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223
223화. 추적
어두운 숲속을 바람처럼 내달리고 있는 은빛의 인영, 실버 팽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 놈들 수장의 꼬리를 처음으로 잡았어.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네.
아직 머릿속에 생생한, 유일한 인간 친우의 목소리.
귀에 인이 박일 정도로 들었던 그 말 때문인지, 발밑에 깔린 나뭇잎이 바사삭 부스러지는 소리도 신경에 거슬렸다.
거창한 목표가 무색하게, 놈들을 처리하기 위해 투입된 인원은 자신을 포함해 백여 명에 불과했다.
물론 아주 적합한 처사였다. 현혹과 저주, 혼란의 마법을 기본으로 쓰는 악마추종자 정예와의 전투에서, 수준 이하의 아군은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었으니까.
적들이 숨어 있을 것이라 예상되는 동굴의 출입로는 산의 양면에 있었고, 거기서 다시 다섯 가지 정도의 경로를 추린 상황이었다.
그래서 세계수의 수호자가 한 루트, 오크의 대전사가 한 루트, 자신이 또 하나, 그리고 나머지 둘은 엘븐나이트와 발렌티아의 정예들이 각각 맡았다.
그리고 그중에서 전체적인 전력을 비교해 보자면.
‘내가 제일 약하다.’
그 사실이 그의 의무감에 더욱 불을 지폈다. 만약 놈들을 놓친다면 자신의 탓일 것만 같았으니까.
정령을 다루는 엘븐나이트의 최정예들과 단체 전투 스킬을 구사하는 발렌티아는 분명 자신 한 명의 무력보다는 강할 테고, 세계수의 수호자야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대륙에 이름을 떨친 초강자다.
그리고 젊은 시절 몇 번 싸운 적도 있는 오크의 대전사는 어느새 자신을 뛰어넘는 초강자로 탈바꿈해 있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도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바보는 아니었다.
– 나? 나야 내 친우, 타이니를 만난 뒤에 행운을 얻은 거지. 자네도 곧 녀석을 만나게 될 거야.
친구라기보다는 숙적이라 해야 할 만한 저릭이 해 준 말.
자신을 구원해 준 발렌티아의 주인, 검제 역시 그에 대해 언급했었다.
– 당신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은 많지만, 일단 바로 눈앞의 목표만 공유하겠습니다. 바로 당신의 원수이기도 한 악마추종자들을 처리하는 일을.
– 진짜 진실은 타이니 노…… 크흠, 경이 돌아오면 말해 줄 겁니다.
그 타이니란 기사가 엘프족과 오크족, 카룬과 아스란 제국의 위협을 막아 내고 이 연합을 만들어 냈다던가.
거기에 오크 대전사에게 벽을 깨는 깨달음을 주기까지 했다니, 그 단편적인 정보만으로도 정말 놀랍기 그지없는 인간이었다.
더구나.
– 당신도 타이니를 만나게 되면, 훨씬 강해질 수 있을 겁니다.
세계수의 수호자가 덧붙인 말까지.
만나는 이들마다 하나같이 그가 자신에게 무언가 해 줄 것처럼 말하니, 더욱 기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영웅이자 현자쯤 되려나? 정말 만나 보고 싶군.’
물론 그 영웅이 공식적으로는 제국 소속이 아니라는 사실에 인상이 더 좋게 남기도 했다.
그래서 더 마음에 걸리는 것도 있었고.
자신은 누명을 쓰고 조국에서 쫓겨났고, 돌아가서 내전의 빌미가 되느니 적국으로의 망명을 택했다.
물론 그 선택의 배경에는 악마추종자와의 결탁이 강하게 의심되는 체베르 놈의 축출을 도와주겠다는 검제의 약속이 있었다고는 해도, 지금 자신의 입지가 초라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니 인간의 영웅이자 현자를 당당히 만나기 위해서라도 성과를 보여야 했다.
‘더러운 쓰레기들을 확실히 청소하고, 어깨를 펴고 만나야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부담감이 더욱 가중되었다.
하지만 그는 전직 웨어비스트의 대장군. 이런 부담감 따위에 짓눌려 일을 망칠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 부담감을 발판 삼아 전투력을 한층 끌어올릴 수 있는 전사.
날카로워진 실버 팽의 신경이 감각을 증폭시켰고, 늑대인간의 후각과 시각이 옅은 달빛 아래서 적의 흔적을 찾았다.
그리고 마침내.
‘발견했다!’
보통의 인간은 길로 치지도 않을, 울퉁불퉁한 암석이 잔뜩 박혀 있는 가파른 절벽 길 위.
그 끝에서, 그의 후각이 인간의 냄새를 맡은 것이다.
그 순간.
파지직.
평지를 달리던 실버 팽의 거체가 일순간 샛노란 번갯불을 발하더니, 이내 바람처럼 절벽 위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속도라면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아.’
늑대인간의 신체 능력에 벼락의 속성을 더해 만들어 낸 신경 가속의 비전.
거기에 라이트닝 로드의 능력으로 증폭된 속도는, 일순간 은빛의 선이 절벽과 그 위를 번개 형태로 연결한 듯한 잔상을 만들어 냈다.
잠시 후.
“잡았다!”
절벽 길 사이로 내달리던 검은 로브의 인간들, 자신을 올려다보며 사색이 된 놈들의 머리 위에서 그는 사나운 미소를 띤 채 라이트닝 로드를 휘둘렀다.
“전부 뒈져라, 쓰레기들!”
번쩍.
우르르르르릉!
제국 서남부 국경 근처의 어느 야산, 지상에서 하늘로 벼락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 * *
“시작했네.”
에스티나는 자신이 있는 곳의 반대편, 산 너머에서 솟구치는 뇌기를 느끼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타이니가 대미궁으로 사라진 지 벌써 1년하고도 203일 13시간째가 막 지나가고 있었다.
카일룸을 움직여 타이니 일행이 대미궁에 들어서는 걸 몰래 지켜봤던 그녀. 기왕이면 타이니와 같이 들어가거나 그가 다시 나올 때까지 입구에서 기다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약속했으니까.”
그가 돌아오기 전까지 말룸의 쓰레기들을 뿌리 뽑아 놓겠다는 약속을 지켜야 했다.
다행히 검제가 무슨 수단을 썼는지는 몰라도 몇 달 전 황제의 전폭적인 지원을 얻어 냈고, 적어도 대륙 중서부에서는 놈들을 거의 박멸했다.
부관인 라므엘이 정령의 힘으로 놈들의 머릿속에 심어진 저주를 잠시나마 지우는 방법을 개발해 낸 덕이 컸다.
그리고 최근엔 말룸의 장로 중 하나를 잡아냈고, 놈들의 수장과 정예 전력의 행방을 알아내 오크의 대전사와 검제에게 알린 것이 불과 일주일 전이다.
저릭이 홀로 산과 산을 뛰어넘어 서남부 국경까지 시간 맞춰 달려와 준 것도 기적이었고, 블루윙 기사단이 남부 도시에서 놈들의 가지를 쳐 내고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다.
그러니.
“이번에야말로…….”
약속을 지킬 때였다.
‘가자.’
– 끼루루!
의지가 일어나는 순간, 영혼 저편에서 호응하는 카일룸.
하늘 높은 곳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는 카일룸의 눈에, 산의 일각에 뿌려진 짙은 마기가 또렷이 보였다.
예상했던 출입로가 아닌 생각지도 못한 경로였지만,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그렇게 은밀히 움직이는 마기라면 놈들의 본대일 확률이 높을 테니까.
‘정령 앞에서 마기를 사용한 은신이라니.’
싸늘한 미소를 지은 에스티나의 뒤편에서 환상처럼 피어난 독수리의 날개가 그녀에게 또 하나의 특성 ‘가속’을 부여하는 순간.
그녀의 몸이 잔상을 일으키며 숲의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그리고.
스르륵.
탁.
불과 십여 분도 되지 않아 그녀는 마기가 흩뿌려진 숲의 가장 높은 나무 위에 안착했다.
‘보인다.’
우우웅.
살기에 찬 미소를 지은 그녀가 초월무구 아르쿠스의 시위를 당기자 자연스레 녹색 오러의 화살이 형성되며, 검은 밤안개 속에 몸을 숨긴 일단의 무리를 겨누었다.
팟.
그리고 바로 쏘아지는 녹색 화살은 이질적인 검은 밤안개를 꿰뚫고 그 안에서 조용히 움직이던 적들의 몸을 관통했다.
“끄아아악!”
“기, 기습이다!”
“피해!”
순식간에 밤하늘을 울리는 비명이 터져 나오는데,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양 이번엔 녹색의 화살이 무수히 쏟아지며 사방을 초토화시키기 시작했다.
“끄아악!”
“오러!”
“초인이다!”
“그년이다!”
“세계수의 창녀!”
……뭐?
터무니없는 소리에 에스티나의 이마에 실핏줄이 튀어나온 순간, 그 말을 뱉은 놈의 고간에 녹색의 오러 화살이 꽂혔다.
“끄아아아아아아악!!!”
수많은 소음 중에서도 단연 압도적인 비명.
그 목소리가 간신히 잦아들어 갈 때쯤, 검은 안개 속에 몸을 숨겼던 무리는 모조리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썩어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을 보는 에스티나의 눈빛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잘해야 익스퍼트급 마병이야. 뭐지? 이놈들은 버림패인가?’
미끼에 걸렸다는 생각이 든 순간 그녀의 의식이 다시 상공의 카일룸에게 전이되었다.
– 끼룩!
카일룸의 시선으로 지상을 내려다보려는데, 갑자기 그 시야에 분홍빛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끼루루루!”
그 고운 색깔에 담긴 짙은 마기에 카일룸이 불쾌감을 표시하며 번개처럼 활강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시야에 깔린 분홍빛 안개는 사라지지 않았다.
“끼루!!!!”
카일룸의 마나가 바람의 속성력을 동원하며 주변을 몰아쳐도 전혀 걷히지 않는 안개.
그에 에스티나가 의식을 다시 본체로 되돌리는데.
“……이런.”
어느새 그런 그녀의 주변에도 똑같은 분홍빛 안개가 깔려 있었다.
“칫.”
타다닥.
감각을 제약하는 짙은 마기가 담긴 안개는 그녀가 재빨리 몸을 움직여 몇 번이나 자리를 바꿔도 도무지 떨쳐 낼 수가 없었다.
“합!”
콰콰콰.
혀를 차는 순간, 그녀의 주변으로 은빛과 녹색이 섞인 오러가 일어나더니, 이내 회오리치듯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녹색 바람의 손길.
방어와 긴급 회피, 거기에 정신 방어력 상승과 약간의 회복 능력까지 더해 주는 전천후 수비용 비기였지만, 그럼에도 분홍빛 안개는 사라지지 않았다.
‘영역’을 침범해 오지는 않고 그 경계에 머무르는 안개.
‘영역을 읽고 있어? 흥, 그래 봤자…….’
말룸의 수장이 8서클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정보.
‘나를 피해 도망 다니던 놈이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
에스티나의 의지에 따라 그녀의 ‘영역’이 뾰족하게 변이되며 안개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분홍빛 안개의 마력을 읽어 낸 뒤 그 원천을 향해 ‘타겟팅’을 이어 가려는데.
우우웅.
“읏!?”
함정!?
그 순간 마력이 변질되며 그녀의 영역을 타고 오히려 감각을 교란시켰다.
“칫!”
암습을 대비해 황급히 자세를 가다듬고 주변을 경계해 보지만, 분홍빛 안개는 딱 그 경계에서 멈춘 채 변함이 없었다.
게다가 감각이 제한되었을 뿐, 분홍빛 안개에서 특별한 독기나 저주는 느껴지지 않았다.
‘……8서클의 마법을 오직 감각 교란에만 집중시켰다고?’
8서클의 마력으로 타겟팅과 감각 제한만을 극대화시킨 마법이라면, 떨쳐 내기 어려운 게 이해가 된다.
나아가, 이 마법을 전개한 자가 다른 공격을 하지 못하는 것도 말이 된다.
조금 이상한 점이라면 타이니가 카룬에서 마주쳤던 놈은 분명히 검은색 마기를 사용했다 말한 것인데, 뭐, 그조차 놈이 ‘진화’하며 특성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악마추종자가 분홍색 마력이라니, 미친놈이 성정마저도 제대로 변태적이야.’
괜히 짜증이 솟구쳤지만, 대책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8서클의 마법이라도 범위의 한계는 있을 테니 멀리 벗어나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그랬다가는 적을 놓칠 수가 있다.
‘난 혼자가 아니야.’
초월무구 아르쿠스가 어디에 있을지 모를 적 대신 하늘을 향해 쏘아지고.
피융.
녹색의 오러 화살이 밤하늘의 일각을 물들이며 약속된 신호를 보냈다.
– 이곳에 말룸의 수장이 있다.
그리고 그 직후부터 에스티나는 주변의 안개가 틈을 보이기만을 기다리며 정신을 집중했다.
‘나와 카일룸을 동시에 잡아 두다니, 이만한 마법을 유지하려면 놈도 반드시 근처에 있을 거야. 시간을 끄는 마법에 전력을 투사하고 있을 테니 오래 버티지는 못하겠지.’
그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동료들이 도착하길 기다리려는 것이었다.
설령 놈에게 다른 초월무구나 그에 준하는 아티팩트가 있어 상상 이상의 마력을 발휘할 수 있다 해도 마찬가지다.
‘저릭이 오러익시더가 되었다는 걸 놈이 알까?’
오크의 대전사 역시 오러익시더의 경지에 올랐으니, 놈이 이 근처에서 마력을 움직이기라도 한다면 그가 놈을 처단할 것이다. 놈들의 위치가 발각된 지금, 시간은 자신들의 편이었으니까.
에스티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정신을 집중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멀리 떨어진 숲의 그늘 속에서, 염두에도 없었던 다른 누군가가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상상하지 못한 채로.
“흠……. 그분의 희생하신 마력 중 일부가 너를 속이기 위해 소모되었으니 영광으로 알아라, 타락한 세계수의 자식아.”
차원의 벽을 뚫었음에도 남아 있던 주인의 마력을 마저 털어 버린 릴리스가 에스티나의 주변으로 모여드는 적들의 기세를 느끼며 빙긋 웃었다.
‘다시 당해 주지는 않겠지만, 이번 한 번으로 충분하다.’
엉뚱한 곳으로 적의 주의를 돌려 놓았으니, 말룸의 정예들은 그녀의 명을 따라 변수를 죽이기 위해 달려갈 것이다.
그러니.
“제발 그 ‘구경’이 재미있었으면 좋겠군.”
묘한 미소를 남긴 그녀의 그림자가 밤하늘에 녹아들 듯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