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 Me Up! RAW novel - Gaiden 68
67. 금화 한 닢
* * *
벨키스트가 탐험 던전에서 돌아올 때까지, 그 빈자리는 2파티의 베닉이란 영웅이 대체하게 되었다.
원래 벨키스트의 이탈 소식을 들은 에디스가 대타를 자원했지만, 그녀는 1파티를 제외한 모든 영웅들의 지휘를 맡은 몸이었다. 특별히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함부로 임무에 투입 시킬 수 없었다.
베닉은 20층 클리어 이후 2파티에 합류한 영웅으로서, 침착한 성품과 냉정한 상황 판단이 장점인 도적 클래스였다. 에디스가 추천한 인물이기도 했다.
적어도 1인분은 충분히 해주겠지.
‘싸울 일이 있겠냐마는.’
나는 위를 올려보았다.
[플로어 47.] [임무 유형 – 탐색] [목표 – 낯선 장소를 수색하라!]임무의 목표창이 떠올라 있다.
몇 번이나 겪어봤던 임무 유형인 탐색.
별다를 것도 없다.
‘정찰이라 이건가.’
현재 시각은 쨍쨍한 낮.
처음 소환됐던 공터에서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둡기 짝이 없다. 백 미터 위까지 뻗은 거대한 나무의 가지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는 탓이었다. 숲의 한중간인 이곳은 흡사 밤이나 다를 바 없는 환경이었다.
“꾸엑! 꾸에에에엑!”
나는 옆을 보았다.
덤불이 우거진 숲의 어둠 속, 몬스터들이 괴성을 지르고 있다.
놈들의 눈이 음침하게 번쩍거렸다. 아마 나와 저들의 사이에 투명한 벽이 없었다면, 지금쯤 나는 몬스터들과 대판 싸움을 벌이고 있겠지.
온전히 탐색만.
벽 바깥쪽에 있는 몬스터들은 영웅을 건드릴 수 없었기에, 영웅들은 필드의 안쪽 길을 거닐면서, 다음 임무에 나올 적들의 전력을 손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전통적인 방식의 임무였다.
‘보이는 건 전혀 그렇지 않은데.’
내 발밑의 낙엽이 바스라 졌다.
숲길 곳곳에 널린 낙엽은 까만빛을 띠고 있었고, 검은색으로 물든 나무들은 흉하게 구부러져 있었다.
그리고,
우오오오오오.
숲의 왼쪽 저편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몬스터가 배회하고 있었다.
나무 위로 튀어나온 몸체를 보니, 체구만 최소 30m 이상.
대형급이었다.
‘많아.’
그들은 숲 여기저기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잎이 울창한 나뭇가지가 사방에서 흔들렸고, 덤불이 쉴 새 없이 흩어졌다.
내가 놈들을 보고 있는 것처럼, 놈들도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수백 미터 전방, 고층 빌딩을 연상케 하는 둥그스름한 물체가 솟아 있었다.
맥동하는 듯이 껍질이 꿈틀거렸다.
부화가 얼마 남지 않았다.
멀쩡했던 숲이 한순간에 공포 체험의 장이 된 것은 저 알의 영향이었다.
‘타오니어에 있는 모든 몬스터들이 총출동했다고 봐도 되겠는데.’
알 근처, 높이 솟은 그림자들이 흔들거렸다.
수십에서 수백 마리의 대형 몬스터들.
그들은 침입자가 오기를 애태워 기다리고 있었다.
나무 틈새로 보이는 하늘에선 수많은 점들이 떠다니고 있다.
이번에는 비행형 몬스터들.
비공정의 천적이라고 불리는 것들이었다.
몇 마리지.
나는 지나오면서 봤던 몬스터의 머릿수를 얼추 세어보았다.
그 수는 십이나 백 단위가 아니었다.
천 단위.
숨어 있는 놈들까지 고려한다면, 만 단위일 수도 있다.
‘너무 많아.’
45층을 깬 이후 타오니어는 꾸준히 전력을 늘려왔다.
그 결과, 타오니어는 동레벨대에서는 비할 수가 없는 대규모 병력을 갖출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수백 명이었다.
구구콘은 그렇게 말했다.
임무에 간섭할 수 있는 황자가 위층에 있는 몬스터들을 이용했을 거라고.
50층만 깬다면 다음 임무들은 날로 먹을 수 있다.
‘말이야 쉽지.’
그 뜻은 곧 50층의 임무 난이도는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몬스터의 숫자만 많은 게 아니다. 나는 나를 쩔쩔매게 했던 두 명의 네임드 몬스터를 떠올렸다.
과거의 영웅이었던 수왕과 성녀. 그놈들도 50층에 출현할 확률이 높았다. 상황의 중대함을 따지자면, 80층의 보스인 황자까지도 모습을 드러낼지 모른다.
‘더 이상은 안 되는데.’
자원이 있어도 안 된다.
지금의 계정 레벨에서는 병력을 늘리고 싶어도 더 늘릴 수 없었다.
50층을 뚫고 연구를 거친 뒤, 시설을 한 차례 크게 더 확장 시켜야만 천 단위의 영웅을 굴릴 수 있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아시니스 가문의 빈자리가 아쉬웠다.
그들이 있었다면 훌륭한 몸빵 역할을 해줬을 텐데.
‘칩거 상태라고 했지.’
아시니스 가문을 다녀온 프리아가 내게 해준 말이었다.
46층, 우리의 도움으로 지상으로의 탈출에 성공한 프리아시스는 한 번 더 아시니스 가문을 찾아갔다고 한다.
그러나 아시니스의 가주는 후계자를 잃었다는 충격에 빠져 있었고, 더 이상 제국과 교단의 일에 끼어들지 않겠다고 봉문을 선언했다. 이제 아시니스는 전력 외나 다름없었다.
‘미안하다고 했던가.’
프리아에게서 그 말을 몇 번째 듣는지 모르겠다.
그들을 설득할 수 없었다며, 프리아는 내게 울음에 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1파티의 다른 멤버들과 함께 숲 외곽을 돌고 있었다.
“키익! 키킥! 킥킥킥!”
캉! 캉캉! 캉!
숲길로 나온 고블린들이 내게 이를 드러내고 있다.
놈들은 나와 몬스터 사이에 세워진 투명한 벽에 끊임없이 단검을 박아 넣었다.
소용없는 짓이었지만, 멈추지 않는다. 검날이 꽂힌 벽에서 파란 불꽃이 튀기더니 흩어졌다.
“까아악! 깍깍!”
[오염된 고블린 Lv.38] X 31초록빛을 띠고 있던 피부는 까맣게 변색 됐다.
몸 곳곳에서 흉한 혈관이 울룩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38레벨. 이곳의 몬스터들은 수만 많은 것이 아니라, 강함도 대폭 늘어났다.
‘……하아.’
한숨밖에 안 나온다.
현재의 전력으로는 저들과 전면전을 벌이지 못한다.
사용할 수 있는 전술은 비공정을 이용한 유인과 기동전.
전투를 최대한 피하고, 완성된 열쇠를 이용해 알을 빨리 제거할 수밖에 없다.
말이야 쉽지.
기동전이라는 것도 앞에서 버텨줄 만한 방패가 있어야 효과적인 법이다.
‘여기까지인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정찰이 가능한 한계 구역에 이르렀다.
더 이상은 투명한 벽 때문에 지나갈 수 없었다.
나는 한 번 더 숲의 풍경을 눈에 담아두고는 걸음을 돌렸다.
“그래서 오빠, 수가 얼마나 돼요?”
숲의 외곽에 있는 집합 장소.
제나가 내게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물어왔다.
“보면 알잖냐. 더럽게 많지.”
“무지무지 많나요!”
“고약한 냄새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을 지경이다. 숲 전체가 냄새투성이야.”
키샤샤가 코를 찡그렸다.
구석에 세워진 탐색 마법진을 점검하던 카티오도 입을 열었다.
“아마 숲 안쪽에는 교단군도 와 있을 거야. 몬스터와 교단군을 합치면 일만은 훌쩍 넘어가지 않을까.”
“일만 마리? 그건 좀…… 심하긴 하네요.”
“내가 어쩌다 이런 곳에 왔는지, 원. 사기도 제대로 당했다니까.”
카티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프리아는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다들 표정이 좋지 않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뭐 좋은 방법 없어요? 그 아시니스라는 곳에서 마음을 바꿔먹었다며, 도와줄 확률은 없으려나.”
그렇게 된다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지.
계승자와 파견대가 전멸당했다지만, 아시니스 가문이 망한 것은 아니니까.
프리아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아직도 많은 숫자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를 도와줄 생각이 없을 뿐이지.
“미안하다. 내가 좀만 더 설득을 잘했다면…….”
프리아가 고개를 숙였다.
“네 탓이 아니야. 상황이 꼬였을 뿐.”
타오니어의 원래 시나리오라면, 우리는 든든한 아시니스의 대부대와 함께 임무 공략을 진행했을 것이다.
그런데 45층에서 델핀이 죽으면서 일이 크게 꼬여버렸다.
혹시 층을 넘기면서 역사가 수정되고, 델핀이 살아나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아시니스 파견대가 전멸했다는 스토리는 그대로였고, 프리아의 말을 따랐다가 후계자를 잃은 아시니스는 그녀를 불신하게 되었다.
“이제 좀 싸운다 싶은 곳은…… 다 우리 적 아니야?”
카티오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에 속한 단체들.
4대 가문 중 세 곳은 처음부터 적 진형.
제국의 근위대와 교단의 병력 또한 적이었고, 유일하게 중립적이었던 아시니스도 돌아섰다.
타오니어에 존재하는 모든 대형 무력 집단이 우리에게 등을 돌린 셈이다.
“미치겠네, 이거. 어떡해야 해.”
카티오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일단 침착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적이 한두 번도 아니고 말이죠. 안 그래요?”
“그렇기야 하지만…….”
“차차 찾아보면 방법이 있을 거예요. 정 안되면 우리끼리 하면 되죠. 그렇게 열심히 준비했는데, 설마 지겠어.”
“한 번 더 상황을 분석해봐야겠어. 어디 보자…….”
1파티의 멤버들이 열띤 토론을 나누고 있다.
한 발짝 물러서 있던 나는 이내 바깥으로 물러섰다.
“어디 가요?”
제나가 물어왔다.
“바람 좀 쐬러.”
나는 대충 답하고는 숲의 바깥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좁은 곳에서 끙끙거려봤자 답이 안 나오니까.
지구에서도, 나는 공략이 막힐 때면 산책을 나서곤 했다.
‘좀 낫군.’
숲의 안쪽은 어두웠지만, 바깥쪽은 그나마 괜찮았다.
햇빛도 잘 들어오고, 나무와 잎도 초록빛을 띠고 있다.
그나마 숲을 거니는 모양새가 난다.
숲 외곽도 갈 수 있는 곳과 갈 수 없는 곳이 나뉘어 있었다.
나는 아름드리 나무의 뿌리와 덤불을 헤치며 바깥쪽으로 나아갔다.
아직 임무가 종료될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되는 데까지는 움직여볼 생각이었다.
‘여기도 몬스터가 있나.’
나는 발을 멈췄다.
멀리서 희미한 기척이 났다.
기척은 내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중이었다.
‘…….’
몬스터는 아니다.
그 사실을 눈치챈 나는 풀숲에 몸을 숨겼다.
약 5분이 흐르자, 기척의 주인이 정체를 드러냈다.
‘사람.’
두 명의 남자가 길을 걷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갈 수 없는 투명한 벽의 바깥쪽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교단군은 아니다.
그들은 잘 정돈된 가죽 갑옷을 차려입고, 허리춤에 무기를 차고 있었다.
왼쪽에서 걷는 남자는 높게 쳐봐야 20대 초반. 앳된 티를 벗지 못했다.
오른쪽의 사내는 시궁창에서 꽤나 굴러봤을 듯한, 험하기 그지없는 인상이었다.
“왜 이런 곳으로 온 겁니까요?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험한 인상의 사내가 투덜거렸다.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와 어투였다.
“딱 보면 수상하잖아. 저 이상하게 생긴 알이 평화를 가져다준다니. 누가 믿어?”
“교단의 말이 아닙니까. 우리 같은 잡배들은 따르는 수밖에 없잖슈. 그리고 꼭 조사하고 싶었으면, 부하들을 보내면 되지 않슈?”
“부하라니. 누가 부하야. 직원이라고 해야지.”
“그야, 우리가 형님 부하죠.”
“나보다 열 살은 많은 게!”
청년과 사내는 끊임없이 투닥거리며 숲길을 걸었다.
나는 청년 쪽을 살폈다. 험한 얼굴의 사내가 형님이라 부르고 있다.
신체의 균형이 제대로 잡혀 있었고, 걷는 자세도 흔들림이 없었다.
‘나름 강하군.’
분명, 오랫동안 훈련을 거친 놈이다.
덧붙여…… 뭔가 익숙하면서도 낯선 냄새가 난다.
말로 할 수 없는.
파지직.
나는 왼팔을 보았다.
검붉은 번개가 살짝 튀었다가 사라졌다.
‘…….’
갈색 꽁지머리.
쾌활한 인상의 청년이 숲 저편을 건너보더니 말했다.
“몬스터가 많아. 셀 수도 없을 만큼. 아주 바글바글해.”
“높으신 분들이 알아서 처리하지 않겠슈? 그러고 보니, 요즘 몬스터의 공격이 거의 없었잖수. 나으리들께서 이놈들 모아다가 한 번에 처리하려는 거 아니오? 평화 맞구만!”
“이건…… 냄새가 나는데.”
청년이 미간을 좁혔다.
“애들 모아서 공격이라도 하시려는 거요?”
“공격은 무슨. 저렇게 많은 놈들을 어떻게 잡아. 그냥 수상하다 이거지.”
“잡을 수 있지 않나! 형님이 누구야. 타오니어에 있는 모든 용병들의 우상 아닙니까! 10년도 안 되어 전 대륙의 던전을 제패한…… 크! 누구도 이룩하지 못한 업적이지. 그래서 나도 형님으로 모시는 거 아닌가. 형님의 말 한마디면, 타오니어에 있는 수천 용병들이 벌떼처럼 들고일어날 것이오!”
“시끄럽다.”
“요슈 형님!”
“형님이라 부르지 마.”
“그럼 용병왕!”
“누가 용병왕이야!”
“용병왕이라 부를 만한 놈이 형님 말고 누가 있슈?”
사내가 실실 웃었다.
용병왕이라 불린 젊은 청년과 험상궂은 인상의 사내.
두 명은 티격태격하면서도 숲의 안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나도 몸을 낮춘 채 그들을 따라갔다.
“그만두는 편이 나은 거 같수만. 더 들어갔다 놈들의 이목이라도 끌면 어쩔 셈이유? 몇 마리는 문제없겠소만, 이 숲의 모든 몬스터가 몰려들면 골치가 아파지지 않나.”
“그 평화를 가져온다는 알만 보고 나갈 거야. 여기선 안 보이잖냐.”
“어휴, 알이 어쨌건 저쨌건 뭔 상관인지 모르겠네.”
“먼저 돌아가도 상관없다만?”
“내가 어찌 형님을 두고 돌아가겠소? 형수님한테 무슨 구박을 받으려고.”
“그럼 잠자코 따라오기나 하셔.”
두 명은 숲의 울창한 가지와 덤불을 헤치며 앞으로 움직였다.
청년의 말대로, 여기선 숲 가운데에 우뚝 선 알이 보이지 않는다. 거대한 나무들이 천장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5분 정도 걷다 보면, 휑하니 뚫린 공터가 보인다. 그곳에서 저들은 알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대륙에 평화를 불러오는 물건이랬나.’
제국과 교단은 알에 대해 그렇게 공표했다.
글쎄, 평화라는 단어가 싸그리 다 뒈지는 것을 의미한다면 맞는 말이겠지.
“기척은 많은데, 몬스터가 덤벼들지 않아.”
청년이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형님에게 쫀 거 아니오?”
“쫄기는. 그보다 형님이라 부르지 말랬지. 사장님이라고 부르랬잖아.”
“그 이상한 호칭은 통 익숙해지질 않는구먼.”
“언제까지 구세대적 호칭에 붙잡혀 있을 거냐. 이쪽도 변화가 필요해.”
“알았수, 사장님.”
사장이라.
나는 피식 웃었다.
평범한 용병 나부랭이는 아닌 모양이다.
‘요슈 형님.’
사내가 청년을 그렇게 불렀었지.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어감이었다.
나는 그들을 몇 분간 쫓으며, 잊혀진 기억들을 하나둘씩 끄집어냈다.
결론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왔다.
“…….”
요슈.
처음으로 갔던 탐험 던전의 한 도시에서 내가 정보를 샀던 꼬맹이다.
기막힌 사업 아이템이 어쩌고 하면서 금화를 구걸했었지.
자꾸 귀찮게 하길래 한 닢을 주고 돌려보냈다.
‘어이가 없군.’
그때 이후로 대기실의 시간은 반년도 흐르지 않았지만, 타오니어 안쪽은 다른 듯했다.
내 허리에나 닿을 듯했던 꼬마는 몰라볼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물론 그보다 더 놀라웠던 점은 따로 있다.
‘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도와줬던 꼬맹이가 거물이 되어 나타났다?’
그것도 도움이 필요한 이때에, 보란 듯이 등장했다.
소수점 이하의 확률.
우연에 우연이 몇 번이나 겹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단순한 우연은…….’
아니겠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현실에 한없이 가깝다고 해도 이 세계는 결국 게임이었다.
‘시스템의 보정이 들어갔다 이거군.’
원래 있었어야 할 지원군이 사라졌다.
따라서 영웅의 임무 수행을 도울 NPC 무리를 새로 채워 넣었다는 뜻인가.
그리고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 보스 스테이지 전의 탐색 임무에 등장시킨 것이고.
‘벗어날 수 없구나.’
황자와 떨거지들이 뒤엎으려 아무리 발악해도 룰은 변하지 않는다.
공략할 수 없는 임무는 성립 불가. 어떤 어려운 임무라도 공략은 존재한다.
놈들은 잠깐 상황을 꼬이게 했을 뿐, 이 세계는 여전했다.
“저게…… 알.”
숲 외곽의 공터.
청년이 멀리 우뚝 솟은 알을 보며 중얼거렸다.
사방에 널린 몬스터들은 청년과 사내를 습격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공격할 수 없는 것이겠지.
“생긴 거 한번 끔찍하구만.”
사내가 토해내듯 말했다.
크기만 수십 미터. 알의 투명한 겉껍질에서는 회백색 육질이 꿈틀거리고 있다.
그리고, 껍질 중간에는 실핏줄이 사방으로 퍼진 빨간색 눈알이 흔들리고 있었다.
알을 한동안 응시하던 청년이 눈썹을 찌푸렸다.
“제대로 알아봐야겠어.”
“알아봐서 뭐할 생각이유?”
“제국과 교단은 숨기는 게 너무 많아. 황녀를 갑작스레 수배한 것도 그렇고, 이번 건도 그렇지. 우리 같은 평민들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고 있잖아.”
“만약 높은 분들이 구라를 친 거라면?”
“그때는…….”
청년은 머뭇거리다 입을 닫았다.
뒤이어 고개를 털었다.
“일단 돌아가자.”
청년이 등을 돌렸다.
점차 그 뒷모습이 멀어져갔다.
두 명이 점으로 바뀌어 사라진 다음에야 나는 풀숲에서 몸을 일으켰다.
임무의 클리어창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 정도면 정찰은 충분히 다한 것 같은데.
‘아니.’
클리어창이 뜨지 않는 걸 보니,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는 거겠지.
나는 어깨에 내려앉은 나뭇잎을 쓸어내린 뒤 멤버들의 집합 장소로 향했다.
“이렇게 되면, 일점 돌파밖에 답이 없겠어.”
“일점 돌파?”
“비공정 선단을 송곳 진형으로 만든 뒤, 몬스터의 대군을 뚫고 지나가는 거야. 전면전이 안 되잖아. 알까지 최대한 빨리 가서 일을 끝마치는 거지.”
“그건 좀…… 희생이 있을 거 같은데요.”
“병력의 반절 이상이 사라지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제나와 카티오가 임무 공략법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다.
몬스터들을 무시하고, 알까지 돌파한 뒤 목표 수행. 내가 계획하고 있던 전략 중 하나였다.
나는 묵묵히 단검날을 갈고 있는 베닉과 하품을 하는 도중인 키샤샤를 지나쳤다.
“…….”
프리아시스는 아름드리나무의 밑동에 걸터앉아 있었다.
가지런한 은빛 눈썹을 좁힌 채, 한눈에 봐도 우울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다.
“아, 한…… 왔구나.”
나를 발견한 프리아가 살짝 웃었다.
그러더니 억지로 목소리의 톤을 높였다.
“나한테 무슨 용무인 게냐? 어차피 난 그대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느니라.”
“해줄 만한 게 없진 않지.”
“내겐 싸울 만한 실력이 없다. 검 연습은 꾸준히 해왔다만, 너와 비교하면 달 앞의 반딧불이야.”
그거야 당연하다.
스킬과 각인의 보정을 받는 영웅들의 성장 속도는 NPC와 비할 수 없으니.
프리아도 수년간 검술 연습을 해왔지만, 기껏해야 몬스터 한두 마리가 한계였다.
“내 모자란 검이라도 빌릴 셈이냐? 아니면…… 어깨가 쑤시느냐? 내게 안마라도 받아볼 테냐?”
프리아는 장난스러운, 그러나 씁쓸함이 묻어나는 미소를 지었다.
“필…….”
필요 없다고 대답하려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예전이 이랬다가 유르넷에게 구박을 받은 적이 있었다.
사람 마음을 너무 몰라도 모른다고 했던가.
“이리 오거라.”
프리아가 손으로 자기 옆을 두드렸다.
말없이 앉자 프리아는 내 어깨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 어깨에 타오니어의 미래가 달려 있다. 제대로 풀지 않으면 큰일 나는 것이야.”
별로 느낌이 오지 않는다.
깃털이 내려앉은 것 같았다.
“예전 기억이 나는구나.”
프리아가 속삭이듯 말했다.
“황자 전하의 어깨도 이렇게 두드려드리곤 했었지. 내 안마가 가장 기분이 좋다고 하셨는데. 지금 그분은 무얼 하고 계실지 모르겠구나.”
“살아 있기야 하겠지.”
“그럼 다행이니라. 황궁에 들어간 지도 십 년 가까이 지났어. 얼굴이라도 한번 뵈었으면 좋으련만.”
황자의 얼굴이야 곧 볼 수 있겠지.
네가 기대하는 모습은 아니겠지만.
“잘 들어, 프리아.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어.”
“후후, 안마만은 자신 있다. 다섯 명 모두에게 해주라는 것이냐?”
프리아는 날개뼈 부근을 콩콩 두드려갔다.
“……용병왕이라고 들어본 적 있냐?”
“으음, 용병왕이라. 기억이 날 것 같기도 하다. 아! 술집의 음유시인에게 들었지. 동료들과 함께 전 대륙의 던전을 제패했다더구나. 그런데, 그게 무슨 일인가?”
“너는 곧장 이 길을 떠나서, 용병왕이란 놈을 포섭해와.”
프리아의 손이 멈췄다.
나는 말을 이었다.
“놈은 용병계에 상당한 지분이 있는 것 같다. 이쪽으로 꼬신다면, 이번 전투에서 지원군을 노려볼 수 있겠지. 보다시피, 우리는 여길 나갈 수 없어. 임무에 묶여 있거든. 네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야.”
“…….”
“안 되겠냐?”
나는 앉은 채로 프리아를 돌아보았다.
프리아는 눈을 쉴 새 없이 깜빡이고 있었다.
“내게…… 그자를 데려오라는 것인가?”
“그래.”
“듣기론 수많은 거부들이 그자와 계약하겠다고 했지만,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 거물이 폐황녀에 불과한 나와 이야기를 해 주겠는가? 안 될 것이다. 내게는 돈도 명예도 없어. 나는 고작, 힘없는…… 큭!”
프리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하다. 나는…… 또 도망치려 했구나.”
“힘들면 안 해도 돼. 다른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
“아니다. 내가 가 보겠다.”
“그 녀석은 여기 근처에 있을 거야.”
“당장 찾겠느니라!”
프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바깥으로 이어진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곧장 용병왕을 찾아보려는 듯했다.
‘너무 무모하잖냐.’
나는 입을 열었다.
“프리아.”
“……?”
“그놈에게, 한 이스라트가 금화 한 닢의 빚을 받으러 왔다고 해.”
“금화 한 닢?”
“말하면 알 거야. 나머지는 네 몫이다. 기대할게.”
등을 돌리고 있던 프리아가 잠깐 움찔거렸다.
나는 피식 웃고는 말했다.
“힘내라.”
프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뒤 앞으로 나아갔다.
그와 동시에, 빛이 몸을 휘감았다.
[스테이지 클리어!] [‘제나(★★★★)’, ‘키샤샤(★★★★)’, 레벨 업!] [보상 – 300,000G, 숲의 정수(중급) X 3, 널판지(A) X 13] [MVP – ‘한(★★★★)’]스테이지 클리어의 메시지가 떴다.
뒤를 돌아보니, 멤버들이 차례대로 대기실로 복귀하고 있었다.
‘곧이군.’
50층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쉬고 있을 시간이 없다. 나는 대기실로 돌아가서 할 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빛의 입자가 몸을 뒤덮어갔다.
[Now Loading…….]‘……?’
귀환을 준비하던 도중, 갑자기 눈앞에 낯선 메시지가 떠올랐다.
[복구중…….] [서버에 오류가 생겨 접속이 끊겼습니다. 잠시 기다려주세요.]치직.
바람에 흔들리던 나뭇잎이, 그 자리에서 멈춰섰다.
숲의 풍경이 차디찬 잿빛으로 변했다.
이 상황은 처음이 아니다.
예전에 한 번 겪은 적 있었다.
10층. 텔이 직접적으로 임무에 개입했었을 때.
‘누군가 있다.’
나는 뒤를 돌아보려 했다.
「그대로 있거라.」
정체불명의 목소리.
성별도, 어조도 특정할 수 없다.
「저 아이의 안마를 받아본 지도…… 오래되었구나.」
“……뭐냐.”
「장기판의 말로 마주치기 전, 잠깐의 인사일 뿐이다.」
인사라고?
「서로 기구한 운명이구나.」
눈앞에 붉은 붕대가 살짝 스쳐 갔다.
「한 이스라트, 우리는 너의 자격을 시험하고자 한다. 네가 정녕 탑을 정복하고 싶다면, 뫼비우스의 감춰진 진실을 알고 싶다면, 닥쳐오는 부조리를 뛰어넘어 보거라.」
“…….”
「네가 만약 실패한다면…… 이런 망가진 세계는, 내가 부숴버리겠다.」
치직.
풍경이 제 색깔을 되찾았다.
[복구 완료!] [서버에 재접속합니다. 이용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나는 즉각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낙엽이 쌓여 있을 따름이었다.
‘선전 포고라도 하러 왔나.’
황자가 간섭력을 쓸 수 있다는 말은 정답인 것 같다.
잠시나마 텔의 행동을 흉내 냈으니.
부숴버린다.
그것이 페르세네가 말했던 해방인가.
폼을 잔뜩 잡았던 거 같은데, 어쨌건 상관없다.
‘황자가 50층에 나온다는 거군.’
레벨 차이가 나는 만큼 황자가 직접 전투에 나서지는 않겠지만, 멀리서라도 귀찮게 굴기는 할 것이다.
내가 놈이었다면 이런 힌트는 절대 안 줬을 텐데.
빛이 몸을 뒤덮었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차원의 틈에 돌아와 있었다.
나는 앞을 살펴보았다.
방 가운데의 거울이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탑을 등반, 세상을 구원하라.
마스터였던 시절에도, 영웅이 된 지금에도 수천 번이나 봤던 문구다.
아주 질려버릴 정도로.
“오빠, 뭐해요?”
“아무것도.”
바깥에서 제나가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보고 있다.
나는 머리를 젓고는 광장으로 따라 나갔다.
할 일은 많다.
50층이 코 앞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