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 stacking hunter RAW - volume 2 (2)
2-2장.
“예린 선배 덕분에 살았어요.”
“수현 씨도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부상자들까지 지키느라 고생했어요.”
나예린 일행이 제때 도착한 덕분에 상황은 잘 정리됐다.
이수현을 포위했던 나가들은 매서운 반격에 허겁지겁 도망쳤다.
나예린은 현재 상황부터 정리했다.
“실종자들은 무사합니까?”
“예, 기절했지만 목숨에 이상은 없어요.”
“그런데 다른 헌터들은 어딨죠? 수현 씨는 2팀의 후발대랑 같이 온 거 아녔어요?”
“어휴! 그 새끼들은 말도 꺼내지 마십쇼, 예린 누님! 저랑 수현 형님을 미끼로 써먹고 저들끼리만 튀었습니다. 순 쓰레기 새끼예요.”
박동원이 씩씩대며 2팀 팀장에게 이용당한 사실을 밝혔다.
그러자 나예린이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쳐다봤다.
“…박동원 씨, 제가 왜 누님이죠?”
“하하! 저보다 강하면 형님, 누님이죠. 저희 태산 길드에선 나이보다 능력을 우선시합니다.”
“그냥 나예린 팀장님이라고 해 주세요. 그런 호칭은 좀 부담스러워요.”
“옙!”
그 양아치 같던 박동원이 며칠 만에 싹싹해지니 영 적응이 안 됐다.
아무래도 그는 이수현이랑 모종의 얘길 따로 나눈 모양이다.
그녀는 본론으로 돌아왔다.
“수현 씨, 나가들의 행동이 뭔가 이상했어요.”
“이상하다뇨?”
“저희도 인질을 이용한 함정에 걸렸었어요. 다행히 격퇴했지만, 거기서 묘한 위화감을 느꼈는데…….”
그녀는 나가들에게서 받은 위화감을 설명했다.
습격해 온 나가들이 왠지 모르게 전투에서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꼭 저흴 상대로 시간을 끄는 것 같았어요.”
“시간을 끈다니. 대체 왜…….”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게 틀림없어요.”
나예린은 어쩐지 불길하다고 말했다.
나가들의 목적은 침입자들의 목숨이 아니라 전혀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
“2팀 팀장이 전투 도중에 도망쳤다고 했죠. 어디로 갔어요?”
“저희가 지나온 방향이니 아마 게이트 쪽으로 갔겠죠.”
“……!”
이수현의 대답에 나예린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나가들의 속셈을 이제야 간파한 것이다.
차원 게이트의 위치. 그들은 그걸 통해 지구로 이동하려는 거다.
“서둘러야 해요! 놈들의 진짜 목적은 차원 게이트였어요.”
“하지만 부상자들까지 데리고 가려면…….”
2팀의 헌터들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들은 나가들한테 입은 부상으로 뒤처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버리고 갈 순 없는 노릇.
나예린은 곤혹스러운 마음에 발만 동동 굴렸다.
그때, 이수현이 버스를 소환하며 사람들한테 말했다.
“버스 탈래요? 자리 남는데.”
* * *
“인간 전사여, 나쁘지 않은 솜씨였다. 내 몸에 상처를 내다니.”
꿀렁.
나가 부족의 족장은 패배한 박원기 팀장을 통째로 삼켰다.
마력을 지닌 인간은 그에게 있어 보양식이다.
꿈틀!
뱃속에 들어간 박원기의 마력을 서서히 빨아들이자, 도끼에 베였던 그의 상처도 점차 아문다.
충실한 포만감에 그는 절로 미소가 나왔다.
나가의 지도자는 부푼 자기 배를 쓸어내리며 차원 게이트를 바라봤다.
“드디어 다른 차원으로 가는 통로를 확보했다.”
뱀 군주께 이 사실을 보고하면 틀림없이 상을 받을 수 있을 터.
어쩌면 자신에게 신물을 내려 주실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그가 이끄는 부족이 어엿한 뱀 군주의 친위대로 인정받게 되겠지.
“샤악! 조, 족장님! 알 수 없는 거대한 존재가 이쪽으로 접근 중입니다!”
“당황하지 마라. 나도 저 울림이 느껴진다. 나무까지 부수고 오는 모양이로군. 어지간히도 급했던 모양이지?”
나가는 땅의 진동을 통해 적의 접근을 사전에 감지할 수 있다.
역으로 자신들은 그런 기척을 감추고 은밀하고 신속하게 적을 사냥한다.
숲의 그림자. 다른 부족들은 나가를 그렇게도 부른다.
“족장님, 남은 인간들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당연히 여기서 처리해야지.”
“쉬익? 넘어가서 상대하시는 편이…….”
“쯧. 이 아둔한 놈. 차원의 틈을 지나면 우리 몸은 한동안 둔해진다. 다른 환경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지.”
몬스터들은 자신이 살던 곳과 다른 환경일 경우, 제대로 싸우지 못한다.
저 차원 게이트가 어디로 연결되는지 당장 알 수도 없다. 그는 그걸 경계했다.
그가 나가 부족의 족장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전장에서 계속 살아남았으니까.
“전투에서 생존하려면 신속하게 움직여야만 한다. 몸이 둔해지면 필시 죽기 마련.”
“죄, 죄송합니다.”
“싸울 때는 몸을 가볍게 해라. 그게 오래 살아남는 비결이다.”
족장의 호된 질책에 부하가 머릴 숙였다.
정작 본인은 박원기가 품고 있던 마력의 유혹을 못 참고 식사를 했지만.
부하들은 그에게 감히 딴지를 걸지 못했다.
“놈들을 맞이해라. 모조리 죽여서 후환을 없애는 거다.”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그에겐 수십의 정예 전사가 있다.
반면에 여기로 빠르게 다가오는 것들은 고작해야 십수 명의 인간.
‘개중엔 함정에 걸려서 다친 놈들도 섞여 있겠지.’
나가의 족장은 전투만 잘하는 게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승리하기 위한 술책을 짜냈었다.
“후후, 여기까지 헐레벌떡 뛰어온다면 반드시 지칠 터.”
지친 자를 상대하는 것만큼이나 손쉬운 사냥은 없다.
게다가 다친 동료들까지 챙겼다면 놈들의 전투력에도 제약이 생길 터.
승기도 확실한데 굳이 싸움을 마다할 필요가 있겠는가.
쿠웅-!
거대한 나무가 충돌음과 함께 무너졌다.
먼지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인간이 아니었다.
“…저게 뭐지?”
나가 부족의 족장은 그걸 보고 당황했다.
자신의 예상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생김새였다.
‘마력으로 구동하는 골렘인가?’
저렇게 생긴 골렘은 태어나 처음 본다.
족장은 물론이고 나가 전사들도 그걸 보더니 깜짝 놀랐다.
“족장님, 안에 인간들이 타 있습니다!”
“……!”
인간들이 탈것으로 사용한다는 마차 같았다.
나가 족장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서 잠시 망설였다.
그 잠깐의 망설임이 부하들의 목숨을 앗아 갔다.
* * *
“너희가 내릴 정류장은 지옥이다. 이 뱀 대가리들아.”
뻐엉-!
이수현은 신나게 버스를 몰며 나가를 날려 버렸다.
놈들은 지옥행 버스를 앞두고 도망치기 바빴다.
“저 골렘은 움직임이 굼뜨다. 그러니 당황하지 말고 신속하게 피해라! 요격 준비!”
리더로 보이는 녀석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나가들에게 명령했다.
이수현은 어디 해 볼 테면 해 보란 식으로 버스를 몰았다.
“버스는 느린 대신 내구성이 튼튼하거든, 어디 백날 때려 봐라. 부서지나.”
터엉-!
나가들은 버스의 유리창을 노리고 창을 힘껏 던졌지만 부질없었다.
조그만 흠집만 생기고 유리창은 멀쩡했다.
“캬아악?”
“끄륵!”
콰드득!
창을 던지느라 미처 도망치지 못한 나가들은 버스에 깔려 찌부러졌다.
“나가들이 아무것도 못 하고 도망만 치는데요?”
“뭐 이런 능력이…….”
버스 승객들은 멍하니 학살의 현장을 바라보았다.
벌써 반절 가까이 쓰러졌다. 피하지 못하고 부딪히면 일단 즉사다.
이수현은 뒷좌석에 앉은 사람에게 부탁 하나만 했다.
“예린 선배, 슬슬 저것들한테 따끔한 맛 좀 보여 주죠.”
“알았어요.”
나예린은 좌석의 유리창을 열었다.
그 틈으로 화살을 마구 쏴 대자 나가들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버스 안에서 화살을 쏴 대다니. 난공불락의 요새와도 같았다.
원거리 공격 수단을 지닌 헌터들도 그녀를 지원했다.
퍼버벙! 파직!
나가 부족의 전사들은 폭격에 휘말려 하나둘 쓰러진다.
족장은 악몽을 꾸는 사람처럼 안색이 파리해졌다.
“이럴 순 없다! 다른 차원으로 가는 통로를 발견했는데…….”
뱀 군주께 인정받을 절호의 기회란 말이다.
이대로 날릴 순 없었다. 그는 운전석에 앉은 이수현을 쏘아보며 소리쳤다.
“골렘을 조종하는 인간이여, 당장 멈춰라! 나는 나가 부족을 이끄는 족장, 다르간! 네놈도 전사라면 정정당당하게 일대일로 결투하자!”
이수현은 다르간의 말에 콧방귀를 뀌었다.
정정당당은 개뿔… 인질을 이용해 함정을 파던 놈이 할 소린 아니지.
“그래, 정정당당히 결투하자. 일단 네 부하들부터 다 죽이고.”
뻐엉!
버스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다르간은 머릴 굴렸다.
인간들은 유달리 정에 약한 종족.
그는 아가리를 쩍 벌려 아까 삼켰던 박원기를 토해 냈다.
“그걸 당장 멈추지 않는다면 이 녀석의 목숨도 없다!”
“팀장님!”
“다, 다행이다! 아직 살아 계셨어!”
산 채로 삼켜서 소화해야지만 마력의 흡수율이 높아진다.
즉, 박원기는 아직 살아 있었다. 물론 정상은 아니었지만.
소화액 때문에 머리카락과 살갗이 심하게 녹아내렸고, 팔 하나는 뜯겨져 나갔다.
겨우 숨만 쉬는 시체 같은 꼴.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죽을 거다.
동족의 목숨으로 협박하면 녀석도 저 골렘을 세우겠지… 다르간은 안일하게 생각했다.
정작 이수현은 중지를 치켜세우며 엿이나 잡수라고 했다.
“나 버리고 튄 놈을 내가 왜 챙겨 줘야 하는데?”
“머, 멈추라니까! 내 말이 안 들리느냐!”
나가들은 볼링공에 맞은 핀처럼 나풀대며 날아갔다.
다르간은 박원기의 목덜미를 콱 붙들고 애원하듯 이수현을 협박했다.
버스 승객 중 2팀 소속의 헌터들도 울면서 그에게 부탁했다.
“이수현 헌터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저희 팀장님 좀 살려 주세요!”
“놈이 약속을 지킨단 보장이 어딨습니까?”
“그, 그건…….”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여기서 버스를 멈춘다면, 놈은 인질의 목숨을 이용해 더한 요구도 할 수 있다.
녀석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선 안 된다.
다르간도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다급히 소릴 질렀다.
“알겠다! 인질부터 풀어 줄 테니 제발 그 골렘을 멈춰다오!”
“그래, 처음부터 그랬어야지. 협상은 그렇게 하는 거야.”
다르간은 기절한 박원기를 땅바닥에 내려 두고 멀찍이 물러섰다.
살아남은 나가들도 족장이 시키는 대로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버스에서 헌터 몇 명이 내렸다.
“혓바닥이라도 날름했다간 바로 운전할 거야. 알겠어?”
“헙!”
나가들은 이수현의 요구에 입을 다물었다.
다르간도 두려움에 떨며 혀를 쏙 집어넣었다.
‘…응? 방금 저 인간, 우리 일족의 언어를 사용했어. 어떻게 된 거지?’
나가의 언어는 다른 종족들이 쉽게 배울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어렵다.
그런데 다른 녀석도 아니고 인간이 따라 할 줄이야.
이수현은 창가에 머릴 내밀고서 다시 질문했다.
“다른 인질은 어딨어?”
“없다. 저항이 거세서 다 죽였지.”
박원기는 먹음직스러워 보여서 삼켰고, 나머지들은 숨통을 끊어 줬다.
그의 대답에 이수현은 천천히 버스에서 내렸다.
나가들이 잔뜩 경계하며 그를 노려본다.
‘놈이 골렘에서 내렸다. 지금이라도 공격할까?’
공격할 기회만 엿보던 다르간에게 이수현은 검을 뽑았다.
다르간은 그의 돌발 행동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뭐해? 자세 잡아.”
“뭐?”
“네가 일대일로 붙자면서, 아니면 저걸로 다시 깔아뭉개 줘?”
‘나한테 혼자서 덤비겠다고? 진심인가?’
다르간은 자신의 창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이수현도 천천히 검법 자세를 잡았다.
그의 손에 예사롭지 않은 반지가 보였다.
다르간도 어디서 본 적 있는 물건이었다.
‘저 반지는 천둥 군주의 신물!’
원래 소유자가 죽고 인간의 손에 들어갔단 소문이 돌던데.
그게 사실일 줄이야. 저걸 뱀 군주께 가져다 바치면 분명 대리인으로 선택받을 수 있다.
뱀의 눈동자에 찐득한 탐욕이 깃들었다.
“인간이여, 그 반지는 어디서 났느냐!”
“네가 알 거 없잖아.”
“크흐흐! 날 우습게 본 걸 후회하게 해 주마.”
다르간은 창날을 혀로 핥았다.
버스 안에서 그걸 본 나예린이 날카롭게 경고했다.
“수현 씨, 나가는 신경독을 지니고 있어요. 저도 도울 테니 같이 싸워야 해요!”
“전 괜찮아요. 선배는 나가들이 버스에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 주세요.”
“그러다 독에 당하기라도 하면…….”
“여럿이 덤비면 독 때문에 오히려 위험해요. 절 믿어 줘요.”
나예린은 이수현을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혼자서 보스랑 싸우겠다니. 너무 무모했다.
하지만 저렇게 자신만만하다면 뭔가 이유도 있겠지.
그녀는 이수현을 한번 믿어 보기로 했다.
‘여차하면 바로 끼어들어야겠어.’
그녀는 화살을 시위에 건 채, 다른 나가들의 동태를 감시했다.
결투에 끼어들려는 놈이 있다면 바로 쏠 생각이다.
“아까 풀어 준 인간도 너처럼 무모하게 덤볐다. 실력은 제법이었지만, 녀석도 내 독엔 어쩔 도리가 없었지.”
처음엔 팽팽하게 맞서 싸웠던 박원기 팀장도 끝내 중독되어 패했다.
다르간은 혀를 날름대며 넌지시 말했다.
“넌 내 독에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어디 해 봐. 나도 궁금한데.”
이수현의 자신만만함에 다르간이 먼저 움직였다.
그의 신속한 움직임에 이수현은 조금 늦게 반응했다.
핏!
찌르기는 용케 검으로 막았지만, 창날에 그의 뺨이 살짝 베였다.
그걸 본 다르간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됐다! 독이 스며들었어. 철저히 괴롭히다가 죽여 주마.’
* * *
‘비늘 때문에 전류가 잘 안 먹혀.’
파지직!
나가의 촘촘한 비늘은 전격을 막아 내기에 유리했다.
이수현의 전기 능력이 막히자 공격권은 자연히 다르간 쪽으로 넘어갔다.
이수현은 상대가 휘두르는 창을 피하는 데 급급했다.
과연 나가 부족을 이끄는 지도자다운 실력이었다.
다르간은 살벌한 눈으로 이수현을 뒤쫓았다.
“도망쳐 봤자 소용없어. 넌 독 때문에 곧 손발에 힘이 없어지고, 제대로 숨쉬기조차 어려워질 거다!”
“난 멀쩡한데?”
터엉!
창날을 튕겨 내면서 이수현은 반격했다.
하지만 다르간은 고갤 젖혀서 손쉽게 칼날을 피했다.
힘과 스피드 전부 다 다르간이 이수현을 앞선다.
그는 비릿한 미소를 짓더니 이수현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핏!
이번엔 이수현의 팔뚝에 작은 생채기가 났다.
쓰라림 때문에 그가 절로 인상을 찌푸린다.
그걸 본 다르간이 혀를 날름대며 그를 비웃었다.
“흐흐! 상처가 나면 날수록 독은 더 빨리 퍼질 거다. 슬슬 어지럽지 않나?”
“안 통한다니까… 말귀를 못 알아먹네.”
“흥. 입만 살았구나.”
승부는 이미 기울었다. 다르간은 그렇게 생각하며 창을 빙글 돌렸다.
그는 찌르기 공격을 생각함과 동시에 돌진했다.
그런데 날카로운 참격이 다르간의 코앞으로 날아들었다.
“……!”
끼긱!
그는 간발의 차로 이수현의 발도술을 막아냈다.
다르간은 뒤로 물러서며 창을 고쳐 잡았다.
‘방금은 위험했다.’
자신의 신체 능력이 그보다 한 수 위였기에 겨우 반응할 수 있었다.
이수현은 검집에 칼을 집어넣고선 다시 발도 자세를 잡았다.
“기괴한 동작이구나. 기습에 특화된 검법인가?”
하지만 그것도 상대방보다 빠를 때나 먹히는 거지.
둘의 실력 차이가 명확한 이상, 한 번 당한 기술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
“아쉽겠군. 방금 공격이 성공했으면 역전의 기회 정도는 노려볼 법했는데.”
“어이, 뱀 씨. 좀 닥치고 싸워. 뭔 말이 이렇게 많아.”
“뱀? 나를 그깟 하등 생명체랑 동일시하다니.”
이제 장난은 끝이다. 다르간은 창을 붕붕 돌리며 달려들었다.
채앵! 챙!
처음 몇 합을 주고받을 땐 다르간의 얼굴엔 자신감이 가득했다. 곧 놈을 죽일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터엉! 끼긱!
십여 합을 휘둘렀는데도 창날이 죄다 막히자, 다르간의 얼굴엔 점차 웃음이 사라져 갔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공격을 시도하려 하면 사전에 막힌다. 이수현의 검술은 상대의 동작과 흐름을 절묘하게 끊었다.
아까까진 반응도 제대로 못 하던 녀석이, 이젠 자기 움직임을 따라잡기 시작했다.
‘내 창술에 벌써 익숙해졌나?’
그건 말이 안 된다. 인간 따위에게 자신의 창술이 막히다니.
아니, 막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훤히 꿰뚫고 있었다.
이수현이 수십 합이나 받아 내자 다르간은 속으로 경악했다.
그의 움직임이 그림자처럼 따라온다.
적을 알고 나를 안다면 질 일도 없다. 이수현은 다르간의 창술을 통째로 외웠다.
‘설마 내 창술을 간파했다고? 이 짧은 시간에? 그건 말도 안 돼!’
“너무 뻔해. 다음은 회심의 찌르기겠지?”
“그걸 어떻게……!”
핏-!
다르간의 뺨에 얇은 생채기가 생겼다.
이수현은 자기가 당했던 걸 그대로 갚아 줬다. 그 효과는 탁월했다.
다르간의 머릿속에 수치심과 분노가 몰려들었다.
그는 냉정함을 잃고 무리해 가며 거릴 좁혔다.
“죽여 버리겠다!”
어차피 시간은 다르간의 편이다.
지금도 이수현의 혈관에선 독이 서서히 퍼지고 있을 터.
시간만 질질 끈다면 알아서 땅을 기게 만들 수도 있다.
‘그것만으론 부족해. 실력으로 찍어 누르지 못하면, 분해서 못 참겠단 말이다!’
이 울분은 놈의 배때기에다 창을 마구 쑤셔 박아 줘야지만 풀릴 것 같았다.
다르간은 칼에 찔리는 걸 감수하면서 간격을 좁혔다.
한 방만 제대로 찌르면 된다.
나약한 인간은 그것만으로도 자세가 무너지고 비명을 지르니까.
아까 통째로 삼켰던 녀석도 그랬었다.
“저러다 이수현 헌터가 중독되면 어쩌죠? 벌써 몇 분째 쉬지 않고 움직였는데. 움직이면 독이 더 빨리 퍼질 거예요.”
“아직까지 치명상은 없지만…….”
이수현과 다르간의 치열한 접전. 다른 헌터들은 버스 안에서 불안하게 지켜봤다.
꼭 아슬아슬한 줄타기라도 보는듯했다.
다르간의 전신에 상처가 늘수록, 이수현도 피범벅이 되어 갔다.
나가의 피 역시 인간에겐 치명적인 맹독.
“저렇게 피가 묻으면 몸이 점차 굳을 텐데…….”
“나예린 팀장님, 지금이라도 저희가 개입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나가들을 보세요. 저희를 순순히 보내 줄까요?”
일대일 결투를 방해하려 든다면 저들도 가만있지 않을 터.
나예린은 필사적으로 싸우는 이수현을 지켜보았다.
그의 움직임은 조금도 둔해지지 않았고, 칼끝 역시 무뎌지지 않았다.
[체내의 오염 물질을 자동으로 세탁했습니다.] [해당 물질에 내성이 추가됩니다.]‘수현 씨한테 나가의 독이 안 듣는 건가?’
그녀는 그의 비밀을 어렴풋이 간파했다.
굳이 혼자 보스를 상대하겠다고 한 것도 좀 이상했는데.
독에 대한 대비책까지 마련해 왔을 줄이야. 어디서 아티펙트라도 챙겨 온 걸까.
“…커헉!”
다르간은 피를 질질 흘리며 뒷걸음질 쳤다.
이수현은 악착같이 버티며 상대에게 검을 쑤셨다.
그 집요한 모습은 검귀 한철용과 판박이였다.
“흐아압!”
서걱-!
이수현은 기합과 함께 상대의 한쪽 팔을 썰었다.
기세가 꺾이고, 겁에 질린 다르간은 이제 나가의 전사가 아니었다.
그저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뱀이나 진배없었다.
“끄아아악!”
다르간은 장기전으로 싸워 본 적이 거의 없었다.
반면에 이수현은 독에 중독될 기미조차 안 보인다.
놈이 중독될 거라 믿고 마구 날뛰었던 다르간은 제풀에 지쳐, 팔까지 날려 먹었다.
그게 패착이었다.
콰직!
이수현은 지친 얼굴로 다르간의 가슴팍을 짓밟았다. 그리곤 숨겨 왔던 비밀을 밝혔다.
“어째서 멀쩡한 거냐! 분명 독을 주입했는데…….”
“독은 안 통한다니까. 몇 번을 말해?”
“말도 안 돼!”
그러자 녀석이 버둥대며 눈물을 질질 짰다. 억울함이 가득 담긴 눈동자로, 그토록 무시했던 인간 이수현을 올려다본다.
“사, 살려다오! 나, 날 죽이면 분명 후회할 거다! 뱀 군주님께서 반드시 너를……!”
“후회는 뭔 후회. 빨리 뒈져.”
푹!
이수현은 드디어 나가의 비늘을 뚫고 칼날을 쑤셔 넣었다.
파지직!
고압 전류가 흐르자 놈은 비명도 못 지르고 바싹 타 버렸다.
다르간의 패배에 나가들은 울음소릴 내며 땅속으로 숨었다. 그들은 허둥지둥 밀림으로 도망쳤다.
“진짜 해치웠어!”
“혼자 보스를 잡다니…….”
털썩!
이수현도 탈진한 얼굴로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의 상태도 썩 좋지 않았다.
자세히 보면 몸 군데군데가 창날에 찢겨서 너덜너덜했다.
빨리 포션으로 치료하지 않으면 흉터로 남을 거다.
나예린과 서민아는 쓰러진 그에게 급히 달려왔다.
“수현 씨, 괜찮아요?”
“독은요? 해독제 먹어야 하는 거 아녜요?”
“해독제는 괜찮아요. 대신 상처에다 포션 좀 뿌려 줘요. 아으, 쓰라려.”
이수현은 그녀들에게 부축을 받으며 버스로 옮겨졌다.
혼자서 보스를 상대하니 죽을 맛이었다.
그래도 수확은 있었다.
창을 휘두르는 상대에게 어찌 맞서야 할지 감이 좀 잡혔다.
나예린과 서민아는 이수현의 뺨에 회복 포션을 덕지덕지 발라 줬다.
그녀들은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런데 나가의 독은 어떻게 견딘 거예요?”
“그건 나중에 설명할게요. 그보다 2팀 팀장은요?”
나예린은 그의 상처가 아무는 걸 꼼꼼히 확인하고 나서, 궁금한 걸 질문했다.
이수현은 주변에 사람도 많아서 말해 주기 껄끄러웠다.
그래서 박원기 팀장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상태가 많이 안 좋아요. 소화액에 섞인 독이 전신에 퍼져서 혼수상태예요.”
“그래요?”
“얼마 못 버틸 것 같아요. 그나마 팀장급이니 아직도 숨은 붙어 있는 거죠.”
나예린은 애도를 표했다.
비록 이수현과 다른 헌터들을 미끼로 던지고 도망친 쓰레기지만.
죽은 자에게 죄를 물을 순 없었으니까.
몸이 얼추 회복된 이수현이 버스에 올라탔다. 내부는 이미 초상집 분위기였다.
“박 팀장님…….”
“끄윽, 흐윽…….”
죽어 가는 박 팀장 때문에 서럽게 우는 팀원들도 보인다.
아무리 자기들을 버리고 도망쳤어도, 몇 년을 함께해 온 동료다.
그런 박원기가 입에 게거품을 물고, 부들부들 떨어 댔다. 그의 죽음이 임박했다.
독은 퍼질 대로 퍼져서 챙겨 온 해독제로도 별 차도가 없었다.
“다들 비켜 봐요.”
이수현은 클리닝 방망이를 소환하고서 박원기 앞에 섰다.
그러자 질질 짜던 헌터들이 울음을 뚝 그쳤다.
“이수현 헌터님, 그걸로 저희 팀장님을 살릴 수 있습니까?”
“네. 몸이 망가진 건 저도 어쩔 수 없지만, 해독은 가능해요.”
‘살려는 드릴게. 평생 휠체어 신세겠지만.’
이수현의 눈에는 박원기의 전신에 퍼진 독기가 잘 보였다.
그는 빨랫감의 오염 물질을 제거하듯 힘껏 두들겼다.
그러자 체내에 쌓인 독기가 점차 흩어진다.
“…쿨럭, 웩!”
박원기가 거무죽죽한 피를 토했다.
그래도 이수현은 방망이질을 멈추지 않았다. 아직도 체내에 독이 쌓여 있으니까.
오염 물질을 다 제거할 때까진 한순간도 안심할 수 없다.
퍼억! 퍽!
신명 나게 쳐대자, 박원기가 그만하라며 꽥꽥 소릴 질렀다.
“반항 못 하게 꽉 눌러요!”
“예, 옙!”
“끄악!? 그만 때려! 이거 놓으라고, 이 미친 새끼들아!”
“박 팀장님, 좀 가만히 있어요!”
“아파도 좀 참으세요. 일단 살고 봐야죠!”
“꾸에엑!”
‘역사적으로도 이게 약이었지.’
이수현은 돼지를 때려잡듯 방망이질을 해 댔다.
그러자 박원기의 몸에서 놀라운 변화가 생겼다.
다 죽어 가던 얼굴에 생기가 돌아왔다.
나예린과 서민아는 멍하니 그걸 바라봤다.
파지직!
마무리로 이수현은 박원기의 목덜미를 힘껏 쳐서 기절시켰다.
‘나도 받은 게 있으니 전기 충격으로 갚아 줄게.’
그는 힘든 수술을 끝마친 의사처럼 경건하게 말했다.
“오염 제거 끝.”
* * *
박원기 팀장은 이수현 덕분에 목숨만 겨우 건졌다.
하지만 이수현과 다른 헌터들을 버리고 도망친 죗값을 톡톡히 받게 됐다.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된 검귀 한철용이 크게 노해서 바로 징계 위원회가 소집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박원기는 독의 후유증 때문에 몸이 심하게 망가졌다고 한다.
즉, 헌터로서의 인생도 함께 끝장난 셈. 다 인과응보였다.
“자, 우선 칼부터 잡아 보실까요?”
“예.”
이수현은 검 대신 부엌용 식칼을 손에 들었다.
협회가 어렵게 모셔온 요리 전문가가 이수현을 가르쳤다.
팀을 위해 요리를 배우고 싶다던 서민아도 함께였다.
“아얏!”
“서민아 헌터님, 칼질할 땐 꼭 집중하세요.”
“힝, 죄송해요…….”
서민아는 서투른 칼질에 손가락을 베고 말았다.
그녀는 자기 손가락을 쪽쪽 빨며 피를 삼켰다.
가르치던 요리 전문가가 그녀에게 꾸중을 줬다.
서걱!
탁탁탁.
반면에 이수현은 능숙하게 칼질을 이어 갔다.
칼질만 잘하는 게 아니었다.
잘게 썬 재료를 섬세히 다듬고, 불에다 볶는 손놀림까지.
전문가가 봐도 군더더기 없는 수준이었다.
“정말 능숙하시네요. 평소에 집에서 요리하는 걸 즐겨 하셨나 봐요?”
“아뇨, 꼭 그렇진 않은데…….”
“겸손하셔라. 헌터분들이 평범한 조리 자격증을 딴다길래 좀 의아했는데……. 이 실력이면 이수현 헌터님은 금방 따겠어요. 서민아 헌터님은 좀 더 분발해 주시고.”
“네…….”
서민아는 마지막 말에 힘없이 대답했다.
이수현은 평범한 조리 자격증이란 말에 궁금증이 들었다.
“평범한 조리 자격증이라뇨? 뭐 특별한 게 따로 있나요?”
“그럼요. 몇 년 전부터 유행했잖아요?”
“몇 년 전이라면…….”
그가 따려고 한 건 한식, 중식, 일식, 복어 기능사다.
그거 말고 다른 조리 자격증이 더 있었던가?
서민아는 손을 번쩍 들며 이수현 대신 대답했다.
“몬스터 조리 기능사 맞죠?”
“네, 맞아요.”
“…몬스터를 조리한다고요?”
“너튜브에도 관련 영상이 활발히 올라와요.”
던전에 고립됐을 때, 식량이 다 떨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럴 때를 대비해 공략대는 사냥한 몬스터를 도축해 요리를 만든다.
“몬스터 사냥은 헌터들의 전유물이지만, 식재료는 아니잖아요? 지금도 요리 연구는 꾸준히 진행되고 있어요.”
전문가의 말로는 다른 자격증보다 따긴 어렵지만, 취득해 두면 분명 도움이 될 거란다.
이수현은 절로 관심이 생겼다.
“취득하기 힘든 이유는 뭔가요?”
“일단 조리법이 까다로워요. 게다가 평범하게 조리하면 맛이 별로인 경우가 많거든요. 종종 별미가 탄생하니, 그게 또 매력이죠.”
그래서 전문 셰프들도 제각기 조리법을 고민한다고 한다.
이수현은 고갤 끄덕이며 생각했다.
‘따기 어려우면 스킬 효과도 괜찮겠지? 나중에 기회 되면 전문가한테 배워 둬야지.’
일단 다른 조리 기능사부터 싹 따 두자.
요리의 목적은 하나로 귀결된다. 보다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것.
몬스터 조리 기능사도 별다를 게 없을 터.
‘그걸 따려면 일단 기본기부터 착실히 다져 둬야지.’
이수현은 전문가의 세세한 동작을 놓치지 않고, 쭉쭉 빨아먹었다.
태어나 요리라곤 한 번도 안 해 본 남자가 무서운 속도로 성장해 갔다.
전문가는 기본기를 배우는 데 최소 몇 달은 고려했지만, 그는 한 달 안으로 끝낼 셈이었다.
이론보다 실전에 강한 헌터. 그게 이수현이었다.
* * *
[일주일 전, 부산시 해운대 근처 바닷가에서 다수의 머맨이 출몰했던 사건 기억하시나요? 협회 소속의 헌터들이 발 빠르게 대응해 잘 수습했었죠.]뉴스에서 해운대 머맨 출몰 사건을 다시금 다뤘다.
아나운서는 바닷속 차원 게이트의 완전 소멸을 확인했고, 해운대 인근의 봉쇄령이 해제됐음을 알렸다.
[평소 활약이 부진했던 협회에 대한 인식도 차츰 개선될 것으로 전망됩니다.]우리의 활약 덕분에 협회도 어깨에 힘 좀 넣을 수 있었다.
우웅!
내게 7팀을 추천해 줬던 유근혁 교관. 그에게서 몇 주 만에 연락이 왔다.
그는 내가 한동안 잊고 지냈었던 사안을 꺼냈다.
“초신성 라디오요?”
[예, 저번에 약속드렸던 특제 차량도 완성됐거든요. 수현 씨의 능력을 방송에서 맘껏 보여 주시죠.]그러고 보니 저번에 토크 쇼 촬영을 권유받았었지.
타이탄을 코팅해서 만든 차량도 무상으로 제공해 준다 했었고.
드디어 내 전용 무기가 완성됐구나.
[아, 그리고 이번에 방송사에서 모시고 싶은 게스트가 세 분이거든요?]“네? 보통은 신인 헌터 한 명이지 않나요? 많아야 두 명이고…….”
“나 팀장님을요?”
그녀 성격상 방송 출현은 썩 내켜 하지 않을 텐데.
돈에 별 욕심도 없으니 출연료를 얼마나 챙겨 주든 싫다고 거절하겠지.
[뭐, 본인이 거절하면 어쩔 수 없죠. 현장이 어땠는지 간단하게 물어만 보는 정도라니까, 부담 가지실 필요는 없다고만 대신 전해 주세요.]“제가요? 본인이 전화하시면 되죠.”
[쩝. 나예린 팀장은 절 별로 안 좋아하더라고요. 아예 수신 거부를 해 뒀던데.]“저런.”
이번 토크 쇼의 주역은 이수현과 다른 신입 헌터 한 명.
거기에 나예린까지 고려하면 총 셋이었다.
나예린은 간단한 문답 몇 개만 해 주면 된다.
유근혁 교관은 그렇게 말하며 내게 섭외를 부탁했다.
“알았어요. 일단 얘기는 꺼내 볼게요.”
“오늘 제가 오후쯤에 찾으러 갈게요.”
[네.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방송 진행 대본이랑 다른 게스트 분의 정보도 메일로 발송해 드릴게요.]“예, 수고하십쇼.”
그와 통화를 끝낸 뒤, 나는 고민에 잠겼다.
대중들에게 알려진 나예린의 이미지는 그야말로 재수 없는 천재.
그것부터 타파하지 않으면 7팀은 더 위로 도약할 수 없다.
‘7팀이 협회에서 최고여야 어머니도 안심하시겠지.’
남자가 그만한 포부도 없으면 쓰겠나.
나는 주머니를 뒤적여 저번에 얻은 아이템을 꺼냈다.
인어를 해치우고 습득한 은색 목걸이.
‘분석.’
– 심해 군주가 자신의 하수인에게 직접 하사한 아티펙트. 공격보단 방어에 특화된 마법이 내장되어 있음.
– 착용 시 물의 구체를 생성할 수 있다.
– 물에 대한 친화력이 대폭 상승한다.
– 여성만 착용할 수 있음.
‘쩝. 아깝네.’
다 좋은데 마지막 설명에서 아웃이었다.
이 목걸이는 여성만 사용할 수 있다.
즉, 내가 갖고 있어 봤자 그냥 장신구일 뿐.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그럼 쓸 사람은 나예린 아니면 서민아인데…….”
“제가 왜요?”
“아, 선배. 마침 잘 왔어요. 이리 앉아 봐요.”
“……?”
마침 나예린이 타이밍 좋게 단련실로 들어왔다.
그녀는 내 손짓에 쪼르르 달려왔다.
내가 들고 있는 목걸이를 보더니, 대번에 알아봤다.
“그거 인어가 갖고 있던 목걸이죠? 용케도 챙겼네요.”
“제가 눈썰미는 좋잖아요.”
사실 눈썰미가 아니라 정보 분석 스킬 덕분이었지만.
나는 그녀에게 잠시 뒤돌아보라고 했다.
그녀는 순순히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줬다.
목걸이를 걸어 주자, 나예린은 날 부담스럽게 쳐다봤다.
“어때요. 맘에 들어요?”
“이건 수현 씨가 보스를 잡아서 얻은 거잖아요. 왜 저한테…….”
평범한 목걸이도 아니고 마법이 내장된 아티펙트다.
그걸 대뜸 넘기다니… 누구라도 부담스럽겠지.
“제가 목에다 걸려 하니까 튕겨 나오더라고요. 남자는 못 쓰나 봐요.”
“그럼 경매장에 그냥 팔아요. 얼마나 할진 몰라도 아티펙트는 대부분 고가에 거래되니까.”
“됐어요. 그냥 선배가 가져요.”
“…고마워요. 소중히 잘 간직할게요.”
나예린은 선물 받은 목걸이를 조심스레 매만졌다.
능력 테스트를 위해 그녀는 인어가 했었던 것처럼 앞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녀의 뜻대로 물의 구체가 허공에 생겼다.
“음. 하나밖에 안 나오네요. 인어는 대여섯 개나 만들던데.”
“처음이라 그런 거겠죠. 그리고 물의 마력은 저도 처음 다뤄 봐서요.”
나예린은 새로 얻은 능력을 분석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구체는 그녀의 손짓과 시선이 닿는 곳까지 자유롭게 움직였다.
“그거 공격보단 방어에 좋을 것 같아요.”
“네?”
난 확신을 품고 말했다. 상태창에 그렇게 쓰여 있었으니까.
내가 검을 꺼내니 그녀도 물의 구체를 앞으로 이동시켰다.
쭈욱! 투웅-!
검을 내리긋자, 구체는 고무처럼 쭉 늘어나더니 반탄력으로 날붙이를 튕겨 냈다.
그 탓에 난 몇 걸음 뒤로 밀려났다.
“이런 식으로도 응용할 수 있겠네요.”
“어떻게요?”
파지직!
나예린은 자신의 뇌기를 구체에 담았다.
그러자 전류를 머금은 물의 구체가 완성됐다.
나예린은 구체의 형태를 타원으로. 또 타원에서 기다란 뱀처럼 바꾸었다.
‘진짜 마력 컨트롤 재능만큼은 말도 안 되네.’
오늘 처음 다루는 물의 마력도 저렇게 잘 응용하다니.
저런 게 진짜 악마의 재능이지.
전류를 머금은 구체는 공격용으로도 충분히 쓸 만해 보인다.
나예린은 들뜬 얼굴로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을 점쳤다.
“연습해서 구체의 개수를 더 늘릴 수 있으면…….”
“그런데 선배, 뭔가 좀 이상하지 않아요?”
“뭐가요?”
나예린은 아직 눈치채지 못했구나.
나는 설명문에 나온 물의 친화력이 대체 뭘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방금 테스트로 대충 감이 왔다.
“선배, 물 공포증이 없어진 것 같은데요.”
“……!”
내 지적에 나예린의 눈이 살짝 커졌다.
원래 그녀는 물을 보면 고양이처럼 몸이 멋대로 굳었다.
적은 양이면 괜찮지만, 사람 수준의 크기라면 얘기가 다르지.
하지만 방금 그녀가 테스트할 때, 그런 기미는 전혀 안 보였다.
“그 목걸이 벗어 볼래요?”
“…네.”
나예린이 스스로 목걸이를 벗었다.
그러자 바로 변화가 일었다.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물의 구체가 그녀의 얼굴을 비춘다.
그 표정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녀는 다시 목걸이를 끼면서 말했다.
“…정말 목걸이 덕분이었네요.”
“바다는 괜찮았으면서, 이건 보는 것도 못 견디겠어요?”
“바다는 제가 안 다가가면 되니까요. 하지만 이건 멋대로 움직이니까…….”
바닷물과 달리 물의 구체는 자유자재로 움직인다.
요컨대 자기 몸에 닿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관건이겠지.
나는 대강 이해했다.
저 목걸이만 있으면 그녀는 물 공포증도 이겨 낼 수 있을 터.
‘이건 꼭 나예린이 가져야겠네.’
“잘됐네요. 그 목걸이 선배한테 잘 어울려요.”
“…잘 어울려요?”
나예린은 고갤 픽 숙이고 자기 머리카락을 배배 꼬았다.
이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녀를 섭외할 차례다.
나는 유근혁 교관에게 부탁받은 걸 찬찬히 말했다.
“초신성 라디오? 거기 나가시게요?”
“네. 저번에 해운대 사건 인터뷰 관련해서 선배도 같이 와 주길 원하더라고요.”
“죄송하지만 그런 자린 별로 안 내켜서…….”
“전 이게 선배의 오명을 씻어 낼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요.”
“기회요?”
초신성 라디오는 나예린의 이미지를 대차게 말아먹은 원인 중 하나였다.
그땐 그녀도 한창 어머니의 병세로 많이 시달릴 때였으니.
‘제대로 된 답변을 하기 어려웠겠지.’
“지금은 상황이 다르잖아요? 선배도 이제 여유가 생겼으니 대중한테 좋은 이미지를 심어 줄 기회예요.”
“그건 그렇지만…….”
“자신감을 가져요. 누가 뭐래도 선배는 7팀의 팀장이니까.”
내 설득에 그녀도 조금씩 마음이 흔들렸다.
결국, 그녀는 고갤 끄덕였다. 토크 쇼에 함께 나가 주겠다고 답했다.
난 막 메일로 받은 방송 관련 정보를 프린트로 출력했다.
“여기 대본이랑 다른 게스트의 프로필이에요.”
“다른 게스트라뇨?”
나예린은 아까의 나처럼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다른 게스트의 프로필을 살펴보더니,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뭔가 좀 싸한데.
“왜 그래요. 뭐 문제 있어요?”
“아뇨. 악연이란 건 참 지독하구나 싶어서요.”
“악연? 설마 아는 사람이에요?”
“…저랑 정말로 친했던 친구예요.”
“친구?”
나예린은 말을 아꼈다.
자기 입으론 더 말하기 싫다는 표정이라 더 캐묻지도 못했다.
난 게스트의 프로필을 찬찬히 살폈다.
이름 정민정. 현 7급 헌터.
나이는 열아홉으로 나예린과 같았다.
‘친구라고 했으니 같은 고등학교 출신인가?’
저 어두운 표정을 보니 지금은 사이가 좋지 못한 모양이다.
나는 그녀한테 조심스레 말했다.
“저, 선배. 껄끄러우면 그냥 안 나와도 돼요.”
“아뇨, 수현 씨 말이 맞아요.”
“네?”
“팀장의 이미지는 곧 팀의 이미지예요. 저번에 만난 태산 그룹의 주원석 팀장, 기억나요?”
당연히 기억난다.
규모가 큰 길드의 팀장치곤 보기 드물게 성격이 괜찮았지.
박동원한테 따로 보복하지 않은 것도 그 사람이 진심을 담아 사과했었기 때문이다.
“전 그때 다시금 느꼈어요. 팀의 이미지는 팀장이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걸.”
그러니 나예린은 기회에서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
악연이라고 마냥 피했다간 7팀의 이미지만 나빠질 터.
이번 기회에 자신의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바꿔 보겠다.
“토크 쇼에 참여하겠다고 전해 주세요.”
* * *
“이번에 나예린 팀장이 나온다고요?”
“네, 좀 의외네요. 당연히 안 나올 줄 알았는데.”
“…하, 짜증 나네.”
“네?”
“아무것도 아녜요. 알려 줘서 고맙습니다.”
“네, 그럼 푹 쉬세요. 오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남자가 문을 닫고 개인실에서 나갔다.
정민정 헌터는 매니저에게 다음 일정을 전해 들었다.
나예린이 그녀랑 같은 토크 쇼의 게스트로 참가한다니.
정민정은 그녀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가 으드득 갈렸다.
“너만 거기 없었으면 됐는데…….”
청소년 국가대표가 되기 위해 고된 합숙 훈련을 하며, 그녀들은 선의의 경쟁을 펼쳤다.
둘은 정말 사이가 좋았다. 그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는.
‘너 때문에 난 꿈을 접었어.’
그녀는 종종 생각하곤 했다.
나예린만 없었으면 능력을 각성하지 않았을 텐데.
그랬으면 훗날 올림픽도 노릴 수 있었을 거다.
“세계 무대에 서는 게 내 모든 거였는데. 전부 너 때문에 망쳤어, 나예린…….”
정민정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깐의 신호음이 가더니, 중년의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생긋 웃으며 인사말과 함께 용건을 꺼냈다.
[아, 민정 씨! 무슨 일인가요?]“네, 서 국장님. 실은 제가 이번에 나가는 토크 쇼 있잖아요.”
[네. 소식 들었습니다. 요즘 방송 일정 너무 많으신 거 아닌가요. 혹여 몸이 상할까 걱정되네요.]“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런데 거기 PD한테 요구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어떤 겁니까?]“나예린 헌터가 게스트로 나오기로 했는데, 저랑 인연이 좀 있거든요.”
[나예린 헌터랑 아는 사입니까?]그녀의 전화를 받은 건 초신성 라디오를 편성한 방송국 국장이었다.
정민정은 헌터 일만 하는 게 아니라, 각종 예능과 화장품 광고 모델로 맹활약 중이었다.
오죽하면 헌터보다 연예인으로 더 성공하는 거 아니냐고 하겠는가.
타고난 미모와 사근사근한 목소리.
그녀는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덕분에 모 방송국의 서 국장과도 친밀한 관계가 됐다.
[아, 나예린 헌터가 양궁 선수 훈련생이었다고요?]“네, 그래서 말인데요. 세트장에서 저랑 소소한 대결을 해 보고 싶은데…….”
[대결이라니, 설마…….]“아이, 참. 치고받고 싸운다는 게 아니라, 양궁 대결로 점수 내기를 하고 싶단 뜻이었어요.”
[아,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지원해 드려야죠.]정민정은 나예린과 양궁으로 승부를 내고 싶었다.
그녀는 끝내 헌터가 됐지만, 아직 마음속엔 그때의 미련이 멍에처럼 남아 있었다.
“감사해요. 그럼 서 국장님만 믿고, PD한테 대본 수정해 달라 말할게요.”
[하하, 그럼요. 이번 방송도 잘 부탁드립니다.]서 국장은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실제로 그녀는 여러 예능 방송에서 많은 두각을 보였다.
PD들이 입을 모아 시청률의 여신이라고 부를 정도였으니 말 다 했지.
‘나예린, 그때 못다 한 승부를 내자.’
정민정은 정보를 살피다, 다른 게스트의 프로필을 발견했다.
“이수현? 신입인데 8급이네.”
좀 신경 쓰이지만 뭐 괜찮겠지.
8급이라고 해 봤자 막 각성한 신입 헌터니까.
그녀의 목표는 나예린을 뛰어넘는 거다.
이수현이 뭐 하는 놈인지는 관심 없었다.
* * *
방송국장의 지시가 떨어졌다.
그 탓에 PD는 부하 직원들과 함께 머릴 맞대고서 대본을 수정했다.
‘정말 이대로 진행해도 될까?’
PD는 쭉 검토하며 한숨을 쉬었다.
수정한 대본에는 정민정 헌터의 사심이 담겨 있었으니까.
그녀는 나예린에게 악감정을 가진 모양이다.
사실 여기 스태프들도 나예린의 출현을 반기진 않았다.
지난 방송에서 그녀에 대한 평가가 워낙 안 좋았으니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지.
“PD님, 수정된 대본 말인데요. 나예린 헌터한테는 좀 민감한 질문 아닙니까?”
“그렇겠지. 둘이 사이가 안 좋은 것 같더라.”
“이러다 저번처럼 방송 망하면…….”
“잘 받아넘겨 주길 빌어야지.”
국가 대표를 꿈꿨던 양궁 꿈나무들.
원래 스포츠란 게 다 그렇다.
경쟁심이 없으면 자연히 도태되고 밀려난다.
그래서 어른들은 후보생들이 의도적으로 경쟁하도록 분위기를 조장했다.
정민정이 나예린과의 양궁 대결을 요청한 것도 그런 이유겠지.
아직 그녀의 마음속에 집착과 미련이 남은 거다.
‘일부러 나예린의 화를 돋워서, 이미지를 실추하려는 거겠지. 민정 씨, 어리지만 참 영악해.’
미성년자의 머릿속에서 나왔다고는 믿기 힘든 지저분한 술책이다.
심지어 문제가 생겨도 정민정은 혼자 유유히 빠져나갈 구멍도 있다.
어디까지나 질문은 토크 쇼 진행자가 하니까.
“…일단 이대로 진행해. 국장님 지시니까, 편집할 때 싹 다 모여서 대책을 짜든가 하자.”
“예, PD님.”
* * *
내가 살다 살다 방송국 본부에 올 줄이야.
나는 협회에서 받은 특제 차량을 몰고 지하 주차장에 들어갔다.
보기만 해도 든든한 SUV 형태의 타이탄 차량.
SUV는 트럭처럼 무게감이 있고, 승용차의 편의성을 더했다.
게다가 이 차는 내 명의로 되어 있어, 귀속 무기로 취급된다.
‘차를 사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었네.’
[해당 무기는 당신에게 귀속되어 있습니다.] [귀속 무기는 내구도가 다해도 소멸되지 않으며, 하루마다 내구도가 최대치로 복구됩니다.] [해당 무기는 한 번이라도 탑승해 본 적 있는 차량으로 형태 전환이 가능합니다.]마지막 능력이 귀속 무기의 핵심이었다.
내가 타 본 적 있는 차량 한정으로 형태를 맘껏 바꿀 수 있다.
게다가 타이탄의 내구성까지 그대로 가져오니 일반 차량보다 내구성도 뛰어나다.
나중에 기회 되면 공사장에 들러야겠어. 이것저것 운전해 둬야지.
“도착했어요, 선배.”
“…네.”
조수석의 나예린은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정민정 헌터 때문이겠지.
과거에 그녀랑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난 잘 모른다.
‘나예린이 이렇게 신경 쓴다는 건…….’
그녀가 정민정에게 뭔가 피해를 줬을지도 모른다.
그게 의도적이었든 아니든 간에.
나예린의 성격이면 혼자 끙끙 앓고도 남는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고 싶었지만, 난 꾹 참았다.
주차를 마치고 우리가 차에서 내렸을 때,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어머, 벌써 오셨네요. 나예린 팀장님?”
“…민정아.”
“저기, 죄송한데. 친한 척 이름으로 부르지 말아 줄래요?”
“…….”
프로필에서 봤던 게스트, 정민정이었다.
그녀는 표독스럽게 쳐다보며 불쾌감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그러자 나예린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가 기싸움에서 밀리다니.
‘성깔도 좀 있고, 못되게 생겼네.’
정민정의 첫인상은 되게 강렬했다.
불여우 같다고나 할까.
나는 애써 웃으며 먼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이수현이라고 합니다.”
“아, 네. 정민정이라고 해요. 이수현 헌터, 만나서 반가워요.”
그녀는 표정을 싹 바꾸고 내 인사를 웃으며 받아 줬다.
방금까지만 해도 경멸하던 눈으로 나예린을 쳐다보더니.
이 정도면 헌터가 아니라 거의 연기자 수준인데.
“나예린 팀장님 밑에서 고생이 참 많으시겠어요.”
“고생이라뇨?”
“소문이 자자하던데. 독선적이고 자기가 제일 잘난 줄 안다고…….”
“아뇨, 그건 헛소문입니다.”
“…네?”
내 반박에 그녀의 눈꼬리가 살짝 떨렸다.
나예린이 그러지 말라며 내 팔을 잡아당겼지만, 아닌 건 아니라고 딱 말해야지.
“어떤 교관이 악의적으로 소문을 퍼트린 겁니다. 실제론 훌륭하신 팀장이죠.”
“…흠, 그래요?”
정민정은 나예린을 쓱 훑어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녀는 내 말을 전혀 안 믿는 눈치였다. 딱 보면 알 수 있다.
부하가 상사의 허물을 덮어 주려 하는 거라고… 그렇게 받아들인 거겠지.
“충직한 팀원이 생겨서 참 좋으시겠네요, 나예린 팀장님.”
“이봐요.”
“수현 씨, 이제 됐어요. 그냥 가요.”
나예린은 내 팔을 억지로 잡아당기며 자리를 피했다.
그녀도 며칠간 나름의 각오를 다졌을 텐데.
대체 무슨 잘못을 했길래 잠자코 있는 걸까.
‘보는 내가 다 열받네.’
물론 내가 오지랖이 심한 걸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녀가 무시당하는 걸 보고 있으니 속에서 화가 들끓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문이 완전히 닫히자 바로 질문했다.
“선배. 저 사람이랑 뭔 일이 있었는지 알려 주세요.”
“…네?”
“저렇게 대놓고 무시하는데. 선배는 왜 한마디도 못 따지냐고요.”
“…….”
나예린은 묵묵부답이었다.
자기 입으로 말하기가 껄끄러운 모양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강수를 뒀다. 그러자 그녀의 표정이 확 변했다.
“선배가 말 안 하면, 토크 쇼 진행할 때 그 사람한테 확 물어볼 겁니다. 그래도 괜찮아요?”
“왜 궁금해하는 건데요?”
“그야 선배를 도와주고 싶어서죠.”
“…알았어요. 다 말할 테니까 민정이한텐 묻지 말아 줘요.”
그녀는 포기한 눈으로 내게 지난 일을 털어놨다.
나예린의 입에서 처음 듣는 단어가 나왔다.
“마력 공명이요?”
“네. 아주 희소한 경우라 잘 모를 거예요.”
마력 공명.
예를 들어서 A라는 능력자와 B라는 잠재적 능력자가 있다고 치자.
“마력에도 궁합이 있어요. A가 보유한 마력이 일반인 B에게 큰 영향을 준다고 쳐 봅시다. 그럼 어떻게 될까요?”
“마력 공명이란 게 발생하나요?”
“네, 마력 공명은 각성의 계기가 될 수 있어요. 그러면 B도 A처럼 돌연 능력자가 되는 거죠.”
처음 듣는 얘기였다.
마력에도 궁합이 있고, 그게 잘 맞으면 공명한다.
그렇게 되면 마력의 흐름이 점차 활발해지고, 갑자기 능력을 각성할 수도 있다는 것.
“설마…….”
“네, 저희 둘은 마력 공명 때문에 각성했어요. 물론 그땐 저희 둘 다 각성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나예린은 국가 대표가 되기 위해 다른 훈련생들과 합숙 훈련을 했다.
거기엔 정민정도 있었다.
1등을 쭉 유지하던 나예린은 훈련생 무리에게 심한 따돌림을 당했다.
그런 그녀에게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 준 게 정민정이었다.
둘은 점차 친해졌다.
“하필이면 서로의 마력이 각성의 촉매제가 됐어요. 합숙을 하고서 몇 달 뒤, 마지막 선별 과정에서 사건이 터졌죠.”
나예린의 화살엔 뇌기, 정민정의 화살은 돌풍을 만들었다.
두 사람은 최종 선별 시험 도중에 능력자로 각성했다.
둘은 진실을 알고 나서 깊이 절망했다.
소중한 친구가 자신의 꿈을 산산조각 낸 셈이었으니까.
“민정이는 어릴 때부터 양궁을 배웠어요. 어머님이 국가 대표셨거든요. 금메달까지 따셨을 정도로 대단하신 분이죠.”
정민정은 늘 입버릇처럼 말했다.
나도 어머니처럼 국가 대표가 되고 싶다.
그녀의 성장에 집안에서도 큰 기대를 품었다.
정민정은 본의 아니게 그걸 저버린 셈이다.
“하지만 고의가 아니었잖아요. 서로 똑같은 피해잔데. 왜 선배는 찍소리도 못 하는 건데요?”
“…제가 힘들 때 가장 먼저 도와준 소중한 친구예요. 그런 애를 탓하는 건 도저히 못 하겠어요.”
나예린은 훈련생들 주변에서 늘 겉돌았다.
남들과는 재능부터 달랐으니까.
다른 훈련생들은 질투와 시기심에 그녀를 따돌렸다.
그런 그녀에게 먼저 손을 내민 게 정민정이었다.
그녀를 도와준 유일한 친구가 지금은 자길 원망하고 있다. 그녀는 그게 괴로웠다.
“제가 거기 없었으면 민정이는 분명 국가 대표가 됐을 거예요. 꿈을 이뤘을 거라고요.”
“좀 답답하네요.”
“…답답하다고요?”
“꿈을 못 이룬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선배 혼자만 죄책감에 몸서리치는 거, 솔직히 호구 같아요.”
내 직설적인 말에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당장이라도 반박하고 싶지만, 감정싸움으로 치달을까 봐 망설이는 게 보인다.
“딱 보니까 저쪽은 선배 탓만 하는 것 같던데.”
“…….”
“그 사람, 선배한테 사과 한 번 안 했죠?”
“…네.”
나예린 역시 그녀 때문에 능력을 각성했고, 꿈을 포기했다.
서로가 피해자인데 한쪽에게만 책임을 씌우는 게 웃긴 상황이다.
“전 어머니의 치료 때문에라도 언젠가 각성했어야만 했죠. 그러니 전 어차피 꿈을 이룰 수 없었어요.”
“그렇다고 해서 선배가 무시당해도 된다는 건 아니죠.”
띠잉-!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나는 하던 얘길 멈추고 나예린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녀는 흠칫 놀라며 날 바라보았다.
“과거에 너무 시달리지 말아요. 선배가 여기 온 건 사람들 목숨을 구했기 때문이지, 사과하러 온 거 아니잖아요? 허리는 당당히 펴고, 좀 뻔뻔해져도 돼요.”
“고마워요.”
나예린은 내 말에 피식 웃으며 긴장을 풀었다.
* * *
“만나서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협회 7팀의 나예린 팀장입니다.”
“신입 헌터, 이수현입니다.”
“정민정입니다. 저까지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게스트로 초대된 헌터만 세 명.
정신이 없을 법도 한데, 토크 쇼 진행자는 능숙하게 대화를 이어 갔다.
내심 걱정했던 나예린도 호응을 잘해 줬기에 수월했다.
진행자는 나예린한테 농담조로 말을 걸어 봤다.
“작년에 오셨을 때보다 표정이 훨씬 밝아지셨는데, 최근에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음, 훌륭한 팀원들을 만난 덕분이죠. 부족했던 제게 과분한 분들이었어요.”
“아직 어린 나이신데, 팀장의 책무가 무겁지는 않으세요?”
진행자는 나예린을 보며 어린 나이를 딱 꼬집어 말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정민정이 속으로 비웃었다.
‘좋아, 내가 말한 대로 잘하네.’
나예린이 가장 싫어하는 게 나이로 무시당하는 거다.
물론 진행자는 완곡하게 표현했지만, 그녀가 알던 나예린이면 그냥 넘어가진 않을 터.
‘후후, 빨리 평소처럼 짜증이나 팍팍 부려. 사람들한테 비호감으로 낙인찍히게.’
물론 편집자들의 손을 거치겠지만, 세상엔 악의적인 편집이란 게 존재한다.
나예린이 조금이라도 짜증이나 성질을 부리면 그걸 부풀려서 이미지를 추락시켜 주마.
그게 정민정의 속내였다.
“물론 되게 무겁죠. 사실 돌이켜 보면 전 준비도 안 됐는데, 덜컥 팀장 자릴 받아들였어요. 그땐 선택지가 없었거든요.”
“……?”
나예린은 짜증이나 불만 하나 없이 부드럽게 질문을 받았다.
‘어, 이러면 안 되는데?’
정민정은 속으로 당황했다.
나예린의 불같던 성격이 반년 사이에 많이 변했다.
“선택지가 없었다니, 무슨 사연인지 들어봐도 될까요?”
‘그래, 좀 더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어떻게든 화를 내게 만들어!’
정민정은 진행자를 속으로 응원했다.
나예린은 그녀의 기대와 다르게 덤덤히 사연을 말했다.
“제 어머니가 좀 편찮으세요. 엘릭서 치료가 아니면 도저히 못 버틸 만큼.”
“죄, 죄송합니다. 미처 몰랐던…….”
“괜찮습니다. 지금은 회복세에 접어들어서 많이 좋아지셨어요.”
나예린은 진행자를 보며 아예 눈웃음까지 지었다.
그러자 대본대로만 말하던 진행자가 헤벌쭉 웃었다.
정민정은 주먹을 꽉 쥐고 나예린을 흘겨봤다.
‘…저 여우같은 게, 어디서 같잖은 연기질이야?’
틀림없이 저건 연기다.
나예린이 못 본 새 아주 요물이 다 돼서 돌아왔다.
정민정은 진행자에게 슬쩍 눈치를 줬다.
그러자 그가 정신을 번쩍 차리고 다음 질문을 했다.
“그런데 나예린 팀장님, 미성년자는 원칙상 팀장이 될 수 없죠?”
“네.”
“그럼 지금 어머님께서 받으시는 엘릭서 치료, 엄연히 특혜 아닌가요? 여러 말이 나올 법도 한데…….”
“그거야 받을 능력이 되니까 받는 거죠.”
“네?”
잠자코 있던 이수현이 진행자의 말을 받아쳤다.
그러자 모두 당황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대본에 없던 그의 돌발 멘트.
이수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의견을 피력했다.
“저희 팀장님이 능력도 없는데 그런 특혜를 받았다면 문제가 됐겠죠. 하지만 이번 해운대 사건을 저희 7팀이 해결한 것도 그렇고, 충분히 팀장의 특혜를 받을 만하다 생각되는데요?”
“어, 그래도 이견 정도는…….”
“정말로 부당했으면 협회에서 벌써 조치했겠죠. 남들은 다 괜찮다고 하는데, 혼자만 아니라고 주장하면 그건 누가 잘못된 걸까요?”
이수현은 생긋 웃으며 짓궂게 말했다.
그러자 진행자는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화제를 돌렸다.
‘자기가 뭐라고 자꾸 훼방을 놔?’
정민정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사람은 끼리끼리 모여 논다더니. 둘 다 마음에 안 들었다.
“그럼 오늘의 게스트, 이수현 헌터의 능력을 구경하러 가 보죠. 정말 독특한 능력을 갖추셨다는데. 차로 몬스터를 들이받는다고요?”
“네, 샌드백용 몬스터도 준비했다고 들었는데…….”
“아, 샐러맨더 길드에서 몬스터를 지원해 줬거든요.”
진행자는 능력 테스트를 위해 야외 세트장으로 이동하자고 제안했다.
이수현은 어떤 몬스터가 나와도 밀어 버릴 자신이 있었다.
정민정은 속으로 그런 그를 비웃었다.
사실 샐러맨더 길드에 몬스터 대여를 부탁한 건 그녀였다.
‘신입 헌터 혼자 어떻게 해 볼 녀석이 아니거든… 어디 쪽 좀 당해 봐.’
미리 준비해 둔 야외 세트장.
그곳에 정장 차림의 젊은 남성이 와 있었다.
그는 이수현에게 다가오더니 밝게 웃으며 먼저 인사했다.
“이수현 헌터님 맞으시죠?”
“예, 맞는데 누구시죠?”
“드디어 뵙네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샐러맨더 길드의 임정식 팀장입니다.”
“임정식 팀장? 혹시 임정섭 학생의…….”
“네, 정섭이는 제 동생입니다.”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었다.
지난달에 실전 테스트를 치렀던 임정섭 수습 헌터.
그의 이목구비를 조목조목 살펴보니 둘은 많이 닮았다.
이수현은 떨떠름하게 웃으며 그를 쳐다봤다.
‘아, 맞다. 팀장급 헌터의 동생이라고 했었지? 어쩐지 장비가 좋더라니.’
“제 동생의 목숨을 구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누가 그러던가요?”
“동생한테 직접 들었습니다. 이수현 헌터님 덕분에 마음가짐부터 달라졌더군요.”
형의 후광에만 의존하려던 임정섭이 지금은 스스로 바뀌고자 노력한다.
실은 나태했던 동생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진지하게 임할 게 아니면 그냥 헌터 일을 하지 말았으면 했지만.
동생의 뜻이 완고했기에 좋은 장비를 지원하고 교관을 찾아가 인사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런데 이수현이 동생의 마인드를 바꿔 줬다.
“죽을 뻔하고 돌아오니, 철이 들었더군요.”
“그거 다행이네요.”
임정식 팀장이 호의적으로 나오자 이수현도 안심했다.
동생이 시험에서 떨어진 걸, 자기 탓으로 돌리면 어떻게 할까 고민했는데.
그럴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런데 저 몬스터들, 샐러맨더 길드에서 지원해 준 거죠?”
“네,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르니까요.”
“어떤 놈이 오늘의 샌드백인가요?”
“원하는 놈으로 골라 보세요.”
커다란 철창들이 무대 위에 놓여 있었다.
이수현은 거기서 가장 눈에 띄는 몬스터와 눈이 마주쳤다.
‘거북이를 닮았네?’
붉은 등껍질을 가진 몬스터였다.
거북이 혹은 자라를 연상시키는 머리.
덩치는 누워 있는데도 거의 3미터 정도는 되며 다리 근육이 크게 발달한 걸 봐선, 이족 보행도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저 붉은 거북이는…….”
“좀처럼 보기 드문 ‘레드 토터스’입니다. 평범한 토터스보다 덩치가 크고, 등껍질은 튼튼하죠. 공격성은 아주 낮지만, 그래도 4성급입니다.”
“임 팀장님, 능력 테스트는 저 몬스터로 하시죠?”
“아, 민정 씨!”
정민정이 대뜸 우리 얘기에 끼어들었다.
그런데 임정식이 그녀를 알아보며 반겼다.
말하는 걸 보아하니 둘은 구면인 듯했다.
“그런데 민정 씨, 레드 토터스는 신입 헌터한테 너무 가혹한 거 아닐까요? 흠집도 못 낼 텐데…….”
“이수현 헌터, 괜찮겠어요?”
“뭐가 말이죠?”
토터스의 등껍질은 타이탄 금속보다 훨씬 단단하다고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도 레드 토터스는 최상급으로 친다.
그럼 왜 저 등껍질을 제련해 보호구로 만들지 않느냐?
토터스의 등껍질은 타이탄과 달리 엄청나게 무거워서였다.
‘대신 내구성만큼은 모든 헌터가 인정하지.’
정민정은 몬스터의 실물을 보고선 만족했다.
저 크기면 성체니까… 이수현은 등껍질에 생채기 하나 낼 수 없겠지.
“정 자신 없으시면 다른 몬스터를 골라도 돼요.”
“아뇨, 저 녀석이 길드에서 준비해 온 것 중에 제일 튼튼한 놈이죠?”
“예. 그래도 허들이 너무 높지 않을까요?”
임정식은 다른 몬스터로 테스트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말했다.
레드 토터스는 6급 헌터의 공격도 견디는 몬스터.
신입의 샌드백으로 쓰기엔 과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아뇨. 자신 있습니다. 제 전용 무기가 얼마나 셀지도 궁금하고요.”
“알겠습니다. 그럼 꺼낼게요.”
“근데 죽여도 되나요? 저것도 돈인데…….”
“하하! 그럼요. 진짜 죽이신다면 제가 배상할게요.”
임정식은 철창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그러자 웅크리고 자던 레드 토터스가 눈을 떴다.
임정식이 손짓으로 놈의 움직임을 유도했다.
몬스터가 사람의 말을 따르다니. 신기했다.
“혹시 몬스터 테이머신가요?”
“아뇨. 얜 저한테 두들겨 맞고 제압당했거든요. 그래서 제 앞에선 아주 얌전합니다.”
쿵쿵.
육중한 다릴 이끌고 녀석은 철창 밖으로 나왔다.
주변 사람들을 보더니 놈은 침을 질질 흘렸다. 하지만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임정식이 옆에서 마력을 풀풀 풍기고 있었기에.
놈은 사육사에게 조련당한 맹수와 같았다.
임정식 앞에서 잘못하면 흠씬 두들겨 맞는다는 걸 몸으로 학습한 거다.
“자, 거기 딱 멈추고. 좋아, 가드 올려.”
“그워어.”
임정식의 명령에 녀석이 움찔하며 멈췄다.
레드 토터스는 껍질 속으로 완전히 숨었다. 완벽한 방어 자세.
“테스트 준비 끝났습니다! 이수현 헌터님도 준비되시면 말씀해 주세요.”
“네, 잠시만요.”
이수현은 미리 연락해 뒀던 헌터들을 보조 무기로 소환했다.
SUV의 특수 능력. 자리가 되는대로 보조 무기를 장비할 수 있다.
‘7인승이니까, 운전석을 빼면 6명까지 태울 수 있어.’
지금까지 보조 무기로 등록해 뒀던 헌터들이 하나둘 좌석에 소환됐다.
초신성 라디오에 출연한다는 얘기에 모두 흔쾌히 허락해 줬다.
“…저게 뭐야?”
팔짱을 낀 채 구경하던 정민정이 깜짝 놀랐다.
SUV의 외형이 세기말 감성으로 변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파지직!
앞쪽 범퍼엔 고압 전류가 흐르는 커다란 칼이 생겨났다.
“저기 조수석에 탄 사람…….”
“그 지옥참마도 맞지?”
방송사 직원들도 차량에 탑승한 헌터를 알아봤다.
박옥자 할머니. 그녀가 좌석에 타 있었다.
‘나예린은 언제 저기 탄 거야?’
“그럼 출발합니다. 안전벨트 꽉 매시고요.”
“수현 총각, 이거 안전한 거 맞지?”
“예, 어르신. 차가 파괴되지 않는 한, 탑승자는 안 다쳐요.”
“수현 형님, 저거 토터스 아닙니까?”
“…심지어 레드 토터스인 거 같은데. 정말 괜찮을까요?”
박동원은 토터스를 알아보곤 덜덜 떨었다.
이번 달에 8급으로 승급한 정진혁 헌터도 오랜만에 소환됐다.
그는 몬스터 지식에 해박했다.
4성이지만 방어력만 놓고 본다면 5성급에도 안 밀린다는 그 레드 토터스.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괜찮습니다. 시너지 효과란 말도 있잖아요? 여러분들의 힘을 모으면 분명 뚫을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창과 방패의 대결이었다.
창이 부러지느냐, 방패가 뚫리느냐.
이수현은 액셀을 밟고 그대로 돌진했다.
붉은 벽처럼 꿋꿋하게 서 있던 레드 토터스와 차량이 충돌했다.
퍼억-!
등껍질에 숨어 있던 레드 토터스는 충돌과 함께 비명을 질렀다.
“꾸에에엑!”
콰직! 파앙-!
단단하기로 유명한 레드 토터스의 등껍질은 충돌과 함께 반파됐다.
방송 스태프들이 입을 떡 벌렸다.
예상했던 결과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이게 무슨…….”
임정식도 깜짝 놀라서 급히 확인했다.
레드 토터스는 슬픈 표정으로 눈물을 흘렸다.
야생의 감.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것이리라.
“영상 잘 찍혔습니까?”
“아, 예…….”
이수현은 차에서 내리더니 잘 찍혔냐고 태연하게 질문했다.
PD는 레드 토터스한테 달려가 상태를 확인했다.
“얘 숨을 안 쉬는데요?”
“…….”
임정식은 곤란한 얼굴로 PD와 잠시 상의했다.
둘은 고갤 끄덕이더니 레드 토터스를 어떻게 처리할지 정했다.
야외 촬영이 끝난 후, 남은 토터스 고기는 스태프들이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 * *
‘말도 안 돼! 뭐 저딴 능력이 다 있어?’
정민정은 상식을 뛰어넘는 운전기사의 능력에 기가 질렸다.
쪽을 주려고 준비한 게 오히려 그를 치켜세워 준 셈이다.
그녀는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으며 생각했다.
‘그래, 저 남자는 어찌 되든 상관없어. 난 나예린만 이기면 돼.’
정민정은 가상 대련 기기를 자기 머리에 쓰고서 마음을 다잡았다.
나예린과의 승부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
그때 못다 한 승패를 가릴 때가 왔다.
“다음은 정민정 헌터와 나예린 팀장의 양궁 대결인데요.”
가상의 공간에 들어간 두 사람이 화면을 통해 보인다.
진행자는 그 화면을 중계하며 이런저런 멘트를 날렸다.
이수현은 걱정스럽게 나예린을 쳐다봤다.
‘하필 대결 종목이 양궁이냐.’
나예린과 정민정은 번갈아 가며 화살을 쏘았다.
팍! 팍!
화살은 전부 고정된 과녁의 정중앙에 꽂혔다.
수십 발을 쏘는데도 두 사람은 실수 하나 없었다.
“정말 대단하네요! 둘 다 중앙에서 한 발도 안 빗나갔어요.”
둘 다 만점이라 승패를 가릴 수 없었다.
원래라면 대결은 여기서 끝.
하지만 가상 세계는 소멸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됐다.
나예린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자 정민정이 슬쩍 웃으며 그녀에게 제안했다.
“나예린 팀장님, 대결 규칙을 좀 바꾸죠.”
“어떻게요?”
“번갈아 쏘되, 한 발이라도 빗나가면 지는 거로… 단, 둘 다 못 맞추면 무승부고, 어때요?”
“전 상관없어요.”
딱!
정민정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고정되어 있던 과녁이 일정한 속도로 움직였다.
그걸 본 나예린이 정민정을 흘끔 쳐다봤다.
“자신 없으면 포기하셔도 돼요.”
“아뇨. 뭐든 상관없는데, 이렇게까지 승패에 집착하는 이유가 뭐죠?”
“악몽을 꾸거든요.”
“악몽?”
“저희가 각성했을 때 기억나죠?”
소동은 마지막 테스트 중에 벌어졌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마력 화살을 쏴댄 탓에 과녁 자체가 소멸했었지.
그 시험 직전의 종합 성적으로는 1등 나예린, 2등은 정민정이었다.
“마지막 테스트 점수에선 제가 한 발 앞서고 있었잖아요? 시험이 중단되지만 않았으면, 1등 자리도 뺏었을 텐데.”
“고작 그거 때문에 이 승부를…….”
“아, 1등 못 한 것 때문에 이러는 건 아녜요.”
“그럼 진짜 이유가 뭐죠?”
정민정은 고갤 저으며 그게 아니라 했다.
그녀가 악몽을 꾸는 이유는 1등을 놓쳤기 때문은 아니었다.
“지금 양궁 대표 누가 된 줄 아세요?”
“몰라요. 그쪽 일엔 관심 끊은 지 오래라서.”
“우릴 시기하고 따돌렸던 애들, 기억하죠?”
물론 기억은 난다.
나예린은 그들 덕분에 말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거에 비하면 협회에 퍼졌던 악소문은 애교 수준이었다.
게다가 정민정은 나예린과 친하게 지냈단 이유만으로 심한 괴롭힘을 당했다.
“그 쓰레기 같은 놈들이 대표 자릴 차지했어요.”
“…그랬군요.”
“당신은 분하지도 않아요? 그런 놈들이 승승장구하는데.”
나예린은 그때 일을 잊고 살았다.
하지만 정민정은 아니었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었다.
자신보다 훨씬 못하던 것들이 꿈을 빼앗아 갔으니까.
“찾아가서 따지니까 뭐라 한 줄 아세요? 괴롭혀서 미안했대요. 뻔뻔한 것들… 내가 잘나가는 헌터가 되니 태도가 싹 바뀌던데, 어찌나 역겹던지.”
“그냥 무시해요.”
“무시? 아뇨, 난 지금보다 더 성공해서 꼭 복수할 거예요. 더러운 수를 써서라도, 싹 다 선수 생활 못 하게 만들 테니까! 그놈들, 당신한테는 사과할 생각도 없어 보이던데. 저한테 고마워해도 돼요. 아예 당신 몫까지 내가 복수해 줄게요.”
“저 때문에 그럴 필요 없어요.”
그 말에 나예린은 고갤 저었다. 정민정의 접근 방식은 잘못됐다.
감정에만 치우친 복수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들을 용서하는 건 아니라도, 억지로 파멸시키는 건 공허함만이 남을 뿐이다.
그녀는 소중한 친구가 망가지는 걸 보기 싫었다.
“그냥 세상에 없는 사람들이라 여기고 살아요.”
“…뭐?”
“정민정 헌터, 아직도 양궁에 미련이 남은 거죠? 제가 이기면 그 미련과 복수심, 전부 떨쳐 내세요.”
나예린의 말에 정민정은 어이가 없었다. 갑자기 혼자만 고결한 척하다니.
정민정은 참지 못하고 본색을 드러냈다.
“하, 너 진짜 웃긴다. 나만 나쁜 사람이라 이거지? 연기가 많이 늘었네.”
“미안하지만 전 진심이에요. 그리고 저희가 각성한 건 어쩔 수 없었던 거였어요.”
“어쩔 수 없었다고? 그 입 닥쳐. 너만 아니었어도……!”
“이제 당신이 쏠 차례에요.”
나예린은 움직이던 과녁을 맞히고선, 정민정의 말을 잘라먹었다.
정민정은 분한 얼굴로 시위를 당겼다.
팍!
그녀의 화살도 정확하게 꽂혔다.
어느 한쪽이 빗나갈 때까지 과녁은 계속 생성된다.
정민정은 그녀를 비웃으며 말했다.
“흥, 내 능력이 뭔지 몰라? 난 미세한 바람도 조종할 수 있다고. 넌 언젠가 실수하겠지만, 내 화살이 먼저 빗나갈 일은 없어.”
팍!
나예린은 대답 대신 과녁을 명중시켰다. 거기엔 일말의 흔들림조차 없었다.
그녀는 다른 규칙을 제안했다.
“화살을 쥐고, 발사까지의 제한을 10초로 두죠. 공식 경기처럼요.”
“10초?”
정민정은 이를 으득 갈았다. 어디 한번 해보자 이거지.
두 사람은 쉬지 않고 계속해서 과녁을 맞혔다.
정민정이 드디어 100번째 화살을 쐈을 때였다.
손끝에 힘이 평소보다 조금 더 들어갔다. 그 영향으로 진행 방향이 조금 뒤틀렸다.
‘빗나가면 안 돼!’
정중앙에 맞히지 못하면 아무 의미도 없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능력으로 화살의 궤적을 살짝 조절했다.
양궁에선 반칙이나 다름없는 기술.
그걸 눈치챈 나예린이 활을 장전하며 말했다.
“그렇게 자신 있어 하더니. 고작 그거밖에 안 돼요?”
“…닥쳐! 이제 네가 쏠 차례야.”
피잉-!
나예린은 정민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과녁의 정중앙에 화살을 적중시켰다.
그러곤 정민정에게 조언했다.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거기에만 의존하면 안 돼요. 결국, 화살을 쏘는 건 저희니까.”
솔직히 뜨끔했다. 한동안 사격 연습을 소홀히 한 건 맞았다.
바람을 다루게 되고 나서부턴 굳이 연습할 필요도 없었으니까.
그녀는 원하는 대로 바람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 그건 화살을 자유자재로 날릴 수 있다는 의미다.
심지어 역방향으로 쏴도 중앙에 정확히 맞힐 수 있을 정도.
“너, 그렇게 잘났으면 어디 이것도 맞혀 봐.”
바람의 방향이 급격히 바뀌었다.
나예린의 사격을 방해하려는 정민정의 방해 공작이다.
“이번에 제가 맞히면 깔끔히 패배를 인정할 건가요?”
“그래, 어차피 못 맞히겠지만.”
“그 말, 꼭 지켜요.”
바람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데다가 과녁까지 좌우로 움직인다.
‘네가 무슨 수를 써도 안 될걸.’
정민정이 그렇게 생각할 때, 나예린은 천천히 화살을 장전했다.
곧 그녀가 화살을 놓으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바람은 계산하는 게 아니라, 극복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