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103
신필천하(神筆天下) 103화
그날 후 진양은 다시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힘썼다.
진양의 가르침은 대부분 파자공에서 비롯됐는데, 그 때문인지 서예 공부를 하는 아이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강인한 신체를 가지게 되고 무공을 익힐 때는 그 참뜻을 빠르게 깨우치곤 했다.
특히 진운생(陣雲笙)이라는 열 살 된 아이가 있었는데, 그는 또래의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그 깨달음이 매우 빨라 진양의 기분을 흡족하게 해주었다.
하루는 진운생이 글을 쓰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사부님, 궁금한 것이 있어요.”
진양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무엇이냐? 말해보아라.”
“사부님께서는 글을 적을 때 참뜻을 음미하면서 적으라고 하셨잖아요. 그리고 주변의 현상들을 섬세하게 살피는 것만으로도 글자의 참뜻을 깨우치는 데 많은 도움을 받는다고 하셨잖아요? 하지만 저는 어떻게 그러한 것들이 훌륭한 필체로 나타날 수 있는지 이해되지 않아요. 그리고 글씨를 적는 것만으로 어떻게 무공도 익힐 수 있어요?”
진양은 기특한 마음에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아직 너에게 어려운 일일지 모르겠지만, 참뜻을 알게 되면 글씨는 저절로 네 속에서 우러나오게 되어 있다. 또한 주변을 면밀히 살피고 대상 하나하나에 너의 감정을 이입시키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실제로 사부님 말고도 그렇게 하신 분이 있나요?”
“당대에 광초(狂草)의 대가인 장욱(張旭)의 서예는 기묘하고 복잡하며 운율이 분명히 느껴지는 것이 특징이다. 사실 그는 저명한 무용가였던 공손대낭(公孫大娘)의 검기무(劍器舞)를 보면서 그 신비로움에 빠져 예술적 혼이 마구 솟아났다고 한다. 이는 무용가의 분명한 운율과 우아한 동작에서 드러나는 기쁨, 비애, 분노, 기대 등 여러 가지 신운(神韻)과 감정일 것이다. 장욱의 글씨를 보면 이러한 것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으니, 마치 검기무를 보지 않아도 본 것과 같은 마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단계는 이미 글자의 의미를 완파한 자에게 드러나는 것이며, 필체만으로도 검기무를 가상으로 펼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말을 마친 진양은 대청 앞의 단상으로 걸어 올라가더니 탁자 위에 화선지를 크게 펼쳐 놓았다. 그리고 서진으로 고정시킨 다음 커다란 붓을 들어 먹물을 찍었다. 이어서 진양이 일필휘지로 글을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春水滿四澤 봄물은 연못에 가득하고
夏雲多奇峰 여름 구름은 산봉우리처럼 떠 있네.
秋月揚明輝 가을 달은 밝은 빛을 비추고
冬嶺秀孤松 겨울 산마루엔 큰 소나무 한 그루 서 있네.
광초로 글을 모두 적은 진양이 화선지를 들어 보였다.
대청에 모인 제자들이 저마다 ‘와아!’ 하는 소리를 내며 입을 척 벌렸다.
아이들의 연못 같은 눈동자에는 곧 구름이 피어오르더니 이내 가을 달처럼 빛이 났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로 향하는 그들의 눈에는 산마루에 우뚝 선 소나무 한 그루가 고고한 자태로 내비치고 있었다.
진양이 말했다.
“이것은 도연명(陶淵明)이 쓴 춘하추동(春夏秋冬)이라는 시다. 이 시를 보면서 무엇을 느꼈느냐?”
그러자 진운생이 얼른 대답했다.
“봄 구절에서는 촉촉한 기운이, 여름 구절에서는 뜨거운 하늘이, 가을 구절에서는 선선한 달빛을, 겨울에는 추위와 함께 굳건한 의지를 느꼈습니다.”
“그럼 하나 더 물어보마. 너는 언제 그것을 느꼈느냐?”
“글을 보자마자 느꼈어요. 마치 글씨를 읽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보는 것처럼요. 글자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고, 시의 심상이 고스란히 마음에 들어왔어요. 먼저 느끼고 나중에 읽었어요.”
“바로 그것이다. 필체에 글자의 혼을 담기 시작하면 읽는 이가 읽기도 전에 보는 것만으로 느낄 수가 있게 된다. 무공도 그와 같은 이치에서 익히는 것이다. 너희가 글을 적을 때 이미 그 무공의 참뜻과 심상을 공유하게 된다면 글씨를 적는 순간 너희도 모르게 무공의 오묘한 이치를 꿰뚫게 되고 글씨는 글씨대로 명필이 될 것이다.”
진운생을 비롯한 아이들이 큰 깨달음을 얻은 듯 ‘아!’ 하는 탄성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양이 말을 보탰다.
“장욱이 검기무를 보고 필체를 완성했듯이, 거꾸로 필체를 보고 무공을 완성하는 것 또한 왜 없겠느냐? 너희는 오로지 참뜻을 익히는 데 열중하고, 모든 사물을 세세히 관찰할 것이며, 글을 적을 때는 혼을 담도록 해라.”
“예, 사부님.”
아이들이 이구동성으로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만약 현존하는 무림의 대종사 중 누구라도 이 젊은 사부의 가르침을 엿듣기라도 했더라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으리라.
그만큼 진양은 젊은 나이에 무학의 깊은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그때 마침 대청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 사람이 불쑥 들어왔다.
“양 소협! 아니, 양 관주! 자네가 시킨 대로 다 했네!”
진양과 아이들이 고개를 돌려 보니, 대청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서요평이었다. 그는 큰 소리로 말을 했지만, 화가 난 것은 아닌 듯했다. 오히려 어쩐 일인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뒤늦게 그의 뒤를 따라온 서운지가 서요평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형님, 아이들이 글을 배우고 있지 않습니까? 방해하지 말고 우선 나중에 차근차근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그러자 서요평이 소맷자락을 뿌리치며 말했다.
“흥! 요 새파랗게 어린것들이 방해를 받으면 얼마나 받겠느냐?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으니 조금 방해를 받는다고 해도 달라질 것이 있겠느냐?”
서요평이 까칠하게 대꾸했다.
진양은 우선 이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얼른 말했다.
“무슨 용무이신지 모르겠으나 우선 밖으로 나가서 대화하도록 하지요.”
“밖으로 나갈 것까지 뭐 있나? 이왕 내가 여기까지 왔으니 그냥 여기서 이야기하세.”
“아이들이 글을 쓰는 데 방해가 되지 않습니까?”
진양이 부드럽게 말하자 서요평이 다시 뭐라고 반박하려고 했다.
하지만 서운지가 얼른 나서서 서요평의 소맷자락을 다시 잡아당겼다.
“자자, 형님, 우리 나가서 대화합시다. 양 관주께서 나온다고 하지 않수?”
“쳇! 할 수 없지.”
결국 서요평이 서운지를 따라 몸을 돌려 걸어갔다.
이를 본 아이들이 자기네들끼리 키득거리며 웃었다. 아이들은 사상이괴를 볼 때마다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진양이 준엄한 목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어허, 다들 집중하고 글을 쓰도록 해라. 다녀와서 검사할 테니 모두 게으름 부리면 안 된다.”
“예, 사부님.”
진양은 아이들의 믿음직한 목소리를 들으며 걸음을 돌렸다.
다만 그의 표정은 조금 어두웠다.
‘이상하다. 지금쯤 사상이괴가 날 찾아왔다면 분명 내가 시킨 대로 서로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었을 텐데. 지금 보면 서로의 성격에 전혀 변화가 없는 것 같군.’
사실 진양은 두 사람의 무공을 상당히 높이 평가했다.
다만 사상이괴의 성격이 워낙 특이하기에 아이들을 가르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해서 두 사람에게 서로를 가르치도록 부탁했던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서요평은 긍정심공을 익혀 그 성격이 좀 더 부드러워질 것이고, 부정심공을 익힌 서운지는 성격이 좀 더 신중해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 하는 행동으로 보면 두 사람의 성격이 예전과 똑같지 않은가?
진양이 대청 후원으로 나가자, 먼저 기다리고 있던 서요평과 서운지가 다가왔다.
서요평이 말했다.
“자네가 시킨 대로 우리는 서로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고 배웠다.”
“정말입니까, 서운지 선배님?”
진양이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아서 서운지를 돌아보며 물었다. 서운지는 여전히 안면 가득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우리는 양 관주 덕분에 많은 깨달음을 얻었소.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바이오.”
“흥! 감사하긴 뭐가 감사하다는 것이냐? 양가 녀석도 우리를 이용해 먹기 위해서 도와준 것이다! 괜히 남 좋은 일을 시키겠느냐?”
“거참, 형님은 너무 비관적이라니까.”
“네가 너무 생각이 없는 것이야!”
두 사람은 다시 옥신각신하기 시작했다.
진양이 얼른 나서서 두 사람을 말리면서 말했다.
“자자, 두 분 다 진정하시고 제 이야기를 좀 들어주세요. 저는 두 분이 서로 무공을 가르치게 되면 틀림없이 심공에 영향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두 분 모두 성품에도 변화가 있을 것이라 짐작했지요. 한데 지금 보면 두 분 모두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이는군요.”
그러자 서요평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지야! 그것 봐라! 이 녀석은 꿍꿍이가 있었다니까? 이 녀석, 이 어르신들의 성격을 개조시켜서 뭘 할 속셈이었단 말이냐?”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흥! 내가 그 말을 믿을 줄 알아? 네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시킬 이유가 없지!”
그러자 다시 서운지가 나섰다.
“형님, 우리 성격이 조금 이상해서 고쳐 준다면야 그도 좋은 일 아니겠수?”
“너는 너무 생각이 없어서 탈이라니까!”
“허허, 생각이 없어서 마음이 편하면 그도 나쁘지 않지요.”
“제미랄! 뭔 말이 통해야지!”
서요평이 투덜거리는 것을 보자, 진양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진양이 정중한 태도로 말문을 열었다.
“어쨌든 두 분이 서로 무공을 가르치고 배우셨다니 제가 한번 구경해 볼 수 있겠습니까? 한번 확인하고 싶군요.”
그러자 서운지가 예의 그 사람 좋은 미소를 그려 보이며 말했다.
“양 관주 덕분에 우리의 무공은 그야말로 일취월장했소이다. 나의 무공은 양의 기운을 많이 품고 있었는데, 이제 음의 기운을 보강하게 됐소. 그리고 형님께서는 음의 기운이 강했으나, 이제는 양의 기운마저 겸할 수 있게 됐소. 진정으로 감사드리오.”
“아, 글쎄! 그 녀석에게 감사할 필요 없다니까!”
서요평이 다시 소리치자, 서운지가 껄껄거리며 검을 뽑았다.
“자, 그러지 말고 형님, 우리가 익힌 무공을 한번 보여 드립시다.”
“싫다!”
“음? 형님은 자신이 없수?”
“흥! 내가 왜 자신이 없느냐? 내 무공은 훨씬 강해졌으니 이제 천하에 내 적수가 몇 없을 것이다!”
“정말 그렇다면 한번 보여줍시다. 우리 위력을 양 관주께 자랑이라도 해야 할 일이 아니겠소?”
결국 서요평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검을 뽑아 들었다.
“좋다! 그럼 내 검을 받을 자는 양 관주가 되겠군?”
그러더니 누가 뭐라고 할 사이도 없이 서요평이 곧장 검을 부리며 진양에게 쇄도해 들어갔다.
“하앗!”
팟!
그가 검광을 흘리며 빠르게 파고들어 오자, 진양은 깜짝 놀라 뒤로 훌쩍 물러갔다. 그리고 얼른 수호필을 꺼내 들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후려쳤다.
까앙!
청명한 금속성이 울리면서 서요평의 몸이 뒤로 벌떡 젖혀졌다. 이 틈을 타서 진양이 재빨리 서요평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진양은 곧장 수호필을 내찔렀다.
한데 서요평이 몸을 빙글 돌리더니 오히려 진양에게 더욱 바짝 붙어오는 것이 아닌가? 이어서 그는 왼손을 불쑥 내밀어 수호필의 붓대를 잡고 바짝 끌어당겼다. 그 바람에 진양의 몸이 더욱 빠르게 서요평에게 이끌려 갔다. 뒤미처 서요평이 오른 손바닥을 활짝 펼치더니 장력을 뿜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