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the Game as a Barbarian RAW - Chapter (698)
“흐음, 그렇다고 하면 딱 하나는 더 보여주겠네. 한데 뭐가 좋을는지……. 아, 아예 이번에는 자네가 한번 골라보겠는가?”
아우릴 가비스의 제안은 나쁘지 않았다.아까처럼 하나를 콕 집어서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내가 고를 수 있다면, 이걸로 수작 부리려는 건 막을 수 있을 터.
“…….”
다만, 무엇을 골라야 할지 한참이나 망설이고 있자니 답답했는지 한마디를 옆에서 덧붙인다.
“뭘 그리 고민하는가? 어차피 무엇을 고르던 자네 운명대로일 텐데.”
“그렇게 생각하면 숨은 왜 쉬고, 생각은 왜 합니까?”
일단 쏘아붙이기는 했으나, 할배의 말을 듣고나니 이런 거로 고민하는 게 의미없다 느껴지긴 했다.따라서…….
“저기 저거. 저기 역삼각형 모양의 튼실한 놈으로 주십쇼.”
그나마 파편들 중에서 가장 커 보이는 것을 골랐다.크기가 큰 만큼 읽을 거리도 많을 거 같다는 판단.
한데 이 할배는 모든 파편석의 기록들을 외우고 있었을까?
“흐음… 하필 저걸 고를 줄이야.”
“왜요?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 문제랄 건 없네마는……. 뭐, 이것도 자네의 운명이라면 운명인 거겠지.”
이후 아우릴 가비스가 정말 보겠냐고 한 번 더 물었고, 나는 고민 끝에 보겠다고 답했다.솨아아아아아아-!
이윽고 손을 뻗은 할배의 손을 향해서 천천히 하강하는 파편석.머지않아 글자가 보일 만큼 가까운 거리가 되었다.
한데 내 선택이 틀렸을까.‘뭐 이리 빈 자리가 많아?’크기가 제일 커서 골랐는데, 막상 실제로 보니까 여기저기 부서지고 패여서 읽을 수 있는 글자는 얼마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나마 온전한 것만이라도 읽어보자면.
[………논이 불타오르던 날, 이……… … 악령 ‘————’가 믿…… 동료…게 배신……다.]일단 이름을 상징한다는 그 무늬 자체는 아까 전의 보았던 것과 일치했다.
즉, ‘————’가 나라는 뜻인데…….
“황도 카르논이 불타오르던 날… 믿었던 동료에게 배신당했다……?”
파손 이슈로 읽을 수 없는 부분들을 문맥에 따라 끼워맞추자면 대충 이런 느낌이다.
“제가 올바르게 해석한 게 맞습니까?”
“그 어느 순간에서든, 해석은 본인의 몫인 법일세.”
“하, 쓰읍…….”
괜히 본다고 했던 걸까?안 그래도 복잡하던 머리가 더욱더 복잡해졌다.어떤 사고로 세 명의 동료가 죽고.
그다음인지, 이전인지 몰라도 동료 중 하나가 나를 배신한다 그러고.역시 바꿀 수 없는 미래를 알게 되는 건 축복이 아니라 저주라는 생각이 든다.
“흥미롭군.”
“……제가 괴로운 게 그리 즐거우십니까?”
“그것보단 그 많은 파편들 중에 딱 자네가 나오는 걸 고른 게 신기해서 말일세. 이게 운명의 힘이라는 거겠지.”
흥미롭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었는지, 할배는 내친김에 하나 더 보지 않겠냐고 제안까지 해왔다.하지만…….
“아뇨, 됐습니다. 여기서 더 머리가 아파지는 건 사양이라서요.”
“흐음, 자네가 그렇다면 그렇게 되는 거겠지. 알겠네. 더 제안하지 않지.”
그렇게 기록석 투어는 이쯤에서 마무리를 짓고 다시금 계단을 타고 내려와 동굴로 돌아왔다.그 과정에서는 별다른 대화는 없었다.
“그럼 이제 가는 겐가?”
“예, 지금 이렇게 늦게 나온 것만으로도 이백호가 개지랄을 떨 테니까요.”
“그 친구는 자네와 닮았네. 무엇이든 알고 싶어한단 점에서.”
“언제는 친하게 지내지 말라면서요?”
“그 조언은 아직도 여전하네. 이백호와 친하게 지내서 좋을 게 없어.”
“그 말… 제 입장에서입니까. 아니면 어르신 입장에서입니까?”
“둘 다일세.”
오랜만에 느끼는 거지만 이 할배랑은 대화를 오래 해도 실속이 없게 느껴진다.하는 모든 말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어서 더욱더 그렇다.
나눈 말들은 많아도 믿을 수 있는 게 없달까.
“……말이 나온김에 한 가지만 더 알려주겠네.”
“하… 해보십쇼.”
“이백호를 조심하게.”
“…그건 전에 했던 말 아닙니까?”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아우릴 가비스가 끝까지 들으라는 듯 말을 잇는다.
“조연이니 뭐니 말은 했지만, 이백호는 굉장히 특이한 존재라네. 저기 보이는가?”
이내 허공에서 천천히 공전 중인 수백 개의 파편석들을 가리키는 아우릴 가비스.
“이곳에 모인 것만이 아니라, 수많은 파편석의 기록을 직접 보았네마는, 그 어디에도 이백호에 대한 기록은 존재하지가 않네.”
“……?”
“이는 몹시 이상한 일일세. 그만큼이나 영향력이 있으며, 무엇보다 자네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자를 그 어느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저 말이 사실이라면, 확실히 좀 이상하긴 하다.이백호에게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떠한 비밀이 숨겨져 있기라도 한 걸까?
알 수 없으나, 아우릴 가비스는 다시금 말했다
“그러니 이백호를 조심하게.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다 함은, 그만큼 기록에서도 자유롭다는 뜻이니. 아예 영향이 없진 않겠지만, 적어도 우리보다는 말일세.”
“……안 그래도 놈은 경계하고 있으니 너무 걱정 마십쇼.”
“그렇다면 다행일세.”
“이렇게 헤어져도 또 언젠가 만나겠죠?”
“그런 걸 필연이라고 하지.”
“그럼 오늘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되도록이면 아주 늦게 만나도록 하고요.”
“나 역시 바라는 바일세.”
그 말을 끝으로 아우릴 가비스는 말 없이 나를 지켜보았고, 나도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그저 한 번 더 할배를 위아래로 훑은 뒤, 눈인사 정도만 건네고 포탈을 탔다.
그리고…….
“오! 왔구려!”
“다, 다행입니다! 걱정했는데!”
“뭐야! 왜 이제야 왔어! 남작님! 그 늙은이랑 뭔가 대화했지? 어? 그렇지?”
포탈을 타고 눈을 뜬 즉시 사방에서 쏟아지는 여러 말들을 들으며 나는 눈을 감았다 떴다.이백호.렉 아우레스.제이나 플라이어.벨베브 루인제네스.유르벤 하벨리온.
전원이 악령이라는 특이한 점은 둘째치고.나까지 합치면 딱 한 팀의 단위인 여섯 명으로 맞춰지는 구성.
“뭐예요? 그 눈빛은? 나 방금 뭔가 오싹했는데?”
이백호의 호들갑은 싹 무시하고서, 나는 아까 읽었던 기록을 떠올렸다.
문득 번개가 치듯 떠오른 게 있었다.
[이계에서 온 악령 ‘————’가 세 명의 동료를 잃고서 비로소 본인이 나아가야 길을 깨달았다.]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세 명의 동료.
“너희들, 내 동료가 돼라.”
어쩌면 뭔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정말 즉흥적으로 떠오른 생각이었다.그도 그럴 게, 기록에는 ‘세 명의 동료’라고만 적혀 있었으니까.
‘이 녀석들을 동료로 만들어서 매일 함께 다니면……. 이놈들 중 세 명이 죽고 넘길 수도 있는 거잖아?’
얼핏 들으면 말도 안 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논리적으로 틀린 점을 찾아보긴 어렵다.
뭐, 암만 그래도 정말 그리 되겠냐는 의문이 남기는 하지만…….그래서 뭐 어쩌겠는가?일단 해볼 수 있는 데까지는 해봐야지.
“동료… 요?”
다만 그런 내 제안이 당혹스럽게 들렸을까.깜빡이도 없이 들어간 내 제안에 모두가 어벙벙한 표정을 짓는다.아, 그중 이백호가 압권이었다.
“와, 이거 더 궁금해지네. 그 늙은이한테 뭔 얘기를 들었기에 갑자기 저러는 거야?”
벙찐 표정을 짓기도 잠시, 금방 날카로운 눈빛을 되찾고서 나를 쳐다보는 이백호.그 반응에 나도 좀 급했구나 싶기는 했다.
아무리 동료 목숨이 걸린 상황이어도 침착하게 단계별로 진행을 했어야 했건만.
“남작님, 그 늙은이랑 뭐 했어요?”
“……딱히 별거 하지 않았다만.”
“에이, 그걸 누가 믿어요?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런 심경의 변화가 생겼다고?”
“단지 함께 여정을 이어나가다보니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너희랑 같이 미궁에 들어가면 든든하기는 하겠다고.”
물론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다.그 어느 곳에서보다 뒤통수를 조심해야 하는 곳이 바로 미궁인데, 이런 놈들이랑 어떻게 같이 들어가?
내가 없을 때도 서로가 서로를 대할 때 배 안에 칼 한 자루씩 숨기고 있던 놈들이건만.나까지 끼면 정말 대환장 파티가 열릴 것이다.
“흐음……. 근데 우리랑 다니면 남작님 클랜은 어쩌고요?”
이백호가 슬쩍 떠보듯이 묻는다.보아하니 꿍꿍이가 없다는 내 말은 전혀 믿지 않는 듯했지만, 일단 얘기를 들어보긴 하겠다는 눈치였다.
“글쎄, 그건 앞으로 생각을 해봐야지. 애초에 너네가 승낙을 한 것도 아니니까.”
따라서 아직은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상황을 넘겼다.하지만…….
“오! 거인, 얀델 남작이 우리 동료가 되겠다니? 이거 정말 우리도 진지하게 생각해봐야겠는 걸?”
이백호가 국어책을 읽는 톤으로 중얼거린다.누가 봐도 나를 비꼬고 있단 걸 알 수 있었으나, 단 한 명만은 그렇지 않았다.
“저… 백호……? 남작이 팀에 들어오면 내, 내가 있을 자리가 애매해지는데……?”
이백호 팀의 탱커, 렉 아우레스.그래도 탐험가라고 자기 밥그릇을 챙기는 본능은 남아 있는 듯한데…….약간의 눈치까지만 겸비했다면 훨씬 좋았을련만.
“아우레스… 부탁이니 가만 있어요 좀…….”
“…어, 어떻게 가만히 있소? 내, 내 자리가 위협을 받고 있는—!”
조용히 말리던 제이나의 노력도 통하지 않자, 이백호가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내질렀다.
“아니, 그런 거 아니니까! 좀 가만히 있으라고! 진짜 강퇴당할래?”
“…….”“아, 진짜 짜증나네.”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는 아우레스 때문에 맥이 탁 풀렸는지 한숨을 푹 내쉬는 이백호.연기 톤의 국어책 말투는 없어진 지 오래였다.
“이봐요, 남작님.”
“듣고 있으니 말해라.”
“탐험가들이 제일 잘하는 게 뭔지 알아요?”
그게 뭐냐는 눈빛을 던지자, 이백호가 나를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알아보는 거요.”
“……?”
“내가 유리한지 불리한지, 저쪽이 센지, 내가 더 센지.”
두근-!뒷말을 듣지 않았음에도 불길한 예감에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역시나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그걸 알아야 제대로 할 수 있거든요.”
“……뭐를?”
“뭐긴요. 이미 알면서.”
그 말을 끝으로 이백호가 눈짓하자 파멸할배와, 렉 아우레스, 그리고 제이나까지 이백호의 옆으로 다가선다.그리고…….
“야, 너 거기 계속 있을 거야?”
GM에게까지 툭 던지듯이 말한다.
“그러고 있다가 괜히 불똥 맞고 뒈진다?”
등골에 소름이 쫙 끼칠 만큼 진하게 흩뿌려진 살기에 GM이 멈칫하며 나와 이백호를 번갈아본다.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갈등이 깊어지는 듯했다.
아, 물론 ‘인간’답게 선택까지 긴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탱커와 마법사.이 두 조합으로 저 네 명을 상대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으니까.
“죄, 죄송합니다…….”
그래도 양심의 가책은 있었는지, 내게 사죄의 말을 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이백호에게 향하는 GM.딱히 배신감까지는 느껴지지 않았다.
애초에 이 새끼랑 나랑은 동료 같은 게 아니었으니.스윽…….무슨 짓이냐 묻는 대신, 방패를 들어 올리며 언제든 전투를 취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춘다.
그리고 그런 날 보며.
“너무 서운해하진 말아요. 솔직히 말하면 내가 더 서운하니까.”
이백호가 말한다.
“그도 그럴 게, 암만 봐도 그 늙은이랑 뭔가 얘기를 하고 나온 게 뻔하잖아? 근데 내가 다른 건 몰라도, 그 얘기가 뭔지는 꼭 좀 들어야겠거든.”
“…….”
“탐험가의 방식을 써서라도.”
이 새끼는 대체 탐험가를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그런 생각이 드는 한편으로는, 저 말이 당연하게 느껴지는 나 자신이 있다.
힘이 없으면 억울해지는 수밖에 없다.이는 물건을 사기 위해선 돈을 지불한다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이 세계의 섭리였으니까.
터벅.언제라도 달려들 기세로 한 걸음 다가오는 이백호.다만 다가온 만큼 뒷걸음질치며 물러나지는 않는다.그도 그렇잖아?
‘도망치는 건 불가능.’
이 상황에서 도망을 치면 어디로 칠 것이며, 이렇게 둔한 몸뚱이로 도망쳐 봤자 얼마 못 가 따라잡힐 뿐이다.
다만 그런 내 결정이 의외였을까?
“이야, 여기서도 안 물러나?”
이백호가 조금 놀란 듯 중얼거린다.하나 내가 보기에는 전혀 놀랄 구석이 없었다.
그야 방패는 뒤가 아닌, 앞에서 날아드는 공격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니까.
“설마 내가 못 죽일 거 같아서 그런 건가?”
뭐, 그 생각도 사실 하지 않은 건 아니다.이백호는 내가 심연의 문을 열기를 바라고 있으니.절대 나를 죽일 수 없다.하지만…….
“근데 이걸 어쩌나? 죽이지 못해도 좆 같게 만들 방법이 벌써 수십 개는 떠오르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놈을 무시할 생각은 없다.방금 이놈도 직접 말했듯, 죽이지 않아도 나를 괴롭힐 방법은 차고 넘치니까.
브라이엇이 겪었던 ‘심문’까지 갈 것도 없다.
“예를 들면, 입고 있는 장비를 전부 빼았는다든가. 앞으로는 여색에 한눈 팔리지 않게 중성화 수술을 시켜버린다든가.”
아, 어…….음, 중성화는 전혀 예상 못 했는데.
“…….”
씨바, 그냥 다 솔직히 말해야 하나?“그도 아니면, 돌아가서 남작님 동료들을 전부 다 죽여버린다고 협박—.
”아니, 그럴 리가.
“베헬—라아아아아아아아!!!!”
함성을 내지르며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는다.
“자꾸 뭐라고 짖는 거냐?”
이백호는 들개다.상대가 약해보이면 뼈에 살 한 점 남기지 않고 발라먹을 들개.그래, 그러니까…….
“잔말 말고 덤벼.”
물러나선 안 되는 자리다.***
여기서 더 말을 걸어봐야 짖는 소리만 우렁찬 개처럼 보인다 여겼을까?이백호가 입을 꾹 다물며 파생된 정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