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ouble Life of a Wicked Woman RAW novel - Chapter 18
18화
연무장에 있을 에인을 찾으러 간 나는 화려하게 장식된 황궁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고 있었다. 만화에서만 보던 건물이 떡하니 눈앞에 펼쳐져 있으니 신기할 따름이었고 아직도 내가 혹,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보이는 화려한 캐노피와 천장에 수놓아진 문양들. 고급스러운 재질의 드레스와 금과 은은 기본이요, 갖갖의 보석을 박은 액세서리를 볼 때마다 나의 것이 아닌 것 같아 뭔가 오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차라리 죽어서 빙의를 한 거면 맘 놓고 내 것으로 생각하고 떵떵거릴 텐데……. 죽지도 않고 자고 있는데 갑자기 빙의라니.
게다가 엄마가 남긴 보험금조차도 아까워서 못 쓰다가 홀라당 날려 버린 내가 많은 재산을 가진 귀족이라니.
‘보험금 날려 먹은 이야기만 생각하면 정말 내가 호구라는 걸 실감하지.’
그러나 엘리자벳에 빙의된 이상 이러한 생각을 버려야 했고 아직 그것이 서툰 나였다. 그리고 오늘의 태도를 보고서 확실히 깨달은 것은 내가 악녀로 죽기 위해서는 황제에게 접근해야 하는 것이 맞지만 그가 철벽을 치는 탓에 제대로 접근하지 못한다면, 다른 방법도 생각해 놔야 할 것 같았다.
황제가 아끼고 또 아끼는 친우. 아라한을 이용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 않을까. 애초에 날 먼저 이용한 아라한이니까 나라고 못 할 것은 없지.
다만 걸리는 것은 그가 나를 이용한 것은 자신의 평판 때문이고 내가 그를 이용하는 것은 ‘죽음’ 때문이라는 점 정도겠지. 뭐, 이 사회 귀족들에게 ‘명예’와 ‘평판’은 ‘목숨’보다 귀중하다고들 하니 괜찮으려나.
“이왕이면 아라한이 나 좋다고 따라다니면 참 좋을 텐데.”
‘사랑하는 이에게 배신당하여 분노에 이를 가는 친우를 대신하여 그 여인을 처형!’
그게 아니더라도 뭐가 되었든 지금 아라한이 나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니 그를 이용하여 황제를 자극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애초에 오즈번은 카를시아가 아니라 아라한과 이루어질 입장이었으니까 오히려 오즈번과 더 부딪힐 일이 많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어장 관리를 위해 여러 남자를 만나지 않는 이상은 말이지.
“…아가씨…!”
저 멀리서 나를 발견하고 달려온 에인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미소를 지어 보냈다.
“다 끝나신 건가요.”
“아아, 응. 대충 이야기 마무리 짓고 왔어. 할아버지는?”
“아마 황궁 내 집무실에 계실 겁니다. 인사하러 가실래요?”
“아냐, 바쁘신데 그럴 필요는 없지.”
“…아가씨…….”
뭐지, 저 감동한 듯한 얼굴은.
“흑흑…. 우리 아가씨가 벌써 이렇게나 크셨다니.”
“…뭐라니.”
“단장님도 생각하시고…. 흑흑….”
“그렇게 우는 척해도 나오는 것 없어.”
“…아무튼, 우리 아가씨 까칠한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요. 이제 돌아가실 건가요?”
“응. 아빠가 기다릴 것 같으니까 어서 돌아가야지.”
“예~ 그럼 아르엘시아 백작저로 모시겠습니다~.”
에인의 안내를 받은 나는 마차에 타고 드디어 아르엘시아 백작저. 정확히는 내 집으로 향했다. 아직도 어색한 ‘내 집’. 작은 원룸에서 살던 내가 정말 백작가의 영애가 되어 엄청난 저택을 ‘내 집이야.’라고 표현할 줄이야.
“폐하랑은 무슨 이야기 하셨어요?”
“어? 음– 뭐. 그냥 비즈니스적인 이야기.”
“…비즈…. 뭐요? 요새 아가씨 너무 어려운 말을 구사하시는 것 같으신데….”
“…아하하하. 상업적인 이야기를 했다는 거지.”
“아무튼, 아가씨 위험한 일은 절대로 하시면 안 돼요. 그러다가 단장님이 아시면……. 외출 금지령이 내려질지도 모른다고요!”
“…예, 예. 알아서 잘 처신하도록 할게.”
나는 두 손을 들며 ‘항복’의 제스처를 취했고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나를 보는 에인이었다. 워낙 잘생긴 인물들이 쟁쟁하게 많아서 자각하지 못했는데 에인도 잘생겼구나. 응, 매우 잘생겼어. 그렇게 에인의 잘생김에 대해 고뇌하고 있는 사이 덜컹거리던 마차는 백작저 앞에 멈추었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그리고 종종 후작저에도 놀러 와 주세요. 다들 아가씨를 뵙고 싶어 합니다.”
“알겠어~ 에인도 잘 가~.
가볍게 손을 흔들고 백작저에 들어간 나는 마중 나온 마야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곤 별일이 없었는지 물었다.
“내가 없는 동안 별일 없었어?”
“있었죠.”
“오. 루시엘라 영애가 찾아왔니?”
“……어디 눈 달리신 건 아니시죠?”
미안, 원래 원작에 이 비슷한 일이 있어서 알고 있었어. 그런 예지력 쩌는 사제님같이 보지 마.
“아무렴~ 자세한 이야기는 안에 들어가서 하자. 아빠는?”
“아, 잠시 출타 중이십니다.”
“잘됐네. 방으로 디저트랑 차 좀 들고 와 줘.”
“예.”
먼저 걸음을 옮기는 마야를 뒤로하고 나는 내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엘리자벳은 이런 귀찮은 일들을 왜 이리 많이 만들고 다녔는지 모르겠다.
일단 제일 먼저 귀족파 무도회를 생각해야겠네. 생각만 해도 귀찮다는 듯 나는 머리를 휘저었고 ‘똑똑’거리는 노크 소리에 서둘러 소파에 앉았다. 문이 열리고 간단한 디저트와 홍차를 가지고 온 마야가 내 앞에 트레이를 놓고 살짝 물러선 뒤 아까 하려던 말을 계속 이어서 했다.
“일단은 아가씨의 말대로 아프다고 하였더니 본인이 직접 확인하겠다고 말씀하시는 바람에 식겁했어요. 이제 이런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 제 심장을 위한 일인 것 같으니 자제 부탁드립니다. 아가씨.”
“…그렇게 간단히 무너질 심장 아니잖아.”
“아무튼! 일단 너무 감기가 독해 루시엘라 영애께 옮길까 염려된다며 돌려보내긴 했지만…….”
“했지만?”
“…내일 신성 지역의 사제와 함께 다시 방문하신답니다.”
“…뭐?”
쿠키를 집고 있던 나의 손은 마야의 말에 놀라 집고 있던 쿠키를 접시 위에 떨어트렸다. 요란한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만, 그만큼 내가 놀란 것을 알았는지 마야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물론 마야는 내 꾀병이 들킬까 하는 마음에 놀라 떨어트린 줄 알겠지만, 실상은 달랐다.
‘아르텐!!!’
‘성녀, 오즈번’ 속에서 등장 비중은 그리 크진 않지만, 그 누구보다 비범한 능력을 갖추고 있던 사제! 그리고 나의 최애캐!! 내 최애캐를 3D로 볼 수 있는 거야?!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잘생겼던데 아르텐은 얼마나 잘생겼으려나.
비범한 능력을 감추고 있는 사제. 그것이 아르텐의 타이틀이었다. 그리고 그 비범한 능력은 일반 사제들과 같은 신성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물며 다친 사람을 치유하는 치유력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비범한 능력. 원작에서는 이 비범한 능력이 어떠한 능력인지 자세히 서술되어 있지 않았다. 엘리자벳이 죽는 그 순간까지도 작가는 사제의 능력을 숨기고 싶었는지 그의 능력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단 하나, 수많은 팬이 추측하건대 아르텐 자체가 신의 능력을 이어받은 신의 대리인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했다. 예언은 기본이요, 그가 말한 것은 대부분 다 이루어졌다. 물론 아주 작은, 사소한 것들이었지만.
그러나 풍년과 흉년을 예지하고 오즈번의 위험과 엘리자벳의 악행도 예견한 적이 있었으므로 독자들은 그가 신탁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라 여겼다.
뭐……. 소설에서도 정확하게 어떠한 능력이 있는지 안 밝혀서 정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애캐를 볼 수 있다니!! 그것도 3D로!! 이런 횡재가 다 있나!!!
“이러다가 꾀병인 걸 들키면 어쩌죠……?”
“하루 만에 나았다고 하면 되지, 뭐.”
나는 떨어트렸던 쿠키를 다시 집어 들어 한입에 넣어 ‘아작’거리며 우물거렸다. 그런 나의 태도에 황당해하던 마야는 이내 고개를 내리 젓곤 입을 열었다.
“내일 점심쯤에 다시 오신다고 하셨으니 오늘은 일찍 주무시지 않는 것이 좋겠네요.”
“응?”
“일찍 주무셔서 일찍 일어나면 아파 보이지 않잖아요.”
“…하하, 참 좋은 조언이네. 이왕이면 차가운 얼음이랑 하얗게 뜨는 화장품도 준비하지 그래?”
“……!! 그것도 좋은 방법이네요. 지금 바로 준비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나의 농담을 정말 진담으로 받아들인 마야는 고개를 꾸벅이곤 조심히 방에서 나갔다.
설마 정말 얼음이랑 화장품 준비하러 간 거야? 진짜로?
‘아니, 그렇게 아파 보여야 하는 건가…….’
뭐 어찌 됐든 그건 내일 잘 넘어가면 되는 일이니까 잠시 접어 두고.
“문제는 귀족파 무도회인데 말이지.”
소설 속에선 나오지 않았다. 이런 거창한 무도회는. 게다가 엘리자벳이 황제와 파트너가 되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러한 스토리가 나온 이유는 내가 개입되면서 흐름이 바뀌어서일까. 아니면 원래 있었던 일인데 소설에 기재만 안 되어 있던 외전 같은 것일까. 알 수는 없지만 무언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가까운 예로 엘리자벳인 나에게 친절과 호의를 베푸는 아라한의 태도였으니 말이다. 더는 깊게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차라리 깊게 관여하고 그들을 배신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럼 자연스레 나는 배신자, 배반자. 그리고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공작을 이용한 ‘악녀’가 되는 거겠지.
일단 이건 둘째 치고 지금 당장 급한 건 귀족파 무도회다. 일단 이것부터 해결하고 플랜 B를 다시 짜야겠다.
“일단 보통 소설 보면 이런 모임에 가려는 이유는 여자 주인공을 지키기 위해서나 귀족파들의 불순한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서인데…….”
어찌 되었건 그 일은 황제가 알아서 할 것이고 나는 오즈번을 찾아서 그녀를 괴롭히는 일에만 집중하면 되겠지. 아라한을 이용하는 것과는 별개로 오즈번을 괴롭히는 일은 계속해야만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성녀’ 오즈번이니까 내가 괴롭혀야 나의 ‘악녀’ 이미지가 두드러질 터이고 그래야 오즈번이 아라한에게 접근할 때, 맘 놓고 괴롭힐 수 있을 테니까.
‘아작.’
잘 구워진 쿠키가 ‘톡’ 하고 부러져 부스러기가 자연스레 나의 치맛자락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나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툭툭’ 털어 버리고, 이미 식어 버린 홍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몸을 일으켜 내일을 기약하기 위해 침대에 누웠다.
마야는 밤늦게 자라고 했지만. 어제, 오늘 긴장의 연속이라서 엄청나게 졸리단 말이야. 자고로 잠은 자면 잘수록 늘어나는 법이라고.
그렇게 잠들어 버린 나는 이내 다음 날 해가 중천을 다다를 때쯤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