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untess's Shield Protects the Kingdom RAW novel - Chapter (96)
제96화
무투술(武鬪術).
야금술과 제련술이 아직 발전하기 전인 고대, 몬스터와 아인족들을 상대하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육체의 기술들.
하지만 날카로운 날붙이들, 단단하기 그지없는 방패와 갑옷을 만들 수 있게 된 후부터 무투술이란 호신술이나 교양이라는 개념으로 뒤처지게 되었다.
당연했다.
오러를 사용하더라도 날붙이를 통해 사용하는 편이 한층 더 날카롭고 강하게 사용할 수 있었으니까.
굳이 무식하게 육체를 고집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만약 그 육체를 날붙이에 못지않게 만들 수 있다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필라도르 왕국의 제2 왕국기사단장 융켄은 지금 그에 대한 대답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쾅, 쾅, 쾅, 쾅, 쾅!
“크윽!”
융켄은 이를 악물었다.
주먹, 수도(手刀), 팔꿈치, 머리, 어깨, 무릎, 정강이, 뒤꿈치….
인간의 신체에 숨겨진 온갖 무기들.
그 수많은 무기들이 연계되어, 검이나 창이 만들어내지 못하는 각도에서 끊임없이 공격해왔다.
단련된 무투술의 대가가 얼마나 무서운지 융켄은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하물며 지금 싸움이 벌어지는 장소는 뒷골목.
거미줄과 같이 뻗어져 있는 골목들은 대부분 건물과 건물 사이가 촘촘하여 검을 휘두르기에 적합하지 않은 환경이었다.
쾅!
수비로 일관하자 날아온 뒤차기에 융켄이 고랑을 만들며 주욱 밀려났다.
어느새 그의 갑옷은 여기저기 우그러져 갑옷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고 보아도 무방한 상태였다.
“흐음.”
융켄을 궁지로 몰아넣은 청년, 제롬이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단장님.”
아직 앳됨이 남아 있는 청년은, 왕국의 기사단을 이끄는 한 축인 자신에게 담담하게 물었다.
“투항하지 않을래요?”
* * *
‘역시나.’
마지노 요새로 서둘러 달려온 것이 정답이었다.
미다스 후작가도 만만치 않지만, 그 오랜 세월 동안 후작가를 견제해온 왕가라고 멍청이들만 모여 있을 리 없었다.
하물며 작금의 왕인 몽마르트와 독사 베르사유라면 더더욱이나 경계해도 모자랐다.
요새에 도착한 이후 곳곳을 돌아다니자 익숙하면서도 조금씩 이질적인 기운을 품은 이들이 느껴졌다.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플라워 휠을 익힌 미다스 후작가의 기사들이라는 사실을.
‘나름대로 자신들에게 맞게 변형도 하고. 후작도 나름대로 고생이 많았겠어.’
그들의 움직임이 뒷골목으로 향하자, 그와는 달리 정석적인 기사의 기운이 느껴지는 이들이 뒷골목을 포위하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느껴지는 우직한 기운으로 볼 때 왕국 근위기사단임을 눈치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 후로 일어나는 사건을 본 후, 지금의 상황이었다. 미다스 후작가의 기사들과 조용히 접촉하여 일을 처리하려 했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별수 없었다.
중년의 기사, 융켄은 마치 모욕을 받았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개소리지?”
“말 그대롭니다, 단장님. 굳이 불필요한 희생을 더 할 이유가 있나요?”
비록 필라도르 왕국이 강국은 아니라 하나, 그럼에도 왕국의 근위기사단장이라는 자리는 아무나 오를 수 있는 자리는 아니다.
‘나한테 금방 제압당했다지만, 엑스퍼트 최상급의 인재야. 이렇게 소모할 자는 아니지.’
융켄은 추후 마스터의 문을 열고 베르사유를 지키다가 우리에게 죽은 이였다.
성정이 올곧아 왕의 친위대장까지 역임한 이지만, 불의를 저지른 왕국에 번뇌하던 이.
죽이기에는 아까운 자였다.
“융켄 기사단장님, 단장님의 신념과 고결한 도덕성은 저희 방패가까지도 널리 전해져 왔습니다. 그런 분께서, 이런 추잡한 전장에 끼시는 걸 보고 싶지 않군요.”
가문의 이름을 언급하자 융켄이 나의 정체를 파악했다.
“…방패가라. 그대가 바로 제롬 공자인 모양이군. 벌레라는 말이 아쉽지 않은 망나니였다가 정신을 차렸다더니. 소문이 사실을 따라가지 못하지 않는가. 정신을 차린 정도가 아닌데.”
설마 융켄 자신을 제압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겠지.
“미안하지만, 이 몸은 필라도르 왕국의 기사이다. 기사 된 자로서 전황이 불리하다 하여 주군을 바꾸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 일.”
처억.
온몸의 갑옷이 너덜너덜해졌음에도 재차 자세를 잡는 융켄의 모습에는 신념이 어려 있었다.
“자아, 그대가 원하는 바를 이루고자 한다면, 나를 쓰러뜨려라. 그리하여 그대들의 신념이 옳음을 증명하라.”
“으음….”
역시나, 쉽게는 안 되는군.
‘앞으로 기회는 많으니까.’
나는 결정을 내린 후, 융켄을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그럼, 당분간 답답하시더라도 이해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판크라티온의 월보가, 올곧기 그지없는 기사를 향해 펼쳐졌다.
“…어떻게 된 것인지, 여쭈어보아도 되려는지요.”
근위기사단을 제압한 후. 얼굴에 상처가 가득한, 꿈에 나올까 두려운 외모를 한 남자가 차분함을 잃지 않은 채 내게 물어왔다.
“공자께서는 수도, 베르티에서 성문을 여시기로 후작님과 약속이 되신 것으로 압니다. 한데, 어떻게 이곳 마지노 요새에….”
맥스라고 했던가. 뒷말은 생략했지만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수도에 도착하자 왕가에서 천명(闡明)하였습니다. 사흘 후 미다스 후작가를 징벌하겠다고요. 아무래도 이상해서 생각해보니, 빈트 평야나 마지노 요새 중 하나에서 승부가 날 것이라 여겼습니다. 다행히 늦지 않았네요.”
미다스 후작가의 푸른 들 기사단은 정보 수집과 분석, 첩보 활동에 특화된 기사단이다.
그 우두머리를 맡고 있는 자인 만큼 내 말을 단번에 이해하였다.
“…과연. 공자님의 총명함이 범상치 않습니다. 더 이상 과거의 좋지 못하셨던 명칭의 모습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으시군요. 감탄하였습니다.”
맥스는 진심으로 탄복한 것처럼 보였다. 하긴, 이번에 죽다 살아났으니 고마울 만도 하지.
“별말씀을. 그래서, 원래 푸른 들 기사단이 하려던 계획은 무엇이죠? 돕겠습니다.”
자고로, 노는 물이 들어왔을 때 더더욱 저어야 하는 법이다.
달조차 수줍음에 구름 뒤로 숨어드는 밤.
마지노 요새의 성벽에는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병력들이 상주하고 있었다.
“오늘따라 인원이 많은데? 무슨 일이라도 있나?”
왕국으로 가는 요충지라고는 하나, 전시 상황도 아닌 시기에 이토록 많은 병사들이 성벽을 경계하는 것에 누군가가 의문을 제기했지만.
“몰라, 우리 같은 이들이 뭘 알겠나. 윗분들이 까라면 까는 거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요새 안에 있는 몇몇 극소수의 사람들은 배치된 병력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역시나. 그렇게 쉽게는 안 되려나 봅니다.”
“근위기사단이 복귀하지 못했으니, 작전이 실패로 돌아갔다 여기고 경계를 늘린 모양이네요.”
보통의 지휘관이라면 근위기사단이 복귀하지 못한 상황에서 병사들을 풀어 기사단을 찾아 나서려 했을 것이다.
다른 이들도 아니고, 근위기사단은 왕가에서도 중요한 무력 단체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적들은 근위기사단의 수색이 아닌 성벽의 강화를 선택했다.
어차피 근위기사단은 대부분 귀족들의 자제였다.
그런 그들을 해코지한다면, 비록 필라도르 왕가에게 승리를 거둔다하더라도 내부의 적들을 무수히 많이 만드는 결과를 야기할 터.
그렇기에 그들을 과감히 버린다.
그렇기에 조용히 경계만 강화한다.
그렇기에 요새는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요새 내부에서는 어떠한 동요도 찾아볼 수 없었고, 빈틈을 타 요새 내부를 더욱 혼란스럽게 하려던 맥스의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으음, 곤란하군요. 성벽에 저토록 많은 인원이 경계하고 있어서야 요새 문을 탈취하기 쉽지 않을 텐데….”
맥스는 적들의 차분한 대처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다고 이대로 아무것도 못 한 채 시간만 소모한다면, 필라도르 왕가의 본대가 마지노 요새에 도착할 터.
그렇다면 미다스 후작군에게 더 이상 승리란 요원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떻습니까?”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있으신지요?”
“좋은 방법…인지는 판단하시기 나름일 것 같습니다만.”
내 생각을 들은 맥스의 눈이 점점 커져갔다.
* * *
마지노 요새의 중앙 첨탑. 요새의 방벽들을 향해 어디든 시야가 닿는 이 첨탑은 유사시 재빠른 명령을 내리기 위해 설계된 곳이다.
“불편하신 것은 없으신지요?”
첨탑의 주인이자 요새의 책임자인 위그노 자작은 연신 누군가를 향해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왕국으로부터 마지노 요새의 수장으로 임명된 자작이 고개를 숙일 일은 평상시라면 없었으니까.
하지만 하루 전, 평상시와 달리 왕가에서 한 인물이 찾아온 탓에. 요새의 가장 높은 자가 바뀌었던 것이다.
“아뇨. 딱히 없어요, 자작. 그보다, 부탁한 건?”
“말씀하신 대로 성벽 경비 인원을 평상시보다 세 배 증가해 두었습니다, 왕세자 저하.”
젊디젊은 목소리의 질문에 위그노 자작이 답했다.
위그노 자작의 답변에 왕세자, 베르사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2 근위기사단이 통째로 연락이 두절되었어요. 아마 분명 내부에서 성벽을 흔들려 할 겁니다. 성벽의 방비를 더 탄탄히 해주시길 바라요.”
제롬이 그러했듯, 베르사유 또한 알고 있었다.
오늘 밤이 승부처라는 사실을 말이다.
‘내일이면 왕국군이 도착한다. 그럼 미다스 후작군이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어.’
어차피 후작가의 병력으로 이 요새를 돌파하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분명 무슨 일을 벌일 것이다.’
베르사유가 그렇게 생각할 때.
쾅!
첨탑 꼭대기의 문이 열리며 한 병사가 달려 들어왔다.
“크, 큰일입니다!”
“무슨 일이냐!”
위그노 자작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왕세자 저하가 방문하셨으니 채신머리없이 소란 떨지 말라 일러두었건만.
하지만 병사는 위그노 자작의 그런 반응을 고려할 틈이 없었다.
“불입니다!”
“불?”
“요새 곳곳에 불이 났습니다! 국지적으로 일어난 불이 동시다발적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특히, 병기고와 군량고에 불이 가장 거세게 일고 있습니다! 어서 빨리 진화하지 않으면, 수많은 물자들이 잿더미가 될 상황입니다! 자작님, 명령을!”
“뭐라!”
병사의 말에 위그노 자작이 대경했다. 요새가 요새로서 제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군수물자의 확보가 우선이다.
그중 핵심 중의 핵심 시설에 동시에 불이 일어나다니.
누가 보아도 정상적이지 않은 상황이었다.
위그노 자작이 자신도 모르게 베르사유를 바라보았다.
“저하, 이건…?!”
베르사유의 생각 또한 다르지 않았다.
“성벽에 많은 인원을 배치하였으니, 자연히 요새 내부는 평소보다 경계가 허술할 수밖에요. 허점을 잘 노렸군요.”
그것도 곳곳으로 흩어져 지른 불이니만큼, 뭉쳐져 있는 병력들을 분산시켜야만 했다.
불을 끄기 위해 병사들이 움직이다 보면, 요새 내의 움직임이 늘어난다. 그러다 보면 수상한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결과적으로 틈이 생긴다.
성벽의 인원이 줄어들고, 요새 내부의 혼란이 사그라들 때까지의 그 짧은 틈. 침입자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뭘 노리는 걸까….’
물론 내부의 혼란을 야기하여 성벽을 공략하겠다는 생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베르사유의 직감이 이 방화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고 외치고 있었다.
베르사유가 생각에 잠기고 찰나의 순간이 지났다.
눈을 뜬 베르사유가 위그노 자작을 향해 말했다.
“자작, 성벽의 병력 중 3할을 불을 끄는 데 동원하세요. 나머지 부족한 부분은 요새 내 상주하는 인원들을 징발하여 불을 끕니다.”
“하지만 요새 내의 불꽃을 진화하기에는 역부족이지 않습니까?”
“시간이 좀 걸려도 어쩔 수 없어요. 지금은 성벽을 지키는 것이 우선입니다.”
“…명을 받듭니다.”
베르사유가 뜻을 굽히지 않자, 위그노 자작이 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채 병사와 함께 방을 나섰다.
홀로 남은 베르사유가 밤을 밝히는 곳곳의 불꽃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방화는 그저 혼란을 주기 위한 수단일 뿐. 저기서 성과를 낼 목적이 아니다. 그리고 성벽 또한 진짜 목표가 아니야.’
근위기사단의 수색을 명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놈들 또한 자신들의 최우선 목적이 성벽의 방어임을 모르지 않을 터였다.
그렇다면, 불을 지른다 하여 성벽의 방어를 풀지 않는다는 것 역시 짐작하겠지.
따라서.
‘놈들이 노리는 목표는 나다.’
위그노 자작까지 나선 것을 확인한다면, 놈들은 분명 첨탑이 비었다고 여기고 이곳을 야습해올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해야겠군.”
딸랑!
베르사유가 방의 줄을 잡아당기자,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저하.”
“가서, 미하일 경을 모셔오도록.”
“예, 저하.”
시종이 나가자, 베르사유는 창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융켄 경을 사로잡았을 테니 자신감에 차 있을 만하지. 하지만 아마 너희들 뜻대로는 안 될 거다.”
베르사유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과연, 누구의 수가 더 깊을지. 기대되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