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haebol's Youngest son RAW - Chapter (63)
64화. 한도영의 촉.
96년 12월 1일.
96년도 이제 한 달 밖에 남지 않았다.
벌써부터 동장군이 몰아치는 가운데, 한국경제에도 심각한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수면아래에서 은밀하게 회자되던 보한제철의 부도가능성이 전격적으로 수면 위로 부상한 것이다.
백산중공업.
한도영은 김혁수, 권영길, 우철희를 모아놓고 월간회의를 진행 중이었다.
차례로 월간보고를 받은 한도영은 보고서에 싸인하여 돌려주었다.
“요즘 보한제철 어때요?”
한도영이 지나가는 말투로 김혁수에게 물었다.
사실 김혁수에게 자세하게 조사를 내렸었고, 이런 중요한 부분은 권영길, 우철희도 알아야했기에 월간회의 시간에 그것에 대한 교육을 할 생각이었다.
“현재 보한제철은 무리하게 대출을 끌어다 써서 이자가 영업이익을 초과한 상황입니다. 은행도 더 이상의 대출에 난색을 표하고 있고, 정부의 시선 또한 매우 차갑습니다.”
김혁수는 가감 없이 보한제철에 대해 설명했고, 권영길과 우철희는 큰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설마 재계서열 15위의 보한제철이 쓰러지진 않겠죠?”
권영길이 급히 되물었다.
이미 우성그룹, 건영건설이 부도났지만, 보한제철의 부도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차원이 달랐다.
그렇기에 권영길이 화들짝 놀라 되물은 것이다.
“부도가능성이 큽니다. 은행에서는 보한제철 회장 장덕수에게 ‘주식을 모두 내놓고, 이선으로 물러나라. 그러면 대출을 연장은 물론이고 새롭게 대출도 해주겠다.’는 입장인데, 장덕수는 전혀 물러날 생각이 없으니까요. 대마불사라고 할까요? 그는 정부가 절대 보한제철을 부도내지 않을 것이란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김혁수의 대답에 우철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랫동안 법정관리를 당하며 고생한 그는 장덕수의 생각이 얼마나 허황스러운지 알았다.
“예외란 없지요.”
우철희는 짧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곧 결정이 날 겁니다. 제가 볼 때, 보한제철이 부도나면 대한민국의 경제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추락할 겁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단단히 대비하세요. 긴축하시면서 현금보유비중을 늘리세요. 이제부터 백산중공업은 긴축경영체제로 돌입합니다.”
한도영이 긴축경영선언에 셋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사장님. 장덕수가 은행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아 부도가 난다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어느 정도일까요?”
권영길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처음에 한도영을 만났을 때는 그의 나이가 너무 어려서 걱정을 했었는데, 몇 달 함께 일하면서 그런 우려는 깔끔하게 사라졌고 오히려 그에게 의존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권영길이었다.
“은행에서 기업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뀔 겁니다. 그 전에는 웬만하면 대출을 연장해주고, 신규대출을 해줬다면 이제부터는 깐깐하게 들여다보겠죠. 은행이 그렇게 태도를 바꾸면 기업들은 자금압박에 시달릴 테고, 그동안 대출을 많이 해온 기업들의 재정상태는 악화됩니다. 솔직히 걱정입니다. 과연 몇 개의 기업이 버틸 수 있을지. 어쩌면 내년은 기업부도 쓰나미가 발생할지도 모릅니다. 부디 내 생각이 틀렸으면 좋겠군요.”
한도영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마무리했다.
미래를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실내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그렇게 긴축경영을 약속한 후, 회의가 끝났다.
김혁수만 남았을 때, 한도영은 문득 홍건희가 생각났다.
“참, 홍 실장님 만나봤어요?”
“네. 만나서 소주 한 잔했는데 회사일은 아닌 것 같고, 집안에 문제가 있는 듯 했습니다. 둘째가 골칫덩이거든요.”
“회사 일에 바쁘면 집안을 관리하기 어렵죠. 휴우, 안타깝군요. 둘째가 공부안하고 사고 쳤습니까?”
“그게···.”
김혁수는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대마초를 구입하여 피웠습니다.”
“대마초라면 마약이군요. 걸리면 처벌을 면하기 어려울 터인데.”
“그런데 마약이 중독성이 강하지 않습니까? 대마초 말고도 다른 마약을 구입하여 은밀하게 투약한 듯합니다.”
“허어, 정말 걱정이 많겠군요.”
한도영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로 흔들었다.
성실한 홍건희에게 둘째 홍명석의 비행은 실로 충격적이었으리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나중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룹경영권을 내가 인수하면 홍 실장도 데려다 쓰고 싶었는데. 지금쯤 마음이 너덜너덜해졌을 텐데. 안타깝군. 안타까워.’
한도영은 진심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그와 대화하다보니 이상한 점을 간파했습니다.”
“이상한 점요?”
한도영은 급히 정신을 차리고 김혁수의 말에 집중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가 나오다 우연히 한강식 사장님이야기가 나왔는데, 홍 실장님이 경멸하는 눈빛으로 ‘당장 그 사람 이야기 집어치워!’ 하고 소리치더군요. 정말 놀랐습니다. 성실하고 남에게 모진 말을 잘 못하는 사람인데. 더군다나 한강식 사장님은 그가 존경하는 회장님의 둘째 아들입니다. 홍 실장님의 그런 태도에 깜짝 놀랐습니다.”
한도영의 눈이 길게 가늘어졌다.
전생에서 기업사냥꾼으로 살았고, 목적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소시오패스라고 비난을 받았던 그였다.
비록 지금은 그렇게 살고 있진 않았지만, 여러 흑막을 경험했던 그의 촉이 발동했다.
-아주 심각한 뭔가 있다. 한강식이 홍건희가 가진 뭔가를 빼앗으려고 하고, 홍건희는 반발하는 것이다. 그게 뭘까?
음모술수가 판치는 아수라장을 헤쳐 나온 그였기에 단번에 숨겨진 뭔가를 깨달았다.
“홍 실장님을 만나게 해주세요.”
“예?”
“부탁합니다. 직접 만나서 대화하고 싶군요.”
“알겠습니다.”
김혁수는 한도영의 질문이 뜬금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대로 지시를 따랐다.
이틀 후.
한도영은 강남의 음식점에서 홍건희와 식사를 함께 했다.
확실히 홍건희는 몰라보게 야위어있었고, 눈에서는 흉흉한 기운이 감돌았다.
“저를 뵙자고 하셨다고요?”
어딘가 모르게 날카로워진 목소리.
한도영은 자신의 직감이 맞다고 확신했다.
“그동안 백산그룹을 위해 고생하셨는데, 고맙다는 인사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식사라도 대접하려고 이렇게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한도영의 감사표시에 홍건희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한도영이 그에게 감사표시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럴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군요. 제게 그런 마음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홍건희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겸손하게 대답했다.
주문했던 식사가 나왔고, 식사를 하면서 한도영은 홍건희에게 한득병을 도와 백산그룹을 일으킨 노고에 감사했다.
좋은 이야기를 통해 분위기를 띄웠지만, 확실히 홍건희는 예전과 달랐다.
원래 성실한 성격이라 속내를 숨기고 다른 말을 하는데 익숙하지 않은 홍건희의 성격을 잘 알았기에, 한도영은 좀 더 깊숙이 파고들기로 마음먹었다.
“어려운 일이 있다면 제가 좀 돕고 싶습니다.”
홍건희는 뭔가 찔리는지 흠칫하는 표정을 지으며 숟가락을 멈췄다.
“아뇨. 괜찮습니다. 어려운 일 없습니다.”
대화를 하지 않고 밥 먹는데 열중하는 홍건희를 바라보며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확신했지만, 그가 입을 열지 않으니 어떤 문제인지 알 수 없어 답답했다.
둘째 문제는 오래되었으니 그 문제는 아니라 판단했지만, 일단 그 문제부터 짚기로 마음먹었다.
한득병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그였기에 분명 백산그룹과 관련된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혹시 홍명석 문제라면 제가 도움을···.”
“그만하시죠. 제 자식은 제가 관리합니다.”
홍건희는 단호하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도영은 바로 따라 일어서며 그를 막아섰다.
“저의 이런 행동이 오지랖이란 걸 잘 압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투병중이어서 사실상 홍 실장님이 백산그룹을 이끌고 계신데, 갑자기 행동이 변하셨으니 어찌 걱정이 안 되겠습니까? 홍 실장님은 자연인이기 전에 백산그룹 경영인입니다. 도대체 무슨 문제입니까? 말씀이라도 해주셔야 돕든 말든 할 게 아닙니까? 모두 홍 실장님을 보고 있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홍건희는 한도영을 노려보았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도영은 좀 더 자극적인 질문을 던져 그의 속내를 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혹시 홍 실장님도 백산그룹을 노리십니까?”
“저를 모욕하지 마십시오.”
“그럼 따로 뭘 챙기셨습니까?”
한도영은 홍건희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걸 놓치지 않았다.
‘설마 홍 실장님도 이 기회를 이용해 한 몫 두둑하게 챙기셨단 말인가? 참으로 개탄스럽구나. 그래도 홍 실장님만큼은 믿었거늘.’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에 뵙겠습니다.”
홍건희는 살짝 목례를 하고는 식당을 나섰다.
한도영은 허탈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홍건희에게 어떤 큰일이 벌어진 것 같은데, 그게 감이 오질 않았다.
하지만 그의 직감은 말하고 있었다.
백산그룹과 관련한 중대한 일이란 것을.
한도영은 핸드폰을 꺼내 한충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쩐 일이야? 홍 실장님과 식사한다더니.”
“저 드릴 말씀이 있어요.”
한도영은 한충식에게 홍건희와의 대화내용을 가감 없이 설명했다.
그리고 자신의 느낌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한충식도 충격을 받았는지 한동안 말이 없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홍 실장님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다. 그건 이 아비가 장담한다.”
“그럼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요? 우리가 모르는 어떤 문제가 있는 걸까요?”
“내가 한번 만나보마. 짐작 가는 게 있는데···.”
“그게 뭔데요?”
“일단 만나보고 알려줄게. 먼저 집에 가 있어.”
통화를 종료한 한충식은 심각한 문제라고 판단하고는 수행기사를 불러 홍건희의 집으로 향하면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장님까지 왜 이러십니까?”
홍건희는 답답한 표정을 지으며 소릴 질렀다.
한충식은 그의 손을 잡아 이끌어 차에 태우고는 준비한 따뜻한 음료를 건넸다.
그는 수행기사에게 차라도 한잔 마시고 오라고 지시했다.
“홍 실장님.”
“네. 피곤하니 빨리 말씀해주세요.”
평소와 달라도 너무 달라진 홍건희의 태도에 한충식의 표정이 굳어졌다.
“홍 실장님. 혹시 차명지분을 갖고 장난칠 생각입니까?”
차명지분이 나오자 홍건희는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한충식은 그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압니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아버지는 저를 후계자로 생각했었지요. 그래서 차명지분에 대해서도 지나가듯 말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내 성격상 그런 걸 싫어하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요. 하지만 오늘 홍 실장님을 보니 차명지분에 욕심이 있어 보입니다. 아닙니까?”
“아닙니다! 아니에요! 왜 나만 못살게 들들 볶습니까? 나도 차명지분에 조금도 관심이 없습니다.”
홍건희는 억울한지 소리를 질렀다.
그러더니 눈가에 분노의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럼 뭡니까? 왜 오해할 행동을 하세요. 제가 도와드릴 테니 말씀하세요. 지금 홍 실장님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백산양회, 백산정유, 백산제지, 백산에너지를 경영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홍 실장님의 사소한 행동은 큰 오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한충식의 차분한 설득에 홍건희는 몇 번이나 자책하더니 입을 열었다.
“제가 백산건설 지분 8%를 차명으로 소유하고 있습니다. 회장님의 것이지요. 회장님께서는 백산그룹을 위해 의결권을 행사하라고 지시하셨는데, 그걸 한강식 사장님이 알았나 봅니다.”
여기까지 듣고 한충식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단숨에 알아차렸다.
“강식이가 협박했군요. 대상은 분명 명석일 테고요.”
“미안합니다. 가화만사성이라 했는데, 부끄럽군요.”
“제가 해결해드리죠. 절대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지분도 처분해주십시오.”
그동안 얼마나 시달렸는지 홍건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충식은 그의 두 손을 꼭 잡았다.
경영을 배울 때, 홍건희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났다.
그때 홍건희를 형처럼 의지하며 배웠었다.
“건희 형. 우리 집안일 때문에 힘들게 해서 미안해. 내가 반드시 문제를 해결할 테니까, 마음 편히 가져.”
이런 식으로 형 동생한 지 벌써 10년이 넘게 흘렀다.
홍건희는 창밖으로 돌렸던 시선을 한충식에게 돌렸다.
“부탁한다. 강식이가 명석이를 감방에 넣겠다고 협박했지만, 차마 회장님을 배신할 순 없었다. 정말 많이 힘들다.”
“내가 반드시 처리할게.”
한충식은 홍건희를 위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