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 healer's hidden ending strategy RAW novel - Chapter 111
110화. 마녀의 고양이 (3)
상상해보지도 못했던 일이 눈 앞에 펼쳐지니까 내가 뜬눈으로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졌다.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한 적은 없지만, 진예신의 말마따나 내가 일을 너무 열심히 해서 잠이 모자란 나머지 눈 뜨고 잠이라도 자는 거 아닐까.
하지만 온기가 느껴지는 찻잔과 여전히 빛나고 있는 마석이 여기가 현실이라고 외치고 있어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저 고양이, 마수라도 돼? 그럴 리가 없는데. 마수면 그 신여월이 자택에서 키울 리가 있나.’
소설의 문장이나 게임 속 행적만으로 아는 척하는 게 아니다. 그간 균열 공략을 함께 다니면서 보고 느꼈던 점을 종합한 판단이다.
신여월은 인간에게는 한없이 물러질 수 있는 사람이지만, 마수에게는 가차 없이 죽음을 내리는 사신이다.
내게도 ‘사람 형태를 한 마수’를 사람이라고 여겨서 감정적으로 휘둘리지 말라는 조언을 건넨 사람이지 않나.
대화가 통하는 마수에게는 제법 너그러웠던 게임 속 진예신에 대한 내 기억과는 다르게, 마수를 냉철하게 대하던 그의 태도도 신여월에게서 물든 게 아닐까 하고 추측하는 판국인데. 가온이 마수일 리는 없다.
‘그럼 뭔데. 진짜로 감응자? 아니지, 사람이 아니니까 감응자가 아니라 감응묘라고 해야 하나?’
마석과의 감응에 성공해서 계약까지 완료한 감응자는 인간 중에서도 많지 않고 등급이 높은 자는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문데, 이게 말이 되는 일인지 모르겠다.
아직도 감응자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버리지 못한 박호승과 이세환이 봤다면 자괴감에 빠질 모습에 괜히 머리가 아파졌다.
이 세계에 막 왔을 때, 내 상상을 벗어나는 일이 벌어져도 현실임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었는데, 철회하고 싶은 기분이다.
“어, 그러니까….”
혓바닥이 굳어버린 것처럼 말끝이 흐려졌다.
신여월의 무릎에서 벗어나 바닥으로 사뿐하게 착지한 가온이 몸을 길게 늘이며 기지개를 켰다. 털이 보들보들한 가온의 발등에서 튀어나와 주변을 맴돌고 있는 토파즈는 형광등 불빛에 의해 하얀 광택이 흘렀다.
홀린 것처럼 마석을 보면서 간신히 말을 끝마쳤다.
“가온이 감응자입니까?”
“보다시피 제법 등급이 높은 솜씨 좋은 아이란다.”
가온은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제 주변을 떠다니는 토파즈를 연신 건드렸다.
신여월은 대견한 눈으로 가온을 응시했고, 다과로 챙겨온 롤케이크를 잘라 접시에 나눠 담고 있던 신유하는 방긋 웃었다.
“신기하지? 나도 처음에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그래도 사람이나 동물이나 다를 건 없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싶더라.”
“그야 사람도 동물이니까 틀린 말은 아닌데, 감응이 어디 쉽냐고. 그랬으면 벌써 세계적으로 마석과 감응한 동물이 여럿 나왔을 거고, 감응자가 아닌 사람을 꼽는 게 더 쉬웠겠지.”
그리고 그랬더라면 협회에 재직 중인 소수의 고등급 감응자들이 과로에 시달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만약’이라는 단어를 붙여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대해 상상하는 일은 지양하지만, 투정처럼 생각이 흐르는 것을 막을 방도는 없었다.
높낮이가 거의 없이 한탄처럼 튀어 나간 내 대답에 신유하가 멋쩍게 웃으며 내게 접시를 내밀었다. 가운데 크림이 잔뜩 들어간 롤케이크는 입에 대지 않았는데도 냄새부터가 몹시 달았다.
입맛은 없었지만 대접해주는 걸 거절하기엔 마음이 좋지 못해서 찻잔을 내려두고 접시를 받았다. 포크로 롤케이크의 구석을 잘라내는 내게 신여월은 흥얼거리듯 말을 꺼냈다.
“가온이는 아들이 처음 공식적으로 균열 공략에 나갔을 때 구조해온 고양이인데. 그땐 정말 볼품이 없었단다. 털도 푸석푸석했고, 제대로 먹지 못했는지 비쩍 곯아있었지. 그런데도 눈이 어찌나 형형하게 살아있던지….”
신여월이 신유하가 건네는 접시를 받아 롤케이크를 한입 먹고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림처럼 올라간 입술은 고아했고, 가온을 바라보는 눈동자는 따사로웠다.
“그때 그 금색 눈동자에 반해버렸단다.”
살고 싶다는 의지로 가득 차 이글거리던 눈동자가 너무 아름다워서 이후를 생각하지도 않고 거둬버렸다며 신여월이 나지막하게 웃었다.
그 옆에서 고개만 끄덕이며 다 맞는 말이라고 긍정하던 신유하가 입술에 묻은 크림을 핥고는 설명을 덧붙였다.
“요한이 너도 알겠지만, 우리가 어릴 땐 지금과는 다르게 균열이 엄청 많이 열리지 않았잖아. 그런데 그렇다고 협회에 일손이 남는 건 또 아니었거든. 우리가 태어나기 전, 그러니까 어머니께서 한창 현역이던 시절의 감응자 선배분들께서 대부분 순직하셨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귀한 감응자를 더 잃을 수도 없으니까 균열 공략팀에 다소 많은 인원을 배정해서 파견하는 편이었거든. 당시 나를 비롯한 신입이 미성년자라 보호자가 필요했던 것도 있고.”
“내 나이, 혹은 그보다 윗사람들이 얼마 없으니 새로운 인재들을 협회에 들였는데 하나같이 너무 어렸던 게지. 어른의 보호를 받아야 마땅한 아이들을 어찌 전쟁터에 밀어 넣을 수가 있을까.”
“어머니의 말씀을 들으면 알다시피 어머니께서 미성년 감응자는 혼자 움직일 수 없게 하셨던 것도 있어. 아무튼, 그래서 가온이를 처음 구조한 날에 어머니와 함께였는데, 균열이 열렸다는 소식에 급하게 팀을 꾸려서 출동했던 날이기도 했어. 사람들 대피는 끝냈다는 보고를 받았는데, 거기에 동물은, 그것도 길거리에서 지내는 동물들은 해당이 안 됐던 거지.”
신유하는 솔직히 지금도 대피 대상에 반려동물은 포함되지 않아서 걱정이라는 사족을 덧붙였다.
그거야 위급할 때 사람보다 동물을 우선시할 수 없기 때문이라서 그렇다는 건 알고 있지만, 신경이 쓰인다며 신유하가 포크를 까딱까딱 흔들었다.
“보통은 말이지. 동물은 본능이 강해서 사람보다 먼저 대피하는 경우가 제법 있는데, 가온이는 힘이 없으니까 도망을 못 쳤던 거야. 균열 안에서 마수는 나오지, 그 중앙에서 가온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쓰러져 있지, 정말 위급한 상황이었어. 급한 마음에 가온이한테 다가가는 마수를 저격이라도 하려고 희망이를 불렀는데, 내가 뭔가를 하기 전에 빛이 번쩍하더라.”
신유하가 포크로 가온을 가리키며 맑은 노란색이 워낙 강렬해서 눈이 순간 보이지 않았었다는 말을 더했다.
자연스럽게 내 시선도 신유하의 움직임을 따라 가온에게 향했다.
둥둥 떠다니던 토파즈를 기어이 잡아낸 가온이 그걸 품에 안고 바닥을 뒹굴었다. 그새 살짝 빛이 바랜 느낌이 드는 것이 저 마석 친구가 멀미라도 하는 느낌이다.
“그 자리에 있던 감응자 중에서 그 현상을 못 알아본 자는 없었지. 우리가 모두 겪었던 현상이니까.”
“계약.”
“응. 한순간 계약 때문에 아이온이 과도하게 몰리면서 빛이 터진 거야. 정말이지, 얼마나 놀라웠는지. 보통 그런 상황에 사람이 휩싸이면 감응에 성공할 확률이 높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고양이에게도 해당한다고는 상상도 못 했거든.”
신유하는 깨끗하게 비워진 접시와 포크를 쟁반 위에 올리며 신여월이 건네주는 찻잔을 받아서 들었다.
마석을 삼킬 것처럼 이빨로 긁어대는 가온을 다정하게 보면서 신유하가 신여월과 비슷한 말을 했다.
“그날 푹 빠져버린 거야. 마석에게 인정받을 정도로 강렬한 삶에의 의지로 가득한 눈동자에.”
가온이 토파즈를 허공에 띄워두고, 금색으로 반짝이는 눈을 빛내며 마수 하나를 도륙을 내는 순간, 두 사람은 고양이를 키워야겠다고 생각했고, 그걸 실제로 옮겼다고 한다.
하나를 해치운 후, 기력이 다해 쓰러진 가온을 안전한 구역에 잠시 옮기고, 균열을 완벽하게 해결한 후에 정식으로 저택에 데려왔으며, 그때부터 함께한 인연이라는 말이 쭉 이어졌다.
그동안 계속 제 마석을 못살게 굴던 가온이 별안간 꼬리털을 펑- 부풀리면서 토파즈를 후려쳤다.
‘오…. 마석을 저렇게 험하게 다루면 안 되는데….’
감응자와 마석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마석이 깨지면 감응자의 목숨도 위험하다. 당연히 평소에도 애지중지 흠 하나 가지 않게 주의하는 게 좋다는 얘기다.
마석에 상처라도 생기면 바로 내 몸 상태도 어딘가 나빠지니까 대부분 전투 중이 아니면 손등에서 잘 꺼내지도 않는 거다.
그러니까 저렇게 깨물고 두드리는 게 가온의 몸에도 좋지 않은데, 이 모자는 딱히 제재하지를 않았다.
오히려 신여월은 가온에 의해 벽에 부딪힌 마석보다는 가온의 말랑한 발을 더 걱정했고, 신유하는 저 정도에 깨질 마석이었으면 벌써 사달이 났을 거라며 태평하게 웃었다.
그때 처량하게 벽에 튕긴 토파즈가 부르르 떨면서 옅은 빛을 머금었다.
그 사이로 어렴풋하게 드러나는 길쭉한 팔다리에 벌어지려는 입을 가까스로 다물었다. 하필 롤케이크의 마지막 조각을 먹던 터라 포크가 이에 부딪히면서 딱딱한 소리가 났다.
‘이야, 실체화까지? 이쯤 되면 가온이 원래 사람이었다가 고양이가 되는 저주에 걸렸다는 게 더 현실적이겠어.’
마석이 자아를 가지고 실체화까지 가능하다면, 최소 A등급이다. 하지만 저 마석은 내 마석과 동등한 수준의 아이온이 느껴지지는 않으니 아마 아무리 높아도 오버 A급.
신여월의 입에서 제법 높은 등급이라는 말이 나와서 혹시 S급인가 걱정했지만, 그건 아니니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특히 변수가 될만한 ‘아직 계약하지 않은 S급 마석’이 있는지 한창 알아보던 중이라 기왕이면 한동안은 현재의 감응자 숫자가 변하지 않길 바라거든.
《두 분…. 저 멀미에 약하니까 주인이 던지지는 않게 해달라고 부탁드렸었는데요…. 왜 또 던져진 거죠, 저?》
듣는 사람도 기운이 빠질 정도로 축축 늘어지는 목소리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우리 사이로 끼어들었다.
자연히 그 음성을 따라 실체화된 마석의 모습에 눈을 굴렸다. 희끄무레한 빛무리 사이에서 나타난 실체화된 마석의 모습은 ‘성인’이었다.
보통 사람의 형태로 실체화하는 마석은 봄이나 영원처럼 아이의 모습이다.
봄의 말로는 그쪽이 가성비가 좋아서 어린 모습으로 유지하는 거라고 했는데, 그렇게 따지면 저 토파즈는 실체화에 힘을 낭비하고 있는 걸까.
토파즈는 요리사 복장을 하고 노란 눈동자를 가진, 키가 큰 남성의 모습이었다. 그를 신기하게 쳐다보는데 창백한 낯의 남성은 부푼 꼬리를 핥는 가온을 자연스레 품에 안으며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대답을 좀 해주세요, 두 분…. 제가 오늘은 식탁도 꽉 채워드렸는데…. 어떻게 주인이 던지게 둘 수가 있죠…?》
이세환이 소심한 나머지 말끝을 흐려서 가끔 답답해진다면, 이 마석은 졸음에 겨운 듯이 느릿느릿하게 말끝이 흩어지는 느낌이라 듣는 내가 나른해졌다.
신유하는 비틀비틀 걸어온 마석에게 제 맞은편 소파에 앉으라며 쿠션을 옆으로 치워주고 배려를 보여줬지만, 차를 음미하던 신여월은 그의 하소연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래도 아예 무시할 생각은 아녔는지 한마디 하기는 했다.
“몸은 네가 움직였을지 몰라도 아이온은 가온의 것을 쓰지 않았더냐. 네가 그리 고생한 것도 없으니 울상 짓지 말려무나.”
《여월 님…. 저한테 유독 매정하신 거 같아요….》
“글쎄다…. 나는 누구에게나 비슷한 태도를 보였는데, 네가 그리 느낄 정도로 나를 거북하게 여기는 건은 아니더냐? 이리 생각하니 내가 서운해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 싶구나.”
《세상에나…. 그런 소리 함부로 하시지 마세요, 여월 님…. 저는 맏형에게 잔소리를 듣다가 영면에 드는 마석이 되고 싶지 않아요….》
신여월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가는 영원이가 나를 죽일 거라며 마석이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았다.
그러자 그 품속에 있던 가온이 크게 하품을 한번 하고는 마석의 팔을 타고 올라 어깨에 매달렸다.
우리가 마석과 마음속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처럼 가온도 마찬가지였는지 한참을 마석의 목덜미와 볼 여기저기에 코를 가져다 댔고, 그때마다 마석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갸웃거리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는 가온을 양손으로 들어 코와 코를 맞대며 속삭였다.
《그걸로 괜찮아요, 주인? …으응, 그렇다면야…. 나야 언제든 주인 편이잖아요. 걱정하지 말아요.》
“웨웅.”
《네에, 조심 또 조심할게요.》
그 말을 끝으로 가온을 바닥에 내려준 마석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나도 신기해서 빤히 봤던 게 조금 전이라 그 눈빛에 뭐라고 탓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맘껏 관찰하라는 뜻으로 최대한 자연스럽게 차만 마셔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석의 입이 열렸다.
《저기…. 봄이랑 계약하신 분, 맞지요…?》
“예, 그렇습니다.”
《오늘 음식은 어땠나요…? 입맛에 맞으셨을까요?》
“물론입니다.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내 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순식간에 맑게 갠 얼굴이 된 마석이 잔을 쥐고 있지 않은 왼손을 덥석 붙잡고 외쳤다.
《그럼! 내일 제 부탁을 하나만 들어주실 수 있으실까요!》
“내일부터는 출장이라 제가 이곳에 머무르지 않습니다만, 괜찮으십니까?”
《출장인 건 알아요…. 왜냐하면 주인과 제가 거기에 가야 할 일이 생겼고…. 혼자서는 힘드니까 이 두 사람에게 말했더니 적임자를 불러주겠다며 당신을 데리고 온 거거든요….》
즉, 오늘 만찬 초대는 내가 눈앞에 있어서 계획 없이 다짜고짜 초대한 게 아니라 계획적인 초대였다는 뜻?
생각지도 못한 정보에 뒷골이 뻐근하게 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