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ver Eyes Under Black Feet RAW novel - chapter 133
“에나께서 폐하를 뵙자고 한 이유 말이에요. 분명 마음이 쓰이셨을 거예요. 대외적으로는 중립을 지키고 계시지만 어쨌든 에나께서도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데 그 뜻과 의지가 있으셨던 거잖아요.”
무어라 대답해 줘야 할지 몰라 릴리는 고개만 한 번 갸우뚱했다.
“그래서 직접 폐하를 뵙고 양해를 구하려 하시는 것 아니겠어요? 그것 말고는 굳이 만날 이유가 없어요. 안 그래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물론 아닐 수도 있고. 에나의 속마음을 어떻게 알겠는가. 다만 혹여나 나쁜 뜻이 있어 불렀다면 부디 그 뜻을 이루지 못하길 바랄 뿐이다.
“결혼식을 집전할 사제는 구했나요?”
“아, 그거요.”
에이가의 표정이 영 마뜩잖았다. 여전히 그 부분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모양이었다.
“몇 명의 사제에게 연락을 해 보았지만 집전을 꺼려 하더군요. 폐하의 출신 성분을 이유로 들면서 신의 아이를 죽인 살인자와는 대화하지 않겠다나 뭐라나. 본인이 지금껏 목을 건사하고 있는 이유는 알지도 못하고서 말이에요.”
그가 온전히 살아 있는 것은 카르낙이 알기어스의 폭정을 멈추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유일신이라며 섬기길 거부하는 자들은 모조리 죽였다. 캘던에서 자신의 신앙을 지키던 사제들은 모조리 그렇게 죽었다. 아마 카르낙이 그를 죽이지 않았다면 알기어스의 칼날은 더 먼 곳을 향했을 테고 그랬다면 그들도 살아남지 못했을 거다.
에이가에게도 신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사랑이 있다. 모든 엘버그인이 그러하듯이. 그도 달의 여신인 아마네스를 사랑하고 숭배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에이가는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대신 신을 위해 칼을 빼 들었다는 것이다.
아마네스의 존재조차 지우려는 자를 함락하는 데 일조함으로써 그녀는 자신의 신앙을 증명하였다. 모름지기 진정한 신앙이란 그것을 위해 기꺼이 싸우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신이 주신 고귀한 생명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또한 진정한 신자라면 이교도인 카르낙을 기피하며 거부하는 대신 그에게 아마네스의 사랑과 헌신을 알려 주어야 한다. 그러니 멍청한 사제들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른다. 무엇이 진정 아마네스를 위한 길인지 멀리 내다보지 못하는 근시안들뿐이었다.
쯧, 하고 에이가는 혀를 찼다. 하여간 사내란 자들은 모두 다 그렇다. 눈앞의 이익에만 전전긍긍하여 멀리 생각하지를 못한다.
“너무 고관대작들만 찾아다닌 것은 아니고요?”
“무려 왕의 성혼식이에요. 에나만큼은 아니더라도 그에 버금가는 명망 있는 분을 모셔야죠.”
“그러면 나는 캘던성의 노처녀로 늙어 죽겠군요.”
“무슨 그런 끔찍한 말씀을 하세요.”
“돌아가는 것이 그렇잖아요. 명망 있는 사제를 찾아 결혼식을 거행하는 것보다 그편이 더 확률이 높지 않겠어요?”
“원래 지체 높으신 양반들은 거절을 미덕으로 여겨요. 그래야 자신이 고귀해진다고 믿는 거죠. 두고 보세요. 두드려서 안 열릴 문은 없으니까.”
릴리는 에이가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녀는 도면을 뒤적거리며 말했다.
“에나가 거부한 집전을 누가 선뜻 하겠다고 나설 수 있겠어요? 관료들에게는 왕의 뜻이 가장 중요하듯 사제들에겐 에나의 뜻이 무엇보다 중요할 텐데요.”
“캘던 내에 아가씨에 대한 소문이 파다해요. 곧 왕국 곳곳에 번져 나가겠죠. 그때쯤 되면 사제들도 별수 없을 거예요.”
마치 릴리의 존재가 만병통치약이라도 되는 듯 말한다.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존재임에는 확실하지만 과연 에나의 뜻을 거스를 수 있을 만큼 중요한 존재일까. 에나 역시 파니릴리의 존재를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거부했다.
심지어 에나는 저와 핏줄이 섞인 먼 친척뻘이지 않은가. 누구보다 저의 존재를 궁금해하고 인정해야 할 이조차 그를 거부하는데 일개 사제들이 그러한 에나의 의중에 반하는 행동을 과연 할 수 있을지 릴리는 의심스러웠다.
“저라면 적당히 돈으로 매수할 수 있는 자를 고르겠어요.”
“그런 천박한 자에게 왕의 성혼을 맡길 순 없어요.”
“천박하더라도 자격이 있는 자에게 식을 맡겨 어서 혼인을 거행하여 폐하의 지위를 공고히 하느냐, 아니면 미리 폐하의 지위를 공고히 해서 고관대작이 승낙할 때까지 기다리느냐. 결국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문제 아니겠어요? 저라면 좀 더 냉정하게 판단해 볼 텐데요.”
“아무래도 아가씨께서는 책을 너무 과하게 보신 모양이에요.”
에이가는 틀림없이 그렇다고 믿었다. 엘버그의 그 어떤 여자도 파니릴리처럼 이런 문제에 또박또박 자기 의견을 내세우지는 않는다. 알기어스와 라미레스의 혈통이라면 마땅히 다른 여인들보다도 훨씬 더 교양있고 우아하며 현명해야 하지만 릴리는 도가 지나쳤다. 침착하나 결코 얌전하지는 않았다. 모든 것에 자기 의견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성품이라도 지닌 걸까.
“자신의 박식함을 과시하는 것은 여인의 미덕이 아니에요. 혹여 그런 점이 폐하에게 밉보일까 걱정입니다. 저는.”
저에게 하듯 건건이 카르낙에게 말대꾸를 한다면 분명 그것은 여인의 도리에 어긋난 일. 행여 그 일로 카르낙이 그녀를 벌한다 해도 잘못된 처사가 아니다. 엘버그의 을 건네주기 전에 먼저 부인으로서의 처신을 알려 주는 책을 권할 것을.
그렇다면 똑똑한 릴리 아가씨는 을 깨쳤듯 부인으로서의 몸과 마음가짐을 지금쯤 훌륭히 따르고 계셨을 텐데. 모든 게 다 자신의 과오였다.
“에이가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해 줄 사람은 나뿐이잖아요.”
릴리의 말에 에이가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가씨가 아니더라도 듣기 싫은 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아주 많아요. 예를 들면 폐하께서는 매번 제 혈압이 치솟는 이야기만 하신다고요.”
“그건 좀 따져 볼 필요가 있겠는데요. 폐하는 에이가를 골려 주기 위해 하는 거고 저는 에이가를 아끼고 걱정하기 때문에 조언을 하는 거예요. 엄연히 출발부터 다른 문제죠.”
“네. 하지만 결과는 같을 거예요. 아가씨께서도 제 혈압을 올리고 계시니까요.”
에이가의 목소리에 한껏 감정이 실리자 파니릴리는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뭐가 그렇게 재밌냐고 따져 물으려는데 후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가 창문을 때렸다. 생경한 소리에 릴리도 에이가도 창문을 쳐다보았다.
몇 번이고 창문이 덜컹거리다가 멎었다. 둘은 그 소리가 멎고도 잠시 동안 침묵을 지켰다. 무슨 일이 생긴 건지 가늠해 보기 위해서였다. 에이가가 물었다.
“바람이 부는 것을 보니 드디어 비가 오려는 걸까요?”
릴리는 창가로 다가갔다. 아침나절 시녀들이 열심히 닦았는데도 유리창에는 금세 뿌연 먼지가 앉아 있었다. 창밖으로 나뭇잎들이 불규칙하게 흔들렸다.
이상한 일이다. 분명 지난밤에도 비가 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창문을 열어 바람 내음을 맡아 보았으나 여전히 질척한 물 향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신경질적인 바람이 방 안으로 뿌연 흙먼지를 흩뿌릴 뿐이었다. 후드득, 마른 모래 알갱이가 나무 바닥에 충돌하고 흩어졌다.
“먼지가 말도 못 하게 많네요.”
에이가가 터져 나오는 기침을 참지 못하고 쿨럭대며 손부채질을 했다. 코며 입 안이 매캐했다.
“비가 아닌 거 같아요.”
릴리가 바닥에 떨어진 모래 알갱이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에이가는 콜록거리며 물었다.
“비가 아니라고요? 바람이 이렇게 부는데요?”
“네. 비가 아니에요.”
릴리는 다시금 창밖을 바라보았다. 후덥지근한 기온, 뜨거운 바람. 어느새 어두워진 하늘이 꼭 비가 올 전조 같지만 분명 비는 아니었다. 갑자기 무엇이 떠오른 건지 릴리는 치맛자락을 붙잡고 서둘러 방 밖으로 향했다. 에이가가 종종걸음 치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아가씨! 어디 가세요! 이 늙은이는 그렇게 빨리 걷지 못한답니다! 조금만 천천히 가세요!”
“따라올 필요 없어요! 혹시 모르니 시종들에게 성의 문을 모두 걸어 잠그라고 하세요! 창문도요!”
‘예?’ 하고 되물었지만 릴리는 이미 계단을 벗어나 멀어졌다. 그 뒤를 세일린이 바짝 따랐다. 왜 저러실까. 무슨 일이지? 하지만 영특한 분이시니 분명 무슨 이유가 있으리라 싶어 에이가도 발걸음을 서두르며 보이는 시종들에게 말했다.
“열려 있는 창문을 모두 닫으렴! 근위병에게 연락해 성문도 굳게 걸어 잠그라고 해!”
“네! 에이가 님!”
영문도 모른 채 시종들은 다급하게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세일린은 제 주인을 따라 뛰느라 숨을 헐떡거렸다. 걸음걸이는 왜 저리도 빠르신 건지 늘 산을 타고 다녔다는 말을 이제는 믿을 수밖에 없다.
“아가씨!”
세일린은 행여 치맛자락에 걸려 넘어질까 무릎까지 갈무리해 올렸다.
“아가씨! 어딜 가십니까!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세요!”
릴리는 거침없이 숲을 가로질렀다. 그녀를 따라 이곳에 산책을 온 것이 한두 번아 아니었다. 왕이 릴리에게 성의 뒤뜰을 하사한 후 하루에도 몇 번이나 들락거렸지만 릴리는 지금껏 들어가 보지 못한 깊은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세일린은 겁이 났다. 카르낙 발투만이 궁에 쌓여 있는 시체를 모두 이 숲 안으로 끌고 들어가 해결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더 깊고 외진 곳에는 분명 주인 모를 시체들을 묻은 시체 산이 나타날 것이다.
문득 그 시체들의 비린 향이 떠올랐다. 알기어스 왕이 다 처리하지 못해 부패한 희생자들의 시체도 모두 이곳에서 처리했겠지. 한동안 시체를 태우는 냄새가 계속되었었다. 성은 늘 검은 연기로 뒤덮여 있었다.
그 열기에 늘 성벽이 뜨거웠더랬다. 혹여 릴리가 향하는 곳이 그곳일까 두려웠다. 역한 피 냄새가 벌써부터 나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을 뿐인데 어느새 눈앞에 있던 릴리의 기척이 사라졌다.
“아가씨!”
세일린은 행여 그녀를 완전히 놓쳤을까 봐, 그래서 혹여 그녀가 잘못되었을까 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무턱대고 뛰었다. 울창한 숲 너머로는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듯 암흑뿐이었다. 그러나 망설일 새가 없었다. 세일린은 입술을 질끈 물고 죽을 각오로 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분명 무엇인가에 부딪칠 거라 생각했는데 어디 하나 걸리는 것 없이 몸이 앞으로 쏠렸다. 덕분에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다 쏟아지는 볕에 절로 인상을 찌푸렸다. 릴리의 뒷모습이 바로 보였다.
세일린이 헐떡대며 주변을 살폈다. 생각했던 시체 무덤이나 구덩이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러나 잿빛의 커다란 고목이 시체처럼 서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세일린은 겁이 나 침을 꿀꺽 삼키고 도망치듯 릴리의 곁에 섰다.
“아, 아가씨… 어떻게….”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냐 묻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가로막는 성벽도 없이 뻥 뚫린 풍경에 말문이 막혔다. 발아래는 아찔한 낭떠러지였다. 저 멀리 캘던의 풍광이 고스란히 보였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을 살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풍경이 조금 이상했다.
아주 아스라이 먼 곳에서 육안으로 식별이 가능할 정도의 벽이 보였다. 짙은 황색의 벽이.
“저게 뭐죠?”
세일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폭풍이에요.”
“예?”
“…모래 폭풍.”
릴리가 더듬거렸다.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다. 그라타에서는 홍수와 산사태는 종종 있었지만 나무뿌리가 뽑힐 정도의 태풍은 한 번도 오지 않았다. 부르테에게 그런 일이 있었노라 들었을 뿐이다. 종종 어떤 곳에는 모래를 동반한 폭풍이 온다고 했다.
생명을 죽이고, 싹을 짓밟고 이기를 위해 땅을 불태우기를 반복하다 보면 땅이 황폐해지고 마른다. 그러고 나면 반드시 이런 것이 온다고 말이다. 얼마나 빠를까. 강한 바람이니 눈 깜짝할 새에 이곳에 당도할 것이다. 사람들을 대피시킬 시간도 없다. 할 수 있는 건 그저 살아남길 바라는 것뿐.
“뛰어요, 세일린.”
“예?”
“뛰어요!”
릴리가 소리쳤다. 세일린은 덜컥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녀가 시키는 대로 뛰었다. 릴리는 성으로 뛰어가며 보이는 이들에게 고함쳤다.
“문을 닫아요! 실내로 들어가요!”
성내의 일꾼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릴리를 쳐다보았다.
“성벽의 보초병들에게 초소로 들어가라고 해요! 어서요!”
몇몇 짐꾼이 릴리를 알아보고 지고 있던 건초를 내려놓았다.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이지만 릴리의 명령이니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폭풍이 올 거예요! 말과 가축들을 축사로 옮겨요! 바람에 날아가 다 잃어버리기 전에요!”
그러자 한 명, 두 명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곧 주변의 분위기에 휩쓸려 다들 조급하고 바쁜 걸음으로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가축을 넣어 어서!”
“문을 막아!”
“기사님들께 훈련을 중지하라고 알려 드려야 해!”
사방에서 고함쳤다.
“아가씨!”
어느새 문 앞에 나와 있는 에이가가 수건으로 제 입과 코를 막고는 소리쳤다. 이미 성의 모든 창문은 나무 문까지 덧대어 완벽하게 닫아 놓은 상태였다. 대낮임에도 빛을 차단한 탓에 에이가의 한 손에는 초가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