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82
신필천하(神筆天下) 82화
풍천익이 피식 웃으며 속삭였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 하지만 나는 네놈 짓이라고 보고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확증이 없으니 말이다.”
진양은 새삼 풍천익의 배려에 깊은 감동을 느꼈다. 결국 풍천익은 자신이 칠절매화검을 가져간 탓에 천중옥에 갇힌 것이 아닌가?
진양이 속삭여 물었다.
“그럼 제가 여길 떠나고 나서부터 천중옥에 갇힌 겁니까?”
“아니지. 근래에 화산파가 칠절매화검을 되찾겠다고 유독 천상련과 왕래가 잦았다. 련주님도 서서히 마음이 기울어서 결국 칠절매화검을 화산파에게 돌려주자는 쪽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하지만 칠절매화검은 천상련이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그때부터 내가 책임을 지고 천중옥에 갇히게 된 것이다.”
“그랬군요. 괜히 저 때문에…….”
“됐다. 원래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모든 일은 자신 때문이다. 남의 탓을 하는 순간 고통이 더욱 커지는 법이지. 아무튼 나는 그 일로 천중옥에 갇히게 됐다.”
천중옥은 천상련 뒤편 언덕의 깊은 동굴에 만들어진 뇌옥이다.
풍천익은 천중옥에 갇힌 뒤로 줄곧 내공 수련에만 몰두하며 심신을 안정시켰다.
그의 맞은편 뇌옥은 창살 대신 철문이 굳게 닫혀 있었고, 배식구만 아래에 자그맣게 나 있었다.
그곳은 바로 천의교의 위교사왕 중 한 명이 갇혀 있었다.
사실 천상련은 오래전부터 천의교의 은밀한 움직임을 파악하고 그들을 예의 주시했다. 그러다가 파멸대에 의해 위교사왕 중 파천일왕인 마천강을 생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새벽,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풍천익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정좌를 한 채 운기행공에 집중하고 있었다. 본래 천상련의 원수가 잡혀오면 운기행공조차 할 수 없도록 혈도를 점해 버리지만, 풍천익은 천상련 내에서도 인정받는 고수였기에 최소한의 예우로 혈도까지 제압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가 막 기를 삼주천시키고 있을 때였다.
느닷없이 동혈 입구에서 답답한 비명이 터지는가 싶더니, 이내 털썩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물론 이러한 소리는 범인이라면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듣기 힘들 만큼 미약했다.
하지만 내공이 깊은 풍천익은 이러한 소리가 바로 옆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선명하게 들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껏 천중옥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풍천익은 얼른 운기를 멈추고 쇠창살 가까이 다가갔다.
마침 동혈 안쪽을 지키는 간수 한 명이 의자에 앉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풍천익이 그를 향해 새된 목소리로 나무랐다.
“네놈이 어찌 본연의 임무를 잊고 자리에 앉아 졸고 있단 말이냐?”
느닷없는 호통에 간수가 벌떡 일어나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곧 풍천익의 목소리라는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풍 각주님.”
아무리 지금은 천상련에서 죄를 지은 몸으로 갇혔다지만, 풍천익에 대한 련주와 무인들의 신임은 제법 깊었다. 때문에 간수는 그에게 고개까지 숙이며 몸 둘 바를 몰랐다.
“됐다. 지금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니 너는 동혈 입구로 가서 살펴보아라!”
“아, 알겠습니다!”
“조심해야 할 것이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무인이 경직된 표정으로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풍천익은 천상련에서도 련주를 제외하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다. 그런 그가 말했으니 거짓말이 아니라면 틀림없이 무슨 일이 생긴 것이리라.
그가 막 모퉁이를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쒜에엑! 서컥!
길이가 한 자 정도 되는 단도가 칼바람처럼 날아들더니, 이내 간수의 목을 뎅겅 잘라내며 벽에 박혔다. 간수의 목은 그대로 바닥을 굴렀고, 머리를 잃은 몸뚱이는 피를 분수처럼 토해내며 ‘쿵!’ 소리와 함께 넘어갔다.
지켜보던 풍천익조차 크게 놀라 입을 척 벌리고 눈을 부릅떴다.
벽에 박힌 단도는 아직도 그 힘을 느끼는 듯 부르르 떨고 있었다.
다음 순간 풍천익은 바닥에 철퍽 주저앉아 벽에 기댄 채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껏 기를 죽이고 돌아가는 사태를 주시했다.
이윽고 모퉁이를 돌아 나온 사람은 비쩍 마르고 키가 큰 복면인과 청색 무복을 입은 복면인이었다. 청색 무복의 복면인은 걸음걸이라든지 몸의 굴곡으로 보아 여인임이 틀림없었다.
두 사람은 태연하게 걸어 들어왔다. 그중 복면의 여인이 벽에 박혀 있는 단도를 아무렇지도 않게 뽑아 들었다.
두 사람은 풍천익을 한 번 힐끗 보았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여인은 바닥에 목을 잃고 쓰러진 간수의 몸을 뒤적였다. 잠시 후 그녀가 열쇠 꾸러미를 꺼내 들며 말했다.
“열쇠를 찾았어요.”
“좋아, 이리 주게.”
여인의 목소리는 중년쯤으로 짐작됐고, 비쩍 마르고 키가 큰 복면인은 나이가 꽤 지긋한 노인인 듯했다.
여인이 열쇠를 건네자 노인이 철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열쇠를 바꿔가며 끼워 맞추자, 어느 순간 ‘철컥!’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열렸다. 그러는 동안 풍천익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실눈을 뜬 채로 침입자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 전부였다.
철문이 열리자 뇌옥에서 음산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크크크크.”
걸걸한 웃음소리 뒤에 마천강의 굵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기다리고 있었소.”
그러자 노인이 뇌옥으로 들어가며 웃음기를 머금고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파천일왕.”
“후후, 미안하지만 내 혈도를 좀 풀어줘야 할 것 같은데…….”
“그러지요.”
뇌옥 안은 몹시 어두웠기 때문에 실눈을 뜨고 있는 풍천익의 시야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한편 복면의 여인은 뇌옥 입구에 서서 경계를 하며 대기하고 있었다.
잠시 후 마천강이 갇혀 있는 뇌옥에서 후끈한 열기와 함께 강한 기운이 퍼져 나왔다. 아마도 이제 막 들어간 노인이 마천강의 막힌 혈도를 뚫어주는 모양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풍천익은 마음이 초조해져 갔다.
‘제미랄. 이거 보통 일이 아니군. 저놈들이 대체 누구지? 마천강을 구하러 왔다면 천의교 신도들인가?’
이때 풍천익은 화산파와 종남파가 천상련을 방문 중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때문에 그는 그 두 문파를 안중에도 두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마침 뇌옥에서 깜짝 놀랄 만한 말이 흘러나왔다.
“고맙소. 이제 좀 개운하군. 내 살아가면서 화산과 종남의 은혜를 입게 될 줄 몰랐소.”
목소리의 주인은 틀림없이 마천강이었다. 이어서 노인의 대답이 들렸다.
“클클. 우리 화산과 종남은 이미 천의교와 뜻을 함께하기로 굳히지 않았습니까? 어려울 때는 서로 도와야지요.”
“크크크, 좋소. 우리 천의교 역시 화산과 종남을 돕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소.”
“마음이 든든합니다. 클클.”
그러고 나서도 마천강은 운기행공을 하며 몸의 기운을 끌어올리느라 한참 동안 앉아 있었다.
이윽고 두 사람이 뇌옥에서 걸어 나왔다.
이제 풍천익도 더 이상 두고만 볼 수는 없었다. 결국 그가 눈을 부릅뜨며 벌떡 일어났다.
“서라! 네놈들이 감히 천상련의 죄인을 함부로 풀어주려고 하다니! 간이 부었구나!”
그러자 노인이 풍천익을 힐끔 보더니 킬킬거렸다.
“이럴 줄 알았지. 죽은 척하고 퍼져 있더니 전부 엿들은 모양이군.”
“입을 막아야 해요.”
여인이 검을 뽑아 들며 차갑게 말하자 노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함부로 떠벌려서는 곤란하지.”
풍천익이 코웃음 쳤다.
“흥! 네깟 녀석들이 본좌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거참, 시끄럽군. 이보게, 우리가 자네를 풀어주지. 그럼 서로 비긴 셈이 아닌가? 자네도 천상련에 어느 정도 원한이 있겠지? 서로 각자의 길을 가는 건 어떤가?”
“닥쳐라! 본좌는 천상련의 천보각주다! 화산파와 종남파가 어째서 천의교를 돕는 것이지?”
풍천익의 말에 복면의 노인이 침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흐음. 역시 말이 안 통하는군. 게다가 너무 많은 걸 들었어. 쯧쯧.”
그는 풍천익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더니 자물쇠를 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철컥!’ 소리가 나면서 쇠창살 문이 열렸다. 노인이 두어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이리 나오시오. 이제 어쩌시겠소?”
“흥! 나를 풀어주다니, 정신이 나간 모양이군.”
“우릴 막으시겠소?”
“당연한 소리!”
말을 마친 풍천익이 눈 깜짝할 사이에 몸을 날려 복면노인을 향해 쇄도했다. 그가 양손을 앞으로 쭉 뻗어내자 손바닥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맺혔다.
노인이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양손을 마주 뻗었다.
퍼펑!
두 사람의 쌍장이 부딪치면서 동혈 내에 폭음이 울렸다.
복면노인이 여유를 부리며 웃었다.
“클클, 좋은 장력이군.”
하지만 풍천익은 일언반구도 없이 재차 몸을 날렸다. 그가 이번에는 왼손을 앞으로 불쑥 내밀어갔다. 복면노인이 몸을 빙글 돌리며 피하자, 이번에는 눈 깜빡할 사이에 풍천익의 오른손이 상대의 등을 향해 뻗어갔다. 처음 내뻗은 왼손은 바로 허초였던 것이다.
“훌륭하오!”
노인이 찬탄하면서 허리를 뒤로 한껏 젖혔다. 마른 장작 같은 노인의 몸이 활처럼 유연하게 휘어지며 풍천익의 오른손을 피했다. 뒤미처 노인은 오른 주먹을 곧게 찔러들어 왔다.
하지만 이 역시 풍천익에게 큰 위협은 주지 못했다.
사실 노인은 현재 지극히 제한된 무공을 펼치는 중이었다.
만약 풍천익이 조금만 여유를 가지고 상대의 무공을 차분히 살폈더라면 그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사문을 숨기려는 목적이라는 것도 눈치챘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라 풍천익의 눈에도 그러한 것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이들이 화산파와 종남파의 무인이라고 확신할 뿐이었다.
풍천익이 연이어 뒷걸음질을 치며 다섯 보를 물러가자, 노인이 다시 훌쩍 물러섰다.
그때였다.
타다닷!
지금껏 복면노인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마천강이 느닷없이 튀어나오며 풍천익의 복부에 일장을 날렸다. 풍천익은 노인만을 상대하면서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가 나타나서 장력을 뻗어오자 미처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
퍼억!
마천강의 일장은 그대로 풍천익의 복부에 꽂혔다.
“커헉!”
풍천익이 눈을 부릅뜨며 뒤로 비틀비틀 물러났다.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서 있기가 힘들었다.
마천강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방심하셨군, 풍 각주.”
“비열한…….”
“말을 아끼시오. 조금 있으면 오장육부가 가닥가닥 끊어질 듯 고통스러울 거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치 증명이라도 하듯 배가 끊어질 듯 아파왔다.
풍천익이 참지 못하고 비명을 터뜨렸다.
“아악!”
“단맥장(斷脈掌)이라는 것인데, 고통이 좀 오래갈 거요. 운이 나쁘면 죽을 수도 있고.”
“노옴!”
풍천익이 내력을 한껏 끌어올리며 주먹을 뻗었다.
하지만 그 주먹은 반 자도 나아가지 못했다. 온몸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는 듯한 고통이 뒤이어진 탓이다.
마천강이 고개를 저었다.
“안 되지. 내력을 갑자기 끌어올리면 더 힘들어지지.”
그때 복면노인이 다시 나서며 말했다.
“시간이 없습니다. 가지요.”
“그럽시다.”
마천강이 고개를 끄덕이곤 몸을 돌리려는데, 여인이 성큼 나서더니 풍천익을 금방이라도 내려칠 듯 검을 치켜 올렸다.
그녀의 전신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때 마천강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됐소. 그만해도 저자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소. 죽지 않는 게 다행이겠지. 그만 갑시다.”
여인은 복면노인을 힐끗 보았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니 그제야 그녀도 검을 거두고는 몸을 돌렸다.
세 사람은 순식간에 동혈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풍천익은 정말 곧 죽을 사람처럼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안간힘을 다해 쇠창살이 있는 곳까지 기어갔다. 그 모습이 몹시 힘겹고 고통스러워 보여서 마치 죽은 자가 되살아나 기어가는 듯했다.
쇠창살에 가까스로 등을 기대고 자세를 잡은 풍천익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운기행공에 들어갔다.
‘과연 단맥장이라는 것이 대단하긴 하군. 온몸이 찢어지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대로 죽는다면 풍천익이 아니지. 네놈들은 이 어르신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풍천익은 이를 악물며 천천히 기를 움직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