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forge the Streak RAW novel - Chapter 42
연록흔 – 42화
“오랜만에 즐거웠다.”
말은 그러하나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우르르 몰려와 네가 제일이라 외쳐 주니 흥이 툭 떨어진 참. 가륜은 메마른 어조로 부접들을 치하했다.
“폐하, 외려 저희가 광영이옵니다.”
부접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예바른 소린 그만 하고, 이놈이나 데려다 묶어 둬라.”
여전히 록흔은 가륜에게 잡혀 있었다. 뜨뜻한 상처가 그의 손 안에 붉게 번졌다.
“천한 놈치곤, 잘 깨져서 말이다.”
가륜이 상긋이 웃었다. 흔치 않은 부드러움이라 록흔은 말문이 턱 막혔다. 무진 역시 내색은 못해도 크게 놀랐다.
“예, 폐하.”
너나 할 것이 없이 부접들이 한입으로 대답했다.
“가자, 우중랑장.”
“예, 폐하.”
팔에 놓인 무게가 덜어지자 마음 한쪽이 휑하니 무너졌다. 록흔은 달빛 같은 눈매로 멀어지는 임을 보았다. 눈앞은 온통 금빛, 서럽도록 눈이 부셨다.
“폐하, 저놈 생긴 거랑 다르지 않습니까?”
“…….”
“정말 스라유를…….”
무진은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닫았다. 그러고 보니 좀 전부터 저 혼자 말하고 있었던 듯했다. 황상께선 무언가에 골몰해 한곳만을 보고 계셨다. 바로 손, 놀이라도 들었는지 엷붉었다.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가, 주군은 한참을 그랬다.
“폐하, 어수가!”
채 마르지 않은 것은 분명 록흔의 피였다.
“아니, 됐다.”
가륜이 나직하게 잘라냈다. 어인 일인지 그는 한쪽 입귀를 어그러뜨리며 웃고 있었다.
“닦아 내셔야 합니다.”
무진이 손짓하자 궁녀 하나가 홀보드르르한 손수건을 받쳐 올렸다. 그는 냉큼 휘감아 주군의 손을 닦아 냈다. 곧, 미색 천이 연연히 물들었다.
“벌써 잊었나? 이보다 더한 핏물 속에서도 살았다. 이 정도가 대순가.”
“폐하, 그건 예전의 일이옵고.”
“지금은 다르다?”
무진은 차마 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하루하루가 급박하던 그때와 지금의 처지가 같진 않아도 작금이 더 좋노라 딱 부러지게 말하기도 뭣했다. 태화성은 어쩌면 강호보다 더 복잡한 곳이었다. 얽히고설킨 사람사슬 속에서 주군은 항시 날을 세운 검과도 같았다.
“폐하, 어머나!”
곱디고운 미성,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신경질이 배 있었다.
“어인 피온지요?”
무진은 이를 자그시 깨물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아름다운 미랑이건만, 애극 배우인 양 구는 저 태도는 우습기 그지없었다. 가녀리고 향기롭고 아리따운……, 은소현을 정의하는 수식어들이 그는 같잖기만 했다.
“고운 살갗 글면 어쩌려고, 일산(양산) 없이 나다니나?”
가륜이 곁눈 한번 없이 한마디 툭 던졌다. 걱정인 양 꾸민 비꼼에 무진은 웃음을 참으려 헛기침을 한 번 했다.
“폐하께서 친히 구장에 납셨다는데, 제가 어찌 처소에 가만있겠나이까?”
는실난실, 앙앙대는 양이 가히 고왔다. 그러나 소현이 어여삐 봐 주길 바라는 이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너처럼 연한 거죽은 금세 탄다. 뭐 하느냐, 어서 미랑을 안으로 들여라.”
“예, 폐하.”
챙기는가, 서둘러 치우는가? 소현은 황제의 면전 앞이라 인상을 쓰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나 어딘가 석연찮았다. 어언간, 그녀의 임은 멀찌감치 가고 없었다.
‘창휘루에 계시지 않는다 하여 좋아했더니…….’
소현에게 안도의 마음은 잠시였다.
‘연록흔과 축국판이라.’
황제와 호분중랑장, 주종관계 그 이상은 아닐 터였다. 그러나 소현은 자꾸만 의구심이 생겼다. 그녀는 계집도 아닌 사내에게 질투심을 느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오라비가 그러는데 폐하께서 호분중랑장을 아우처럼 여기신다 하더이다.”
월한이 거드는 말이 되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현은 얼굴을 더욱 찡그렸다.
“아우? 저 미천한 것을 그리 여기신다고?”
소현은 파르족족한 시선으로 월한을 치어다보았다. 붉은 입술이 앵돌아졌다.
“예. 그러하니 염려 마소서, 마마.”
토사구팽, 누가 개가 될지 그건 오래 두고 볼 일. 월한은 검은 너울 아래서 비릿하게 웃었다. 그녀 뒤로, 모였던 군중이 뿔뿔이 흩어졌다.
***
숲엔 안개가 몹시 짙었다. 어린 사람이나 늙은 사람은 숨쉬기도 힘들 지경, 아름드리 솟은 송목 군집 새로 들어가니 뿌옇던 것이 아예 는개로 변했다. 이슬비보다 가늘어도 비는 비라서, 시나브로 신이 젖고 겉옷이 젖었다. 문인석들이 둥그러니 쳐진 무덤 앞에서 일군의 사내들은 축축한 발걸음을 접었다.
“오셨습니까?”
검은 관복을 입은 사내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러자 관모에 돋을새김 한 법의란 글자에 종알종알 매달린 빗방울들이 밑으로 툭 떨어졌다.
“수고 많습니다.”
일곱 중의 우두머리가 맑진 눈으로 대꾸했다. 그리고 곧바로 사건에 대해서 물었다.
“최초 발견자는 누굽니까?”
“예. 문가의 묘지깁니다.”
“현장 보존은?”
“모두 그대로 두었습니다.”
“봅시다.”
“예, 이쪽으로.”
법의가 손짓하자, 그 아래 부법의들이 재빨리 움직였다. 그들이 기름먹인 종이를 거두고 거친 마직물을 치워내니 벌겋게 물크러진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핏덩어리는 너덜너덜하고 또 동그랬다. 훼손이 심하나 분명 인두였다.
“나머진?”
“없었습니다.”
머리칼 한 올 남은 것이 없고 겉살도 예리하게 뜯겨 나갔으나, 물컹한 안구까지 그대로 박힌 머리였다. 목 바로 위로 잘린 것뿐이라 성별은 알 수 없으나, 작고 갸름한 것으로 보아 그래도 여자의 것일 확률이 높았다.
“법의의 소견은?”
단정하게 묻는 말에 법의는 두 손을 모으고 앞으로 나섰다.
“박피를 공들여 했습니다. 되는대로 죽죽 잡아 찢은 것이 아니라, 머리통을 돌려가며 조심스럽게 살갗을 벗겼는데……. 추측하건대, 현재 유실되고 없지만 면피는 어느 곳엔가 원형 그대로 남았을 듯합니다.”
시체라면 평생 지긋하게 겪어 온 법의나, 평화로운 사윤성이라 이런 참혹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새벽녘에 불려 와서 처음 보았을 땐, 토악질을 참으려고 이를 거듭 윽물곤 했다. 그는 설명하면서도 자신의 위치를 잊고 자꾸 눈살을 찌푸렸다.
“면피를 벗긴 시기는요?”
법의는 잠시 유지 위에 덩그러니 놓인 머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 보기엔, 산 채입니다만. 맞습니까?”
살가죽이 한 겹 얇게 벗겨진 머리는 을크러진 피살 덩어리, 세세한 근육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이근이고 소근이고 관골근이고 험하게 뒤틀려 생살이 벗기어지는 고통이 얼마나 잔악한 것이었는지 짐작 정도는 가능케 했다.
“예. 제 소견도 그렇습니다.”
법의는 두말없이 동의했다.
“묘지기는 어디에 있습니까?”
“탄력도위와 함께 있습니다. 모시지요.”
이제 여덟, 그들은 처음에 만났던 무덤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도하자마자, 일찌감치 대기하고 섰던 사내 하나가 자세를 바로하고 공수로써 예의를 갖췄다.
“사윤성 탄력도위, 자천입니다. 이자는 문가의 묘지기, 로군이라 합니다.”
가리킴 당한 초로의 사내는 얼굴에 겁먹은 빛이 역력했다.
“누구의 무덤입니까?”
이래라저래라 하대받는 이였다. 로군은 꽤나 높아 뵈는 관리의 공대에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머리를 깊숙이 숙였다.
“아룁니다. 전대 가주이신 문정 대인의 묘입니다.”
“봉분을 보아하니…….”
새파란 떼가 주위의 것보다 더 새뜻했다. 매장한 지 얼마 안 된 게 분명했다.
“예, 어제가 삼우제였습니다.”
“마지막에 올라온 이는요?”
“작은 마님과 시비 아이옵니다. 작은 마님께서 초우, 재우, 삼우, 큰 마님과 따로 지내시느라 밤늦게 오시곤 했는데 어젯밤도 그랬습니다.”
“그 사람들 내려가는 건 봤습니까?”
“아닙니다. 삼경이 훨씬 넘어도 내려오지 않으시길래, 올라와 봤더니만…… 작은 마님은 안 계시고, 저렇게…….”
“저 길 말고 다른 길은 없습니까?”
지금의 발밑부터 저 산 아래까지, 비오는 날에도 발을 더럽히지 않고 산을 오를 수 있게 넓적한 돌들이 연달아 놓여 있었다. 묘지로 가는 길을 이렇듯 호사스럽게 꾸며 놓은 것만 봐도 문가의 부를 어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없습니다.”
묘지기 로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산 위쪽엔 맹수도 많고 길도 험해서, 문가 어른들은 모두 이 길로만 다니십니다. 사실, 저도 저 너머엔 거의 가보지 않았습죠.”
“본가와는 연락이 닿았습니까?”
“예, 말씀 올렸사온데…….”
로군이 머뭇거렸다. 그때 자천이 나섰다.
“집안에 우환이 끊이지 않으니, 쉬쉬하는 것 같습니다.”
“직접 나온 사람이 없다, 그 말이오?”
묻는 말투가 조금 날카로웠다.
“아, 예…….”
그 기세에 짓눌려 자천은 말꼬리를 길게 끄셨다.
처벅처벅!
젖은 땅에 발자국이 얇게 팼다. 커다란 봉분 주위로 빙 둘러쳐진 족적, 그리고 맑게 떨어진 소리가 있었다.
“문가에 다시 연락하시오.”
“예에?”
“무덤을 파야겠소.”
하얀 손이 떼를 입힌 무덤 위에 놓였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자천도 로군도 놀라 외쳤다. 법의 또한 무슨 일인가 기웃거리다, 그만 경악했다.
“이래도 쉬쉬할 것 같습니까?”
“아, 아닙니다.”
작은 산만 한 봉분 뒤쪽, 푸르러야 옳을 떼가 그곳에만 새카맣게 돋았다. 게다가 다른 것들보다 유난히 길었다.
“무엇으로 보입니까?”
자천은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촘촘하게 자란 것, 는개 속에서 보니 속이 뒤틀렸다.
“머리칼입니다.”
법의가 대꾸했다. 그 역시 눈을 잔뜩 조프리고 있었다.
파슥.
조금 무거워진 솔가지가 밑으로 처졌다.
“…….”
여자 둘은 간데없고, 머리 하나만 남았다. 사건은 장성에서 한 시간 거리인 사윤성에서 최초로 볼가졌다.
태화성의 장서각 진광원, 미시(오후 한 시~세 시).
오 층 건물 안, 빼곡하게 늘어선 책장마다 밖에서는 구하기 힘든 희귀서는 물론이고 여러 분야의 장서들이 가득 들어찼다. 고개가 뻣뻣할 만큼 뒤로 젖혀도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높다란 책의 벽, 그러나 이게 다는 아니라 여러 채의 부속 건물이 더 있었다. 이스펠을 비롯한 서방의 책들은 따로 전유와에, 가깝게는 숙신으로부터 멀리 현국을 아우르는 동방의 장서는 온유와라 불리는 별관에 있어, 수많은 검서관들이 책을 분류하고 관리했다. 평생이란 시간을 통해서도 모두 읽기란 어렵노라, 전대 진광원 제학 송병후의 말처럼 진광원은 그야말로 인간 지혜의 보고였다.
사삭사삭.
거대한 서고 한구석에서 종잇장 넘기는 소리가 상량하게 돋았다. 통풍과 채광을 위해 뚫어놓은 잗다란 창틈으로 새어 들어온 바람이 어느 연한 귀밑머리를 날렸다. 그리고 잘게 들이친 햇발은 섬려한 속눈썹 아래에 짙은 그늘을 드리웠다.
“창해.”
창해는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즉, 이렇듯 방대한 양의 장서라 함은 따분함을 앞서 기가 죽을 노릇. 그러나 답답한 장서각도 나름의 즐거움은 있었다. 그는 맑지고 해사한 얼굴 하나를 뚫어지게 보았다. 조금 전까지 금방이라도 책에 압사당할 것 같은 두려움에 왕방울 눈으로 이리저리 할긋거린 이는 여기 없었다.
“창해.”
연한 속눈썹이 하늑하늑, 영롱한 눈동자가 좌로 우로……. 창해로선 봐도 봐도 질리지 않을 그 무엇이었다.
탁.
록흔은 책장을 소리 나게 덮었다. 먹는 생각을 하는 것인지 술 생각을 하는 것인지 창해는 부르는 지도 모르고 헤실헤실 웃기만 했다. 곰 같은 부하가 마냥 귀여워 그는 입귀를 우그렸다.
“농땡이치려고 따라온 모양이군.”
“예에? 접두, 부르셨습니까?”
밉지 않게 툭 쏘는 소리에 창해는 정신을 차렸다. 행여 침이라도 묻었을까 싶어 그는 소매로 우악살스레 입가를 문댔다.
“하하, 제가 뭐 도울 일이라도.”
“이것 좀, 서장에. 맨 위다.”
록흔은 왼손으로 책 몇 권을 넘겨주었다. 오른팔은 여전히 어깨에 매달려 있으나마나 했다.
“예, 예! 이리 주십쇼.”
창해는 노래하듯이 대답했다. 접두랑 단둘이서 무슨 일인가를 한다는 것이 너무나 좋았다. 책이라면 소름이 돋을 지경이지만, 접두께서 원하신다면 몇천 권이라도 찾아다 드릴 용의가 있었다. 그는 굵다란 팔을 길게 뻗어 책을 꽂았다. 눈을 내리니 저 아래, 접두가 있었다. 티를 안 내려 해도, 문가네 묘지에서 실랑이하고 있을 다른 놈들을 생각하니 웃음이 실실 나왔다.
“접두, 필사 같은 것도 좋습니다. 우수를 못 쓰시니 시켜만 주세요.”
붓으로 베껴 쓰는 것, 그 또한 창해는 질색이었다. 그러나 접두 앞이라 그런지 되지도 않는 말이 마구 굴러 나왔다. 일단 말해 놓고 깜짝 놀라 그는 입을 턱 막았다.
“됐다. 유장이 그러던데, 먹물 두드러기가 있다면서? 길지 않은 내용이니 대충 보면 돼.”
록흔은 그리 말하고 상긋 웃었다. 창해는 날이 갈수록 귀염만 늘어, 웃을 일이 별로 없는 그로선 큰 즐거움이었다. 게다가 우직하고 순박하여 진국인 수하였다.
“이 자식이! 그런 비밀을…….”
“내근하는 게 부러웠던 모양이지. 그럼, 이것도 좀 부탁한다.”
“아, 예에…….”
록흔은 산더미만큼 쌓였던 책을 한쪽으로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검서관들이 관리는 잘한다 해도 먼지는 어느 정도 있어 한참 책장을 넘기고 뒤적였더니 마른기침이 나왔다. 두어 번 목을 가다듬어도 칼칼하긴 매한가지였다.
“접두, 무슨 책을 이리 많이 보십니까? 사윤건 때문이지요?”
“응. 그런데 쉽게 보이지 않는군. 좀 더 찾아봐야겠어.”
“예, 다녀오세요. 여긴, 제가 깨끗이 정리해 둡지요.”
“그래.”
진광원은 깃든 사람은 많으나 정말 조용한 곳이었다. 어느 구석에서 헤매도 검서관들이 즉시 나타나 돕되, 그들의 말소리도 발자국소리도 여간해선 들리지 않았다. 그림처럼 있다가 그림자처럼 움직여 록흔조차도 놀랄 때가 있었다.
“연중랑장님, 도울 일이라도 계시온지요?”
록흔이 기다란 책장을 돌아 나오는데, 누군가 조용히 물었다. 아청빛 관복으로 보아 검서관보다 직제가 높은 대교였다. 해끔한 인상이 영락없는 책상물림, 그는 소매 아래에서 공손히 읍한 채였다.
“진광원 대교, 한수라고 하옵니다.”
“장서총목을 좀 보려 합니다만.”
“이리로. 제가 모시겠습니다.”
대교의 뒤를 따르면서 록흔은 채걸을 생각했다. 그 벗은 책을 어지간히 좋아하니 이곳에 두면 식음도 전폐하고 독서에만 몰두할 것이다. 텁텁한 책 냄새에 어렸던 날들이 떠올랐다. 책 한 권 읽고서 논쟁인지 입씨름인지, 반나절을 싸웠던 기억도 돋았다.
“연중랑장님, 무슨 책을 찾으시는지요?”
“박살과 관련된 것입니다.”
한수는 대번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껍질을 벗겨 죽이는 것, 박살. 듣기만 해도 끔찍한 단어였다.
“잠시만…… 찾아보겠습니다.”
책의 수가 무한하니, 총목 또한 권수를 헤아리기 어렵게 많았다. 총목의 목차 역시 따로 있어 장마다 정리된 것이 정연했다. 한수는 서랍 하나를 열었다.
“촌담, 사람의 피부를 저며 먹기를 즐겼다는 토매인들의 이야기…….”
한수는 가느다란 손으로 목록을 뒤적였다. 분류된 책마다 간략한 개요가 실려 있었다.
“과려전, 대기근에 어린애의 살갗을 발라 식용했다는 예하의 기록…….”
억양의 변화가 없었다. 한수는 그저 읽고 또 읽었다.
“채철담, 밤마다 이어지는 사람 잡는 백정들의…….”
채철, 살을 바르고 발랐다? 어지간히 피 튀기는 이야기로군. 록흔은 서늘한 눈으로 목록을 건너보았다.
“책형주……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기둥에 묶어 세워 창으로 찔러 죽이는 형벌, 그때 쓰이는 나무기둥 책형주. 살점은 발릴지언정 박살과는 별 관계가 없었다. 록흔은 고개만 가만 끄덕였다.
“아, 이런 책도 있습니다.”
“……!”
그저 글자였다. 그러나 록흔은 선명히 맡을 수 있었다. 훅 끼치는 피비린내에 입귀가 절로 일그러졌다.
“어느 살인자에 대한 기록…….”
한수가 머뭇대며 한 글자씩 천천히 읽었다. 그러다 결국은 입을 다물었다.
“리갈, 낯가죽을 벗기다.”
또는 벗기고 벗긴다. 록흔이 한수 대신 마저 읽었다. 작자는 묵철, 기록 연도는 지금으로부터 백오십 년 전. 감이라는 놈, 책명을 대하니 마구 펄떡댔다.
“사 층 서고에 한 권 있습니다. 찾아 드릴까요?”
록흔은 묻는 말에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예서 기다려 주십시오.”
한수는 가고, 록흔은 의자에 앉아 깊은 생각에 빠졌다. 거죽이 벗겨진 정체불명의 인두, 무덤에 돋아난 머리칼, 뭔가 감추려는 문가……. 무엇이냐, 무엇이냐? 심장이 벌떡거렸다.
“저, 연중랑장님…….”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대교 한수였다. 록흔은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내리고, 어두운 눈만 조금 들었다.
“검서관 말이 그 책은 벌써 대출되고 없답니다.”
뉜지 모르나 책 읽는 취향 한번 독특했다. 진광원 구석에서 묵던 살인자의 기록, 어디에 소용이 되었을까? 록흔은 고개를 갸울고 한수를 번히 보았다.
“누가 빌려 갔습니까?”
“그게…… 장인태감입니다.”
“장인태감, 이공공 말씀입니까?”
“예.”
참으로 의외로운 말이었다.
“언제입니까?”
“나흘 전입니다.”
록흔은 대답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의자가 바닥을 끄셔 조용한 장서각에 잗다란 울림이 생겼다.
“가십니까?”
“예. 대교께서 수고 많으셨습니다.”
창틈으로 들이친 해의 부스러기가 희부옇게 산란했다. 한수는 그 빛 아래서 조용히 읍하고, 록흔은 그 빛을 등졌다. 호분위의 백색 정복 위로 빛의 그림자가 묘하게 아롱거렸다.
“접두!”
소리가 난 쪽은 이 층 서가였다.
“강무관에서 기다려라, 곧 간다.”
“접두, 저도…….”
창해가 난관에 몸을 기대고 서서 커다랗게 외쳤다. 그러나 록흔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럼, 먼저 가 있겠습니다!”
머리만 조금 까딱, 접두의 답은 그게 전부였다. 창해는 목을 쭉 빼고 보았다. 고운 머리칼의 끝이 책장 너머로 조금 비치다 그나마 곧 없어졌다.
“하여간 정말 날래셔.”
창해는 반도 정리하지 못한 책 쪽으로 몸을 돌렸다. 갑자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어쩐다…….”
아무래도 검서관에게 부탁을 해야 할 듯. 창해는 팔짱을 끼고 위를 올려 보았다. 진광원의 지난 세월만큼, 그 안에 담긴 책의 권수만큼, 서장마다 묻은 지혜만큼…… 정체모를 무게가 그를 짓눌렀다.
“으스스한데.”
벗들이 알면 마구 웃을 터. 책장이 좁혀져 저를 뭉갤 것만 같았다. 창해는 바짝 졸아서 팔뚝을 마구 문질렀다. 정말이지 질긴 살갗에 소름이 올록볼록 돋았다.
“도와드릴까요?”
갑작스럽게 들리는 목소리. 창해는 너무 반가워 입을 주욱 찢었다. 낯빛 하야니 책상만 껴안고 살았을 거라 비웃던 이들이 이리 반가울 줄은 미처 몰랐다.
탁.
타악.
오동나무를 깎아 소나무로 밑을 받쳐 켜켜이 짜 올린 서장마다 바람이 와 담겼다. 가죽으로 장정한 것, 얇은 종이로만 묶어 세워 두지 못하는 것, 죽간으로 둘둘 말아 차곡차곡 포개 놓은 것……. 지나온 세월이 달라 서책의 생김도 달랐다.
다랑!
장방형으로 파인 진광원의 중앙, 빈 공간을 따라 오르면 또 하나의 천공이 있었다. 시원스레 뻗은 보꾹에서 한낮의 별이 빛나니, 바로 황제를 뜻하는 성좌……. 금을 도려내고 금강을 박아 넣어 하늘에 박힌 것만큼 찬란했다.
“장인태감께선 여기 아니 계십니다.”
턱이 파르란 젊은 환관이 맑은 고성으로 대답했다.
“어디, 출타하셨습니까?”
곧장 달려온 곳이 무세전, 그러나 청방에는 하신이 없었다. 록흔은 조금 난처한 얼굴로 되물었다.
“예. 세죽관에 가셨습니다.”
“폐하를…….”
목에 뭐가 걸린 양, 록흔은 갑자기 말을 끊었다.
“예. 폐하께서 잠시 쉬신다 하셔서요.”
“…….”
“게 가시면, 뵐 수 있을 겁니다.”
록흔은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저는 이만.”
청방의 문이 닫혔으나, 록흔은 차마 발걸음을 뗄 생각을 못했다. 세죽관, 청죽원……. 그에게 그곳은 슬픈 곳, 거짓투성이 몸으로 찾아가기란 몹시 버거웠다.
‘껍데기…….’
록흔은 제 얼굴을 틀어쥐었다.
‘독한 속, 잘도 덮는…….’
적막하던 복도에 소리가 조금 일었다. 하얀 옷자락이 가벼이 휘날렸다.
두벅.
두벅.
두벅.
“연록흔.”
부르는 소리에 록흔이 무심코 고개를 드니, 보이는 것은 연록이었다. 창동, 설무진. 그가 목전에 있었다. 빛접게 반득대는 취옥빛 눈이 몹시 밝았다.
“폐하께 혼이라도 잔뜩 났나?”
빙긋 웃으며 묻는 입매가 서늘했다.
“아닙니다.”
곧장 떨어진 대꾸가 파슬파슬했다.
“아니긴, 어깨가 이렇게 축 처졌는데.”
무진은 그리 말하다 입귀를 우그렸다. 뭔가 마뜩찮은 얼굴이었다.
“그 팔은 언제 낫는 거냐?”
“시체인 양 가만 누워 있으면, 낫는답니다.”
이 사람 저 사람 하도 물으니 답하기가 귀찮을 정도였다. 록흔은 남의 일인 듯 고저 없이 무미하게 대꾸했다.
“그래? 어떠냐, 내가 폐하께 말씀드리면…….”
무진 역시 심드렁하게 받아쳤다. 그러나 눈빛만은 형형하게 번득였다.
“됐습니다. 받는 녹이 얼만데, 그 값만큼은 하렵니다.”
록흔은 툭 내뱉고 한 걸음 앞서 나갔다.
“하하하!”
무진은 가슴을 울리며 웃었다. 야무지고 삐딱한 놈, 말을 칠수록 재미났다. 가분가분 틀에 박힌 대답만 듣다, 어린 호분중랑장을 만나면 속이 뻥 뚫렸다. 사내란 모름지기 고슴도치같이 뻐센 맛도 있어야 옳았다.
“네가 이러하니, 폐하께서 아끼시는 모양이다.”
“아무렴 설중랑장만큼이나 하겠습니까?”
록흔은 무심히 받아쳤으나 무진에겐 예사롭지 않았다. 어린 눈에 그득한 짙은 그늘에 그는 눈귀를 치올렸다.
“폐하께서 뭐라 하시더냐?”
“여기 청방에 안 계십니다.”
터억, 커다란 무게감이 어깨에 내려앉았다. 록흔은 무진을 향해 고개를 실긋 틀었다.
“그럼 세죽관에 계시겠군.”
“…….”
“폐하 성정에 꽃놀이 가시진 않았을 테니까.”
“예, 게 계신답니다.”
“뭐 쉰다는 건 그럴 듯한 허울이고, 일 보따리를 한 아름 챙겨 가셨겠지. 가자, 세죽관으로.”
그냥 지나가듯 하는 말이나 충정이 담겨 있었다. 무진이 황제 곁에 있으니 록흔으로선 안심이 크게 됐다. 올곧은 사람 나무의 울 속에서, 그분께서 더 높이 돋을 수 있을 테니……. 록흔은 저 혼자서 살포시 웃었다.
“애늙은인 줄 알았더니, 나이답게 귀엽게 웃을 줄도 아는군.”
무진이 비틀어 말해도, 록흔은 그냥 웃었다. 하얀 볼에 어여쁜 우물이 깊게 팼다.
“연록흔.”
록흔은 눈귀만 들어 물었다.
“혹 너…….”
“예.”
“누이는 없나?”
“위로도 아래로도 없습니다. 한참 어린 아우는 하나 있습니다만.”
“아깝군.”
록흔은 굳이 묻지 않았다. 일일이 묻고 반응해서 얻을 건 하나 없었다. 그저 덤덤히 그저 담담히 아는 듯 모르는 듯 넘기는 게 상책, 그건 다년간의 경험으로 축적된 바였다.
“라한성은 어떻습니까?”
대신 록흔이 공적인 것으로 화제를 돌리니, 무진은 심록 같은 눈으로 상긋 웃었다. 사내답게 서글서글해, 저리 묻는 속이 빤히 보여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아직 폐하께도 말씀 올리지 않았지만.”
“예.”
“하룻밤 새 아자가 된 이가 수두룩하다.”
라한성도 사윤성도 장성과 멀지 않았다. 괴이한 사건이 산발해 동창도 부접도 바삐 움직이는 참. 이런 즈음의 호분위나 집금위는 부중랑장들이 상관의 빈자리를 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