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the Game as a Barbarian RAW - chapter (501)
501화 탐험의 시대 (2)
플랜 B.
그 말을 듣는 순간 불길한 상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어때요? 이제 진짜 궁금한 건 다 풀렸어요?”
“어, 대충은.”
이백호에 대한 적대감은 더욱 낮아졌다.
미소 속에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 놈보단, 차라리 솔직하게 바라는 것을 말하는 쪽이 나으니까.
“플랜 B에 대해선 물어봐도 대답 안 할 거지?”
“이건 진짜 안 돼요. 저도 비장의 패는 하나 갖고 있어야죠?”
후, 그래 그렇단 말이지…….
조금 아쉬운 부분이지만, 이 정도의 비밀은 나도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다.
나라고 얘한테 모든 걸 오픈한 것도 아니고.
서로 필요한 만큼은 솔직하게 패를 보여 줬지 않은가. 당장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럼 이제 저는 형의 적이에요, 아군이에요?”
나는 별 고민 없이 답했다.
“글쎄, 협력자 정도가 적당할 거 같은데.”
“…협력자요?”
“그래, 협력자.”
이백호는 정확히 무슨 의미로 이런 단어를 썼는지 궁금한 눈치였다. 하긴, 이런 건 확실히 짚고 넘어가는 게 좋긴 하니까.
“네가 집에 돌아갈 수 있도록 협력할게.”
“대신 저는 형이 필요로 할 때마다 도와주고요?”
“대충 그런 느낌이지.”
“나쁘지 않네요. 근데 그러다 의견이 충돌해서 틀어지면요……?”
이백호답지 않은 조심스러운 말투에 나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그 순간 갈라지는 거지 뭐. 별거 있냐? 나도 되도록이면 그런 일이 없었으면 하는데, 네가 말했듯이 사람 일은 또 모르는 거니까.”
“……굉장히 쿨하시네요.”
“어. 그러니까 플랜 B든 뭐든 그때를 대비해 뭘 하든 네 마음대로 해. 어차피 나도 그럴 테니까.”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는 것은 당연한 본능이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그 당연한 걸 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협력 상대로서는 더욱 최악일 것이라고.
“협력자라… 좋네요. 그렇게 하죠.”
이내 이백호는 마음에 든다는 듯 손을 앞으로 뻗었다.
거, 낯간지럽게 뭐 하자는 건지.
속으로 질색을 하면서도 일단 악수는 받아줬다.
“……형, 나 방금 소름 돋았어요.”
“말하지 마. 나도 똑같으니까.”
짧은 악수를 끝낸 우리는 각자 소파에 앉아 서로를 보며 피식 웃었다.
“진작 이럴 걸 그랬나봐요.”
“그러게.”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
이후로도 이백호와 여러 대화를 나누었다.
그중에 가장 메인이 된 주제는 역시나 ‘숨겨진 지역’이었다.
“형, 저한테는 말해줘요. 진짜 뭘 어떻게 했던 거예요?”
“몰라. 특수 조건이 성립된 거 같기는 한데, 왜 그런 상황이 됐는진 모르겠어.”
“그래요? 아쉽긴 한데, 뭐… 알아도 크게 의미는 없긴 할 거예요. 명예의 돌에 기록되는 위업은 딱 한 번만 되거든요.”
“어, 그래?”
“아, 몰랐어요? 이 형 진짜 게임에서 알 수 있는 거 빼고는 모르는 게 많네…….”
뭐, 그거야 어쩔 수 없지.
한때 도서관에서 살기는 했지만, 따져보면 그건 결국 누구나 다 얻을 수 있는 개방된 지식들이니까.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형, 저 이만 가볼게요.”
그렇게 한참 동안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보니 곧 이백호가 로그아웃할 시간이 됐다.
“야, 이렇게 된 거 차라리 도시에서도 가끔 얼굴도 보고 하는 게 어떠냐?”
“저야 좋죠. 근데 당분간은 안 될 거 같아요. 잠시 밖에 좀 나가보려고 해서.”
“…밖이라면, 성벽 바깥을 말하는 거냐?”
“네. 드디어 바깥으로 가는 길을 알아냈거든요. 이거 때문에 도시 지하를 얼마나 뒤지고 다녔는지.”
잠깐만, 이거 꿀 정보인 거 같은데.
나도 알려달라고 하자 이백호는 뭔가 아까워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말로 설명하기는 그렇고, 떠나기 전에 형네 집에 편지 하나 보내둘게요. 가는 방법이 적힌.”
“땡큐.”
이래서 주변에 고인물 하나가 있어야 하는 건가?
예전부터 궁금했던 왕국 탈출 루트를 예상외의 방법으로 손에 넣었다.
따라서,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근데 넌 왜 나가려는 건데?”
“아우릴 가비스. 그 늙은이가 왠지 거기 있는 거 같아서요.”
“……?”
“그래서 한번 찾아보려고요. 그 늙은이라면 제가 가진 의문들 대부분의 답을 갖고 있을 테고.”
그러고 보니, 백호한테 이 할배에 대해서도 물어봐야 했는데. 지금 상황에서라면 더 많은 얘기를 솔직히 답해줄 테니까.
‘뭐… 그건 다음에 만나서 물어보면 되려나?’
“그럼 가볼게요 형. 다음 달에 봬요!”
“그래, 찾으면 나한테도 소식 들려주고.”
“예압.”
그렇게 이백호가 떠났고, 잠시 소파에 앉아서 벽난로를 보며 불멍을 때리고 있자니 현별이가 돌아왔다.
“오늘은 생각보다 늦었네?”
“그럼 제가 나가서 인원수만 보고 있을 거 같아요?”
어… 아니었어?
지금까지 거의 나가자마자 들어오기에 그런 줄 알았는데…….
“그나저나… 표정이 좋네요?”
“응?”
“뭔가 고민 하나가 해결된 표정이에요. 지금 오빠 표정.”
“아… 그러냐?”
얘도 참 가만 보면 신기라도 있는 거 같다니까.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있자니, 현별이가 피식 웃으며 소파에 누웠다.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르겠다.
“현별아……? 너 지금 치마 입었는데…….”
“근데요? 스타킹 있잖아요.”
“어…….”
그, 그런가?
그러면 괜찮은 건가?
왠지 모르게 납득할 것만 같은 기분에 가만히 얼어있자니 현별이가 피식 웃었다.
“참, 별걸 다 신경 써. 이제 와서.”
이내 현별이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책 한 권을 꺼내더니 읽기 시작했다.
“…그 책은 뭐야? 어디서 났어?”
“오빠는 몰라요? 요즘 이거 때문에 난리인데.”
“……?”
“진짜 모르시나 보네. GP로 커뮤니티 내에서 쓸 수 있는 옷이나 그런 거 파는 건 알죠?”
“어, 그건 알지.”
고스트 버스터즈는 의외로 현질 요소가 있는 커뮤니티였다. 채팅방 꾸미기, 치장용 아이템 등등 과금 요소가 여럿 있었고, 당연히 나는 단 한 번도 이용해 본 적이 없었다.
“이 책도 그런 거예요.”
“그럼 아무것도 안 적혀 있다는 거야?”
“아뇨. 적혀 있어요. 원래 자유 게시판에서 글 쓰던 사람 글인데, 하도 인기가 많다 보니까 아예 운영자랑 협의해서 책으로 만들어 판매를 하기 시작했어요 최근에.”
“와… 신기하네. 그래서 그거 재밌어?”
“오빠도 볼래요? 앞의 권 남은 거 있는데.”
“어, 줘봐.”
이내 나는 현별이에게 책 한 권을 넘겨받아서 읽기 시작했다. 현대 배경의 판타지 소설이었는데, 나름 초반부터 흡입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도무지 집중하기 어려웠다.
‘……미치겠네.’
현별이 얘는 가만히 책이나 보지, 왜 자꾸 발을 꼼지락거리고 있는 거야?
“스트레칭요. 다리가 저려서.”
“……내가 말했어?”
“아뇨. 표정이 그렇던데요.”
……얘 앞에서는 무슨 생각을 못하겠네.
이후 나는 아예 현별이에게서 등을 돌린 채로 책을 읽어나갔고, 그렇게 책 넘기는 소리만이 하염없이 이어졌다.
“오빠.”
“…응?”
“곧 그 시간인데 안 나가봐도 돼요?”
“아…….”
뭐야, 이 소설 왜 이렇게 재밌어?
어느새 정신을 차리니 원탁이 열릴 시간이었다.
따라서 얼른 현별이에게 양해를 구한 뒤에 작별 인사를 남기고 떠났고, 서둘러 원탁에 입장했다.
늘 입던 남색 정장.
그리고 그 위에 뒤집어쓴 수사자 가면.
시간이 아슬아슬했던 만큼, 서둘러 착장을 갖추고 복도를 지났다. 도착한 원탁에는 여덟 명의 회원이 먼저 입장해 있는 상태였다.
“오셨군요, 수사자 씨. 피싯.”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오는 광대부터 시작해서 여우, 초승달, 사슴뿔, 광대, 여왕, 나비, 늑대…….
‘여덟 명이네?’
지난번 집회에서 나타난 뉴비 삼인방 중 하나, 흑가면이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 찰나.
스윽.
원탁과 이어진 반대편 문을 통해 흑가면이 모습을 드러낸다. 흑가면은 장내를 쓱 둘러보다가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반갑습니다. 블랙 씨…….”
옆자리가 된 고블린이 인사를 건넸지만, 아무런 대꾸도 않고서 팔짱을 끼는 흑가면.
뭔가 쟤도 기가 참 세보인단 말이지.
스윽.
아무튼, 나도 슬슬 비워져 있던 내 자리로 가서 엉덩이를 붙였고, 때마침 시간이 되었는지 원탁의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다 합쳐서 열 명이라……. 뭔가 사람이 많으니까 낯선 기분이네요.”
여왕이 물꼬를 트듯 중얼거리자 초승달이 온화한 목소리로 답했다.
“여왕, 그대는 그럴 수도 있겠구려.”
“초승달 님은 아니란 말씀인가요?”
여왕의 반문에 답한 것은 뉴비 삼인방 중 ‘복귀 유저’ 타이틀을 갖고 있던 늑대 가면이었다.
“하핫! 마스터가 있을 때는 스무 명이 넘었던 적도 있었지요! 아아, 그때는 정말이지—.”
“그때 당신은 마스터한테 알랑방귀만 뀌느라 바빴죠. 피싯.”
“…….”
“광대, 지금 당신처럼 말이오?”
“피시싯, 요정이 매력적이긴 한가 봅니다. 저리 NPC한테 빠져서 정신 못 차리는 걸 보면. 그래서 저한텐 언제 찾아올 겁니까? 복수, 안 할 겁니까?”
“와! 두 분 원수 사이예요? 재밌겠다. 싸울 때는 저도 꼭 좀 불러주세요!”
“피시싯! 물론입니다. 나비 양.”
아오, 사람이 많으니까 진짜 난장판이 따로 없네.
스윽.
여우에게 시선을 보내자 여우가 내 눈치를 보며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들 모인 거 같으니, 슬슬 시작해보는 게 어떨까요……?”
“하하, 그럽시다. 잡담이나 하려 모인 건 아니지 않소?”
그렇게 상황이 진정되자 원탁의 불문율에 따라 자연스레 내 옆에 앉은 이에게 시선이 모였다.
그야 이 자리가 항상 첫 순서거든.
“여왕 씨가 첫 번째인 건 처음인 거 같군요?”
“그러게요. 다들 저렇게 뒤에 따닥따닥 붙어 앉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나와 무려 세 칸이나 떨어져 앉아 있던 여왕이 한숨을 내쉬며 첫 턴을 시작했다.
“안 그래도 요즘 가장 관심 많은 주제죠? 그거랑 관련된 얘기를 할게요. 명예의 돌을 만든 것은 대현자 디플런 그라운델 가브릴리우스이다.”
정보가 진실이고, 아는 이가 과반수는 넘지 않았기에 녹색불은 떴지만 곧바로 이의제기가 빗발쳤다.
“그걸 누가 만들었는지가 중요합니까? 피싯.”
“헤헷, 그러게요. 마법사도 아니고.”
“애당초 좀 신기하거나 미스터리한 것들은 다 그 인간이랑 관련되어 있기도 하고 말이오.”
여왕도 이의제기가 들어올 걸 예상했는지 격한 반응을 보이지 않으며 순순히 정보를 덧붙였다.
“그럼 이건 어때요. 명예의 돌 그 자체에도 가브릴리우스의 안배, 즉 히든피스가 숨겨져 있다는 신빙성 있는 기록이 존재한다.”
히든피스라…….
“이건 뭐 나쁘지 않군요.”
회원들은 이 정도면 납득할 만하단 눈치였고, 그렇게 순번이 다음으로 넘어갔다.
“다음 달에 종족 회담이 열릴 것이오. 그리고 인간 대표로는 마탑주가 나오는 것으로 확정됐소.”
단순히 종족 회담이 열리는 시기였다면 부족했을 터이나, 인간 대표를 정확히 집는 것으로 초승달도 탈 없이 턴을 끝냈다.
‘마탑주가 인간 대표라…….’
그나저나 종족 회담이 열린단 건 부족장인 나도 몰랐던 얘기인데, 얘는 이걸 어떻게 벌써 알고 있는 걸까.
‘부족 자체의 영향력 차이겠지.’
사실 바바리안을 제하면 다른 종족들은 전부 다 왕가에 연줄이 있으니까. 멜베스의 다른 가문들이 괜히 고향의 비호를 받는 게 아니다.
아래에서 밀어주면 위에서 끌어주는 식으로 그들은 공존한다.
“미샤 칼스타인이 클랜 아나바다에 합류했다.”
세 번째 순번인 여우가 꺼낸 정보였다.
느닷없는 이름이 언급되어 살짝 흠칫하기는 했지만, 불쾌하다거나 하진 않았다.
‘어차피 곧 있으면 온 사방에 알려질 정보니까. 이런 식으로 써도 문제없다고 생각했겠지.’
실제로 틀린 판단은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정보의 가치는 낮았지만, 회원들 중 어느 누구도 이의제기를 하지 않았으니까.
내가 말하긴 그렇지만, 비요른 얀델은 그 정도로 핫한 이름이었다.
“과연, 그 여자가…….”
“그녀는… 그 남자의 동료로 활동 중이라 하지 않았소? 뭔가 사건이 있었나 보군.”
“피싯… 여우 씨도 만만치 않군요. 저도 몰랐던 정보인데.”
여우의 차례가 끝난 후에는 고블린의 순서였고, 그다음은 흑가면, 사슴뿔 순으로 이어졌다.
다만, 충격적인 정보랄 것은 없었다.
그렇게 그냥 뉴스를 보는 느낌으로 회담을 듣고 있던 때였다.
“헤헷, 제가 말할 건 아까 여우 씨가 말한 거랑 비슷한 주제인데요오…….”
나비가 슬쩍 운을 뗌과 동시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미샤 칼스타인, 그 여자 말이에요.”
뭐지?
뭔 얘기지?
나도 모르게 귀를 쫑긋한 순간, 나비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 여자, 배신자예요.”
귀로는 들었으나,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배신자라니? 혹시 이백호의 입장에서 그렇다는 뜻인가?
그런 생각을 하던 때였다.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듯, 나비 가면이 설명을 덧붙였다.
“아, 물론 비요른 얀델, 그 사람 입장에서요.”
이건 또 무슨 정신 나간 소리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시선은 원탁의 보석으로 향했다.
솨아아아아아.
보석은 조용히 녹색빛을 자아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