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848)
제 888화
211화. 오르갈의 협상(3)
오르갈은 대답하지 않고 파엘리토를 응시했다.
[오르갈, 왜 그리 놀라는가? 자네는 지토 님이 가장 좋은 인장을 내어주신 걸로 알고 있다만.] [……자네는 과거 지토에게 가장 치열하게 저항한 인물이니 놀라울 수밖에.] [아, 그런 시절이 있었지. 하지만 지토 님과 싸우면서 깨닫고 말았어. 엄밀히 말하면 싸운 게 아니라 지토 님이 내게 호의를 품으신 덕에 살아남을 수 있던 거지만.] [무엇을 깨달았다는 말인가?] [태양신이라는 질서가 그리 매력적이지 않다는 사실이다. 모든 게 정해진 완전한 세상이라니, 돌아보면 참 지루한 세계가 아니던가? 그렇기에 태양신도 죽음을 맞이한 것이겠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를 부활시키는 게 아니라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것이었다.]오르갈은 지토가 원한 ‘새로운 질서’가 무엇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폭력과 고통.
지토는 그야말로 인간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마왕, 마신, 지옥의 지배자 같은 이미지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인물이었다. 오직 폭력과 고통만이 세상의 질서와 균형을 유지하고, 유희까지 된다고 생각하는.
당연하게도 당시 대부분의 마족들은 지토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토는 그 압도적인 힘을 내세워 자신에게 저항하는 자들을 순식간에 도륙하며 세를 불렸다.
그때 반지토 세력의 우두머리 격 인물이었던 게 바로 지금 눈앞에 있는 파엘리토였건만.
오르갈은 그의 변절에 적잖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파엘리토가 지토에게 넘어갔다면…… 지하엔 지금 지토에게 대항하는 자가 거의 없다는 뜻이다……!’
지토가 이토록 갑자기 깨어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마계 전체가 지토를 추종하고 있다면 그의 의식을 깨우기 위해 그만큼 많은 인력이 투자되었을 터였다.
‘하지만 지토의 영향력이 그토록 높았던 이유가 무엇이지? 그와 아메리스가 잠들었을 때, 지하엔 분명 평화가 찾아왔었다. 지토를 따르던 이들도 대부분 몰락한 상태였을 텐데, 어째서 이렇게? 설마 파엘리토가 남은 추종자들을 규합해서 일을 벌인 건가?’
파엘리토는 오르갈의 속내를 꿰뚫은 듯 미소를 지었다.
[지토 님이 부활할 수 있던 이유가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지. 그리고 그 사실이…… 그다지 반갑지 않은 듯 보이기도 하는군.]오르갈은 감각을 곤두세웠다.
[안타까운 일이야. 지토 님은 그 누구보다도 자네를 총애하는데…… 자네는 지토 님을 거부하고 있으니.] [자네에게 고통을 즐기는 취향이 있었는지 몰랐군.] [그저 세상에 새로운 질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자네가 본 지상은 어떻지? 아마 지하와 크게 다를 바가 없을 테지. 온갖 부조리한 일들이 가득하고, 운명을 벗어나 설치는 하등한 존재들도 넘쳐나지 않나? 우린 그것들을 정화하고, 세상이 옳게 흐르도록 만들려는 것뿐이다.]파엘리토는 변절했고, 지하는 지토의 통치를 받는 게 거의 확실했다. 오르갈은 이제 지하에 남은 반지토 세력이 유의미한 수준이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네 뜻을 알았으니 괜한 걸음은 아니었군. 나는 이만 돌아가겠네, 파엘리토. 지내다 보면 곧 다시 만날 날이 있을 테지.] [멈추게, 오르갈. 난 아직 자네가 떠나는 걸 허락한 적이 없네만.]스릉…….
파엘리토의 손에 한 자루의 거대한 장검이 형성되었다. 응축된 보랏빛 마기가 이글거리며 순식간에 어둠을 몰아냈다.
[……허락?]오르갈도 천천히 검을 뽑았다.
[지토 님의 뜻을 거부하고 있으니, 자네는 방금 전에 나의 적으로 규정이 되었어. 지토 님의 뒤를 이어 언젠가 진마계의, 세상의 제왕이 될 기회를 정말 이렇게 걷어찰 셈인가? 여전히 지토 님은 자네를 원한다.] [그딴 영화와 권력을 원했다면 그 시절 자네와 더불어 지토에게 대항을 하지도 않았을 테지.] [태양신이라는 헛된 꿈을 아직도 놓지 못하고 있군.] [닥쳐라, 파엘리토. 세상이 온전해지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그것뿐이다. 폭력과 공포? 그런 간단한 방법을 추구한 군주는 인세에도 많았어.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지. 근본적으로 불완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하등한 인간 따위와 진마계의 왕이 같을 수는 없다, 오르갈. 이제 보니 지토 님을 잠들게 한 것도 네놈이었군. 자네만 아니었어도, 우린 지금쯤 지상에 낙원을 이루고 있었겠어.] [파엘리토, 내가 요구하고 싶은 것은 단 하나다.] [요구라…… 그리 적절한 표현은 아니지만, 들어보도록 하지. 무엇인가?] [불가침. 지하에 살던 이들은 지하에서만 살고, 지상에 살던 이들은 지상에서만 산다. 이 당연한 조건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전쟁이다.] [하하……!]파엘리토는 허리가 꺾일 정도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이내 표정을 싹 지우며 검을 휘둘렀다.
[자네는 우선 고통을 느낄 필요가 있겠어. 머리가 맑아질 때까지.]스악-!
파엘리토의 검이 오르갈의 뺨을 스쳤다. 오르갈 역시 그 순간에 반응해서 파엘리토의 어깨에 자상을 남겼다.
‘마검 바스칼라인가.’
바스칼라,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건 한때 오르갈의 검이었다. 과거 지토가 태양신의 힘을 통해 직접 만든 검으로, 상대의 특수한 능력을 봉인하는 능력이 있었다.
가령 계약을 통한 신의 힘이나 초재생 등의 능력을 차단하는 것이다. 오르갈은 뺨의 상처가 아물지 않는 걸 느끼고 있었다.
[지토 님이 자네를 위해 만든 검, 바스칼라. 이것으로 자네를 베고 있으니 참으로 애석한 마음이 드는군.] [바스칼라를 자네가 갖고 있다는 건 지토가 새로운 후계를 골랐다는 뜻 같은데.] [뭐, 나는 그렇게 되길 원하는 입장이지. 지토 님은 네가 다시 이 검을 잡을 수 있도록 도우라 하셨다.] [그냥 선물해주는 것이라면야 얼마든지.] [농담이 늘었군.]오르갈은 적극적으로 파엘리토의 공격에 응수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와 싸우기에 적기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지금 깊은 부상을 당하면 지토의 복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전에, 인세의 위협도 부담스러워질 터였다.
[호오, 자네 많이 크긴 했군. 감히 그런 태도로 이 파엘리토를 감당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가? 정말 지상에서 그 정도의 성취를 이룬 것이야?]검마.
지하에서 파엘리토를 부르는 이명이었다. 검에 한해서는 파엘리토를 능가할 수 있는 마족이 아무도 없기에.
[그 시절 자네에 비하면 믿을 수가 없을 정도야. 이 정도 속도도 무난히 받아내는 걸 보니. 도태된 마족들을 이끌기에는 부족함이 없었겠어.]공방 자체는 아직 오르갈의 기세가 크게 밀리지 않고 있었다.
문제는 바스칼라, 마검의 힘이 오르갈의 능력을 억제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오르갈은 상처가 전혀 회복되지 않는 반면, 파엘리토는 피가 흐르기도 전에 환부가 아물고 있었다.
강철의 권능을 비롯한 다른 능력들도 바스칼라의 억제력에 가로막히고 있었다. 오르갈이 파엘리토에 대항할 수 있는 수단은, 오로지 순수한 검술뿐이었다.
그 역시 초월적인 수준이기는 하나.
파엘리토의 눈엔 아직 완성되지 못한 검에 불과했다.
[뭐, 그래도 칭찬해주도록 하지. 애초에 지토 님이 자네를 후계로 정한 건 무력 때문이 아니니까. 하급 마족에 불과했던 자네가 이토록 강해진 건, 분명 놀라운 일이야. 운명을 몇 번이나 초월해야만 가능한 영역이니.]서컥-!
파엘리토의 검기가 바닥에 흉측한 흔적을 남겼다. 피하지 못했다면 그대로 몸이 몇 갈래로 찢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오르갈은 자신의 몸보다도 봉마벽의 균열을 먼저 생각했다. 자신과 파엘리토의 검이 격돌할 때마다 봉마벽의 균열에 조금씩 영향을 주는 것 같았다.
[봉마벽은 걱정하지 말게. 이 정도로 부술 수 있었다면 자네가 여기까지 찾아올 일도 없었을 테니.] [처음으로 듣기 좋은 이야기로군.] [하지만 슬슬 나의 인내심에 한계가 오고 있어. 그간 떨거지들만 상대하느라 감을 많이 잃었군, 오르갈. 나는 자네가 전력을 다해도 이길 수 없는 상대다. 옛정을 생각해 검에 여유를 두는 건 여기까지라네.]파엘리토의 두 눈동자가 자줏빛을 뿜었다.
그리고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오르갈은 자신의 눈동자가 베이는 고통을 느껴야만 했다. 바스칼라가 아니라, 파엘리토의 의지가 그의 눈을 베어버린 것이다.
‘눈이……!’
초재생이 발동하지 않으니 시야는 돌아올 수 없다. 오르갈은 남은 전투를 감각만으로 치러야 했다.
심안과 심검의 경지는 옛적에 지났으니 능력이 봉인된 것만큼 전투력이 급감하지는 않을 테지만, 오르갈은 이미 격차를 느끼고 있었다. 이 상태로는 결코 파엘리토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한 것이다.
[호오…… 붉은 검이라. 점점 더 나를 놀라게 하는군, 자네. 이토록 귀한 힘까지 가지고 있다니.]파엘리토가 오르갈의 검에 맺힌 붉은 오러를 확인하며 말했다. 과거 루나가 안드레이를 벨 때 사용한 적월과 유사한 형태의 오러였다.
파엘리토는 처음으로 조심하는 모습을 보이며 찬찬히 오르갈을 압박했다.
[아니지. 자네가 지토 님을 잠들게 만들 수 있던 게 이 검 때문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 그때도 힘을 숨기고 있던 건가.]오르갈은 대답하지 않고 몰려드는 파엘리토의 검격을 받아냈다. 대답할 여력이 전혀 없기도 했다. 바스칼라의 억제력이 아까보다도 더 강해진 탓에 오르갈은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울 지경이었다.
능력이 전부 다 차단되면, 그는 다른 치명상을 입지 않아도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오르갈, 이제 끝난 것 같군.]결국 파엘리토는 오르갈이 마지막으로 펼친 붉은 칼날을 모두 피해내며 손으로 그의 복부를 관통했다.
[컥…….]손이 아니라 바스칼라에 찔렸다면 그대로 즉사했을 것이다. 오르갈은 겨우 의식을 붙잡은 채 파엘리토를 노려보았다.
저항할 수 있는 수단이 단 하나도 남지 않았다.
‘빌어먹을, 이토록 허무하게…… 우리의 대업이. 부단장이 내 뒤를 잘 이어갈 수 있을까…… 지상과 지하의 괴물들을 상대로.’
그러나 파엘리토는 지금 오르갈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
[이만하면, 감히 진마계를 상대로 전쟁 운운한 자네의 오만을 반성할 정도는 되겠지. 오르갈, 나조차 감당할 수 없으면서 감히 지토 님께 대항하지 말게. 다시 지토 님의 후계가 되고, 새로운 질서를 정립하는 일에 기여하란 뜻이네.]파엘리토가 오르갈을 땅으로 내던졌다.
[지토 님의 자비는 광대하나, 영원하지는 않아. 지토 님의 자비가 분노로 바뀌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옳은 선택을 하길 바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