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 Me Up! RAW novel - Gaiden 47
46. 잃은 것, 얻은 것
* * *
이튿날 저녁, 1파티의 훈련소.
나는 검을 무릎에 올린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네모난 방의 가운데에는 연습용 강철 인형이 놓여 있다. 그 밖의 장식은 없다. 이곳은 나를 위해 설치된 개인용 훈련 장소였다.
오늘은 특별한 훈련 일정이 없다.
앞으로도 당분간은 훈련이 없을 것이다.
내가 이 방에 온 것은 그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손해가 크군.’
35층 공략은 성공으로 끝났지만, 과정은 아쉽기 짝이 없었다.
유일한 원소술사였던 이올카가 죽은 것은 막심한 손해였고, 전력의 한 축을 담당할 예정이었던 3파티도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그 외에 30층을 거치며 성장하던 유망주들도 대다수가 허무하게 죽어 나갔다.
현 생존자는 1파티와 2파티가 네 명씩.
그리고 3파티의 키샤샤와 잔여 몇 명. 상당한 피해였다.
좋든 싫든, 전력 보충과 정비를 위해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뒷머리를 긁었다.
탑 재공략을 위해 필요한 예상 기간은 한 달 이상.
생각할수록 골치가 아파졌다.
이올카는 그렇다고 쳐도 3파티가 문제였다.
제나의 말에 의하면 키샤샤는 3파티의 숙소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3파티는 우리와도 비견될 만한 전력이었으나, 수상 환경이라는 패널티 및 여러 불운한 악재가 겹쳐 반파됐다. 인원 보충을 하고 싶어도, 인외 종족이 나올 확률은 극히 드물다. 실질적인 궤멸이었다.
숨을 낮게 내쉬었다.
해결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지만,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점검 후 시행하기로 했다.
철컥.
나는 칼집에서 검을 빼 들었다.
앞에는 강철로 만든 인형. 장비 제작소에서 혼신의 힘으로 만든 우수한 물건이었다.
나는 자세를 잡은 뒤, 옆으로 검을 그었다.
콰직! 불꽃이 튀며 인형의 가운데가 움푹 파였다. 그러나 그뿐. 수룡과 골렘을 한꺼번에 박살 냈을 때의 위력은 나오지 않았다.
익시드, 그리고 패검혼.
35층에서 내가 얻은 두 가지의 스킬이다.
익시드는 광폭성과 침착성, 여기에 불굴과 전투 속행이 더해졌고, 패검혼은 신검합일과 강격이 합쳐졌다. 둘 다 나만의 고유 스킬인 만큼, 원활한 활용을 위해서는 분석이 필요했다.
‘원래는 대련과 실전을 반복하면서 성능을 실험해야 했지만.’
나는 시야 우측의 홀로그램 창을 살폈다.
저번 업데이트에서 갱신된 패치 로그가 떠올라 있었다.
[편의성 업데이트, 그 첫 번째!] [영웅의 스킬이 궁금하시다구요? 공략을 뒤적거리는 것은 그만!] [스킬창이 보기 쉽게! 간편하게! 편리하게! 개편됩니다! Viva!] [ 1. 이제부터 스킬의 상세 스펙을 제공합니다. 상태창에서 스킬을 터치 후…….]편의성 업데이트.
내용을 살피자면, 여태껏 완벽히 알 수 없었던 스킬의 세부 효과를 안내한다는 것이다. 번거롭게 공략 사이트의 스킬 데이터베이스를 뒤적거리며 고생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쓰여 있었다.
‘세상 많이 좋아졌네.’
나 때는 일일이 굴려봐야 했는데.
나는 격세지감을 느끼면서 상태창을 띄웠다.
[한 이스라트(★★★) Lv. 34(Exp 280/340)] [클래스 : 전사(Warrior)] [힘 : 75/75] [지능 : 10/10] [체력 : 68/68] [민첩 : 66/66] [보유 스킬 : 중급 검술(Lv.4), 익시드(Lv.1), 패검혼(Lv.1), 심안(Lv.6), 화염 저항(Lv.3), 용살(Lv.1)]일단 스킬창이 바뀌었다.
기마술이나 수중 전투와 같은 스킬이 다른 칸으로 사라진 것이다.
이제부터 그런 스킬은 보조 계통으로 분류되어 따로 볼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익시드’라 쓰인 글자를 터치한 뒤, ‘상세 내용 살펴보기’ 탭을 눌렀다.
[익시드(Lv.1)] [등급 : B+] [종류 : 고유(Unique)] [사용자의 신체를 폭주시켜 전투력을 끌어올린다. 단, 능력을 끌어올린 만큼 사용자의 생명력을 차감한다. 최대 사망까지 다다를 수 있다.] [속성 : 상태이상 면역, 전투 속행] [비고 : ‘한 이스라트(★★★)’의 전용 스킬]스킬의 효과는 예상 그대로였다.
전투력을 올리는 대신 신체에 부담을 준다.
심하면 죽을 수도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도 그럴 뻔했으니.
이어서 나는 패검혼을 살폈다.
[패검혼(Lv.1)] [등급 : B-] [종류 : 고유(Unique), 연계(Link), 양면(Double)] [패시브 : 평시 발동. 사용자의 검술에 위력 보정을 더한다.] [액티브 : 익시드 상태에서 발동 가능. 증폭된 모든 전투력을 한 점에 끌어모아 관통형 참격을 날린다. 가한 데미지의 일부는 사용자가 입는다. 최대 사망까지 다다를 수 있다.] [속성 : 고정 데미지] [비고 : ‘한 이스라트(★★★)’의 전용 스킬]설명 한 번 살벌하다.
두 스킬 모두 잘못 사용했다가는 죽을 수도 있다니.
다만 그만큼 위력은 확실하다.
직접 겪었으니 부정할 수 없었다.
고유 스킬.
해당 영웅의 컨셉이자 아이덴티티였다.
한계 돌파로 얻을 수 있으며, 일반 스킬보다 몇 배는 막대한 잠재력을 갖추고 있다.
영웅을 육성할 때 내가 가장 신경 썼던 부분이었다.
스탯은 기초일 뿐, 결국 영웅의 최종 성능은 스킬들이 어떻게 맞물려 시너지를 발휘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나는 검을 바로잡은 채 하체를 낮췄다.
기본적인 자세. 다리와 허리에 탄력을 주며 손을 움직였다.
동시에 광폭화를 쓰는 느낌으로 머릿속의 스위치를 올렸다.
‘떠라.’
[‘한(★★★)’이 익시드 상태에 돌입했습니다!]우드득.
뼈가 어긋나는 느낌이 들더니, 강렬한 통증이 몸을 휘감았다.
전신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감각. 상태창으로는 알지 못했던 익시드의 리스크를 실감할 수 있었다.
“큭!”
나는 주춤거리며 익시드를 해제했다.
온몸이 불이 붙은 듯 뜨거웠다.
‘내구성을 깎아 먹는 스킬이다.’
오래 유지할 수 없다.
35층에서는 각성의 여파로 어떻게 됐다고 해도, 다음부터는 쉽게 가지는 못할 것이다. 한 번 쓸 때마다 목숨을 걸어야 했다. 나는 저릿한 손목을 어루만졌다.
‘길어야 10초인가.’
그 이상 발동시키면 생명이 위험해진다.
지속 스킬이었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일시적으로밖에 활용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의자에 주저앉은 뒤 활용법을 떠올렸다.
‘임무의 마무리 단계에서, 익시드를 발동한 다음 패검혼으로 넘어가는 수밖에 없겠군.’
일종의 필살기였다.
확실히 끝낼 수 있을 때 사용하는.
‘이거 원.’
완전 자폭기잖냐.
비슷한 스킬이 나올 거라고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나는 다시 일어났다. 조금 더 정밀한 계산이 필요했다.
‘한 번 더.’
[‘한(★★★)’이 익시드 상태에 돌입했습니다!]차가운 불이 전신을 휘감았다.
나는 피가 나도록 이를 악문 채 다음 동작을 준비했다.
검자루를 부서지라 쥐고, 끝까지 평정을 유지하며 검을 휘둘렀다.
쾅!
폭탄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전방의 강철 인형이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강철을 부수고도 모자랐는지 정면의 금속 벽에 깊은 칼자국이 새겨졌다. 나는 검을 내팽개쳤다. 그리고 대자로 쓰러졌다.
‘……하아.’
까다롭군.
현기증이 났다.
스킬의 위력은 우수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는 스킬의 모든 잠재력을 끌어낼 수 없었다.
결국,
‘반동을 견딜 수 있을 만큼.’
몸을 강하게 만든다.
이미 신체는 초인의 경지에 들어섰으나, 터무니없이 모자랐다.
몸의 내구도를 대폭 증가시키는 스킬이 필요했다.
몸을 극단적으로 혹사할 필요가 있다.
고통 내성 훈련은 우습게 여겨질 만큼.
나는 내일의 일정을 짜면서 몸을 일으켰다.
[로키! 전할 소식이…… 으와아!]바로 옆에서 나타난 이셀이 비명을 질렀다.
[몸이 왜 피범벅이야? 방은 왜 또 이렇게 난장판이고!]“훈련을 하다 보니.”
[대체 무슨 훈련을 하길래 이래!]“이런 게 한두 번도 아니잖아. 무슨 일이냐?”
나는 흐트러진 방을 대충 정리한 뒤 벨트에 칼집을 찼다.
이셀은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나를 보았다.
[저번에 그랬잖아. 마스터가 공략 영상을 올리면 알려달라고.]“그랬었나.”
[똑똑히 기억한다구. 그래서 내가 매의 눈으로 매일 뮤튜브를 보고 있었거든.]“암케나가 영상을 올렸어?”
이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상을 올리긴 했어. 35층은 빼고 말이야.]“35층은 뺐다?”
암케나가 영상을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15층.
그렇다면 15층과 20층을 올렸다는 뜻인가. 하지만 35층은 제외. 막대한 피해를 입기는 했다. 그래도 긴박감으로 따지면 꽤나 인기가 많을 법한 영상이었는데.
[아무튼 보여줄게.]이셀이 팔을 원으로 내저었다.
[하아앗! 요정 파워!]시야 오른쪽에서 빛이 모여들더니, 인터넷 창이 떠올랐다.
붉은 사각형에 재생 모양의 삼각형. 뮤튜브의 아이콘이었다.
나는 커서를 조작해서 암케나의 채널로 들어갔다.
과연.
새로운 사진과 동영상이 업로드되어 있었다. 나는 맨 앞에 있는 영상을 터치했다.
영상은 별거 없다.
15층과 20층을 공략하는 내용.
‘조회수가 꽤 많네.’
30만을 넘겼다.
나는 무감정한 표정으로 영상을 넘겼다.
[보면 볼수록 저 영웅이 잘하긴 하네요. 엄청 강하진 않지만, 룰을 잘 이해하는 느낌입니다. 위험한 것 같으면서도 지나고 보면 쉽게 클리어. 잘 봤습니다.]└
[엄청 강하진 않지만? 얼마나 쎄야 강한 거임? 제 눈으론 최소 4성 이상인데요.]└
[위엣분은 진짜 괴물을 못 보셨나. 로키 영상이나 보고 오셈. 시리스 혼자서 다 쓸어먹으니.]└
[그건 로키가 잘 키운 거고요. 초기 영상 보면 시리스도 구려요. 그런데 얘는 저렙부터 이렇게 해먹잖아요. 태1성 아님? 얘가 더 괴물인데요.]└
[시리스 겨드랑이 핥고 싶다. 핥핥!] [35층 영상 없나요? 35층도 박살 냈을 거 같은디. 빨리 올려주십셔!]└
[30층 올린 후로 꽤 지나지 않았나. 죽은 거 아녜여?]└
[그럴 수도 있음. 이 분은 버스만 탈 줄 알지 아무것도 안하자늠. 영웅이 아무리 잘해도 혼자서는 한계가 있죠.] [누군 하루종일 빡세게 굴려도 영웅이 후져서 20층에서 구르고 있는데. 누군 운빨 잘 타서 영웅 하나로 수직 등반하네. 이게 게임이냐? 뫼비우스 안 망하냐?]└
나는 스크롤을 쭉 내렸다.
댓글의 반응은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었다.
다음 영상을 빨리 올려달라. 운 하나는 정말 잘 타고났다. 마지막으로, ‘영웅이 아깝다.’
댓글의 후반부에는 마스터에 비해 영웅이 아깝다는 의견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뒤에서 뭐하냐. 쓸데없는 형광봉은 왜 흔드냐. 스샷은 왜 찍냐. 몇 명의 적극적인 선동이 이어진 후로는 인신공격에 가까운 수준으로 댓글창이 더러워졌다.
[흥! 멍청한 것들. 부러워서 그런 거야. 자기는 로키 같은 영웅이 없으니까, 질투하는 거라구.]이셀이 볼을 부풀렸다.
아이디가 롤리팝이었나.
팩트 폭력을 뼈아프게 날리기는 했다.
댓글을 올린 목적이 다소 구린 것 같지만.
‘뒤에서 아무것도 안 한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마스터는 임무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는 못해도, 다른 방식으로 영향을 끼칠 수는 있었다.
전술소.
마스터가 임무에 관여할 수 있는 시설이었다.
다만 이는 양날의 검.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오지랖을 부리겠다고 파티를 전멸시키는 마스터를 나는 수십 번이나 봐왔다. 그래서 지금까지 암케나에게 별말 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35층에서 실패를 겪은 이후로, 나도 약간은 생각이 바뀌었다.
나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인터넷 창을 닫았다.
[픽 미 업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그와 동시에 암케나가 접속했다.
[로딩이 끝났습니다.] [T O U C H !(선택)]암케나는 접속하자마자 시설 탭으로 들어갔다.
유달리 빠른 터치. 감정이 느껴졌다.
[시설을 구축합니다. 원하시는 시설 종류를 터치해주세요.] [‘전술소 Lv.1’를 선택하셨습니다. 해당 건물을 지으시겠습니까?] [Yes(선택) / No]암케나는 망설임없이 ‘Yes’를 터치했다.
‘버스충이라고 해서 열 받았냐?’
나는 씨익 웃었다.
광장 전체가 떨리기 시작했다.
시설이 건설될 때의 현상이었다. 나는 팔짱을 낀 채 완성을 기다렸다.
잠시 후,
[전술소가 완공되었습니다! ‘전술’ 탭이 개방됩니다.] [마스터, 이제부터 전술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Tips/전술은 임무 내에서 제한적으로 활용이 가능합니다.] [※알림!] [전술에 대하여] [화면 하단의 ‘전술’을 터치하여 발동하세요. 영웅에게 특정한 신호를 줄 수 있습니다.] [임무 초반에는 마음껏 사용하실 수 있으며, 본격적으로 임무에 돌입하면 패널티가 더해집니다. 제한된 기회를 신중하게 활용하세요. 전술소의 레벨을 올릴수록 보다 다양한 기능이 추가됩니다.]나는 시야 우측을 보았다.
암케나의 조작 화면, 대기실의 시공의 틈에 새로운 시설이 들어서 있다.
작은 방에 놓여 있는 소형 탁자와 지도. 전술소였다.
암케나는 도움말을 살펴보는 중이었다.
한 번에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꽤나 복잡하니까.
‘어떨지 모르겠네.’
전술은 적시적소에 활용하면 임무의 클리어를 결정짓는 신의 한 수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잘 썼을 때의 이야기. 픽 미 업 전체를 통틀어 전술을 제대로 쓸 수 있는 마스터는 얼마 되지 않는다.
‘전투의 흐름을 잡을 수 있느냐, 없느냐.’
임무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어디가 위험하고 무엇이 필요한지.
이 점을 알 수 없다면 돼지 목의 진주일 뿐이다. 파티를 날려 먹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물론, 대부분의 마스터는 멍하니 화면을 보는 게 일상이기에 임무의 맥을 잡지 못한다. 요즘 추세도 전술소는 버려둔 채 영웅에게 공략을 맡기는 거였고.
나는 35층의 상황을 다시 떠올렸다.
1파티가 수중에서 보스와 싸웠고, 다른 파티는 배 위에서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내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사고가 일어났다.
당시 에디스는 지휘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영웅의 시야는 마스터에 비해 제한되어 있어, 눈앞의 몬스터를 막아내는데에 급급했을 것이다.
만약 그때 전술소가 있었다면, 당시의 마스터가 나였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임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전술은 큰 폭으로 제한된다.
기껏해야 화살표를 띄우거나 모이라는 표시를 하는 것 정도.
그러나 대피 신호만 줬어도 희생은 큰 폭으로 줄었을 것이다.
‘……일찍 깨달았다면.’
무언가 달라졌을지 모른다.
잃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나는 임무의 모든 것을 혼자서 짊어지려고 했었다.
‘비공정을 빨리 회수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올카를…….
“…….”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끝난 일. 시간 낭비였다.
[전술소라니. 쓸데없는 걸 만들었네! 훼방이라도 놓으려고?]이셀은 화면을 보며 툴툴거리고 있다.
암케나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왜 그래. 본인이 하겠다잖냐.”
[마스터는 위에서 보기만 하잖아. 현장에 대해 뭘 알겠어?]“나도 그랬는데.”
[로키는 달라. 전술은 로키 말고는 쓰면 안 돼.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면 가랑이가 찢어진다구. 로키한테 맡기면 알아서 깨줄…….]“미안하지만, 조금 생각이 바뀌었다.”
[……어?]나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멍한 눈으로 이쪽을 보는 이셀을 내버려 둔 채 개인 훈련실을 나섰다.
캉! 캉캉!
대련장에서는 한창 벨키스트와 네리사가 검을 섞고 있었다.
양측 다 몸에 피를 흘리면서도 개의치 않는다. 실전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싸움이었다. 나는 힐끗 바라보다가 광장으로 나왔다.
전술소로 향하는 문은 시공의 틈 왼쪽에 설치되어 있었다.
나는 계단을 내려가 시설 안으로 들어갔다. 원형의 탁자에 백색의 지도가 놓여 있다. 탁자 앞의 의자에 앉았다.
‘실력 한번 볼까.’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마스터, ‘한(★★★)’이 모의전을 제안합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Yes / No]모의전.
전술소를 설치하면 열리는 일종의 미니게임이었다.
플레이어는 두 명. 각각 영웅과 몬스터 진형으로 나뉘어 플레이한다. 임무와 흐름이 비슷하며, 모의전을 통해 전술 능력을 점검하고 단련할 수 있었다.
잠깐 고민하던 암케나는 ‘Yes’를 터치했다.
[빠라밤!] [모의전을 시작합니다!] [종류 – 1 VS 1 : 인공지능과의 대결]‘인공지능이라니.’
나는 쓴웃음을 머금고는 게임을 준비했다.
[Now Loading…….] [맵을 구성하는 중입니다.]탁자 위의 지도가 바뀌었다.
사각형의 모형 필드가 만들어졌고, 검은 말과 하얀 말이 양측에 생겨났다.
‘검은 말이 몬스터, 하얀 말이 영웅.’
룰은 간단하다.
몬스터 측은 거점을 파괴하고, 영웅 측은 이를 지켜내면 된다.
다만 기본적으로 몬스터와 영웅은 인공지능에 의해 움직인다. 플레이어가 할 수 있는 일은 게임을 시작하기 전의 전략과 이후의 몇 가지 신호뿐.
[필드 구성 완료!] [마스터는 ‘영웅’입니다.] [잠시 후에 모의전이 시작됩니다. 준비하세요!] [게임 시작까지 60초!]탁자의 지도가 완성됐다.
나는 여기서 플레이하는 듯했다.
지도 옆에는 붉은 펜과 푸른 펜이 놓여 있다. 전술용 도구였다.
나는 지도를 살폈다.
거점은 중앙. 좌측에 오브젝트가 있다.
몬스터 진형은 필드의 하단에서 스타트하는 것 같다.
마스터였던 때와 달리 아날로그였지만 익숙한 방식이었다.
첫판이니 기초적인 전술을 쓰기로 했다.
대응하기도 아주 쉽다. 반 절씩 병력을 나눠 오브젝트와 거점에 투입하는 것. 나는 지도 위의 검은 말을 양분한 다음, 동그라미로 묶어 화살표를 그렸다. 인원의 진행 방향을 정하는 것이다.
‘이게 또 파고들면 심오하지.’
필드의 종류는 랜덤.
오브젝트의 효과도 랜덤이었다.
인원마다 세 가지의 직업으로 나뉘며 능력 또한 달랐다.
수많은 변수가 있고, 직업과 진형, 전략마다 물고 물리기 때문에, 픽 미 업의 마스터 중에는 모의전만 줄곧 파고드는 놈들도 꽤 많았다.
‘영광으로 알아라.’
국제 모의전 리그의 초대 챔피언에게 1 대 1 강습을 받는 건 너밖에 없을 테니까.
나는 피식 웃으며 말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10초 뒤 게임이 시작됩니다.] [준비하세요!]배치는 끝났다.
나는 손을 놓은 채 시작을 기다렸다.
[게임 시작!]덜컹.
지도 위의 검은 말이 흔들리더니 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몬스터를 형상화한 말들은 내가 지시한 대로 나아갔다.
그리고 10분 뒤,
첫 게임이 끝났다.
‘흐음.’
이건 꽤, 놀랍다.
나는 다음 게임을 세팅했다.
이번에는 전략을 바꾸기로 했다.
올인.
오브젝트는 포기한 채 거점에 모든 병력을 쑤셔 넣는다.
도박성 전략이지만, 머리를 잘 굴리는 상대라면 허를 찔리기 쉽다.
‘…….’
다시 10분이 흘렀다.
나는 다음 게임을 세팅했다.
이번에도 전략을 바꾸기로 했다.
[게임 종료!]그리고 결과가 나왔다.
나는 팔짱을 낀 다음 시야 우측을 보았다.
암케나는 모의전의 승패창을 뚫어지라 보고 있었다.
세 판의 모의전.
이 녀석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허접이다.
“……거참.”
첫 번째 판.
암케나는 거점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오브젝트를 손쉽게 점령한 뒤, 버프를 이용하여 거점의 수비벽을 뚫었다.
두 번째 판.
암케나는 모든 병력을 오브젝트로 출동시켰다.
30초도 걸리지 않았다. 나는 암케나의 거점에 무혈입성했다.
세 번째 판.
이번 게임에서는…….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손을 놓고 보았다.
인공지능에게 게임을 맡긴 것이다.
그래도 암케나는 졌다.
‘이 새낀…… 뭐지?’
어마어마했다.
타고난 게임 센스.
자동 진행보다 못하는 마스터는 처음이었다.
딱히 복잡한 기술을 쓰지도 않았다. 어차피 연습용 게임일 뿐. 한 번 보면 파훼법을 바로 알 수 있을 법한 전략만 골라서 썼다.
‘머리통에 인형 눈깔을 넣었냐?’
임무 영상을 수십 번이나 봤으면 감이 잡힐 만도 한데.
나는 혀를 차고는 지도를 접어버렸다.
[그러게 내가 뭐랬어!]빙그르르 돌며 나타난 이셀이 콧김을 뿜었다.
[레이싱 게임은 잘하는 거 같애. 다른 쪽으로는 바보라니까! 역시 임무에서는 로키가 전권을 담당해야 해.]“……하아.”
나는 한숨을 쉬었다.
예상외의 난관이었다.
한편 암케나는 메인 화면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아무 조작도 하지 않는 상태. 내가 다음 게임을 제안하는 것을 기다리는 듯했다.
그렇게 5분이 지나자, 암케나는 조작창을 움직였다.
[‘한(★★★)’에게 모의전을 제안합니다.]이셀이 멀뚱히 나를 보았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한(★★★)’이 모의전을 거절했습니다!]거절창을 닫은 암케나가 다시 터치했다.
[‘한(★★★)’에게 모의전을 제안합니다.]‘…….’
[‘한(★★★)’이 모의전을 거절했습니다!]고민하던 암케나가 재차 움직였다.
[선물 상점!] [5,000골드로 ‘군마 조각상’을 구매합니다.] [‘군마 조각상’을 ‘한(★★★)’에게 선물합니다!]뿅.
탁자 위에 군마 조각상이 생겼다.
이런 얄팍한 수에 넘어간다고 생각하는 건가.
‘딱 한 판만 해주마.’
나는 조각상을 품에 넣은 뒤 손가락을 튕겼다.
[빠라밤!] [모의전을 시작합니다!] [종류 – 1 VS 1 : 인공지능과의 대결]그리고,
탁자 위에는 수많은 군마상이 늘어서 있다.
도합 열 마리.
[이, 이건 좀 심하네…….]이셀이 뺨을 긁었다.
세 번째 판까지는 마스터를 비난하던 이셀이었지만, 일곱 판이 넘어가자 오히려 동정하기 시작했다. 한 판만 이기라며 응원을 하기도 했다.
암케나는 조작창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열 번을 내리 패배한 뒤로는 재도전을 걸어오지도 않았다.
[마스터, 접속을 종료하시겠습니까?] [Yes(선택) / No] [그럼 안녕히!]한동안 가만히 있던 암케나는 접속을 끊어버렸다.
이셀이 턱을 괸 채 말했다.
[뭐가 문제일까? 재능이 없어서?]“글쎄다.”
열세 판.
나는 암케나의 플레이 기록을 되짚었다.
일단 배울 의지는 있다.
골드를 소모하면서까지 재도전을 했으니.
최소한의 조건은 성립한 셈이었다. 다만 결과가 따라주지 않았다.
‘이상한데.’
아무리 인형 눈깔이라고 해도, 그렇게 임무 영상을 봤으면 무언가 깨닫는 게 있을 터.
하지만 암케나와 상대할 때 나는 초짜와 붙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셀.”
[응?]“마스터가 올린 임무 영상들. 한 번 더 보여줘 봐.”
이셀은 눈을 깜빡였으나, 순순히 말을 따라주었다.
눈앞에서 5층부터 30층까지의 뮤튜브 영상이 빠르게 재생되었다.
[어때, 로키? 알 것 같아?]나는 창을 닫았다.
30층 영상까지 보자 알 수 있었다.
“이 자식은…….”
[응, 응.]“나만 보는데.”
10층까지는 화면을 돌리면서 다른 파티원을 살피기도 했다.
그러나 15층부터 포커스가 내게 집중되어 있다. 중요 오브젝트가 등장했을 때만 잠깐 바뀔 뿐. 임무 전체의 흐름을 되짚어야 할 마스터의 초점이 나에게만 향하고 있었다.
어째 스샷을 찍는 타이밍이 번개 같기는 했다.
시작부터 계속 보고 있었으니, 놓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를 제외한 멤버는 찬밥 신세였다.
기껏해야 1파티의 일원을 가끔 돌아보는 정도.
‘이러니 안목이 안 늘지.’
암케나는 버릇이 잘못 들었다.
다만 사전에 파악하지 못한 내 실수도 없지 않았다.
위를 올려보았다.
어두컴컴한 하늘. 암케나가 지금 느끼는 감정이 왠지 모르게 전해졌다.
결과가 안 나와서 시무룩해진 것이다.
‘도움이 되고 싶었나.’
35층을 보며 무언가 느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웃고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이셀, 한 번만 더 부탁해도 되냐? 인터넷을 쓰고 싶은데.”
[인터넷?]“메일을 좀 보내려고.”
나는 품에서 메모장을 꺼낸 뒤 글자를 적어 내리기 시작했다.
5층부터 30층까지의 전투 흐름을 상세히 해설하는 것이다. 내가 보낸 공략 문서와 대조하면 뇌에 우동사리가 들었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지금 당장,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내가 파티를 돌볼 수 없을 때. 공격대 전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
단 한 번을 도와줄 능력만 있으면 된다.
‘채널 구독자라고 둘러대면 되겠네.’
뭐, 재능이 없었다고 해도, 억지로 끌고 갈 생각이었다.
열 번으로 안 되면 백 번을 주입한다.
그래도 안 되면 천 번을.
머리통에 때려 박힐 때까지.
‘최고로 만들어준다고 했으니.’
어차피 해야 할 작업이기는 했지.
나는 웃으며 메모장에 글자를 써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