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ame Director Returns from Hell RAW novel - Chapter (95)
#95화
이제껏 기획팀 회의 양상은 대개 내가 무언가를 지시하면 팀원들이 수긍하여 따르는 방향이었다.
하여, 이리 둘러앉아 다 같이 의견을 공유하는 자리는 나에게도, 팀원에게도 꽤 어색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추진하는 이유는 역시, 나 홀로 만드는 것보다 유의미한 결과물이 집단지성을 통해 나올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기에.
“···까지가 현재 설정한 방향성입니다. 혹시 관련해 아이디어가 있으십니까?”
아이덴티티가 나아 갈 방향성에 대한 설명이 끝났다.
팀원들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의견도 곧장 나왔다.
호수 씨가 최초였다.
“사장님, 혹시 멀티 플레이에 관한 계획이 있습니까?”
“멀티 말입니까?”
“예.”
이어지는 말은 호수 씨 답지 않게 꽤 길었다.
“롤 플레잉에 초점을 맞추신 것으로 이해됩니다. 생활 컨텐츠의 강화는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QA팀 반응과 별개로 여러 RPG 게임에서 이미 효용이 증명됐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관점에서의 접근이라면 이것이 ‘어떻게 보여지느냐’에 관한 고민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소유욕에는 분명 과시욕 또한 함께 섞여 있으니까요.”
예상한 의견.
더해, 핵심적인 부분이 나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멀티도 생각 중에 있습니다. 호수 씨 말대로 결국 무언가를 꾸민다는 행위에 과시라는 감정이 없을 수는 없으니까요.”
복잡한 설명 없이 호수 씨의 예시처럼 ‘온라인 MMORPG’라는 장르만 봐도 이해가 가능한 이야기다.
당장 떠올릴 수 있는 국내 대표작만 해도 이 계열의 선두 주자였던 마이노기, 하우징과 약탈이라는 유저 간 상호작용에서 자유도를 끌어올렸던 아크 에이지 등등.
그런 게임들이 슬로건으로 내미는 타이틀은 ‘또 다른 나’, 혹은 ‘교류’다.
실제로 유저들이 매력을 느끼는 포인트가 그것이기 때문이다.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니 누구도 그것에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역사적으로 봐도 그렇다.
중세시대 유럽 귀족의 티 파티는 인간이 과시와 교류에 얼마나 집착하는 동물인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아니던가?
잡설은 넘어가고 거기에 하나 더, 그런 게임 대부분이 가지는 특징이 있었다.
“자유도가 높은 게임은 충성도가 꽤 높죠.”
바로 게임에 대한 애착이 상당히 깊다는 편.
오죽하면 장르에 붙는 별명이 ‘연어 게임’이었다.
암만 아니꼬운 패치에 게임을 접어도 어느 순간 즐거웠던 추억을 되새기며 또 접속하게 되기 때문.
‘나만의 것’이라는 개념은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고유의 감성을 자아내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본격적인 온라인 환경을 조성할 수는 없었다.
잊어선 안 될 사실이 있었다.
“결국 이 게임은 콘솔 패키지입니다. 온라인 환경 조성이 생각보다 어렵죠.”
“생각해두신 방법이 있습니까?”
“제한적 멀티 플레이를 생각 중입니다. 유저가 하우징 컨텐츠로 타인과 교류하며 충족하는 것이 과시욕이라면, 철저히 그 개념에 맞추는 거죠.”
그 말에 호수 씨가 “아”하고 탄성을 흘리며 답했다.
“메인 스토리는 솔로 진행만 가능하게, 맞습니까?”
“예, 다른 사람의 메인 스토리에 끼어서 상위 모종이나 레시피를 얻는 편법은 막는 게 좋으니까요. 더해서 거래 시스템은 구현하지 않을 겁니다. 아이템 드랍을 통한 교환도 불가하게 할 거고요.”
“확실히 게임 재화의 시세가 형성되면 곤란하죠. 패키지 게임인데.”
“예, 패키지 게임은 기본적으로 홀로 모든 컨텐츠를 온전하게 소화하는 형태여야 하니까요.”
그리하여, 게임의 멀티 기능은 철저히 타인을 빌리지에 초대해 구경을 시켜준다는 과시적 욕구만을 채우는 형태로 구동시킬 것이다.
구태여 기능을 더한다면··· 순수한 호의로 광질이나 장작 패기 같은 노가다를 돕는 품앗이 기능도 넣으면 좋겠지.
호수 씨가 납득을 끝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으로는 지석 씨였다.
“그럼 중요한 건 분기점마다 충족시킬 성취욕이네요. 각 생활 컨텐츠에 경험치나 레벨을 달아두는 건 어떻습니까? 마침 아이덴티티는 각 컨텐츠를 ‘얼굴’이라는 아이템을 통해 습득하는 게임이니까요.”
“아이템에 레벨을 달아두자?”
“예, 숙련도라고 해도 좋겠죠. 예전에 그런 게임을 한 적이 있었는데 꽤 괜찮았거든요. 경험치 바가 눈에 보이니까 노가다 컨텐츠에 더 진심이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지석 씨가 웃었다.
이건 확실히 좋은 의견이다.
“컨펌하죠. 관련해서 세부 사항 작성 부탁드립니다.”
“옙.”
이후로도 여러 의견이 나왔다.
“생활 컨텐츠의 연계는 어떨까요? 재봉이랑 대장질을 엮어서 특수 장비를 만든다던가···.”
“아! 농기구 등급이나 레벨은 어떤가요?”
“직관성을 중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너무 많은 시스템은 이해하기까지 진입장벽이 될 테니까요.”
“아! npc 호감도 시스템은 어때요? 메인 스토리의 진행 분기마다 구해준 npc가 유저의 마을에 편입되는 형태잖아요? npc와의 애착에 깊이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사뭇 놀라운 감정이 일었다.
모든 것을 스스로 해내려고 생각했을 땐 몰랐던, 기획팀의 역량이 보이기 시작한 까닭이다.
이때까지 저런 의견들을 생각하고 있던 건가.
‘나는···.’
어쩌면 이 팀을 이제껏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반성의 마음이 차오르는 중이었다.
“음, 저도 말해도 되나요?”
기획팀 막내 예슬 씨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예슬 씨의 입이 열렸다.
“생활 컨텐츠도 좋지만, 그게 게임의 메인인 어드벤처를 잡아먹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아이덴티티는 E-40이 제국을 방랑하며 성장하는 이야기니까요.”
“아무래도 그렇죠?”
“네, 이미 사장님이 서사나 시스템적으로 훌륭하게 연결해두시긴 했지만··· 그래도 생활 컨텐츠에 흥미가 없는 사람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그렇거든요. 게임 할 땐 마냥 싸움만 하는 게 좋아서.”
어색하게 웃으며 핵심을 짚었다.
나는 잠시 고민했고, 이윽고 꽤 그럴싸한 해결책을 낼 수 있었다.
“···이렇게 하죠. 생활 컨텐츠를 하지 않아도 클리어는 가능. 하지만, 스테이터스의 고점은 생활 컨텐츠를 병행해야만 뚫을 수 있도록.”
“아, 그렇게 하면 괜찮겠네요.”
“좋은 의견이었습니다. 게임 진행에 필요한 밸런스라는 것이 있으니까요.”
회의가 이어질수록 아이덴티티라는 게임의 실루엣이 또렷해졌다.
어느덧 두 시간이 지났다.
한데도 팀원들은 멈추지 않고 의견을 쏟아냈다.
일단은 오늘 회의를 마무리 짓고 내용을 정리한 후에 다음 회의를 이어가야겠지.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사, 사장님···!”
회의에 참관해 이야기를 듣던 조아윤이 말했다.
녀석도 의견이 있는 걸까.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이니 조아윤이 말했다.
“노, 농기구나 곡괭이 같은 거로 싸울 수 있게 해주면 안 돼요?”
덜컥, 기획팀 전원이 들썩였다.
조아윤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고, 곡괭이로 대가리를 퍽···! 이, 일인전승의 신비 무공···! 전설의 뚝배기 괭이질···!”
기획팀이 서로를 쳐다봤다.
나 또한, 그런 시선을 나누며 뇌리에 번개가 꽂히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호수 씨가 중얼거렸다.
“···생활 컨텐츠용 얼굴의 레벨이랑 관련 npc와의 호감도를 일정 이상 올리면 나오는 히든 전투 스킬?”
“네, 네에···!”
조아윤이 고개를 끄덕인 순간, 나와 팀원들은 눈짓으로 뜻을 나눴다.
‘좋은데?’
그것참··· 흥미로운 시스템이다.
* * *
-이제 어떡해! 나는 무표정들에게 잡혀 처벌받고 말 거야!
E-40은 쩔쩔매며 고민하다 기가 막힌 해결책을 찾아냈다.
바로 농부를 아무도 모르는 은신처에 숨기는 것이다!
한 곳 알고 있었다.
입지는 좋으며 사람과의 교류는 0에 수렴하고 농부가 원하던 원예를 마음껏 할 수 있는 그런 장소 말이다.
-뭐? 따라오라고?
E-40은 고개를 끄덕여 농부를 이끌었다.
도착한 곳은 숲.
바로, 미소와 생활하던 그곳이었다.
-여긴 폐허잖아? 오두막이 불타있는데?
E-40은 슬픈 감정을 느꼈다.
급하게 떠나느라 미소의 유해도 수습하지 못한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다른 기사들의 시체도 없는 걸 보니 아마 후발대가 이곳의 시신을 다 처리한 모양.
E-40은 차오르는 울적함을 애써 내리누르며 고개를 젓고 농부를 더 깊숙한 곳으로 이끌었다.
이미 들킨 오두막에 있을 수는 없는 법.
E-40이 가는 곳은 절벽과 가까운 어느 숲의 공터였다.
그곳은 이곳에 살며 지리를 익히지 않는다면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설령 지리를 안다 해도 조심하지 않으면 섣불리 들어갈 수 없는, 아주 외지고 볕이 잘 드는 땅이었다.
E-40 또한 사냥을 위해 숲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이곳을 발견했었다.
-여기야? 우와···!
농부가 탄성을 흘렸다.
E-40은 괜히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가만 공터의 흙을 만지작거리더니 경악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토질이 아주 좋아! 무엇을 심던 무럭무럭 자라날 만큼 양분이 풍부한 땅이야! 여기라면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원예를 할 수 있겠어!
농부의 얼굴 위로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는 감동에 젖은 목소리로 E-40에게 말했다.
-고마워! 네 덕분에 꿈도 찾았고 안전도 얻었어!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어!
농부는 E-40을 끌어안고선 그리 말을 이었다.
-여기서부터 기반을 다질 거야! 자주 놀러 와! 아, 이걸 줄게! 공간 이동 마석이라는 녀석인데, 심지를 이곳에 박아두면 네가 어디에 있든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야! 물론 안전한 장소에서 쓰는 건 잊지 말고!
E-40은 마석을 받아 들곤 고개를 끄덕였다.
자주 농부를 찾아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와중 생각난 것이 있었다.
E-40은 뒤늦게야 그에게서 떼어낸 ‘햇볕에 찌푸린 얼굴’을 어찌해야 할지 물었다.
그러자 농부는 쾌활하게 답했다.
-그거? 너 가져! 밖을 돌아다닐 써도 되고, 혹시 농사가 하고 싶다면 써봐. 그 얼굴을 쓰고 있는 동안은 농사에 엄청난 재주를 얻게 돼!
의외의 수확.
이것이라면 도시 한가운데라도 쉬이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E-40이 폴짝폴짝 뛰며 기뻐하자 농부는 흐뭇해하며 말했다.
-이 미소는 대단해. 그냥 얼굴 위에 걸려있기만 할 뿐인데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거란 자신감을 줘! 나는 내 생애 최고로 행복한 순간을 맞고 있는 거지! 아마 너는 또 다른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한테도 이런 미소를 나눠주겠지?
E-40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소는 번지는 것이란 그녀의 말마따나, 이 미소가 불행해하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다.
농부는 그에 답했다.
-그럼 그렇게 미소를 얻은 사람을 이곳에 데려와! 바깥은 위험하니 우리끼리 마을을 만드는 거야! 미소 마을! 어때? 우리들이 가장 행복한 마을을 만들어보자!
그의 꿈결 어린 목소리가 E-40의 가슴속에 스며들었다.
E-40은 특히 ‘미소 마을’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크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에 농부가 하하하! 웃었다.
-그럼 열심히 해봐! 나는 내 집을 만들고 당장 꽃을 키워야겠어! 아, 농사에 대해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라고!
그렇게, E-40은 농부와 미소 마을을 만들곤 다시 길을 떠났다.
그에겐 이제 2개의 얼굴이 있었다.
* * *
기획에 가닥이 잡혔다.
아이덴티티는 전투를 기반으로 한 메인 스토리와 생활을 메인으로 하는 하우징 컨텐츠를 복합적으로 연계, 상호작용하는 게임이 되었다.
여기서 문제.
과연 기획팀이 머리를 싸매 완성한 ‘개쩌는 아이디어’는 어떻게 게임이 되는가.
정답.
“기획안 왔어요.”
프로그래밍 팀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다.
명규는 순식간에 얼굴이 거무죽죽해지는 팀원들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이해되는 반응이었다.
‘해야 할 게 많아졌지.’
구현해야 할 요소가 대폭 늘었다.
특히 생활 컨텐츠 같은 경우는 각 직군을 연계하는 제작물도 있다 보니 작성할 코드가 훨씬 복잡해졌다.
대충 알 수 있는 게 있었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것 이상의 기상천외한 버그가 게임 내에 적용되리란 것이다.
‘아직 송아지 발사 버그도 못 고쳤는데.’
한숨이 나오려 했지만 명규는 참았다.
팀장인 자신부터 기운이 없다면 팀원들의 사기가 떨어질 테니 말이다.
하여 그는 한숨 대신, 다른 것을 선택했다.
그의 가슴 속에서 법인카드가 튀어나왔다.
“오늘은 소고기 먹죠. 한동안 고생할 거니까.”
그는 사람을 다룰 줄 아는 꽤 훌륭한 리더였다.
* * *
얼마 뒤 QA 부서.
새로 구현된 시스템의 테스트 케이스(TC)가 있는 날.
직원 진성은 떨떠름한 목소리로 팀장 성철에게 말했다.
“팀장님.”
“응.”
“안 나가지는데요.”
딸깍딸깍, 패드를 두드리는 진성의 손은 다급했다.
하나 그와 반대로 팀장 성철의 기색은 평온했다.
“뭐가.”
“아니, 팀장님 빌리지에서 안 나가져요. 이거 멀티 버그잖아요.”
품앗이 컨텐츠 시연을 위한 자리였다.
한창 성철의 장작을 함께 모아주던 진성은 로그아웃이 되지 않는 현 상황에 큰 당혹감을 느꼈다.
그에 성철이 낮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흘렸다.
“진성아, 아직 이해 안 돼?”
“네?”
진성의 고개가 기우는 순간이었다.
“너, 납치된 거야.”
“?”
“나무나 더 패봐. 보고는 나중에 할게.”
진성은 차게 식은 눈으로 성철을 바라봤다.
천사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