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datory Soul RAW novel - Chapter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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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샤칸의 반응에 변경백은 기뻐했다. 시종일관 여유롭던 그에게 한 방 먹였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신나서 말을 이어갔다.
“에스티아에서는 약혼자와 첫 춤을 춰야 합니다. 오래된 예법이니 왕께서도 존중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는 한껏 거만한 어조로 제 딴엔 멋지다고 생각하는 대사를 날렸다.
“이곳은 에스티아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상대는 이샤칸이었다. 이샤칸은 변경백이 주절대는 말을 끝까지 들어준 뒤, 짤막히 되물었다.
“그래서?”
“…….”
당황한 변경백이 입술을 뻐금거렸다. 대답하지 못하는 그를 내려다보며 이샤칸은 말문을 열었다.
“쿠르칸을 위한 환영연회에서.”
한층 낮아진 목소리였다. 듣는 이가 절로 몸을 움찔할 만큼 저음이 바닥에 내리깔렸다.
“쿠르칸의 왕인 내가 원하는 이와 춤조차 출 수 없다라…….”
반박하자면 얼마든지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법은 멀었고, 이샤칸은 가까웠다.
변경백을 포함하여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이샤칸은 느릿하게 말을 끝맺었다.
“에스티아는 손님을 이리 대하는가.”
그 순간 종전까지 이곳저곳에 흩어져 웃고 떠들며 연회를 즐기던 쿠르칸들이 일제히 행동을 멈추었다.
그들은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표정 없는 얼굴로 오베르데 변경백을 빤히 응시했다.
또렷한 수십의 눈동자들이 단 한 곳을 바라보는 광경은 기묘하고 섬뜩했다.
쿠르칸과 함께 어울리던 귀족들은 당혹스러워하다가, 이내 두려운 얼굴로 주춤주춤 거리를 두며 떨어졌다.
뒤늦게 인간이 아닌 존재와 어울리고 있었다는 이질감을 느낀 것이다.
오베르데 변경백의 관자놀이에서 굵은 땀이 흘러내렸다. 땀방울이 턱 끝에 맺혀 툭 떨어졌을 때, 이샤칸이 부드럽게 시선을 돌렸다.
변경백을 상대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장난스러운 눈빛을 하고서 레아를 향해 슬며시 웃었다.
“왕녀님께선 어찌 생각하시는지?”
그 순간 연회장 안의 사람들은 모두 한마음 한뜻이었다. 수많은 이들이 보내는 무언의 외침에 레아는 한숨을 삼켰다.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레아는 쿠르칸의 왕이 내민 손을 붙잡았다.
살갗에 닿는 열기가 뜨거웠다. 변경백이 이를 갈며 뒤로 물러섰다. 그는 레아와 이샤칸을 노려보다 어디론가 사라졌다.
레아는 이샤칸과 연회장 중앙에 나란히 자리하였다. 함께 있는 모습이 마치 검은 밤하늘에 박힌 은빛 달과 같았다.
이샤칸은 짙은 흑갈색 머리카락과 어두운 피부를 가지고 있고, 레아는 눈부신 은발에 새하얀 피부를 가진 탓이었다.
게다가 오늘 입은 예복의 색감도 정반대인지라 더욱 그러했다.
서로에게 가벼운 인사를 건넨 후, 손을 맞잡고 몸을 붙였다. 드넓은 연회장에서 우습게도 춤을 추는 이는 레아와 이샤칸뿐이었다.
방금 일어난 사건 탓에 다들 몸을 사리느라 바빴다. 몇몇 귀족들은 집에 돌아가고 싶은 표정이었다.
쿠르칸들만이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다시 술을 마시며 떠들썩하게 놀아댔다.
고요 속에서 그와 마주 보고 있자니 악단 근처에 서있던 쿠르칸이 악사들에게 툭 하고 눈치를 줬다.
연주도 잊고 입을 벌린 채 치정싸움을 구경하던 악사들은 뒤늦게 후다닥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직 단 두 사람만을 위한 춤곡이 시작되었다.
춤 같은 건 하나도 모를 것처럼 생긴 남자는 의외로 움직임이 자연스러웠다. 몸 쓰는 일 자체가 능숙하여 그렇기도 하지만, 에스티아의 춤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가볍게 발을 내딛으며 레아는 담담히 말했다.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으시네요.”
드레스 자락이 만개하였다가 봉오리 졌다. 이샤칸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춤출 때까지도 왕녀처럼 굴 거야?”
그의 발을 밟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구두로 있는 힘껏 발등을 밟아봤자, 저 무쇠처럼 단단한 남자에게는 흠집조차 내지 못할 것 같았다.
레아는 이샤칸을 노려보았다. 싱긋 웃는 그에게 쏘아붙였다.
“왜 자꾸 날 곤란하게 만들어.”
“너도 싫었잖아.”
“…….”
진실을 말하는 일은 항상 어려웠다. 선뜻 답하지 못하니, 이샤칸이 짐짓 놀라는 척을 하며 물었다.
“설마 변경백에게 마음이 있는 건가?”
이 남자가……. 재밌어하는 이샤칸 앞에서 레아는 입술을 잘근 물었다가 답했다.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었어.”
“착하네.”
몸이 가까이 붙었을 때, 그가 지나가듯 흘려 말했다.
“좀 더 나쁘게 살아도 되지 않나.”
그럴 수 있었다면, 이미 이곳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레아는 답하는 대신 질문을 던졌다.
“에스티아의 춤은 어디서 배웠어?”
“어릴 때. 맞아가면서 배웠지.”
믿기지 않았다. 짐승 같은 남자의 어린 시절이 상상되지 않는 것은 둘째 치고, 저 성격에 맞아가면서 배웠다는 것도 놀라웠다.
“궁금해?”
“아니. 궁금하지 않아.”
“거짓말을 잘하는군.”
“……제발 날 내버려둬.”
울컥 내뱉은 말에 이샤칸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왜 자꾸 나를…….”
입술이 떨렸다. 목소리가 잠겨들어 말이 끊어졌다. 침묵 속에서 그가 허리를 단단히 끌어당겼다. 숨결이 스치는 거리에서 이샤칸이 속삭였다.
“아직도 죽고 싶어?”
이번만큼은 레아도 솔직하게 답할 수 있었다.
“죽고 싶어…….”
음악이 멈췄다. 어느새 곡이 끝난 것이다. 다음 곡이 시작되기 전에, 레아는 이샤칸에게서 몸을 떨어트렸다.
“함께하여 영광이었습니다.”
에스티아의 왕녀로서 인사 올리니, 그가 미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레아는 담담히 말했다.
“그만 약혼자에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왕께서도 부디 마음을 푸시고, 환영연회를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
이샤칸이 무어라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으나, 레아는 뒤돌아섰다.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서 벗어났다.
도망치듯 떠난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그가 이번에도 도와줄까 하고 묻는다면……. 도와달라고 말해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걸음걸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붙었다. 제게 말을 걸고 싶어 노리는 눈빛들이 살코기를 뜯어먹으려는 승냥이 같았다.
숨고 싶은 기분을 느끼면서도 억지로 발을 움직였다. 헤매던 걸음이 멎은 것은 멜리사 백작부인을 마주쳤을 때였다. 그녀는 곧장 레아를 부축해주었다.
“부인…….”
“왕녀님. 조금 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멜리사 백작부인을 따라 전용휴게실로 향했다. 휴게실에 들어서자마자 기다란 장의자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백작부인은 불편한 드레스를 입은 레아가 앉을 수 있도록 도와준 뒤, 물을 조금 먹여주었다.
현기증이 핑 돌았다. 레아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괴로워하자, 백작부인이 팔을 주물러주며 말했다.
“코르셋을 풀어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변경백을 만나러 가야 해요.”
단단히 마음 상했을 변경백을 찾아 달래줘야 했다. 힘없는 왕실의 왕녀로서 이리저리 치이는 레아를 멜리사 백작부인은 안타까이 바라보았다.
레아는 그녀를 위해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래도 이제 고단한 인생의 끝이 보였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되니까, 조금만 더.
레아는 속으로 되뇌며 몸을 일으켰다. 멜리사 백작부인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뒤따랐다.
그녀는 더 쉬어야 한다고 레아에게 간청했으나, 휴게실 앞에는 이미 왕녀를 기다리는 이가 있었다.
“오베르데 변경백께서 찾으십니다.”
변경백의 시종이었다. 걱정하는 멜리사 백작부인을 남겨두고, 레아는 말없이 남자를 뒤따라갔다.
변경백은 연회장에서 멀리 떨어진 정원에 있었다. 작은 야외용 철제탁자와 의자가 놓인 그곳은 본디 인기가 좋은 장소였다.
하지만 근처에 인기척이 하나도 없었다. 변경백은 전부 내쫓아버리고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탁자 위에 놓인 술잔은 둘이었다. 변경백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레아가 결국 다시 자신을 찾을 수밖에 없으리란 사실을 말이다.
“오베르데 변경백.”
조용히 그를 부르니, 변경백이 거칠게 술잔을 내려놓았다. 함께 온 시종은 어느새 사라진 뒤였다. 변경백은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약혼자를 어찌 이렇게 망신주실 수 있습니까!”
“…….”
그새 얼마나 술을 마셨는지, 술 냄새가 확 풍겼다. 그가 입술을 꾹 다물고 레아를 노려보았다.
술에 취한 눈빛이 번들거렸다. 변경백이 거칠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혼자서 씨근덕거리던 그가 술잔을 내밀었다.
“……술상대나 되어주십시오.”
술잔에는 이미 술이 따라져있었다. 쏟아질 듯 찰랑거리는 술을 바라보던 레아는 천천히 잔을 받아들었다.
마시고 싶지 않으나 마실 수밖에 없었다. 자존심 높은 변경백을 사람들 앞에서 망신 준 대가로 술 한 잔이라면 싼 값이었다.
하는 수 없이 잔을 기울였다. 입술을 열고 술을 머금은 뒤, 천천히 한 모금씩 삼켰다. 변경백은 레아가 마시는 모습을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다 마신 술잔을 내려놓았을 때, 레아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빈 술잔에는 술이 한 방울도 묻어있지 않았다. 바닥에 살짝 고인 것조차 없이, 처음부터 아무것도 안 담겨있었던 것처럼 말끔하기만 했다.
오싹한 감각이 레아를 스쳤다. 무언가 잘못된 것 같았다.
레아는 황급히 술잔을 탁자 아무 곳에나 얹어놓고 드레스 자락을 쥐었다.
“그만 가보겠습니다. 급한 일이…….”
“아니.”
변경백이 명령했다.
“거기 있어.”
레아는 아연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변경백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히죽 웃었다.
“약발이 들 때까진 같이 있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