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 healer's hidden ending strategy RAW novel - Chapter 18
17화. 가두어진 봄 (8)
잘그락. 고요한 사위에 팔찌 두 개가 부딪쳤다. 그의 메마른 손목에 걸려 있는 팔찌 한 쌍에 절로 시선이 갔다.
두께가 서로 다른 백옥 팔찌는 쌍으로 만들어진 물건이지만, 한 사람이 쓰려고 만든 모양새처럼 보이진 않았다.
뻔하다. 서로 하나씩 나누어 갖는 물건이겠지.
[마을은 뒤집혔습니다. 당연하죠. 장정들은 마을에서도 손꼽히는 무인들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다들 죽는 것 말고 무슨 방도가 있겠어요.]맞잡은 손이 덜덜 떨리면서 연신 팔찌가 덜그럭거렸다.
[다들 필사적으로 방법을 찾고 있었을 때였어요. 그 무서운 고개를 어떻게 넘은 것인지 아주 아름다운 여인이 마을에 찾아왔습니다. 입고 있던 옷도 고급이었고, 장신구도 전부 고가였지만, 그것보다는 외모가 뛰어나서 시선을 모으던 사람이에요. 그자가 마을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이야기를 나누더니 자기에게 방책이 있다고 했습니다. 제 부탁을 하나만 들어준다면 고개를 오갈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말하더군요.]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가 금방 질린 태를 내던 신여월의 고개가 비스듬하게 기울어졌다.
특히 ‘아주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슬그머니 입매를 가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작은 콧소리를 냈다.
‘협회장 반응이 묘해. 그 여인이 누군지 짐작 가나 본데.’
나 역시 후보군으로 추릴 만한 사람이 몇 있기는 하다.
이상하게도 마석에 대해서는 휘황찬란한 묘사를 붙이면서, 인물에 대한 묘사는 적당히 뭉개는 서술이 많았던 소설이라 그렇다.
애초에 고등급 감응자는 외모가 평균 이상이라는 설정을 깔고 시작해서 외모 묘사에 공을 들이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작가의 속내를 내가 어떻게 알겠나.
어쨌든 엑스트라를 포함해서 등장인물 입에서 ‘아름답다’라는 수식어가 나올 정도의 외모를 가진 이는 손에 꼽을 수 있다.
예컨대 눈앞의 신여월이나 그의 아들인 신유하와 같은.
‘문제는 소설은 설정에 미쳐있었지만, 게임은 묘하게 설정이 허술해서 이런 세세한 얘기가 없었으니 확신을 할 수가 없다는 거지.’
긴가민가한 마음에 턱을 긁적이다가 팔짱을 끼고 말하는 데에 여념이 없는 이와 신여월을 번갈아 응시했다.
[고민을 오래 하지도 않았습니다. 무슨 부탁이든 성심성의껏 힘을 보태겠으니 도와달라고 모두가 말했죠. 그 사람은 저희의 반응을 예상했던 것인지 자연스럽게 자신의 부탁을 말하더군요. 자신은 희귀한 물품을 수집하는 사람인데, 요즘은 양이 많아져 둘 곳이 없어진 나머지 조금씩 팔고 있다고. 여기도 사실 물건을 팔러 온 것이니 가격은 좀 나가지만 사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꽤 고가를 불렀으나 부유한 마을이었으니까요. 어려운 부탁은 아니어서 마을 사람들이 조금씩 돈을 보태서 그 물건을 샀고, 방도를 들었습니다.]이 얘기까지 듣고 나니 이후에 어떻게 됐는지 예상이 됐다.
그 방도라는 것은 결국 눈앞의 이 사람이 금기를 범하고 뱀을 그림에 봉인하는 일일 것이며, 봉인할 시간을 벌기 위해 용사로 꾸며진 장정 하나가 미끼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대대로 하지 말라고 한 것에는 전부 이유가 있으니 이 사람은 벌을 받는 게 순리다.
그리고 방법을 알려준 여자가 말했을 것이다. 홀로 금기를 어긴 대가를 치르는 것보다 마을 전체가 나눠서 치르면 가볍게 넘어갈 수 있을 거라고.
홀랑 넘어간 마을 사람들과 팔아넘긴 물건에 수작질을 사부작사부작 가했을 여자의 모습이 주르륵 눈앞에 떠올랐다.
‘절박한 상황이었으니 금기를 어기는 것도 서슴지 않았겠지만, 그 여자를 의심한 사람은 정말 아무도 없었던 건가? 얘기만 들어도 수상한 사람이지 않나?’
신여월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것인지 코끝을 살짝 찡그리며 그에게 약간 타박하듯 말했다.
“그리 고운 이가 아무도 넘지 못하던 고개를 넘어 찾아와 기다렸다는 듯이 도움을 선뜻 건넸다…. 혹 그대의 마을에서는 의심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 건가?”
[아하하, 상인이 오가는 마을 사람이 그렇게 멍청할 리가 있나요. 그저 말을….]굉장히 한심한 것을 보는 듯한 신여월의 노골적인 눈빛은 돌려 말한다고 순화될 수준이 아니었다.
주술사는 이상하게 얼굴 근육을 움직였다. 웃으려고 했던 것 같다.
[못했던 것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홀린 거겠지요. 그만큼 다른 걸 생각할 여유가 있지도 않았고요.]주술사의 눈이 허공을 헤맸다.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한 빛깔이었다.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었어요. 무슨 행동을 해도 다 믿음직스러웠고, 이 사람이 하는 말이라면 믿어도 될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거든요.]유독 익숙한 묘사다. 마치 홀린 것처럼 절로 신뢰가 생기는 분위기의 소유자.
소설에서는 단 두 명이 저 수식어를 썼고, 게임에서는 플레이어 캐릭터인 진예신에게도 붙어서 셋이 됐다.
‘남은 둘 중 하나는 신여월이야. 다른 건 몰라도 신여월은 제약이 걸려 있어서 저 유령의 생전에 만나봤을 리가 없어. 그렇다면 남는 건….’
내가 천천히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반개한 눈으로 못마땅함을 숨기고 있던 신여월이 불쑥 주인에게 물음을 던졌다.
“그대. 혹시 그 여인의 손등을 보았는가?”
[…손등이요?]“그래. 내가 아는 이 같아서 말일세. 한데 그치가 왜 이런 일을 벌였는지 짐작이 안 가거든. 해서 묻는 걸세. 혹 손등에 문신이 있지 않았던가 하고.”
끔뻑끔뻑하던 주술사의 눈이 도르르 굴렀다. 눈매를 좁히며 기억을 뒤지던 주술사가 긴가민가하다는 얼굴로 혀를 굴렸다.
[긴 소매로 된 옷을 입고 있어서 손끝만 간신히 보이던 사람이었어요. 잠깐씩 팔을 들 때 스치듯이 보기는 했는데, 어울리지 않게 흉터가 있다고 생각했거든요.]“흉터?”
[네. 요 정도 크기쯤 되는 붉은색의 손톱 모양처럼 생긴…. 흉터가 아니라 문신이라면 그게 아마 초승달이었나 봐요.]주술사는 손등을 우리 쪽으로 보여주며 거의 손목에 가까운 부근의 손등 위로 크기를 가늠했다.
소매가 조금만 긴 옷을 입어도 거의 보이지 않을 위치에 있는 작은 달 모양의 붉은색 문신.
여기까지 힌트가 나왔는데 확정을 짓지 못하면 게임 안 한 거다.
‘부지런하기도 하지. 구슬만 미리 만들어 놓은 줄 알았는데 아예 직접 움직였구만?’
어떤 길을 가든 반드시 한 번 이상은 만나는 이 세계관 최강의 악당.
개인의 취향 같은 건 가볍게 넘겨버릴 수 있을 정도의 강렬한 미인.
대화를 나누면 반드시 홀려 버리고 마는 분위기를 지닌 화술의 달인.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고 그저 자신을 보스라고 부르라 하는 이 세상을 가장 증오하는 사람.
‘그러고 보니 마지막 루트 뚫을 때, 최종 보스가 좀 이상했는데. 설마 내가 여기 오게 된 이유가 그 인간한테 있나?’
메인 스토리에 끼어들 생각도 있었고, 친애하는 악우 두 놈을 위해 최종 보스와 결판을 낼 생각도 마찬가지로 있었지만 이렇게 상황이 몰아치기를 바란 건 아니다.
특히 최종 보스는 여기저기 손을 많이 뻗어놓고 일을 조정했지만, 앞에 최종이라는 단어가 붙은 것처럼 온전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등장 자체는 느지막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까지 적당히 그쪽으로 연결된 자금줄을 좀 끊어내고 겸사겸사 내 통장을 불려놓으려고 했었는데 벌써 미래 계획이 꼬이는 소리가 들린다.
일그러지려는 미간을 꾹 누르면서 신여월과 유령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이런 곳에서 그치의 발자국을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예상외로 수확이 있게 되었어.”
[저어…. 그분에 대해 잘 아시는 건가요?]“글쎄다. 이걸 어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잘 안다고 하기엔 조금 그렇다만, 아예 모르는 사이는 아니지.”
거참 만나면 어느 한쪽이 죽을 때까지 싸울 건데, 이기는 건 나라는 표정을 지으면 어떡합니까, 협회장님. 누가 봐도 철천지원수라는 표정이잖아요, 지금.
‘아니 근데 원래 이렇게까지 증오가 넘치는 사이는 아니었는데? 둘 사이에 뭔가 일이 있었나?’
곰곰이 생각을 해봐도 딱히 짚이는 점은 없다.
기본적으로 신여월은 은원이 확실한 사람인데 기준이 살짝 독특하다.
협회 자체가 은혜를 입어도 자신의 몫까지 더해서 후하게 갚는 대신, 원한은 딱 본인 것만을 해결한다.
개인적인 원한만 딱 풀고, 타인이 입은 원한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미묘한 기준이 있다고 해야 하나.
제 아들인 신유하가 최종 보스로 인해 사경을 헤맸을 때조차 이건 아들이 입은 원한이니 직접 풀어야 한다고 딱 잘라 말했을 정도다.
그런 신여월이 저 정도로 이를 간다는 건, 본인이 최종 보스에게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는 뜻이 된다.
‘겉보기엔 일단 멀쩡하고, 주변 사람 중 죽은 사람도 없어 뵈는데. 둘이서 맞대결이라도 했나? 둘 다 그럴 성정은 아닌데.’
내가 풀리지 않는 고민으로 끙끙대는 동안 이를 벅벅 갈던 신여월이 두루마리를 움켜쥐고는 심상치 않게 눈을 빛냈다.
으레 사고 치기 직전의 약간 돌아버린 눈동자였다.
“그치가 짠 판에 영문도 모르고 들어온 것이 영 마음에 차지 않지만, 그건 어쩔 수 없다 칠 수 있단다.”
“협회장님.”
“순순히 그치의 뜻대로 진행되는 건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서 말이다.”
“뭘 어떻게 하려고 그러십니까?”
당장이라도 두루마리를 산산이 조각낼 것만 같은 흉흉한 시선에 꼴딱 마른침을 삼키면서 물었다.
신여월은 그런 내게 무서울 정도로 화사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자의 생각이야 뻔하지 않나. 어떤 식으로든 그자는 내가 이 두루마리를 찢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며 이 기분 나쁜 구덩이를 팠을 거란다. 내가 그의 성격을 아는 것처럼, 그도 마찬가지니까 말이야. 아마 내가 지금처럼 사연을 들었다면 후환을 남기기 싫어 없애버릴 것이고, 듣지 않았다면 나갈 방도라 생각해서 없애버릴 것이라고.”
“그쪽에서 오히려 이 상황을 그대로 읽었을 가능성도 있잖습니까.”
“물론 있지. 한데 읽는 건 그쪽만 가능한 게 아니지 않니.”
힘줄이 잔뜩 서 있는 손으로 용케도 구김 하나 없이 들고 있던 두루마리가 신여월의 마석 보관함으로 쓱 사라졌다.
‘아이고, 머리야. 저렇게 될 것 같기는 했지만, 저걸 진짜로 들고 나갈 생각을 다 하네.’
그야 저건 나도 처음 보는 물건이고, 어떻게든 온전히 들고 나가서 조사해보는 편이 좋다는 의견이지만, 불안함이 없진 않다.
주술사의 말에 의하면, 저건 어디까지나 저 유령의 힘으로 만들어진 물건일 테다.
내가 아는 한, 최종 보스에게 종이에 영혼을 가두는 능력 따위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불안한 건 신여월의 말마따나 최종 보스가 저걸 찢기를 원했다면, 저 두루마리가 생각보다 중요한 물건이라는 소리다.
‘흰소리를 하기는 해도, 거짓말은 안 하는 인간이었지. 행동은 전부 세계 멸망을 위한 것들이었고. 그럼 저 두루마리가 남아 있는 게 그 인간으로서는 문제가 된다는 거잖아.’
고작 황색 균열의 주인이 가진 능력으로, 겨우 영혼 하나 가둬놓은 두루마리가 무슨 재주가 있어서 세계 멸망에 어깃장을 놓는 물건이 된다는 말인가.
차라리 저걸 찢으면 신여월에게 유효 타격이 들어가서 최종 보스가 잔치를 벌인다는 쪽이 더 신빙성이 있겠다.
‘어? 생각해 보니 그럴 수도 있겠는데?’
순간적으로 훅 드는 생각을 한쪽으로 치워두면서 신여월의 손등에서 시선을 뗐다.
이미 벌어진 일을 막는 방도를 난 모른다. 특히 협회장의 고집은 더욱 그렇다.
저건 친분이 두터운 진예신이 와도, 귀애하는 아들인 신유하가 와도 못 말린다.
그럼 남은 방도는 한 가지. 본래 이 균열을 공략하는 방식대로 저 유령을 성불시켜서 이 거대한 족자를 찢어내어 문을 만드는 것.
한순간에 사라진 두루마리를 황망하게 쳐다보며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는 유령에게 다가섰다.
“저기 보이십니까?”
[네?]“저쪽 말입니다. 산 너머의 접힌 것처럼 보이는 부분이 보이는지 물었습니다.”
주술사 유령이 고개를 쭉 빼더니 내가 가리키는 부분을 응시했다.
[에구머니나.]자기가 소리를 내놓고서는 화들짝 입을 가리는 꼴이 좀 우스웠다.
그러더니만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다가 신여월의 매서운 시선에 불쌍하게 몸을 굳혔다.
“보이시는 것 같으니 가감 없이 말하겠습니다. 이곳은 당신이 금기를 어겨가며 뱀을 가둔 족자 안이며, 당신의 미련이던 뱀은 죽었습니다. 당신의 말이 틀리지 않는다면, 또 다른 미련이라 할 수 있는 두루마리도 저희가 해결하게 될 겁니다.”
[예에….]말끝을 흐린 주술사가 뻣뻣하던 목을 수그렸다가 들어 올렸다. 마을 이야기를 하면서 선명해졌던 형체가 어쩐지 조금 흐려진 기분이 든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은 건지 알아들었습니다.]눈썹을 찡그리며 웃은 주술사가 기다란 소매를 뒤적거리더니 그 속에서 나온 거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크고 기다란 붓을 꺼냈다.
거의 자신의 키만 한 붓을 쥔 주술사가 그대로 먹물을 묻히듯 붓의 머리를 연못에 푹 담갔다가 빼냈다.
고인 연못의 물과 똑같은 짙은 녹색이 모를 흠뻑 물들였다.
[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모른 척하고 싶었을 따름이겠지요. 뱀이 있으니까, 우리의 안타까운 영웅이 꽃으로나마 함께 하고 있으니까. 내가, 형태가 어떻든 숨을 쉬고 있으니까.]먹물이 묻어있던 손끝에 새로이 얼룩덜룩한 물이 들었다.
분분히 내려앉는 꽃잎처럼 서서히 손목을 타고 어깨에도, 머리에도, 발끝의 옷자락에도 물이 퍼졌다.
[제아무리 살던 곳과 비슷하게 그려내고, 그 안에 살아있는 것처럼 기억이 있어도 저는 오래전 이미 죽어버린 사람이니까요.]정자 위에 있던 우리와 연못 위에 있던 그의 사이로 선명한 녹색 선이 그려졌다. 연이어 휘둘러지는 붓질은 천천히 주변을 녹색으로 빼곡하게 채워갔다.
[주술사들의 최후는 대개 비슷해요. 제게 이 길을 알려주신 스승님께서도 마찬가지셨지요. 주술사라는 건, 미련을 그림으로 봉인하는 겁쟁이들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러다 보면 어느 날, 자신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금기를 깨고, 모든 걸 걸어서 자신까지 봉인하게 되더랍니다.]이제는 초록빛으로 뒤덮여 볼품없어진 모양새를 한 채로 주술사가 붓을 어깨에 걸쳤다.
난장판이 된 붓의 끝에서 뚝뚝 연못의 녹색 물이 떨어져 야금야금 그의 발을 잡아먹는다.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물들어버린 유령이 어쩐지 후련하게 웃는다고 느껴진다.
어깨가 들썩이고, 거기에 걸린 붓이 까딱까딱 흔들리면서 접히고 있던 두루마리의 끝자락에도 기어이 물이 튀었다.
[두 분께서는 이런 세계를 계속 돌아다니는 일을 하시는 거겠지요?]“아무래도 그렇지 않겠나. 그대들로서는 세계를 멸망시키러 온 악당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일세.”
[아하하, 그럴지도요. 하지만 모두 같을 거예요. 그냥 다들 알면서 모른 척을 하는 거죠.]심드렁한 신여월의 대꾸에도 유령은 그저 웃었다.
먼저 선을 그어둔 정자 안쪽을 제외하고 모든 광경이 초록색으로 변했다.
이곳에 주술사의 영혼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주변이 녹아내리듯 변했다.
[이런 세계는 이미 전부 죽어버린 세계이니.]접히던 족자의 끝이 물에 푹 젖은 종이처럼 늘어지더니 뭉근하게 뚝뚝 흘러내린다. 그 가운데서 유일하게 진한 점이 된 곳이 깜빡깜빡 명멸한다.
[이렇다 할 흔적 없이 붉은 꽃을 제게 가지고 오셨으니, 특별한 힘이 있겠지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세계에 구멍을 내는 것이 아니라 모두 가지고 잠기는 것뿐이라 부탁드리겠습니다.]“무엇을 말입니까?”
[지금 딛고 계시는 그 정자는 이곳에 남은 몇 안 되는 ‘진짜’입니다. 제가 직접 제 마을의 것을 봉인한 것이지요. 꽃을 가지고 오셨던 그 힘을 정자에 씌우시면 나가는 통로가 생길 것입니다. 편법이지만 안에서 밖으로 나갈 때 가장 빠른 방법이기도 해요.]이미 많은 것이 변한 상황에서 ‘어째서’를 생각하는 것은 나중에 해도 되는 일이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행운의 봄을 불러냈다. 자연스럽게 감기는 지팡이를 손에 쥐고, 바닥을 내리찍으며 읊었다.
“신록의 정화 발동.”
선 바로 앞까지 다가온 초록색 물을 살라 먹을 듯이 밀어내며 정화의 기운이 정자 전체를 감싸 안았다.
휙 휘파람을 부는 신여월과 감사하다며 고개를 꾸벅 숙이는 유령, 그리고 무너져 내리는 풍경 사이로 길게 검은 틈이 생겨났다.
‘출구다.’
신여월이 잘했다며 내 어깨를 한 번 토닥이고는 먼저 틈 밖으로 나갔고, 뒤이어 나도 발을 디뎠다.
이지러지는 눈앞에 어디선가 날아온 꽃 한 송이가 툭 부딪쳤다.
‘은방울꽃?’
의아함을 느끼기도 전에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