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164)
제 111화
55화. 암흑마법회의 잔당들(6)
엔야가 넙죽 허리를 90도로 꺾었다. 그녀는 진이 룬칸델로서 다시 한 번 각성한, 이 역사적인 싸움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유일한 목격자다.
진이 일부러 비효율적인 싸움을 했다는 걸 모르는 그녀가 보기에도, 그야말로 압도적인 승리였다.
“존경합니다, 형님!”
“존경까지야, 많이 놀랐겠어, 오스틴. 아까 저것들 족칠 때부터 말이야.”
진이 실신, 혹은 사망한 암흑마법회 마법사들을 가리켰다. 역천이 펼쳐졌을 때 오십 가까운 마법사 중 8할 이상이 죽고, 2할은 치명상을 입은 채 의식을 잃었다.
그러나 그 2할조차 가짜 오턴을 제외하면 얼마 안 가 숨이 끊길 예정이었다. 치유 전문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지 않는 한, 하급 마법사들은 역천이 일으키는 역류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어…… 놀라긴 했어요. 여러모로…….”
애써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엔야는 실전 경험 한 번 없는 열여섯 소녀였다. 어릴 때부터 피 냄새를 맡아온 진, 시리스 같은 동갑내기처럼 전투와 죽음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사람이 이렇게 많이 죽은 건 처음 보지?”
“네. 약간 멀미가 나네요. 하지만 깨달았어요, 제가 어떤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엔야는 퀴칸텔이 했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진 룬칸델. 여기 있는 모두는 네 동료다. 네가 기수가 되어 룬칸델에서 형제들과 치고받을 때도 우린 함께 싸운다는 뜻이야. 툭하면 만만찮은 싸움이 있을 테지. 그때도 엔야더러 민폐만 끼치고 있으라는 말이냐?
“내키지 않는다면 계속 비전투 인원으로 남아 있어도 괜찮아. 나는 동료들 중 한 사람쯤은 편히 지내도 괜찮다고 생각하거든.”
진이 쓰러진 암흑마법회 마법사들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한 명, 한 명 목과 팔목을 짚어보고, 맥이 뛰는 마법사들의 몸속에 한 번 더 마력을 주입해 역류를 가속시켰다.
혹시라도 살아남아 킨젤로 상부에 무언가 보고하는 사람이 남지 않도록, 확인 사살을 하는 것이다. 단검으로 찌르는 대신 역류를 택한 건 차후 비먼트에서 조사가 나올 때 혼선을 주기 위해서였다.
무미건조한 얼굴로 확인 사살을 이어가는 진을 보며 엔야가 이를 악문다.
“이런 피 튀기는 삶을 강요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분명, 정상적인 삶은 아니잖아. 너는 원한다면 얼마든지 유쾌하고 따뜻한 삶을 살 수 있다.”
확인 사살을 끝낸 진이 씁쓸한 미소를 짓자 엔야가 고개를 저었다.
“형님 말대로 분명 정상적이지 않죠. 남을 죽이는 일, 아마 대부분은 싫어할 거예요. 편하고 안정적인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상황에서라면, 누구라도 그럴 겁니다.”
엔야가 천천히 진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울먹이는 얼굴로 진의 손을 붙잡았다.
“하지만 그 싫은 일을 형님과 다른 동료들만 감당하도록 두는 게 더 싫어요. 나도 같이 싸울게요.”
진의 동료로서 한 사람의 몫을 해낸다는 것.
그건 앞으로 무수히 많은 살인을 저질러야한다는 뜻이다. 진이 룬칸델을 쟁취하고, 지플과 전쟁을 치르고, 마침내 시론을 뛰어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명을 달리하겠는가.
이미 진과 동료들은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놓여 있었다.
‘티칸 자유도시’라는 그들의 작은 보금자리를 지키는 일조차, 살인과 전쟁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세상엔 여러 거대한 권력이 존재하고, 그 권력들은 호시탐탐 티칸을 노리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티칸을 노리는 세력은 더 많아질 것이다. 아직은 카시미르와 칠색조만 알려졌지만, 흑룡과 은룡, 그리고 유일한 룬칸델 마검사가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
티칸은 언제든 폭풍의 핵이 될 수 있었다.
“당장은 힘들겠지만, 저도 꼭 한 사람의 몫을 해낼 거예요. 오늘처럼 형님한테 보호받는 사람으로만 남고 싶지 않다고요. 그러니 저한테 편히 있어도 된다고 말하지 말아주세요.”
“오스틴.”
엔야가 물러서서 진을 바라보았다.
이내 한 손을 제 가슴으로 대며 호선을 그리고, 허리를 숙이며 한껏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리는 엔야.
“저는 올타의 계약자, 엔야. 언젠가 당신이 가장 신뢰하는 대마법사가 될 겁니다.”
티칸으로 돌아가면, 그녀의 하루는 이전과 달라질 것이다.
진은 갑작스레 격식을 차리는 엔야를 보며 멈칫했으나, 곧 그녀와 같이 예를 갖췄다.
“고맙군. 나 역시 언제까지나 그대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각오할게.”
인사가 끝나고, 잠시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난데없이 맹세를 담은 인사가 오갔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흠, 흠흠! 어, 그럼 이제 돌아가면 될까요? 아니면 여기서 더 할 일이……?”
“가짜 오턴을 챙겨야 해. 그놈은 일부러 살려뒀거든.”
“아! 암흑마법회와 킨젤로에 대해 물어볼 게 많을 테니까요. 음…… 아무래도, 고문 같은 것도…… 해야겠죠? 아하하, 방금 한 사람 몫을 해내겠다고 맹세했는데 고문을 생각하니 괜히 좀.”
진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보통은 고문을 해서 입을 열게 만들어야겠지, 본인이 술술 불지 않는 한. 하지만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어. 라트리 님이 있잖아.”
“아! 진실의 용님!”
“유리아가 직접 취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완벽하진 않아도, 인도적인 방법으로 어느 정도는 거짓을 가려낼 수 있다는 말이지. 라트리 님이 공명으로 유리아의 절대안이 가진 능력을 조금 빌리면 말이야.”
역사적으로 수많은 권력자들이 아즈 밀의 계약자를 탐한 이유는, 예지 능력뿐만이 아니었다.
‘절대안’은 거짓을 말하는 자의 표정도 읽을 수 있다. 거짓말을 극도로 훈련한 엄청난 정신력의 소유자가 아닌 이상 결코 절대안을 속일 수는 없었다.
“뭐, 정 안되면 고문도 생각해봐야겠지.”
진이 쓰러진 가짜 오턴을 둥글게 말아 묶어 로브로 감쌌다. 등에 메자 사람이 아니라 감자포대처럼 보였다.
그래도 가까이서 보면 티가 난다. 언제 의식을 되찾아 허우적댈지도 모르는 일.
‘관문 경비병들 눈에 안 띄게 데려가려면 꽤 귀찮겠어.’
우으으.
돌연 어디선가 낮은 신음이 퍼졌다. 홱 돌아보자 신음은 쓰러진 생도들 사이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생도들은 암흑마법회 마법사들과 달리 전원 살아 있는 상태였다. 진이 그들 쪽으로는 역천의 마력이 제대로 향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한 것이다.
언젠가 적이 될 가능성이 높은 이들이라고 하나, 이 자리에서 모조리 죽였다간 문제가 커질 가능성이 높았다. 또한 엔야 말대로 저들 중에 하나쯤은 괜찮은 인간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신음의 주인공은 칩이었다.
‘의외로 마력량이 높은 편이었나? 아니면 정신력이 뛰어난 편이었거나. 아니면 역천의 마력이 칩 쪽을 제대로 비껴간 건가.’
진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자 칩이 간신히 고개를 들어올린다.
“트, 특…….”
“아직도 내가 특임대로 보이나? 그리고 특임대라고 생각한다면 그 단어를 꺼내면 안 되지.”
“특임대가 아니었…… 군요…….”
파르르 몸을 떠는 칩.
사실 그도 역천이 펼쳐진 순간, 진이 특임대가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그건 언젠가 아카데미에서 배운 역류계 마법의 특성을 전부 포함하고 있었으니까.
칩은 그게 역천이라는 것까진 몰랐으나, 아무나 펼칠 수 없는 ‘대마법’이라는 건 똑바로 인지했다. 이제 칩의 눈에 진은 재야의 대마법사로 보였다.
그리고 이 대마법사가 아니었다면, 자신들은 모두 죽은 목숨이었다는 것도.
“당…… 신은…… 누구십…… 니까. 왜 우리를…….”
어눌한 목소리. 의식을 차렸을 뿐, 역류가 완전히 잠잠해진 건 아니다. 칩은 약에 취한 듯 몽롱한 상태였다.
“왜 구했느냐고? 내 동생이 그걸 바랐기 때문이다. 운 좋은 줄 알아라, 생도.”
“동생이라면…… 오스틴, 그레이……?”
엔야와 진의 눈이 마주쳤다. 이내 진이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이익!
엔야가 후드를 벗으며 콧수염을 떼고, 묶어둔 단발을 풀어헤쳤다. 각진 턱을 연출하기 위해 물고 있던 솜뭉치까지 뱉어내자, 엔야의 진짜 얼굴이 드러났다.
“파스칼 칩. 날 기억해?”
“엔…… 야.”
잠시 눈동자가 튀어나올 듯 커지는 (파스칼)칩. 그는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할 수 없다는 듯 헉헉 가쁜 숨만 내쉴 뿐이다.
“미안…….”
“미안한 줄은 아는구나. 나한테 대체 왜 그랬어?”
“미안, 잘못했어어.”
뭉개진 발음으로 미안해, 말하는 칩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진심으로 미안해서 흘리는 눈물인지, 그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눈물인지는 알 수 없다.
어느 쪽이든 엔야는 개의치 않기로 했다.
“아카데미 시절, 너와 패거리들은 날 괴롭히고 못살게 굴기만 했지. 하지만 나는 죽게 생긴 너흴 구해줬어.”
“내가…… 잘못.”
“원한다면 얼마든지 네게 복수할 수 있지만, 너희 같은 놈들과 난 다른 사람이야. 그 말을 하고 싶어서 변장을 푼 거야.”
끄윽, 끄윽, 끕. 칩이 울음을 삼키며 그런 소릴 내자 엔야가 그에게 말했다.
“내 눈을 피하지마, 수치스럽고 무서워도. 너희가 나를 괴롭힐 때, 내가 그랬듯이.”
“미안, 정말 미안해에.”
“한 가지만 기억해. 진 그레이와 내가 너흴 구했다는 것. 언젠가 이 빚을 받으러 너흴 다시 찾아올 거야. 알겠어?”
칩이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엔 진이 입을 열었다.
“차후 이번 일에 대해 조사가 시작되면, 얼마든지 우리에 대해 불어도 좋다. 칩 가가 멸문하는 꼴을 보고 싶다면.”
어차피 칩이 입을 닫고 있든, 열고 있든 비먼트가 차후 조사를 시작하는 건 피할 수 없다. 동굴 바깥의 생도와 마법사가 모조리 사망한 데다, 내부는 난리가 났으니.
‘아카데미는 명예 실추를 막기 위해 어떻게든 상황을 숨기고 포장할 거다. 반면 수사대와 특임대는 뭔가 캐내려고 난리를 치겠지. 생도들 증언으로 역천이 펼쳐졌다는 것을 알게 될 테니까. 칠색조를 시켜 정보를 조작해놔야겠군.’
진이 가만히 엔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방금 오랫동안 자신을 옭아매던 과거를 정면으로 극복한 셈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칩은 진과 엔야가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을 내놓았다.
“언…… 젠가…… 이 은혜를…… 꼭…… 갚겠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 그 말을 쥐어짜낸 칩이 다시 의식을 잃었다. 진과 엔야는 서로를 바라보며 한 번 어깨를 으쓱할 수밖에 없었다.
“별일이군.”
“그러게요. 좀 더 비굴한 이야기를 할 줄 알았는데 말이죠.”
진이 칩의 품을 뒤져 칩 가를 상징하는 명패를 꺼내들었다.
명패를 이용해 칩의 마부를 부려 관문을 빠져나가면 귀찮은 일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돌아가서 가짜 오턴이 무슨 말을 하나 지켜보자고.”
부바르 가스톤.
아마도 가짜 오턴에게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진짜 오턴을 알고 있는 생도 모두를 감쪽같이 속일 만큼 완벽한 변신은, 세상에 그 뚱보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