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ting with 13 hidden characteristic RAW novel - Chapter (324)
잊힌 자들의 왕
“······.”
폭풍이 지나간 자리.
어색한 침묵 속에서 허드슨은 하염없이 눈알만 굴리며 세렝게티를 훔쳐보았다.
도저히 세렝게티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정체를 숨기고 거짓으로 일관해온 것.
그것만으로도 용서받기 힘든 대역죄인이었으니까.
“이제야 이해가 되네.”
돌연 세렝게티가 입을 열었다.
무엇이 이해가 간다는 걸까?
문제삼을만한 게 한, 두 가지가 아닌지라 허드슨은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자 세렝게티가 차가운 얼굴로 허드슨을 바라보며 말했다.
“결혼식 때 나타난 히드라곤. 그건 분명히 란돌프님의 소환물이었지. 잘못 봤나 싶었지만, 아니었어. 왜 그랬던 거야?”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는 물음.
하지만 세렝게티의 입장에선 허드슨과 란돌프가 고의로 결혼식을 망치려고 한 것만 같은 착각을 할 수도 있는 노릇이다.
허드슨은 재빨리 고개를 내저었다.
“······ 미안. 일부러 결혼식을 망치려고 그랬던 건 아니야. 갑자기 마계가 지구를 침략하기 시작했고, 내 육체가 공격을 받는 상황이라 어쩔 수가 없었어.”
“마계가 죄인··· 아니, ‘플레이어’들의 세계를 공격하고 있다고?”
세렝게티가 인상을 찌푸렸다.
마계가 타차원을, 그것도 플레이어의 고향인 지구를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녀로서도 금시초문이었기에.
하지만 모르는 게 당연하다.
허드슨이 한숨을 내쉬며 설명했다.
“벌써 두 번이나 침략했어. 앞으로도 계속 침략해올 거고.”
“마왕은 왜 판게니아가 아닌 지구를 침략하는 거야?”
“······ 플레이어들이 마왕을 방해하니까?”
마왕의 목적은 침략과 정복이다.
하지만 멀쩡한 판게니아를 놔두고, 어째서 지구를 침략하는지 정확한 이유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대원정조차 판게니아에서 자행된 행위이거늘.
왜 난데없이 지구를 공격하는가?
이와 관련된 가설이 많지만, 그중 가장 유력한 가설은 지구와 플레이어의 존재가 마왕을 위협한다는 것이었다.
잠재적인 위험으로 판단하고 지구부터 공격한다는 게 그나마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만약 그때 란돌프님께서 히드라곤을 소환하지 않았다면, 나는 죽었을 거야.”
허드슨이 덤덤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 내용은 결코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종류였다.
란돌프가 등을 떠밀어주지 않았다면, 허드슨은 혼자서 로그아웃할 수 없었을 테고 결국 죽음을 맞이했으리라.
동시에 세렝게티의 두 눈에 파문이 일었다.
“저쪽의 올리버가 죽으면······ 내 눈앞에 있는 당신도 죽는다고 했지?”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야. 예외는 없어.”
허드슨이 죽어도 올리버가 죽는다.
양쪽 세계의 육체 모두가 중요한 것이다.
죽음만이 아니라 장애가 생겨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어찌됐든 두 육체는 서로 유기적으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쪽으로 넘어올 수는 없는 거야?”
“응. 판게니아와 지구는 다른 세계니까. 허드슨은 지구로 갈 수 없고, 올리버는 판게니아로 올 수 없어.”
“그런데······ 박현명님은 어떻게 판게니아에 있는 걸까?”
“······.”
“박현명님이 가능하다면, 올리버도 가능한 거 아닐까?”
“세렝게티. 현명님은 ‘예외의 예외’라고 봐야 돼. 입지적이고 압도적이며 상상을 초월하는 경우라고.”
“그래도 가능성은 있는 거잖아.”
“······ 0.000001%의 가능성도 가능성이라 말하긴 하지.”
그보다 더 극악한 확률이 아닐까 싶지만.
단순히 ‘되냐’, ‘안 되냐’를 따져보면 전자이긴 하다.
박현명. 그는 해냈으니까.
하지만 그가 해냈다고 허드슨도 해낼 수 있다는 건 아니다.
허나, 그런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보다 중요한 일은 따로 있었으니.
“세렝게티. 혹시 더 궁금한 건 없어?”
허드슨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이해한 척 하고 있을뿐이다.
진정으로 용서하고 납득했을 리 만무했다.
그러자 세렝게티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 솔직히 아직도 혼란스러워. 뭐가 뭔지 모르겠어. 박현명이라는 사람이 란돌프님이며 빌헬름님이라는 것도 이상해. 지구에서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지만, 정작 란돌프님의 모습으로 변하진 않았잖아? 아마 다들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을걸?”
“······ 혹시 란돌프님께서 ‘투신의 탑’에서 죽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솔직히······ 그럴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어. 허드슨도, 이자벨라도, 칼날용신님께서도 뭔가 아는 눈치였으니까. ”
허드슨도, 이자벨라도, 칼날용신마저도.
박현명이라는 사람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하지만 세렝게티를 비롯한 나머지 인원은 갑자기 나타난 박현명의 모습에 적응할 수가 없었다.
하다못해 눈앞에서 란돌프로 변하기라도 했다면 믿겠건만.
“그런데 투신의 탑에서 빌헬름님이 ‘란돌프’님을 토벌했잖아. 이후 빌헬름님은 사라졌고, 란돌프님은······.”
그럼에도 왜 란돌프로 변신하지 못하느냐 묻지 않은건, ‘투신의 탑’에서 ‘란돌프’가 토벌된 사실 때문이었다.
말이 토벌이지, 결국 죽였다는 뜻이다.
한데, 박현명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나타난 박현명은 빌헬름도, 란돌프도 모두 본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모순이다.
셋이 동시에 ‘투신의 탑’에서 존재했음이 분명할진대.
솔직히 허드슨도 그 부분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왜 박현명은 이 세계에 나타났을까?
그리고 왜 란돌프의 모습으로 변하지 않은걸까?
모두를 납득시키려면, 그 방법이 가장 확실했을텐데.
“어쩌면······.”
허드슨의 표정이 한없이 진지해졌다.
그가 천천히 이어서 말했다.
“어쩌면 현명님은, ‘란돌프’로서의 모습을 잃었을지도 몰라.”
“······ 잃었다니?”
“투신의 탑에서 ‘란돌프’님은 분열됐어. 기억과 경험들이 진짜처럼 탑에 녹아있었으니까. 빌헬름으로서의 경험도 그곳에서 분열됐을 수도 있고.”
“전부 나뉘었다는 거야?”
“아마도. 결과적으로 ‘란돌프’님은 재현된 빌헬름님에게 토벌된 거야.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아바타가 죽었음에도 ‘박현명’으로서 살아계신 거고.”
“그럼······.”
“우리가 지켜드려야 해.”
허드슨은 확신했다.
란돌프는 죽었다.
하여 지금, 박현명은 란돌프의 모습을 잃었다.
로그인 한 뒤 란돌프로 변신할 수 없는 상태.
‘현명님은 유일하게 신의 섬에 들어가실 수 있었지.’
어쩌면 란돌프가 죽고도 박현명이 살아있는 이유가 그것일 수도 있다.
기존 각성자는 출입이 불가능한 신의 섬.
그곳에서 박현명만이 유일하게 입장하여 또 다시 각성했을 테니.
동명이인일 수도 있으나, 허드슨은 그가 확실하다고 확신했다.
그렇다면.
“허드슨. 지금의 박현명님은 란돌프님만큼 강하지 않다는 거지?”
세렝게티의 표정이 굳었다.
허드슨도 표정을 굳힌 채 고개를 주억였다.
“지금은. 하지만 틀림없이 본래의 자리를 되찾으실 거야.”
그때까진 필사적으로 지켜내야만 했다.
일순간 박현명은 물가에 내다놓은 어린아이와 같은 신세가 된 것이다.
하지만 세렝게티도 허드슨의 의견에 동의했다.
실제 그녀가 보기에, 박현명은 아직 란돌프의 경지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 그래서 라이가의 제자가 된 거구나.”
“당연히 위장이겠지. 이곳에 잠입하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고. 어쨌든 우리는 더 강해져야 해. 그분의 울타리가 되어드릴 수 있도록.”
란돌프나 빌헬름이 라이가의 제자가 된다?
적어도 허드슨은 말도 안 된다며 비웃을 자신이 있었다.
라이가가 그분의 제자가 된다면 모를까.
이윽고 세렝게티가 답했다.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원탁의 기사’는 모두 강하니까.”
세렝게티는 자신했다.
허드슨도 ‘원탁의 기사단’에 입단했으니, 강해질 일만 남았노라고.
하지만 허드슨은 여전히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 세렝게티. ‘원탁의 기사’들 모두가 살아있다는 말······ 그 말, 사실이야?”
박현명에게 전했던 이야기.
허나 원탁의 기사들은 모두 죽었다.
세렝게티를 제외하면 말이다.
-모두 살아있습니다. 이곳, 세계수의 던전에.
그런데 세렝게티는 박현명에게 ‘원탁의 기사’들이 모두 살아있다고 이야기했다.
······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만약 그들이 살아있었다면 란돌프가 모를 리 없고, 그들과 합류하지 않았을 리 없으니까.
허나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박현명도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더 묻지 않은 것이다.
“곧 알게 될 거야.”
“곧? 언제?”
“던전에 입장하게 되면.”
세렝게티가 미소지었다.
그러나 세계수의 던전엔 아무나 입장할 수가 없다.
자격의 검증, 그리고 정원마저 존재했으므로.
하지만 차마 더 묻지 못했다.
“그러니까 입장하기 전까지 알려줬으면 좋겠어. ‘지구’에 대해. ‘플레이어’에 대해. ‘올리버’에 대해.”
세렝게티의 두 눈.
진실을 갈구하는 그 눈빛을 더는 피할 수 없었으니.
아무래도 모든걸 털어놓을 때가 된 듯싶었다.
······ 설령 그 끝에 세렝게티가 자신을 떠나게 된다고 할지라도.
*
아이작은 두 눈을 감았다.
믿기지 않는 이야기들.
하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진실을 들었으니까.
“떠나는 것도, 떠나지 않는 것도, 모두 그대의 자유다.”
한창 고민하자 옆에서 이자벨라가 말했다.
아이작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자벨라······ 너는 정말 괜찮은 거냐?”
“괜찮지 않을 게 뭐 있지?”
“어쨌든 거짓으로 접근했······.”
“그분께서 그러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허황된 꿈과 분노를 가진 채 인생을 허비하고 있었을 거다.”
자신의 핏줄을 찾겠다는 헛된 꿈.
결국 데르시안 가문은 그녀에게 지옥이었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누구보다도 중요한 소노라와의 추억을 상기할 수 있었다.
소노라를 추억하고, 소노라의 존재를 느낄 수가 있었다.
만약 란돌프가 자신을 ‘성각자’라 칭하지 않았다면?
이 모든 진실을 알지 못한 채로 시간만 허비했을 터.
“······ 찾아야 할 사람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성도에.”
“그런데 왜 이곳에 온 거냐?”
“지금은 이곳에 있는 게 더 중요하니까.”
“별로 안 중요한 사람인가 보군.”
“······ 때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소노라가 성도에 있다.
세아 성녀가 직접 확인한 사실이다.
교황성 가장 깊숙한 곳에 봉인되어 있노라고.
무작정 찾아간다고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관리와 감독이 허술해진 틈을 타서 진입해야한다.
바로 ‘여신절’에.
여신교의 모든 이들이 축제를 열고 떠받드는 그 날에, 기회를 노릴 생각이다.
그리고 ‘여신절’까진 아직 시간이 남았다.
조급해할 필요 없다.
‘살아만 있다면.’
살아만 있다면, 반드시 구할 테니까.
“아이작. 우리는 선택받은 거다.”
“··· 그게 무슨 말이냐?”
“그분께서 구원한 천여 명에 가까운 ‘신병’ 환자들. 그중 직접 우리만을 찾아내셨으니까.”
그러니 선택받았다.
천 명 중, 그가 찾아낸 건 고작 셋뿐이다.
이자벨라, 아이작, 발테!
그들의 상처를 치유해주고, 보듬어주며, 더 나아가게 해주었다.
“그런데도 스스로의 선택이 못마땅해 떠나겠다면, 말리진 않으마.”
“그 대신 실망하겠지.”
“다시는 그대를 안 볼 생각이다.”
이자벨라와 아이작은 그간 제법 친해졌다.
서로 비슷한 고통을 갖고 있었으며, 란돌프를 따르는 가신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아이작이 떠나겠다면 이자벨라는 단호히 그를 끊어낼 생각이었다.
영원히 다시 볼 일은 없으리라.
“······ 잔인한 우정이군.”
“나만이 아니다. 모두가 그대를 안 볼 것이다.”
“아무도 떠나지 않을 거란 거냐?”
“당연한 소리를 묻는군.”
란돌프가 박현명이 되었대도, 그는 그다.
변하는 건 없었다.
아이작은 양 손을 펴서 자신의 얼굴을 마구 구겼다.
“젠장. 내가 이상한 건가? 이토록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한결같을 수가 있는 거지? 너도, 다른 사람들도. ”
“너는 인간이니까.”
“그건 이자벨라 너도 마찬가지······.”
“아이작. 네가 착한 사람이라 그렇다.”
“······.”
“그래서다. 떠나겠다면, 아예 어울리지 않는 게 나아.”
아이작은 인간적이다.
이곳에 모인 자들 중에 가장 인간적이었다.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일들에도 계속해서 괴로워하는 착한 인간.
하여 떠나겠다면, 영원히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게 낫다는 의미다.
결국 물들 터이니.
아이작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곤 자리를 박찼다.
“··· 정했다. 난 안 떠날 거다.”
아이작은 결심했다.
주먹을 불끈 쥐는 그를 보며 이자벨라가 피식 웃었다.
“현명님은 네가 상상한 것보다 더 대단하신 분이다. 어중간한 결심으로는 못 따라올 텐데.”
“잊었나? 난 이미 ‘원탁의 기사’다.”
“······!”
그러자 이자벨라의 눈빛이 흔들렸다.
설마 그런 대답을 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하지만 아이작은 그저 잠시 혼란했을 뿐이다.
속마음은 그 누구보다도 ‘원탁의 기사’가 되고 싶었다.
따라가고 싶었다.
그들의 전설과 신화.
빌헬름의 이야기를.
결국 모든 게 자신의 선택으로 인한 일이라면 진정 끝을 봐야하지 않겠는가.
이자벨라도, 심지어 발테도 굳건히 믿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럴진대, 자신을 선택하고 구원해준 은혜를 저버릴 순 없다.
그런 짐승보다 못한 존재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내가 착한 사람이라니.’
······ 그는 착한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