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forge the Streak RAW novel - Chapter 105
연록흔 – 105화
“폐하!”
“고하라.”
사늑하고 아늑하던 공기가 갑작스레 식었다.
“맥이었습니다.”
“틀림없나?”
“예.”
맥은 본디 해로운 짐승이 아니었다. 악몽을 먹어 없애니 선하다 봐도 좋았다.
“삼켜 뱉었군.”
“그리한 듯싶습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랴? 몸보다 마음이 고된 것이 때론 중한 병을 일으키는 법. 가륜은 눈귀를 어그러뜨렸다. 세상도 버거운데 저까지 싸안으려 하지 마시라, 한 집안의 가군이 마음 놓을 곳은 그 아내뿐이라……. 록흔이 연삽하게 하던 말이 작금 귀에 쟁쟁했다. 근심 보탤까 저 혼자 앓았을 터. 곱씹을수록 그는 마음이 좋잖았다.
“어찌했나?”
“한입에 삼켰습니다.”
“그럼…….”
“예, 폐하.”
혈룡이 눈을 야멸치게 치떴다. 붉은 눈 새로 뵈는 것은 맥이 삼켰던 것, 바람결인 양 날파랍게 스쳐 지났다. 가륜은 눈을 지릅뜨고 보았다. 죽이고 앗고 짓밟으며 도륙하니……. 사람이란 짐승이 행할 수 있는 잔독함은 그 안에 다 있었다. 그리고 찰나에 봉안이 살천스레 찢겼다.
득.
가륜이 턱을 바특이 당겼다.
‘가군, 무한……. 당신 다시 보지도 못하고. 내가 죽으면 누가 당신 곁에서……. 아가, 우리 연이……. 배곯아 어쩌니…….’
‘어머니, 어머니, 추울 텐데…….’
다른 꿈에 스민 것도 가여운 걸, 그러나 저건 아니었다. 있어서는 안 될 곳, 그곳에 록흔이 있었던 것이다. 그 때 혈룡이 눈을 감았다 되떴다. 그와 동시에 가륜의 목전에서 환상이 닫혔다.
시윽.
혈룡이 검초에 들었다.
파랏!
휘장이 맵차게 쳐들렸다.
‘…….’
가륜은 이리저리 서성였다. 성이 말랐다. 그리고 격노가 들끓었다. 저를 향한 칼날이라면 얼마든지 받겠으나, 그 대상이 아내라면 경우가 달랐다.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사락.
깁이 슬치는 소리가 작게 돋았다.
“……하.”
이금 아래로 손이 뵈는 듯하더니, 연빛 눈이 가느다랗게 열렸다. 가륜은 바로 다가앉아 록흔의 손을 훔켜잡았다. 시선이 썩 명료치 않은 것으로 보아 아직 몽중에 있는 듯싶었다. 그가 안쓰러움에 눈귀를 좁히는데 도홍빛 입술이 살폿 벌어졌다.
“여긴…….”
계속 울더니 목이 잠겨 있었다.
“생시다.”
반개한 눈이 조금 더 열렸다.
“…….”
찬바람, 피비린내, 눈무덤……. 샅샅이 찾아도 뵈지 않았다. 록흔은 가만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조차 쉰 듯 잠겨, 가륜의 눈이 더 짙어졌다.
“…….”
가륜은 록흔의 눈을 깊게 들여 보았다. 꿈이란 것, 일광 아래 바래니, 잔독한 것이라도 널 갉지 못할 거라……. 뇌리에서 가하고 혀끝에서도 도는 것, 그러나 차마 뱉을 수가 없었다.
“폐하, 혹여…….”
“음.”
가륜이 고개를 끄덕여 록흔은 눈을 반작 들었다.
“어떻게…….”
“그게 중요한가?”
맺거니 듣거니 맑진 눈에 눈물이 그예 가랑가랑 돋았다.
“부부는 일심이라더니.”
“제 꿈이고, 제 의지라…….”
“혼자 앓고 혼자 사윌지언정, 걱정 따윈 보태지 않겠다?”
“대수롭잖은 거라, 곧 잦겠지 하고…….”
가슴에 치미는 것이 화가 다는 아니었다. 가륜은 록흔을 일으켜 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칼에 얼굴을 묻었다.
“낮에 곤하셨는데, 제가 잠을 사납게 들어서…….”
“끝까지 내 걱정뿐이군.”
“그저 그런 거라…….”
부러 걱정하지 않는다. 자연스레 그러한 것이다. 록흔이 사려 하는 말에 가륜은 눈을 조프렸다. 아침나절에 부득부득 쫓아오는 것도 그러했을 터. 마음이란 놈 그 안에서 부듯하게 커졌다.
“이제 악몽 따위 없을 거다.”
“……?”
“내가 알았으니.”
가륜의 가슴에 기대어 록흔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이 순간이 현실이었다. 든든히 안아 주고 깊게 들여 봐 주는, 이분이야말로 현실이었다.
“록흔, 이제부터는.”
“예, 폐하.”
“혼자 앓지 마라.”
“그럴게요.”
섧고 아픈 일이라도 이 곁에 있으면 견딜 수 있을 듯싶었다. 이름 불러주고, 눈 맞춰 주면, 그리하면……. 록흔은 가륜을 올려 보았다.
“그만 침수 드셔야…….”
“생김답잖게 무돼서는.”
가륜이 록흔의 턱을 들어 올렸다. 두 시선이 이내 짙게 얽혔다. 검남빛 눈에 잠겨 연빛 눈이 잗다랗게 떨렸다.
“맥이란 놈이 괴롭혀도 그예 잠들고.”
찰나, 맑진 동공이 드맑게 부풀었다.
“홀몸도 아니면서 지아비 건사하련다 노심초사니.”
“예, 그게 무슨?”
그게 맥이었던가 하던 생각 따위, 뇌리에서 흔적 없이 바랬다. 반드레한 눈이 동그래졌다. 예상치 못한 소리라, 록흔은 입술을 붉게 물었다.
“홀몸이 아니면, 제가…….”
“일곱 달 뒤에 네가 어머니가 된다는 말이지.”
“제…… 가요?”
“의관이 다녀갔다. 두 달을 넘겼다더군.”
“의관이요, 무슨 일로?”
“음. 너, 꿈 끝에 맥을 놓았거든.”
아직은 편평한 배였다. 록흔은 저도 몰래 그 위에 손을 얹어 보았다. 가륜이 눈을 조프리더니 바로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모르고 있었군.”
“아니, 저는…….”
성혼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한증으로 쓰러져 몰랐던 듯싶었다. 무공을 익혀선지 본디 다른 이들과 조금 다르기도 했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 둘의 피가 섞인 아이……. 록흔은 가슴이 먹먹해 눈을 감아 버렸다. 맑은 물이 보얀 뺨 위로 뚝뚝 돋아 흘렀다.
“좋아할 줄 알았는데, 아닌가?”
가륜이 나직하게 물어 록흔은 고개만 저었다.
“그럼 왜 울어?”
“그냥, 어머니께서…… 저 가지고 이리 기쁘셨을까 하고……. 그래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저 새는 듯, 록흔은 가륜의 품에 안겨 섧게 울었다.
“어미란 봄이라고 했던가?”
일찍이 황룡의 대문장가 우순이 읊었던 듯, 가륜은 떠오르는 대로 록흔의 귓전에 속삭였다.
“항시 다스하여 훈김 가득하니, 애움 틔우는 봄이어라. 새끼가 곱든 밉든 현명하든 어리석든, 가림 없이 고루 품노니……. 록흔, 너와 같았을 거다.”
어미 품을 모르고 자란 록흔이었다. 그런 이가 자라 아이를 품었으니 그 애참함이 오죽할 것인가? 가륜은 함빡 젖은 눈귀에 부드럽게 입술을 눌렀다.
“폐하께선…….”
록흔이 자그맣게 말을 사렸다. 그녀가 기쁘냐 묻기에 가륜은 입귀를 어그러뜨렸다. 짙고 깊은 감정들이 검남빛 동공 안에서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래, 말할 수 없이.”
가륜이 긁듯 토한 말에 록흔은 눈을 감았다.
“그러니 잘 자고…….”
“많이 먹고, 자주 웃고…….”
록흔이 대신 이어 하는 말에 가륜이 입귀를 실긋 치올렸다.
“그리 잘 아는데, 이리 여윈 건가?”
“이제 조심할게요. 아이가 잘 크도록.”
“네겐 내가 있잖나, 뭐든 나눠 다오.”
“예, 폐하.”
“약언해.”
“예.”
가륜은 턱을 아득 당겼다.
[한사가 발호한 뒤라 회잉하시면 극히 조심하셔야 합니다.]록흔이 쓰러진 후 혜덕이 서찰로 전했던 것이다.
[두 몫으로 갈리니, 힘의 발현은 지금보다 더욱 위험하옵고.]비죽비죽 볼가지는 말, 가륜은 록흔을 더 바특하게 안았다.
[하다못해 임신오조라 하더라도 더 잔독하게 드러날 수 있습니다.]그때 싸라기눈 같은 얼음덩이 토한 것으로 보건대, 아이가 자랄수록 위험은 더욱 커질 듯싶었다. 가륜은 입귀를 살천스레 비틀었다. 곽아밀이든 태의감이든 만혁이든 청심에 대한 비약을 찾기 전까지는 그 수밖에 없었다.
“폐하, 선사일까요?”
“그래, 달리 있으려고.”
일비일희하지 않으리니, 록흔이 곁에 있으면 이겨 내지 못할 일이 없었다. 가륜은 록흔의 상합지환을 보았다. 둘이 온전히 가까워, 그 빛이 드맑고 연연했다.
***
눈꽃이 포삭포삭 날렸다. 나무란 건 대개 헐벗어 회갈색으로 야위고 예서는 향나무만 푸르렀다. 이제 섣달이니 새로운 해가 멀지 않았다. 주융은 작금 뇌희원에 있었다. 예서 모이자 했으나, 가조는 아직 태화성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하늘은 어두워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마다 칼바람이 스쳤다. 세상 모든 빛이 하얘 은안이 더욱 차갑게 뵀다.
“전하, 차를 올릴까요?”
“됐다.”
가조의 첩을 대할 때마다 주융은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비듬한 꽃이라 고울 법도 한데, 그 위로 다른 이가 덮어 뵈니 마뜩찮기만 했다. 황룡에 든 지 넉 달, 그리움은 그동안 자라고 또 늘었다.
“칠왕야께선?”
“곧 오신다 전갈이 왔사온데…….”
“몸 무거울 테니, 그만 쉬어라.”
저리 순하기만 했더라면 그리 곱답게 뵈지 않았을 터였다. 드맑은 눈에 괸 건 올곧음, 하는 말 또한 녹록찮았었다.
“전하, 상헙니다.”
“들어와라.”
상허가 들어오자마자, 서린이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전서가 방금 전에 도착했습니다.”
바슥.
주융의 시선이 첫줄에서 끝줄로 넘어가는 동안, 상허는 숨도 내쉬지 못했다. 잔뜩 긴장한 만큼 얼굴에 열이 올라 뺨을 가로지른 흉이 짙붉게 도드라졌다.
“반승낙은 떨어졌군.”
“감축드립니다, 전하!”
“그럴 줄 알았다. 둘째형은 벽창호가 아니거든.”
주휼은 오늘내일, 주인 또한 건강이 썩 좋지 않았다. 주융은 픽 웃었다. 바로 손위 형이야 만만하니 이제 거칠 것이 없다 봐도 무방했다.
“이제 그동안 도모하신 것을…….”
“아니, 이 겨울은 넘기고 보자.”
“예에?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혹한기에 일을 도모하는 것, 바람직하지 않다.”
“그건…….”
눈꽃 하나가 또 사분사분 떨어졌다. 상허는 큼지막한 눈으로 주융의 시선을 좇았다. 지금껏 사리신 것을 그니 위해 더 참으시려는 듯싶었다. 험한이 듣기에 이 집 첩실만큼 배가 부르지는 않았으나, 황룡의 황후 또한 아이를 가졌다 했다.
“임부에게 겨울은 참혹하지 싶다.”
“전하, 하오시면…….”
“연이 놀라는 건 바라지 않는다.”
다른 사내의 아이를 품은 여인, 그 자체가 상허는 애참했다. 제가 겪어 주군의 마음을 그저 알았다. 더 애틋하고 더 갖고프니 어쩌면 독이었다.
“해아 생각을 하는군.”
“아, 아닙니다.”
“연모는 감추려도 덮으려도 그저 뵈지. 거사 후에 후궁 하나 네게 못 넘기랴?”
“송괴합니다, 전하.”
주융은 차게 웃었다. 세자의 후궁, 운해아. 상허의 정혼녀였다. 큰형이 빼앗아, 그때 상허는 마음이 찢기고 얼굴이 찢겼다.
“상허, 애운함이라 여기는 것 같다만.”
“그게…….”
“염려 마라. 지닌 뜻이 탱천하니, 연은 내게 힘이 된다.”
상허는 고개만 깊이 꺾었다. 뉘라서 저 품을 재랴? 다만 주군께서 그 미희 품으시고 이 나라 얻으시도록 심신을 갈아 바칠 터. 험한의 두 눈에 충정이 이글이글 끓었다.
“상허, 알아봤나?”
“예.”
주융이 떨친 것, 상허 역시 바로 떨쳤다. 연은 잠시 묻히고 대의가 그 자리를 메웠다.
“묵비가 은소현 처소에 뉘를 데려다 놓은 듯합니다.”
“가조가 보러 들어갔군.”
“예, 헌데 신은…….”
“묵비가 별론가?”
“예.”
도사 묵비, 눈빛이 다랍게 짙고 어두웠다. 이름부터 의뭉스러우니 그 뜻이 ‘비밀로 하여 말하지 않는다’였다.
“토사구팽이라 하지 않던가? 작금은 개를 가릴 때가 아니니, 잘 짖고 잘 물면 족하다.”
주융이 피긋 웃는데, 뇌희원의 집사가 두 손을 맞잡고 들어왔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그 뒤에 선 것은 붉은 오악관을 쓴 도사 묵비였다.
“격조했습니다.”
묵비가 서글서글하게 닦는 인사에 주융은 고개만 까딱했다. 도장에 들르러 간다더니 양생에만 힘을 쓴 듯, 도사놈은 저번보다 생김이 더 반듯해졌다. 생기 충만하여 살이 팽팽해 그 낯이 복숭앗빛으로 반드르르했다.
“혼자 왔나?”
“아닙니다. 작생께서도 함께 오셨지요.”
그때, 곽우안이 들어섰다. 예리한 눈이 주융을 향해 번쩍 빛났다. 목례로 그칠 뿐, 그는 바로 묵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당분간 술은 삼가.”
“아아, 여부가 있겠소.”
묵비는 이마에 면포를 칭칭 동이고 있었다. 불긋하게 피가 밴 것으로 보아 상처가 꽤 짙었던 모양, 상허는 저도 몰래 눈살을 찌푸렸다. 그에 묵비가 싱긋이 웃었다.
“어디 다치셨소?”
“곽선생께서 다독다독 만져 주셨지, 별거 아니다.”
“그러기엔 꽤 깊은 듯싶소만.”
“어허, 아무렇잖다니까!”
상허가 거듭 묻자, 묵비가 성을 벌컥 냈다. 아득바득 매달리는 것이니 속이 뒤집힐 터. 곽우안은 바라보다 실소했다. 사실 변안록만 아니면 예 끼어들지도 않았을 터. 더 깊이 알고자, 더 높이 오르고자, 그에게는 의원으로서의 욕심만 오롯했다.
“뭐든 단단히 하오. 저번 현강 건을 보건대, 명세제는 녹록찮고 만만찮더군.”
“곽우안, 그러니 더 해 볼 만하지 않겠나?”
살풋 찢긴 은안이 얼음장처럼 찼다.
“식은 죽 먹기처럼 지루한 게 없거든.”
“맹맹하니 먹음직스럽지도 않지요.”
주융의 말에 묵비가 맞장구를 쳤다. 곽우안은 말없이 고개만 갸울었다. 가는 방향은 같으나 하러 가는 일은 제각각 다르니, 변안록만 챙기면 그예 떠야지 싶었다. 세상 권력 알 바 아니라 남이 하지 못하는 요치만 하면 족했다.
“뉘 눈에 띄지 않으셨는지요?”
“극히 조심은 하였습니다만, 이 한궁에 뉘가 관심 두려고요?”
어투는 정중해도 분명 이기죽대는 거였다. 소현은 화가 부르르 끓어 입술을 험히 일그러뜨렸다. 집어 말하지 않아도 제가 뉘보다 잘 아니 저 상판이 참으로 얄밉상스러웠다.
“묵비가 보낸 아이는 어디 있습니까?”
가조가 상그레 웃으며 묻자, 소현은 턱짓만 했다. 그가 할긋 보는데 깊게 쳐진 휘장 너머에서 요기가 스산하게 배어 나왔다.
“나오너라.”
“예, 마마.”
깁을 들치고 나오는 것, 참으로 희한했다. 가조는 눈을 좁다랗게 치떴다.
스르르, 스르르르…….
구렁이가 담을 타고 넘듯이 물뱀이 물을 타고 달리듯이 계집은 부드럽고 매끄럽게 움직였다. 가조는 눈을 더욱 가늘였다. 가까이 다가올수록 음기가 짙어져 소름이 절로 돋았다. 팔이라도 문대고 싶으나 사내 체면이 있어 꾹 눌러 참았다.
“소녀 묘야, 칠왕야를 뵈옵니다.”
“묘야?”
가조는 되묻다 고개를 끄덕였다. 보드랍고 동그라니 하는 양이 계집은 고양이를 닮았다. 생김 또한 그러해 살짝 들린 눈귀도 황금빛 칼금 품은 녹안도 조막만한 얼굴도, 하다못해 좁다란 이마까지 하릴없는 고양이 상이었다.
“너, 묘족이냐?”
가조가 떨떠름하게 묻자, 묘야가 입귀를 나른하게 치올렸다. 미소 짓는 것 또한 배부른 고양이와 영락없이 닮았다.
“아닙니다, 전하.”
어여쁘되 사기가 강해 밤에 마주치면 뉘라든 반갑잖을 듯했다. 가조가 치어다보매, 묘야가 녹색 눈을 반드르르하게 빛냈다.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그 물건이나 좀 보자.”
“예, 저희 묵비 도사님께서…….”
하는 양이 오사바사하여 앙큼했다. 묘야가 새살거리며 하는 말을 가조는 그저 흘려들었다. 오직 묵비가 보낸 것만 눈에 들어와 계집이 품에서 꺼내는 것을 깊다랗게 응시했다.
팟.
사기병이 열려 그 안에서 붉은 덩이가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이게 무엇이냐!”
소현이 새된 비명을 올렸다.
그륵그륵.
반투명하여 고물대니 벌레였다. 개개마다 거죽이 매끄럽고 주둥이가 잔독하게 예리했다. 지렁이보다 작고 가늘어 우연찮게 본다면 눈에는 잘 띄지 않을 듯싶었다.
“이렇게 징그러운 건 도대체…….”
“혈고이옵니다.”
소현이 질색하는데 묘야가 목을 울리며 사근사근 웃었다.
“어디에 소용되나?”
“예, 전하. 묵비 도사님께서 큰일 도모하는 데 긴히 쓰일 거라 하셨습니다.”
가조가 개중 가장 꾸물대는 것을 집어 드니 등빛에 그 속이 투명하게 비쳐 보였다. 그 손가락을 타고 감고 올라 스륵스륵 움직여, 소현이 모로 돌아앉았다. 몸은 무색이나 그 안에 들은 것이 짙붉어, 벌레는 생김이 몹시 모질었다.
“이걸 가지고? 맥 또한 유야무야 되었거늘…….”
가조가 심드렁히 하는 말에 묘야가 고개를 저었다. 뉘 눈은 일그러지나, 뉘 눈은 호동그랬다.
“아니긴, 물리면 좀 아프려나?”
가조가 혈고를 이리저리 떠들자, 묘야가 앗다시피 가져갔다.
“아무튼, 이건 전하의 몫이 아닙니다. 도사께서 마마더러 거두라 하신 것이지요.”
샐쭉해서 앵돌아진 입이 붉었다. 묘야가 고양이 눈을 칩뜨자, 가조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래. 마마, 제가 주책없이 나섰습니다.”
“나, 나도 되었습니다.”
“마마, 받으셔요.”
뉘가 뭐라 하든, 묘야는 제 할 일만 했다. 그녀는 혈고 하나를 늘이고 잡아당겨 소현에게 들이댔다.
츠윽츠윽!
지렁이는 소리나 없건만, 요놈들은 제법 듣그러웠다. 주둥이를 내두르며 뱉는 것이 다랍게 역했다.
“저리 치우지 못해?”
“혈고는 인혈을 먹고 자랍니다. 지금껏 묵비 도사님께서 키우셨는데, 이제부터 마마께서 먹이셔야 하지요.”
“뭣이? 무얼 먹이라? 내 피를?”
“예. 절대 배를 곯리면 아니 되옵니다.”
“치우래도!”
묘야가 바짝 다가앉자, 소현이 앉은걸음으로 피했다.
“마마, 저어하지 마십시오. 영리한 아이들이라 증애를 금방 알아차린답니다. 예뻐해 주세요.”
보기조차 역겨운 걸 예뻐하라니 가당찮았다. 소현은 초승달 같은 아미를 야멸치게 꺾었다.
“피를 받으면 마마의 아이가 됩니다. 원하고 바라는 건 무엇이든 하지요.”
“오호라, 어찌?”
소현 대신 가조가 물었다. 호기심이 일어 그 눈이 비릿하게 번득였다.
“전하, 그 이치란 이렇습니다. 혈고란 본디 사람 안에 들어 그 몸을 조종하지요. 그이가 말을 듣지 않으면 피에 독을 푸는데, 그 고통이란 죽음보다 더 괴롭습니다. 하여 뉘든 혈고의 숙주가 되면 부지불식간에 그 명을 따르게 되지요.”
묘야가 나른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가조는 번히 듣는 참, 소현 역시 조금은 돌아앉았다.
“피로써 맺혀, 혈고는 제 주인을 부모처럼 좇습니다. 이만하면 참으로 갸륵한 짐승이지 않습니까?
어느새 소현의 눈빛이 달라졌다.
“동맹인 중, 궁에 계신 분은 마마시니 각별히 돌봐주셔요. 성충이 되면 그야말로 마마의 뜻대로 아니 될 게 없습니다.”
“성충? 다 자란 게 아니더냐?”
소현은 묘야 곁에 다가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드밀고 혈고를 살폈다. 놈들이 고물대고 꿈틀대도, 내막을 들은 뒤라 세상없이 어여쁘기만 했다.
“알에서 깬 지 얼마 안 된 아기들입지요. 다 자라려면 넉 달 정도 더 있어야 합니다. 섬세하고 영민한 만큼 더디 자라지요.”
“그래…….”
소현은 붉은 실타래처럼 엉킨 것에 손을 가져다 댔다. 왜인지 만져 봐도 좋을 듯싶었다. 그때였다. 고물대던 것들이 머리를 치켜들더니 솟구쳐 올랐다. 뉘인가 살핀 것은 순간, 놈들은 무작스레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앗!”
뒤로 물릴 틈이 없었다. 흰 손목이 붉게 덮였다.
차압차압!
혈고는 침 박듯이 주둥이를 꽂아 연한 살을 씹고 피를 빨았다.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듯 아리고 쓰려 소현은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선혈만 돋을 뿐 놈들은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피내 짙을수록 더 서대니 이놈이 붙고 저놈이 붙었다.
“묘야, 이걸! 어서 어떻게든!”
소현이 자지러지는 걸, 묘야는 빙긋 웃으며 보았다. 가조 역시 방관자라 혈고만 유심히 살폈다.
“거머리 같군.”
가조가 뇌까렸다. 그 곁에서 묘야가 는실난실 거들었다.
“전하, 그래도 그건 떼어 낼 수나 있지요. 이 아이들은 제 배가 부르기 전에는 절대 떨어지지 않습니다. 살을 도려낸다면 모를까요.”
“어허, 그렇구나. 마마, 놈들이 꽤나 야무집니다.”
“호호호! 경하 드립니다, 마마. 이제 이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혈고가 손을 잡아 뜯을 듯 피를 빨았다. 통증이 그악해 비명이 절로 나왔다. 그예 소현은 참지 못하고 입을 크게 찢었다. 새되게 찢긴 소리에 문이 벌컥 열렸다.
“마마, 어인 일입니까?”
밖에서 문을 지키던 차, 월한은 피갑칠을 한 소현의 팔을 보고 눈귀를 사늘히 찢었다.
“월한, 나 좀……. 피가 죄 빨리는 듯하다.”
소현이 바랐으나, 월한은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묘야 쪽을 할긋 볼 뿐, 달 같은 눈에는 표정이 없었다.
“선자님, 걱정 마셔요. 마마와 아이들이 친해지는 것이니, 마마께 해롭지는 않습니다.”
묵비나 그 제자나 야멸치기가 똑같았다. 하긴 그러하니 더 단단한 것일 테고. 가조는 턱을 쓸며 상그레 웃었다.
“월한! 뭐 하느냐?”
“마마, 참으십시오. 정히 힘드시면 홍인전 생각을 하시든가요.”
“뭐…….”
월한이 차게 하는 말에 소현은 정신이 번쩍 났다. 그러고 보니 어린애처럼 울고불고 할 일이 아니었다.
“역시 마마께선 뜻이 높으신 분입니다.”
묘야가 고개까지 끄덕이며 웃었다.
“……이건.”
“예, 마마.”
소현이 가락대며 꺼낸 말에 묘야가 녹안을 댕그랗게 치떴다. 황금빛 빗금이 그 안에서 함치르르 빛났다.
“매일 이리 빠느냐?”
“설마요. 마마, 처음이라 그런 것입니다.”
“그래…….”
뱃속에 든 것, 새끼라 거둔 저것들. 소현은 이리저리 빨리느라 힘이 빠졌다. 월한이 받쳐 안아 주기에 그녀는 그 어깨에 고개를 묻고 씨근댔다.
드윽, 득!
혈고들이 하나같이 통통하게 불었다. 바닥에 나자빠져 뒹구니 그 몸피가 굼벵이와 맞먹었다.
“그럼 마마, 전하. 소녀 묘야 잠시 물러가옵니다.”
묘야가 휘장 안으로 몸을 사리는 양이 기괴했다. 엎드려 각행하니 그 뒷모습이 거울에 비쳐 보였다.
‘역시, 요물이로군.’
가조는 혼잣말을 하다 입귀를 비죽 우그렸다.
스스슥.
뱀처럼 유연하게 뒤로 기는데 발꿈치가 없었다.
“마마, 혈고는 저것에 비하면 애교로군요.”
“……?”
“눈에 뵈는 게 다는 아니란 말씀입니다.”
이제 혈고는 사기병 안에 있었다. 가조가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데, 그 눈빛이 몹시 야비했다.
***
유리집 안은 다사해 나비가 제철인 양 나붓거렸다. 한 겹 너머는 겨울, 예는 봄. 록흔은 부옇게 김 서린 천장을 바라보았다. 한사 도질까 저어하는 이들이 하많아, 그녀는 요즈음은 거의 영춘궁에서 지냈다. 대나무 푸르고, 꽃은 지천이라……. 연빛 눈에 비치는 것은 곱고 연하기만 했다.
스윽.
이제 등, 촉을 넘어 동렬도 여섯 권째로 접어들었다. 불이라는 것이 그저 보았을 때는 화락화락 야울야울 타는 것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그 안에도 놀라운 질서와 이치가 숨어 있었다. 재를 거슬러, 숯을 지나, 깜부기불을 겪어……. 록흔은 불의 근원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었다. 연지(벼루못)에 괸 먹물이 줄면 황지가 채워졌다. 보얀 손목이 휘돌아 상합지환에서 불빛이 연연히 반득였다.
“황후, 오늘도 열심이시오.”
“할머님.”
매양 되풀이되는 일상이었다. 예서제서 먹이려 드는 사람이 많은데, 그중에 태후가 가장 바지런했다. 생과방에 들렀다 소주방에 들렀다 노구로 록흔을 열심히도 챙겼다.
“오늘은 뭘 가져왔는지 맞춰 보겠소?”
“글쎄요, 할머님……. 그냥 알려 주셔요.”
록흔이 귀염 있게 웃자, 볼우물이 쏙 들어갔다. 그에 태후는 눈이 반달이 되었다.
“황후께서 이리 어여쁘게 웃어 주시니 그냥 보여 드려야겠소. 자, 뭐냐 하면…….”
궁녀가 보자기를 걷자, 바구니 안이 뵀다. 바소 모양 이파리가 그대로 붙어 탐스럽게 담긴 것은 여지(여주)였다. 알맹이는 동글어 수없이 돋은 돌기는 오돌토돌, 거북의 등을 닮아 곱다랗게 붉었다.
“상하기 쉬운 것이라 들었사온데…….”
“황후께서 잘 드시면 무엇을 못 구할까요?”
동렬이나 지필묵은 잠시 한쪽으로 밀렸다. 태후가 이끌어 록흔은 정자께로 가 앉았다.
“자, 내가 발라 줄 테니 황후께선 그냥 드시기만 하세요.”
“할머님, 제가 하겠습니다.”
“어허, 산송장이라 여기는 거요?”
태후는 즙이 흐르고 손에 묻는 것도 개의치 않고 여지를 깠다. 연한 속살이 발갛게 드러나자 특유의 향이 진하게 풍겼다. 찢는 대로 단물이 뚝뚝 돋았다.
“자, ‘아!’ 하세요.”
한입 머금으니 시고도 달았다. 록흔이 삼키면, 태후가 드밀고……. 그렇게 록흔은 여지 두 개를 먹었다.
“어떻소?”
“할머님께서 주셔 그런지, 향도 맛도 좋습니다.”
“우리 황후께선 왜 이리 어여쁘신지, 이 할미는 뭐든 잘 먹는 사람을 제일 곱게 친다오.”
농하듯 흔연스레 하는 말이나 록흔은 볼이 붉어졌다. 회잉 사실 알자마자 한 달 내내 입덧에 시달려, 속이 갈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때 태후가 노심초사하여 미안한 마음이 적잖았다.
“할머님, 제가 걱정을 너무 많이 끼치지요?”
“아니오, 아니에요. 이리 순하고 고운 황후께서 하실 말씀이 아니라오. 언제나 나는 황상 뒷자리지요. 뉘 있어 그리 아끼고 근심하시겠습니까?”
록흔은 저도 몰래 가슴 한가운데를 꾹 눌렀다. 그가 칼로써 박힌 자리, 그의 근심만큼 묶인 자리……. 그녀는 눈썹 그늘로 심산한 마음을 가렸다.
“황손께선 잘 크고 있지요?”
태후가 인자한 빛으로 건너보았다. 록흔은 얼른 미소로 답했다. 얼룩덜룩한 수심이야 잠시 묻어야 할 터. 맑진 눈이 잠시 일렁이다 제 빛을 찾았다.
“태동은요?”
“포말이 섭슬리는 것 같기도 하고 나비 날갯짓 같기도 하고, 연하고 연해서…….”
“황손께서 잘 자라고 계시군요. 고맙고 또 고마운 일이에요.”
“할머님께서 이리 돌봐 주셔서 그런걸요.”
“내가 한 게 무어라고. 뭐든 잘 드시고 근심하지 마세요. 황후께서 여위면 황상께서 단박에 근심하십니다.”
“예, 할머님.”
록흔이 연삽하게 대답하자, 태후가 손을 마주 잡았다. 깊게 웃어 늙은 눈이 거의 뵈지 않으니 마음이라는 것은 절로 샜다. 머리 허연 이나 머리 검은 이나 서로 보는 눈이 다스웠다. 영춘궁 봄바람이 그들 곁에서 살살 일었다.
“더 들겠소?”
“아니요. 저만 버릇없이 먹는 것 같아서, 제가 하나…….”
“나는 배가 이미 불렀어요. 이리 바라만 봐도 좋아서 말이오.”
웃음소리가 보드레하게 퍼졌다. 애잎 돋은 나무가 그들 곁에서 더욱 활짝 벌어졌다.
“황후 폐하, 호분위사 호류무가 들었사옵니다.”
신상궁이 아뢰자마자, 인호가 들어섰다. 금발이 금안이 어등 아래서 휘황찬란하게 돋았다. 아비를 빼닮았으되 짙은 그늘은 일호도 없었다. 그는 들고 온 것을 내려놓고 머리를 깊다랗게 숙였다. 강녕하셨냐 묻기에 록흔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잠시 들르러 온 거냐?”
“아닙니다, 폐하. 큰스님께서 이제는 태화성에 있어야 옳다 하셨습니다. 하여 완전히 내려왔습니다.”
“큰스님께선 잘 계시고?”
“예, 폐하. 스님께서 이걸 전해 드리라 하셨습니다.”
오지에 담긴 것은 금낭화와 비듬했다. 다물린 꽃망울은 여러 갠데 오로지 하나만 활짝 피었다. 배꽃처럼 투명하여 무지개가 아롱아롱 어려, 그 단아함으로 인해 투박한 화분조차 운치 있게 닿았다.
“거참, 곱구나. 무슨 꽃인고?”
화초에 조예 깊은 태후도 처음 보는 꽃이었다. 솔솔 풍기는 향이 한아하고 드맑았다.
“말씀 올립니다. 상정화라 하옵니다.”
“보기 드문 생김에 이름 또한 아름답구나. 내 이런 것은 정녕 처음 본다.”
“큰스님 법력 아래 매오로시 홀로인 꽃입니다. 하여 태후마마 하신 말씀대로 세상 뉘도 모르는 것이옵니다.”
“그렇구나. 상정이라 함은 또 무엇인고?”
“일체 더러움을 타지 않아 그리 불리니, 이 꽃 깃든 곳에 더럼은 일절 들어올 수 없다 합니다.”
태후가 고개를 갸울더니 눈귀를 좁혔다. 그리고 짚이는 게 있는 듯 더는 묻지 않았다.
“스님께 받기만 하는구나.”
“항시 폐하 걱정이십니다.”
호류무가 저 또한 그렇다 눈으로 말해, 록흔은 입귀를 연하게 늘렸다.
“한사에 관한 것은 계속 알아보고 계십니다. 하옵고 큰스님께서 말씀하시길, 그 또한 죄 없는 짐승이라 하셨습니다.”
“나도 그리 짐작은 했었다.”
록흔은 한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방심하면 언제든 날개가 꺾일 터. 세상은 보이지 않는 거미줄투성이였다.
“너 오니 좋구나. 곤할 텐데 그만 쉬렴.”
“예, 폐하.”
호류무가 물러가자, 태후 또한 인녕전으로 돌아갔다.
‘어찌…….’
동렬, 상정화, 그리고 여기께……. 록흔은 가슴을 꾹 눌렀다. 차마 못할 지경이라 물러섰으나, 한시적일 뿐. 그녀는 눈을 곧게 세웠다. 머리 위, 천창으로 눈꽃이 나팔나팔 쌓였다.
***
신천산, 상림관.
어린것들이 한 무더기 모여 앉아 있었다. 눈마다 초점이 없고 표정에는 얼이 없었다. 데꾼한 눈마다 가득 전 것은 두려움이라 바람소리라도 들릴라치면 저마다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도망치려 해도 사방이 낭떠러지라 바이 갈 곳이 없었다. 울어도 대들어도 소용없어 이제는 그저 죽을 날만 기다렸다.
“그 아이…… 살아 있을까?”
“차라리 죽는 게 나을 텐데.”
안채운은 최초이자 최후의 도망자였다. 물론 탈출은 실패하였고, 지금은 저 위 상봉에 산 채로 매달려 있었다. 꾸덕꾸덕 말라서 송장이나 진배없는 걸, 아이들은 한 번씩은 다 보았다. 예서는 일종의 통과의례 같은 것이라 뉘든 그 잔혹함에 놀라 오줌을 지렸다.
“쟤는…….”
“…….”
영락없는 백발노파였다. 방금 전에 끌려가더니 저리 쭈그렁바가지가 되어 나왔다. 아이들은 굴비인 양 엮여서 고개만 무겁게 떨궜다. 저 모습이 곧 제 모습이니 희망이란 일절 없었다.
“이것들이 눈 똑바로 뜨지 못해?”
고양이 귀신이 소리쳐, 아이들은 자라목이 됐다.
“파닥파닥 나대도 시원찮거늘!”
도관 한가운데 오롯이 사려 앉은 번데기는 식탐이 엄청났다. 먹는 족족 찌꺼기를 토해내고 다시 또 삼켰다. 아이들은 두려운 눈으로 보았다.
“동남동녀라 했다. 눈 크게 뜨지 못하느냐!”
따악!
따귀 치는 소리가 살천스러웠다.
“소리 질러!”
“으읍…….”
고양이 귀신이 등이며 가슴이며 마구 치는데, 아이들은 입술을 꽉 깨물며 참았다.
‘어머니한테 갈 거야.’
그리는 것은 어미, 그래서 버텼다. 아이들은 피가 배도록 혀를 물었다.
“오호, 오래 버티는구나. 이래도 그럴 테냐?”
차악!
앙칼지게 할퀴어 등마다 살이 붉게 발라졌다. 아직 어려 비명이 그예 터졌다. 그러다 가장 소리가 커다란 아이가 바로 붙잡혔다.
“시, 싫어!”
번데기가 크게 찢겼다. 그리고 아이가 그 안으로 쏙 들어갔다.
후르륵!
뭘 삼키관데 뭘 마시관데 번데기가 들썩들썩 요동을 쳤다. 흑갈색 껍질 안 투명하게 비치는 것은 사람이었다. 잘생겼으나 그게 더 섬뜩해 아이들은 엉엉 울었다.
“시끄럽다. 닥치지 못해!”
고양이 귀신이 을러 아이들은 팔을 묶은 쇠사슬에 얼굴을 묻었다. 누에가 여러 잠을 자듯이 저 번데기는 껍질을 거듭 벗었다. 삼켜지고 난 뒤에 피골이 상접한 노인이 되어 얼마 못 가 바로 죽고 말았다. 도관 한 곁에 그런 시체가 더미더미 쌓였으나, 살이고 수분이고 거의 없어 썩은 내는 바이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