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forge the Streak RAW novel - Chapter 84
연록흔 – 84화
“륜…….”
저도 모를 소리였다. 그저 마음에 찬 것이라, 무엇을 부르는지도 몰랐다. 록흔은 그 이름을 흐느끼듯 토해냈다.
탁.
두 손 모두 잡혔다. 아스러질 듯 쥐어져 록흔은 눈을 떴다. 가륜이 바로 위에 있었다. 그가 뚫을 듯이 보기에 그녀는 입술만 동그랗게 말았다.
“흐읍…….”
왜냐는 말 미처 못했다. 가륜이 단숨에 숨을 앗아 그대로 까라졌을 뿐. 혼곤할 만큼 깊은 입맞춤, 그로써 호흡조차 불가했다. 록흔은 그에게 섭슬렸다. 그리고 그를 좇아 만개했다. 부푼 입술은 짙붉고, 가슴 끝은 도홍으로 돋았다.
“다시 불러봐.”
집어삼켜질 듯 거센 눈이었다. 가륜이 좨치는 대로 록흔은 순순히 따랐다. 사내답게 준미한 그 입술에 소중한 이름을 되새겼다. 소리 없으나 그에게는 이미 닿았다.
“이대로라면.”
일종의 광기였다. 가륜은 어둡게 갈앉은 눈으로 록흔을 응시했다. 곧게 잠기고픈, 험히 발기고픈……. 분명 다치게 할 터였다. 그는 턱을 으득 당겼다. 그리고 눈귀를 실긋 틀었다.
“저는…….”
가륜은 눈을 가늘였다. 그 아래서, 록흔이 입술을 달싹였다.
“잘 모르지만…….”
때론 안어가 더 명확하니, 깊게 들여다보는 것으로 족했다. 가륜은 그대로 록흔을 움켜쥐었다. 무엇이든 뜻대로……. 두 눈이 달빛 고여 드맑았다. 그에 그가 보얀 젖가슴을 담뿍 그러잡았다. 성애는 모르오나……. 애달픔에 그녀는 잗다랗게 떨었다. 이내 도홍빛 망울이 그 손 안에 잠겼다. 마음 가는 곳으로……. 그예 연한 눈귀에서 이슬이 맑게 돋았다.
“아…….”
아직 어려 섧게 앓았다. 그러나 가륜은 록흔을 놓을 수 없었다. 그녀가 떠는 만큼 더욱 바투 안아, 은은히 밴 향까지 모두 취했다.
“록흔, 내 연.”
산 자로서 인생을 향유할 터. 지난 그늘은 이미 과거였다. 능금을 음미하듯, 가륜은 록흔의 가슴을 탐했다. 설백빛으로 향긋하니 머금어도 좋을 터, 그는 한입 가득 물었다.
“……!”
록흔은 비명도 내지르지 못했다. 입술이 붉게 이지러져 고개만 젖힐 뿐, 잔뜩 좁힌 눈은 이미 갈쌍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사내, 가륜은 잔약한 몸피를 더욱 그악스레 짓눌렀다. 흐느껴도 뒤채도 돌아보지 않았다. 다만 유륜이 붉어지도록 가슴에 피멍이 남도록, 긁고 빨아들였다. 당과 맛을 처음 본 아이라도 그 같지는 않을 듯싶었다.
“류…….”
가륜은 눈귀를 일그러뜨렸다. 록흔이 그리 부르니 온몸이 묵직했다. 그는 날파랍게 일어서 의대를 젖혔다. 그리고 찢듯 발기듯 다뤄 침상 아래로 내던졌다.
타앗.
무릎으로 가두고, 가륜은 록흔을 내려 봤다. 그 때 햇살바라기 하듯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그가 바로 잡아채 얽어, 그대로 하나가 됐다. 심장이 뛰는 대로 서로를 느꼈다.
“…….”
“…….”
록흔이 하얗게 웃어 달꽃보다 더 곱다웠다. 어언간, 굵다란 기둥에 가슴이 받힌 듯했다. 수줍어 교태 없는 미소나, 가륜은 그대로 무너졌다.
“네 미소…….”
온전히 지켜주겠다, 영원토록. 가륜이 사린 말을 록흔이 그 눈에 받았다. 그녀는 부옇게 미소 지었다.
“이리 젖어서.”
함박 젖은 눈귀가 애틋했다. 가륜이 어루만지니, 연한 것이 닿았다. 설레발치는 속눈썹 새, 그녀가 이슬처럼 맑았다. 미소는 어느새 눈물로 변해 버렸다.
“그예 우는군. 웃어 봐, 그래야 내 마음이 찬다.”
“슬퍼 그러는 건 아니…….”
“안다, 그래도 울지 마라.”
“예…….”
록흔이 잠긴 목으로 대답해, 가륜은 품에 박을 듯이 안았다. 오감으로 느끼니 그토록 그리던 사람이었다. 그저 뵈고 그저 닿아 그를 전율케 했다.
“아내가 된다 했으니.”
가륜은 거침없이 손을 움직였다. 가는 목을 꺾을 듯 젖혀 맥이 팔딱대는 목을 훑고, 말랑한 가슴을 훔켜잡았다. 허리를 다뿍 움켜쥐니 소스라치는 게 닿았다.
“아, 안…….”
록흔은 할딱였다. 큼직하고 기다란 손가락이 껴든 곳, 저조차도 잘 모르던 곳이었다. 가륜이 더 깊게 뻗어, 그녀는 잠시 숨을 멈췄다.
“그건…….”
발그레 숨은 것이 오그라졌다. 록흔은 목을 뒤로 꺾었다. 손목에 도드라진 푸른 핏줄이 파리우리 빛났다. 부드러운 젖가슴이 보얗게 출렁였다. 그 끝에서 유두는 매화인 양 봉오리 졌다. 버긋진 입술 새, 뜨거운 숨이 샜다. 눈귀를 잔뜩 일그러뜨렸으나, 그녀는 아리도록 고왔다.
“……!”
입술이 붉게 터졌다. 록흔은 고개를 비틀었다. 가륜이 허벅지를 움켜쥔 것은 순간, 그 입술이 그녀에게 닿았다. 생명이 시작되는 곳, 그곳에 그는 숨결로 스몄다.
스윽.
하얀 깁에 핏물이 뱄다. 문흔 그대로 선연히 남았다.
“몹쓸 버릇이군.”
가륜이 귓전에 속삭였다. 비로소 록흔은 안도했다. 그가 곧게 보기에 발간 입술만 물었다. 붉음은 곧 이지러져 그에게로 옮겨갔다. 그가 깊게 앗을수록 아린 기는 연해졌다.
“이리 소홀히 하지 마라.”
그러겠노라 대꾸할 여력 없이, 록흔은 맵차게 당겨졌다. 허리께가 잡힌 것도 순간, 가륜이 묵직하게 들어왔다. 깊게 숨은 살갗까지 예리하게 앗겼다. 맑진 눈은 연빛으로 바래고, 입술은 애참하게 터졌다. 버근하게 들이차는 존재, 바로 그였으므로. 그녀는 도리질도 하지 못했다.
탁.
이불깃이 뺨을 눌렀다.
타악.
가륜이 그러쥔 대로 록흔은 섭슬렸다.
“흐윽.”
둔통에 록흔은 입술을 사리물었다. 가륜이 채워, 그녀는 비로소 온전했다. 그가 움직일수록 지금껏 비었던 곳이 부듯하게 찼다. 달금하게 아파도, 사랑이었다. 그녀는 앓는 소리를 깨물며 참아냈다. 명치에서 시작된 통증은 가슴까지 올랐다.
사랏.
록흔은 할근대며 간신히 눈을 떴다. 헝클어진 머리칼 새로 가륜이 뵀다. 그가 급작스레 멈춰, 그녀는 눈시울을 좁혔다.
“전, 괜찮…….”
항시 그렇게 말했다. 그게 록흔이었다. 가륜은 입귀를 비틀고 가냘픈 어깨를 그러잡았다.
“참지 않으셔도, 폐하…….”
날캄한 봉안 가득, 록흔이 들어찼다.
“아니, 록흔.”
숨 가빠 달싹이는 입술에 가륜은 제 것을 묻었다. 그리고 깊게 빨아들였다. 할 수 있다면 앗고 싶은 고통이나, 그녀는 아직 어리고 여렸다. 하여 잠시 묻히길 바랐다.
“함께 하는 거다.”
밤처럼 검은 목소리나 차지 않았다. 불인 듯 뜨거워 뭐든 태울 듯, 가륜이 낮게 속삭여 록흔은 눈귀를 떨었다. 그녀의 젖은 이마에 그가 입술을 댔다.
“그렇다면…….”
사내란 때론 동물이었다. 저 혼자 절정에 치달아, 극렬한 쾌감에 전율하고 여잘랑 내박쳤다. 그러나 그것은 교미, 서로 나누는 것이 사랑이었다.
“절…….”
가륜은 미동 없이 있었다. 그 아픔 잦기를, 눈물이 얼마간은 마르기를……. 그렇게 록흔을 어루만지며 기다렸다. 이리 한 몸이니 이제 피아는 무의미했다.
“함께 하는 것이라면……, 사랑해 주세요.”
록흔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진향 밴 입술을 오므렸다. 오로지 부르는 이름은 하나, 가륜은 갈쌍대는 눈귀를 손끝으로 쓸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그러잡았다.
타악.
탁.
한껏 채워졌다 여겼다. 그러나 임계는 없었다. 가륜이 다루는 대로 록흔은 그득 찼다. 그저 혼곤해 신음만 깨무니, 제 몸이나 이미 제 것이 아니었다. 그 가슴 넓기에 연한 망울도 부풀고, 그 어깨가 강건하기에 가녀린 팔은 크게 꺾였다. 어둠 속에서 달빛에 씻겨 그녀는 오롯이 하얬다.
차악.
보드라이 출렁대던 가슴이 움직임을 멈췄다. 가륜이 맵차게 그러쥐어 말랑한 것이 더 부풀었다. 기다란 손가락 새, 유두는 연홍으로 탐스러웠다.
“하……아…….”
신열이라도 오른 듯 온몸이 뜨거웠다. 어언간, 록흔은 입귀를 비틀었다. 소리 내고프나, 반벙어리 한숨뿐이었다. 가륜이 밀어붙일수록, 아릿한 통증이 그녀를 험하게 좨쳤다.
탁, 타악.
짓눌리는 대로 손목이 고개가 가련하게 꺾였다.
“…….”
지금껏 안겼던 것과 달랐다. 형언할 수 없으나 버겁게 컸다. 세상이 모두 빈 듯했다. 록흔에게는 오직 가륜이 있었다. 떨림은 깊다랗게 퍼져, 그녀를 졸이고 오그라뜨렸다.
“눈 떠.”
가륜이 명하는 대로, 록흔은 힘겹게 부스대 겨우 눈을 열었다. 바로 뵈는 것은 아슴한 빛, 그러나 무디지 않았다. 그 순간, 그가 입귀를 실긋 틀었다.
“폐…….”
록흔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숨을 멈춘 듯, 손끝을 동그랗게 만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가슴이 오르내릴 뿐이라 가륜은 연한 허리선을 힘껏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녀 안에 곧게 들어갔다.
“하윽!”
록흔이 잔약히 울먹여 가륜 또한 신음했다. 방종은 그에게도 허락돼, 그예 작렬했다. 땀방울이 이마에서 돋아, 그녀의 가슴으로 내려앉았다. 열감은 그에게서 터져 그녀를 적셨다.
“후…….”
가륜은 록흔을 한없이 쓸었다. 가쁜 호흡이 잦아들 때까지 곱다시 가는 몸을 바투 안았다. 무와 연은 별개였다. 강한 그녀라 하나, 가락거리는 것은 여느 여인들과 같았다. 그 연약함이 애틋해 손닿은 대로 모두 훔켜쥐었다.
“…….”
아직은 멀었다. 이 정도는 충분치 않았다. 그러나 내키는 대로 할 수는 없었다. 가륜은 제게 짓눌린 젖가슴을 부드럽게 쥐었다. 한 손에 담고 보니 봉긋한 망울이 그저 애처로웠다. 연한 핏줄 푸르게 돋아, 연홍빛 버찌 함초롬히 맺혀……. 그는 손바닥으로 그 고움을 크게 덮었다.
“하자들면 끝도 없을 터.”
가륜은 몸을 굴려 록흔을 바짝 당겨 안았다. 그리고 보드레한 등을 어루만졌다. 곤하고 힘들 테지만, 그로선 이것까지 물릴 수는 없었다. 그는 허리에서 골반으로, 가슴에서 옆구리로 이어지는 선으로 느릿하게 거슬렀다. 그리고 어깨를 자근자근 씹었다. 단물이 배나오는 듯해 거듭 지분댔다. 이내 그녀가 얕은 신음을 흘렸다.
“조금만…….”
“음.”
다소 무뚝뚝한 대답에 록흔이 입귀를 우그렸다. 지쳐 제대로 눈도 못 뜨면서 그녀는 봄볕처럼 웃었다.
“정말, 잠시만요.”
록흔이 나긋하게 가륜에게 안겼다. 가슴에 닿은 보드란 입술에 그는 신음을 억눌렀다.
“…….”
달빛 들이쳐 사위는 어둡지 않으나, 들리는 건 연한 숨결뿐이었다. 가륜은 록흔을 끌어안고, 창 너머 하늘을 올려 봤다.
“끝이런가?”
꿈인 듯 행복했으나, 접어야 할 터. 암행이 영원토록 계속될 수는 없었다. 가륜은 눈귀를 실긋 틀었다. 묵공을 응시하니, 뉘 눈빛인 양 별들이 찬연했다. 그는 록흔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물결처럼 하르르한 머리칼에 입술을 묻었다.
여름밤은 꽤 후텁지근했다. 서린은 손끝에 묻은 미안수를 떨궈냈다. 그리고 의자에서 일어서 창밖을 내다봤다. 무엇을 하든, 무엇을 보든 섧기만 했다. 고운 눈매에도 연한 입매에도 그늘이 짙었다. 그녀는 팔락대는 휘장을 그러잡았다.
‘꽃도 지는데…….’
저것과 제가 다를 게 무얼까? 이 젊음 사위면 그예 지겠지. 서린은 입술 가득 한숨을 빼물었다. 사랑 하나만 보며 살겠노라 다졌어도 첩이란 자리는 결코 녹록치 않았다. 해바라기도 혼자, 가슴앓이도 혼자……. 어쩌면 창에 걸린 저 깁보다도 못한 신세였다. 마음이 울적하니 기껍다 볼 고운 꽃들도 아리게만 닿았다. 그녀는 홀로 눈시울만 붉혔다. 임은 이토록 멀기만 하니, 매양 눈물이었다.
차각.
서린이 할긋 돌아보니 시비 아이였다. 미안이 반짝 개였다가 다시 흐려졌다.
“아씨! 전하께서 돌아오셨답니다.”
막 뛰어왔는지 그 숨이 거칠었다.
“그럼, 왜 이리로 들지 않으시고?”
서린이 물으니, 시비가 입을 내밀었다.
“전하께서 오늘은 본채로 드신다고 하셨대요. 아씨께서 직접 가보심이…….”
본채라면 본처에게 갔다는 말, 고결한 그니는 서로의 왕녀였다. 서린에게는 영원히 넘지 못할 벽이었다.
“오란아, 날더러 투길 하라고? 됐다. 그것처럼 볼썽사나운 게 어디 있으려고.”
뉘가 들으면 어쭙잖다 하겠지만 첩이로되 현숙하게 살기를 바랐다. 서린은 그저 가조의 곁이면 족했다.
“하지만 아씨, 저러다가 전하께서 영 발걸음 안 하시면 어쩌시려고요. 누가 알아준대요? 아씨가 아무리 음전해도 결국 본채에선 요사한 계집이라고…….”
오란이 방정맞게 나불대다 입을 턱 막았다. 그러나 이미 늦어 마음 약한 그 상전은 눈귀가 아슴하게 젖어 있었다.
“문이나 닫으렴. 갑작스레 한기가 드는구나.”
눈물 보일세라 서린은 서둘러 돌아섰다. 임은 지척에 있건만, 제 것은 아니었다. 꽃이 나비를 찾을 수는 없으니 한자리서 기다릴 수밖에. 아스라이 불 켜진 창이 눈을 아리도록 팠다. 눈물 따위 흘리면 다시 아니 오실까 저어하는 마음에 그녀는 입술만 자그시 물었다.
사락.
창에 휘늘어진 깁이 하르르 떨었다.
팔락팔락.
살폿 인 바람에 휘장이 나푼댔다.
“호분중랑장께서는 언제 돌아오십니까?”
갑작스레 들리는 소리가 맑았다. 유장은 살천스레 일어서 주위를 살폈다. 요람에 누운 범아는 이미 잠이 들었고, 창문에선 드밝은 달빛이 샜다. 그러나 사람이란 그림자조차 없었다.
“누구냐?”
유장은 어둠을 향해 낮게 뇌까렸다.
“소녀, 모화라 하옵니다.”
사락거리는 비단 옷자락은 분명 여해의 것이었다. 비로소 뵈기에 유장은 눈을 가늘였다. 야심한 시각에 호분위국에 찾아든 궁녀라니, 괴이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무슨 일인가?”
“호분중랑장께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출타 중이시니, 내게 말해라.”
“그럴 수는 없사옵고.”
궁녀는 입술을 오므리더니 소매에서 하얗게 싸맨 것을 꺼냈다. 그리고 유장에게 바로 건넸다.
“오시면 전해 주십시오.”
“이게 뭔가?”
“호분중랑장께선 바로 아실 겁니다.”
제 할 말만 하고 궁녀가 돌아서기에, 유장은 저도 모르게 바짝 다가섰다. 달빛이 푸르러 신비토록 아름다운 밤이나, 모든 게 마뜩찮았다. 정체불명의 여인에게서는 기묘한 내가 났다. 분명 향기인데 맡기에는 썩 좋잖았다.
“잠깐!”
외쳐 불렀으나 멈춰 세우지는 못했다. 궁녀는 이미 간데없고, 유장만 홀로 남았다. 그는 손에 든 것을 물끄러미 내려 보았다. 동그랗고 딱딱한 것,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살짝 건드리니 푸릇하고 무름한 내가 손에 뱄다. 감이 좋잖아, 그는 이마만 깊게 접었다.
“유장, 아직 안 자나?”
하균이었다. 삭주에서 막 돌아온 모양, 문에 비친 그림자가 기괴할 정도로 컸다.
“음, 아직.”
안에 들이고 보니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됐다. 유장은 어언간 하균을 향해 열없이 웃었다.
“어디 몸이라도…….”
“아니, 괜찮다.”
“희뜩하게 질렸는데.”
하균은 유장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정체 모를 보퉁이를 보고 말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개운치 않아 그 역시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뭔가, 그게?”
“웬 궁녀가 접두를 찾더니 두고 갔다. 도시 무언지 알 수 없는데, 기분이 영 그렇군.”
“궁녀……, 혹여?”
하균이 고개를 갸울이자, 유장이 눈을 크게 치떴다.
“짚이는 데라도?”
“글쎄, 접두께서 막역하게 아는 그 여해가 아닌가 하고. 그런데 네 얼굴을 보니 그건 아니지 싶다.”
“그 뭐랄까, 굉장히 고운데.”
유장이 눈을 좁혔다.
“종이꽃처럼 생기가 없었다. 아니, 뭐……. 이거야 뒀다 전해 드리면 되겠지. 삭주 간 일은 어때?”
유장이 말을 돌리자, 하균은 더는 파지 않았다. 다만 진중한 눈으로 벗을 깊다랗게 응시했다.
“철작방에서 숙련공들이 없어졌는데, 한둘이 아니다.”
“이곳저곳에 실종된 자들이 많군.”
“음.”
“접두께서 오시면 일이 산더밀 텐데.”
“그러게나 말이다.”
“단독수행이라니, 그것 또한 녹록찮을 터.”
유장이 조금은 벌게져 하는 말에 하균은 입귀를 싱긋 치올렸다.
“이거, 사특한 건 아니겠지?”
“뭐든 잘 갈무리 해둬. 범아한테 손 타면 큰일이니.”
하균이 점잖게 하는 말에 대꾸라도 하듯, 요람에서 ‘오옹!’ 하고 잗다란 소리가 났다.
“말도 마. 애 보기가 이리 힘든지 몰랐으니. 부모님께 절이라도 넙죽 올리고 싶은 마음이야.”
유장이 손사래를 치자, 하균이 입귀를 자그시 틀었다. 그 때, 범아가 또 옹알이를 했다. 배를 내밀고 입술을 쫑긋대기에, 둘은 그예 가슴을 울리며 웃어 버렸다.
저기 불 밝힌 곳에 서린이 있을 터. 지금쯤 함초롬히 고운 얼굴이 젖었을 듯싶었다. 가조는 휘장을 야멸치게 그러잡았다. 기껍게 품으니 애첩이지, 돌봐줄 여력 따위는 없었다. 태어남부터 이때껏 그는 충족이란 것은 모르고 살았다. 항시 부족하고, 더 가져야 하고……. 그런 인생에 배려라는 것은 없었다. 하물며 계집이랴 말해 무엇 하랴? 조소에 준수한 입귀만 크게 이지러졌다.
팔락팔락.
창에 휘늘어진 것이 제멋대로 나풀댔다. 가조는 커다란 손으로 제 얼굴을 덮었다. 가지고픈 게 하많아 매양 심장이 벌떡댔다. 한 말도 못 되는 가슴이어도 그 안에 담긴 욕망은 한이 없어, 어릴 적부터 잡으려 애쓰는 것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타 죽든지, 태워 죽이든지.’
가조는 주먹을 아득 쥐었다. 눈이 비릿하게 번득이매, 그 안서 심화가 화룽화룽 탔다.
“전하,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문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가조는 몸을 곧추세웠다. 그리고 창에서 물러서서 눈빛을 바꿨다.
“공주, 어서 오오.”
간만에 본채 출입이라 아내로서는 기대하는 바가 클 터였다. 가조는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문을 활짝 열었다. 홀대할 수 없으니 으레 그렇듯 꾸며 대했다.
“일일이 물을 것 없소. 공주라면 언제도 반가운 것을…….”
가조가 수려하게 잘난 얼굴로 함박 웃으니, 그 아내는 얼굴만 살포시 붉혔다.
“제가 혹여 전하를 방해라도 할까 저어되어…….”
스란에게 지아비는 세상에 둘도 없었다. 자상하고 다사하니, 첩이 있다 해도 없는 것과 같았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가조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럴 리가, 세상 어느 일이 공주보다 중하려고.”
“전하, 곤해 보이셔요. 바깥일이 힘드신가 보온데…….”
가조는 제 얼굴에 놓인 손을 천천히 떼냈다. 그리고 한 손 그득 쥐어 도닥여 주었다.
“아무래도 보양이라도 해드려야……, 제가 이리 소홀하니 덕이 짧습니다.”
서로국 왕녀, 하스란. 나라 간의 정략으로 황룡으로 시집 왔건만, 여염집 여자보다 정세를 더 몰랐다. 그저 가조 하나만을 바라고 사는 순진해 빠진 여자라 지아비가 제 처소보다 별채를 더 자주 찾아도 질투조차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스란이나 서린이나 분에 넘치는 여복이었다.
“보양은……. 난 괜찮소. 무얼 하고 지냈소?”
“그냥 아녀자들이 하는 그런저런 일을 하고 지내죠. 그런데 별채엔 가지 않으셔도…….”
스란이 말끝을 흐렸다. 청초한 얼굴에 쓸쓸함이 설핏 스쳐 그늘이 졌다. 가조는 모르는 척 보얀 뺨을 어루만졌다.
“부러 왔는데 쫓을 작정인가? 서운하군.”
“전하, 그것이 아니오라…….”
그니 또한 울고 있을 테지요. 아내의 눈에 어린 말에 가조는 입귀를 상량하게 치올렸다. 스스로 높아지면 처도 첩도 높아질 터. 그는 그런 식으로 제 야비함을 합리화했다.
“공주, 이리 늦었는데 섬약한 몸 상하면 어쩌려고. 다음부터는 기다리지 마시오.”
“가군께서 돌아오시지 않았는데도, 잠이 들면 그 아낙은 멍청하고 둔한 거라고 어머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전하 오시면 시중도 들어야 하고, 기다려야지요.”
가조에게 스란은 발판이었다. 그런즉슨 착하고 어여쁘지만 사랑스럽지는 않았다. 선황 치세 하에 서로와의 정략혼이 불거졌을 때, 그가 뉘보다 먼저 나섰다. 노림수는 그녀가 가진 배경, 지금껏 오로지 그것만 원했다.
“먼저 쉬어요, 곧 갈 테니. 할 일이 좀 있소.”
환하던 얼굴이 금세 처연해졌다. 스란은 함께 하지 못함은 개의치 않았다. 다만 하늘보다 높은 지아비라, 그가 얼굴 상해 가며 몰두하는 일이 염려될 뿐이었다.
“그럼, 전하. 너무 무리 마셔요. 저는…….”
나가보련다 말하려던 차, 스란은 언 듯 굳었다. 무심코 시선 준 것에 하얗게 바래, 그녀는 더는 말을 못했다. 겁에 질려 부푼 동공에 비친 것은 비둘기였다. 그러나 생것이 아니라 모가지가 비틀리고 깃은 축 늘어졌다. 단도의 끝이 놈의 배를 뚫고 벽을 파, 꼬챙이에 꿰진 것과 같았다. 말라붙은 피나 뭉그러진 몸으로 봐서는 어제 오늘 죽은 건 아닌 듯싶었다.
“왜 그리 놀라는 거요?”
가조가 사근하게 웃었다. 뭐가 대수냐 하는 그 눈빛은 온화하기 그지없었다.
“전하, 저건…… 저것은…….”
스란은 천성이 심약해 피는 보기만 해도 질색이었다. 토악질이 나올 듯해, 그녀는 급히 입을 막았다.
“별거 아니오, 귀찮게 날아들어서.”
가조는 빙긋 웃으며 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단도를 가분하게 쥐고 맵차게 빼냈다.
“요즘 사냥 나간 것도 뜸한지라……, 당신 놀랄 걸 미처 생각 못했소.”
스란은 지아비가 사냥을 즐기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저런 비둘기는 그의 몫이 아니었다.
“아니요, 살았던 게 죽어서……. 그 모습이 기껍지 않아서요. 괜찮습니다.”
이번에 남편이 출타한 기간이 상당히 길었다. 그리고 새는 한참 전에 죽었다. 누렇게 말라비틀어진 발목에 묶인 전통을 보건대, 여느 것도 아닌 전서구였다. 석연찮은 구석이 많으나, 스란은 그저 넘겼다. 더는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럼 전하, 쉬엄쉬엄하세요. 전 그만 나가보겠어요.”
스란은 도망치듯 방을 나섰다. 방금 전까지 저 역한 내를 몰랐다는 게 신기할 지경, 악취가 오장을 마구 뒤집었다.
타악.
가조는 다시 창가로 돌아갔다. 불빛 다사한 곳, 저 너머에 서린이 있었다. 부러 꾸미지 않아도 제 야비함 감추지 않아도, 그녀는 한결이었다. 어찌 대하든 어찌 발기든, 순하게 안길 터. 어언간, 그는 쓰게 웃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