 뒈질 거라서. 꽤 볼 만한 광경 이야.”
“놔라! 이놈,나는 아시니스의…… 아아아아아악!”
콰직.
델핀의 부서진 뿔 한쪽이 바닥에 떨 어 졌다.
뿔을 산 채로 잡아 뜯은 여자,페르 세네가 말했다.
“우리의 영웅님은 이런 상황에서도 눈 깜짝 안 하시네. 워낙 치열한 전투를 많이 겪어봐서 그런 걸까?”
‘슈텐베르크의 가주.’
네임 태그가 떠을라 있다.
그 손에는 날카로운 뿔의 파편이 들려 있었다.
“잘 봐둬.”
페르세네가 히죽 웃었다.
그 리고.
푹!
자신이 들고 있던 뿔을 델핀의 심장에 박아넣었다.
“러!”
델핀의 입에서 피가 튀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바닥을 굴렀다. 쾅!
델핀의 몸이 내가 서 있던 곳을 스쳐 지나갔다.
벽면에 깊숙이 처박힌 델핀이 꿈틀 거렸다.
“내가 명한다.”
〈죽어라.〉
페르세네가 가리키자,
과직!
델핀이 피곤죽으로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