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datory Soul RAW novel - Chapter 72
-72-
레아가 잠든 동안, 다시 이동이 시작되었다. 행군하는 내내 레아는 이샤칸의 품에 안겨 있었다. 불편한 줄도 모르고 달게 잠들었다.
행군은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앉았을 때도 이어졌다. 사막의 밤은 낮에 비해 온도가 급격히 낮아졌다.
하여 여행자들은 모닥불을 지피거나 낮 동안 태양에 달구어졌던 돌덩이를 찾아 눕는 등, 체온을 지키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했다.
그러지 않으면 저체온으로 사망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인간보다 체온이 높은 쿠르칸들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인간과 달리 어둠을 볼 수 있는 눈까지 갖고 있으니, 되레 시원하다고 일부러 밤에 행군하는 경우가 잦았다.
하지만 쿠르칸이 아닌 레아에게는 사막의 밤이 서늘할 터였다. 하여 이샤칸은 직접 레아를 품에 안고 행군을 이어갔다.
하얀 별들이 검은 밤하늘에 쏟아질 듯이 총총했다. 별을 바라보던 이샤칸은 잠시 제 품 안의 레아를 보다가 머리를 쓸어주었다.
어제 잠시 정신을 차리는가 싶더니, 그 뒤로 다시 잠들어 여태껏 깨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귀 기울여 듣던 이샤칸은 느릿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행군은 어느새 멈춰있었다.
다른 쿠르칸들 또한 이샤칸을 따라 모래언덕에 가려 보이지 않는 저편을 내다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환한 달빛 아래에 수십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언뜻 보기에는 사막을 횡단하는 카라반처럼 보였으나,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지자 훤칠한 체구와 짙은 피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가장 선두의 하반이 손을 크게 흔들었다. 옆에 선 게닌 또한 짧게 묵례하여 예를 표했다.
에스티아 왕도에서부터 사막을 절반 넘게 횡단하기까지 삼 주일이 걸렸다.
언뜻 빠르게 느껴지지만, 사실 추격대를 피하기에는 형편없는 속도였다. 레아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빨리 움직일 수 없었던 탓이다.
그럼에도 왕실의 추격대에 붙잡히지 않은 것은 전부 하반과 게닌이 힘써준 덕분이었다.
두 사람은 서른의 쿠르칸 전사들과 함께 추격대를 기습했고, 성공적으로 작전을 수행해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매수해두었던 귀족들에게 정보를 얻어, 에스티아 왕실에서 오베르데령으로 보낸 전령까지 처리하는 일까지 성공했다.
오베르데 변경백은 레아가 안전하게 쿠르칸 왕궁에 도착한 뒤에나 약탈혼을 알게 되리라.
“다녀왔습니다, 이샤칸 님.”
게닌이 깍듯하게 인사를 올렸다. 하반은 이샤칸의 품에 안겨있는 레아를 보더니, 능청스레 질문했다.
“왕비님께선 괜찮으십니까?”
슬쩍 갖다 붙이는 호칭에 이샤칸이 피식 웃었다.
“레아 님이라 칭하도록. 아직 그녀는 무엇도 결정하지 않았으니.”
수레를 하나 비워서 짐짝처럼 실려서 가고 있던 모르가도 다가와 아는 체를 했다.
“고생했네, 게닌, 하반.”
그는 긴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묶고 있었다.
피로가 덕지덕지 붙은 얼굴에 하반은 아주 잠깐, 손톱 끄트머리만큼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반이 모르가를 동정한 스스로에게 놀라는 사이, 게닌은 이샤칸에게 보고를 올렸다.
“대륙의 도마리가 이동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말에 쿠르칸들의 눈빛이 전부 싸늘해졌다.
“확실치는 않으나……. 방향으로 미뤄 짐작건대, 에스티아로 모여드는 듯합니다.”
“왕비가 발악을 해보려는 건가.”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 정도 대규모 이동은 처음입니다.”
“귀환하는 대로 회의를 열도록 하지.”
“예, 이샤칸 님.”
게닌은 살며시 레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깊이 잠들어있는 그녀를 보며 안타까이 말했다.
“레아 님께서는 아직 의식을 차리지 못하셨습니까.”
“어제 낮에 잠깐. 그 뒤로는 계속 자는군.”
옆에서 듣고 있던 모르가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래도 이샤칸 님의 피가 큰 역할을 한 덕분에 고비를 넘겼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효과가 좋았어.”
모르가는 동경 가득한 눈으로 이샤칸을 보았다. 하반이 어깨를 으쓱이며 당연하단 듯이 말했다.
“이샤칸 님께서는 특별하시니까요.”
이샤칸이 특별한 이유는 쿠르칸의 탄생과 얽혀있었다.
아주 오래전, 그 어느 땅에도 정착하지 않고 곳곳을 떠돌며 살아가던 무리가 있었다.
자유로운 유랑민족을 일컬어 대륙은 집시라 불렀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를 ‘롬’이라 칭했다. 그들의 언어로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였다.
롬들은 사람처럼 존중받기를 원했으나, 땅 한 조각 가지지 못한 민족이 대우받을 리가 없었다.
오랫동안 이어져온 박해와 멸시에 롬들은 뿌리 깊은 열등감과 복수심, 분노를 품게 되었다.
어두운 감정이 극에 달한 순간, 한 명의 롬이 선언했다.
강력한 주술사였던 그녀의 선언에 모든 롬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정착할 땅을 가지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떠돌이였던 그들에게는 높은 성벽과 강력한 기사, 날카로운 무기가 없었다.
이미 다른 나라들이 굳건히 차지하고 있는 땅을 뺏는 일은 절대 불가능했다.
하여 생각해낸 방법이 새로운 군대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 어떤 나라도 막을 수 없을, 강력한 군대를.
처음에는 어린아이들을 납치해서 세뇌를 걸었다.
허나 병력을 다뤄본 적 없는 롬들이 기사를 어떻게 키워내는지, 병사는 어찌 훈련시켜야 하는지 알 리가 없었다.
그 뒤로도 다양한 시도가 이어졌으나 모두 실패했다. 실패를 반복한 끝에, 롬들은 금기에 손을 뻗쳤다. 인간이 아닌 존재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들은 주술을 걸어 직접 짐승과 이종교배를 시도했다.
롬이 가진 주술의 힘과 짐승의 강인한 육체가 합쳐져, 태어나선 안 될 존재가 태어났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짐승의 피가 섞인 반인반수였다.
롬들은 원치 않은 탄생으로 세상에 내던져진 반인반수들을 짐승과 다를 바 없이 길렀다.
주술을 써서 복종하도록 세뇌하고, 쉽게 교배하도록 발정기를 가지게 했으며, 강한 번식력으로 다산하도록 만들었다.
인간의 힘을 월등하게 뛰어넘은, 그야말로 완벽한 군대였다. 진실로 대륙을 발아래에 두는 일이 멀지 않았던 어느 날이었다.
세뇌가 듣지 않는 반인반수가 태어났다. 교배를 거듭하면서 너무 강한 힘을 가진 변이종이 태어난 것이다.
변이종에게는 주술이 먹히지 않았다. 어떤 세뇌도 통하지 않아서 복종하도록 길들일 수가 없었다.
변이종은 다른 반인반수들에게 걸린 세뇌마저 깨트렸고, 롬들에게 반기를 들어올렸다.
자신들이 만들어낸 군대에 의해, 롬들은 학살당했다. 대륙을 지배하겠다는 야욕은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그들은 멸족의 위기까지 내몰렸다.
변이종은 자신을 만들어낸 주술사를 죽이고, 반인반수들을 이끌어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가장 척박한 땅으로 향했다.
사막에 도착한 그들은 새로운 종족이 되었으니, 바로 쿠르칸이었다.
대를 이으며 변이종의 피는 옅어졌다. 하지만 이따금 격세유전을 통해 강력한 능력을 타고나는 이가 있었다.
이샤칸은 최초의 변이종과 가장 비슷한 존재였다. 짐승의 야성에 가까워 누구보다 강한 힘을 가졌고, 주술이 걸리지 않았다.
“아무튼 이샤칸 님 덕분에 한시름 놓기는 하였는데……. 여전히 안심할 수는 없는 상태라네.”
모르가는 걱정스럽게 레아를 바라보았다. 이샤칸의 피를 이용하여 주술 일부를 해주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막았을 뿐이지, 완전히 걷어낸 것은 아니었다.
아직 파악하지 못한 여러 주술들이 걸려있었고, 주술의 기운이 강해지는 날에는 갑자기 발작처럼 날뛸 수도 있었다.
물론 그렇게 되지 않도록 각고의 노력을 펼칠 테지만, 문제는 레아의 몸이었다. 그녀는 너무나 약해져있었다.
절벽 끝의 아슬아슬한 상태인지라, 해주를 위해 강한 주술을 썼다간 진짜로 부서질지도 몰랐다.
다른 문제도 하나 있었다. 주술 자체가 생명을 깎아내는 부정적인 기운이기 때문에, 새로운 생명을 품는 일이 어려웠다.
한마디로 임신이 불가능한 것이다.
모르가는 흘긋 이샤칸을 살폈다. 쿠르칸은 짐승답게 번식욕이 강한 편이었고, 아이를 낳는 일에 큰 기쁨을 가졌다.
그러나 이 얘기를 전했을 때, 이샤칸은 별다른 동요 없이 태연하게 답했다.
-레아에게는 비밀로 하지.
에스티아에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는 쓸모가 없었다. 당장 레아의 어머니만 해도 그랬다. 그녀는 레아를 낳고 불임이 되자마자 내쫓겼다.
그런 곳에서 자라왔으니, 자신이 불임이라는 것을 알면 레아는 분명 상처받을 터였다. 가뜩이나 정신적으로 지쳐있는 레아였다.
그녀에게 쓸데없는 걱정거리를 안기지 말고, 회복에만 온전히 힘을 쏟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 이샤칸의 뜻이었다.
“저희가 정성껏 모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생각에 잠겨있던 모르가는 하반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게닌도 한마디 보탰다.
“레아 님을 기다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내일이면 드디어 쿠르칸에 도착이었다. 노예로 붙잡혀 있다가 탈출한 쿠르칸들은 생명의 은인이 찾아오길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에스티아는 생각도 안 나시도록 만들어버리겠습니다!”
하반이 의욕적으로 주먹을 움켜쥐며 소리 질렀다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레아가 부서지지 않았나 흘금 살핀 후, 다시 목소리를 낮춰 속닥였다.
“……어쨌든 이제 우리 왕비, 아니, 레아 님입니다.”
욕심을 드러내는 하반의 모습에 이샤칸은 잠시 웃었다. 그리고 저에게 안긴 레아를 내려다보았다.
너무 작은 몸이었다. 당장 바스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약한 몸……. 대체 여태껏 혼자서 어떻게 버텨왔을까.
이샤칸은 잠든 레아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었다. 이제는 절대 홀로 고통 받지 않도록 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왕녀로서 살아왔던 시간 또한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