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151
151 만월
* * *
에스플러네이드의 저 높은 무대 위에서.
아이는 깊게 고개를 숙인 채, 충분한 시간을 들여 관객석을 향해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진심이 전해지는 것 같아 린은 괜히 더 눈물이 흘러나왔다.
‘잘했어······. 잘했어······. 서진아······.’
린은 눈물을 훔치며 옆에 있는 룽에게 말했다.
“저 서진이 팬이 될 것 같아요. 클래식 음악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제가, 저 멋진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또 듣고 싶어졌어요.”
“저도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저 아이는 오늘 최고의 연주를 보여줬어요.”
린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애써 막지는 않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만큼은 모든 것에 솔직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흐르는 눈물을 더 이상 닦지 않았다.
“룽 선생님. 저요······. 수 간호사가 될 때까지 100번은 넘게 포기하고 싶었어요. 사실 그만두고 싶었어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요. 제가······. 간호사가 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저 아이를 만나게 됐으니까요. 그래서 저런 아이들을 구할 수 있게 됐으니까요. 저는······. 이거면 충분해요.”
린의 목소리가 떨린다.
눈가에 맺혀있는 눈물 때문에 무대가 잘 보이지 않았는데도, 마음속에선 저 아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가 그려졌다.
룽은 그녀의 진솔한 말을 듣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세하게 떨리는 눈꺼풀을 숨기기 위해 눈을 감았고,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목 너머로 삼켜야 했지만, 룽은 담담히 대답했다.
룽 역시 지금은 더 솔직해지고 싶었으니까.
“······ 저도 의사가 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희를 거쳐 간 아이가 저렇게 빛나는 모습을 보다 보니······. 조금 더 용기를 얻게 됐습니다. 저희는 계속 나아가야겠죠. 오늘 이날을 원동력 삼아서요.”
“앞으로는 모든 슬픔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서진이가 우리를 응원해줬잖아요.”
“그래요. 저 아이는 우리에게 희망을 줬습니다. 진정한 희망을요.”
“네. 저도 그걸 알 수 있었어요. 너무나 명확하게요.”
린과 룽은 다른 관객들과 마찬가지로 손바닥이 새빨개질 정도로 박수를 쳐줬다.
브라보나 환호성 없이 오직 박수만 치는 관객들.
그들 중에는 린처럼 눈물을 보이는 이들도 많았다.
AC2505 사고 당시, 밤낮없이 아이를 찾으러 다녔던 사람들.
구조대원들은 아이를 보며 회상에 잠겼다.
“저 아이. 내가 처음 봤을 땐 그저 작기만 한 아이였었는데······.”
“그러게. 그때 처음 봤을 땐 탈수 때문에 엄청 긴장했었는데 말이야.”
컨테이너선에서 아이를 발견했다는 연락을 받고 서둘러 헬기를 띄웠던 구조팀.
그때 아이는 심각한 탈수 때문에 입술마저 바싹 말라 있었고, 계속해서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조금만 더 늦게 발견했더라면 정말로 위험할 수도 있었던 상황.
그런 아이가 어느새 건강을 찾고, 무럭무럭 자라 당당하게 무대 위에 올랐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구조대원들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원래도 멋진 아이였잖아. 지금은 계속해서 멋지게 자라주고 있는 것뿐이고.”
“맞아. 그때, 헬기에서도 아이는 탑승객 한 명을 찾고 있었지. 보통은 경황도 없을 텐데 말이야. 그 와중에도 다른 사람을 신경 쓰고 있었어.”
“대단하긴 했지. 무의식 상태인데도 다른 사람 이름을 연신 불렀었잖아. 그런데 그게 누구라고 했었지?”
“정확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어. 그때 저 아이는 기력이 없었으니까. 목소리도 그만큼 작았고. 그런데 어차피 AC2505 사고 사망자는 한 명도 없었잖아? 저 아이, 아마 찾고 있던 사람은 잘 만났을 거야.”
“그랬겠네.”
“진짜 대단한 아이였다니까.”
“너무나 멋지게 자라줬어.”
미소를 지으면서도 눈물을 보이는 이들.
다른 구조대 팀도 아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바빴다.
“마음이 뭉클해질 정도로 따뜻한 연주였어.”
“맞아. 그리고 저 아이는 분명 우리에게 감사를 전했어. 연주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어. 놀랍게도 말이야.”
“나도 마찬가지였어. 그 ‘희망의 아이’가 우리에게 다시 희망을 연주해준다니······. 뭔가 신기한 느낌이네.”
“우리가 하는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금 알게 된 것 같아.”
“우리는······. 그래. 이런 걸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어. 우리의 손을 거쳐 간 이들이, 저렇게 건강한 모습을 다시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나네. 위안이 돼.”
구조대에서 일을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놓치게 되는 이들이 있다.
익숙해질 것 같으면서도 절대로 익숙해지지 않는 일.
평소엔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지만, 그건 분명히 깊은 상처를 낸다.
그러한 상처를 지닌 채 일상을 이어가는 이들에게.
이렇게 한명이라도.
저렇게 무대 위에서 활짝 웃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충분히 해볼 만한 일이 아닌가.
상처를 안고서도 해볼 만한 일이 아닌가.
구조대원들은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 우리가 하는 일은 이런 거야. 저 미소를 보기 위해서 매일 같이 땀을 흘리는 거니까.”
“저 아이는 우리에게 용기를 줬어. 자신이 할 수 있는 음악으로. 그렇다면 우리도 할 수 있는 일을 계속해야겠지.”
“저 아이처럼 또 나아가야지. 내일도. 모레도 말이야.”
“저런 미소를 또 볼 수만 있다면 못 할 것도 없어. 그리고 이건······. 우리의 사명이니까.”
“꼭 해야 할 일이기도 하고.”
“보람을 느낄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도저히 채워지지 않을 것 같던 공허한 마음이 충만해진다.
구조대에 소속된 모든 사람들은 저 아이처럼 미소를 짓거나 눈물을 흘리며, 박수로나마 아이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한편, 한서진의 옛 선생님이라 할 수 있는 박하선은 거의 오열하고 있었다.
“교수님······. 제 제자가요······. 저 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그때부터······. 제가 계이름을 알려줬던 그 아이가요······.”
강유한은 그녀에게 티슈를 한장 건네줬다.
“멋진 연주자가 됐지?”
“네······. 저렇게나 멋진 연주를 하고 있어요. 저 아이가······.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해주고 있어요······.”
현실과 실력의 벽에 부딪혀 연주자의 꿈을 포기했었던 박하선.
그렇게 포기했던 ‘어린 시절의 꿈’이 저 아이를 통해, 이곳에서나마 이루어진 느낌이 들었다.
박하선은 너무나 감사했다.
서진이가 포기하지 않아서.
끝까지 음악을 해줘서.
그리고 이렇게 멋지게 자라줘서.
모든 게 고마웠다.
한편, 박하선의 뒷좌석에서 엉엉 소리 내 울고 있는 여자아이도 한 명이 있었다.
당황하는 주변 사람들.
아이의 어머니는 아이와 눈을 한참 동안 마주치다가 꼭 끌어안아 줬다.
그러면서 귀에 대고 조용히 의견을 물어본다.
“오늘 오빠 공연을 보고 눈물이 난 거야?”
“······.”
우물쭈물거리는 여자아이.
한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랬을까? 수연이는 무슨 이유로 그렇게 슬펐어?”
“그건······.”
말로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연주를 듣고 마음이 뭉클해졌다.
오빠의 감정이 조금이나마 전달됐다.
그 감정은 너무나 따뜻하기도 했지만······.
‘그냥······. 너무······. 슬펐어······.’
태어나서 처음 겪는 일.
이해가 잘 되지도 않고, 논리적이지도 않은 일이었기에, 조리 있게 설명하기란 무척 어려웠다.
괜스레 등을 두드려주는 엄마의 행동 때문에 한수연은 더 눈물이 났다.
‘오빠는······. 왜 슬픈 걸까······? 연주 중에 눈물도 흘렸었는데······. 나는 오빠가 우는 거 처음 봤어······.’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수연이의 눈물은 엄마가 대신 닦아주고 있었다.
한수연은 오랜 생각 끝에 엄마에게 할 수 있는 말을 해봤다.
“엄마. 우리 오빠가······. 힘든 일이 있었나 봐요. 그래서······. 저 가슴이 아파요. 누가······. 여기를 콕콕 찌르는 것만 같아요.”
수연이의 행동은 본 엄마는 곧바로 위로의 말을 해줬지만,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한수연에게는 그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수연은 그저 앞으로 오빠를 더 잘 챙겨주고, 나중에 꼭 끌어안아 주겠다고 다짐할 뿐 제대로 된 말을 이어가진 못했다.
한서진의 어머니인 송예인은 수연이를 한참 동안 토닥여준 끝에야 간신히 진정시킬 수 있었다.
송예인 역시 수연이처럼, 오늘 아들의 연주를 듣고 ‘슬픔’을 느꼈었다.
⌜고독 속의 신의 축복⌟을 연주할 때 아들이 눈물을 흘린 것도 봤다.
이전부터 어렴풋이 느껴오던 아이의 ‘슬픔’이 오늘의 연주에서는 조금 더 분명히 느껴졌었다.
가슴이 아려올 것만 같은 감정.
따뜻함으로 마무리된 공연이었지만, 그 인상적인 감정은 아직도 송예인의 가슴에 박혀있었다.
그녀는 남편에게 작게 속삭였다.
“우리가 놓치고 있던 게 있을까?”
“글쎄. 서진이는 워낙 의젓한 아이니까 속으로 삭이는 게 있을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저 아이는······. 아직 ‘아이’잖아. 부모가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돼.”
송예인의 말에 한선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이런 결론을 내렸다.
“우리가 더 잘해주자. 서진이가 슬픔을 잊을 수 있도록. 잊은 사실조차 잊을 수 있도록 행복을 알려주자.”
“그래도 그 원인을······.”
“때가 되면 서진이가 직접 말해주겠지. 서진이에게도 생각이 있을 테니까. 나는 그걸 언제까지나 기다릴 거야. 그때까지 우리는 가족으로서, 부모로서 서진이를 품어주자. 나는 그러고 싶어.”
“······.”
“할 수 있지?”
“······.”
남편을 빤히 바라보는 송예인.
그녀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고, 남편은 그런 그녀를 꼭 안아줬다. 무릎팍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수연이와 함께 말이다.
1층 구석진 곳엔 객석에 앉지도 못한 채 서서 공연을 봤던 이들이 있었다.
⌜Schmid⌟ 소속의 두 사람.
김수호 매니저는 무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로저스 디렉터에게 말했다.
“음악이 만들어 내는 힘이 놀랍네요. 저뿐만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두가 느꼈을 겁니다. 저 아이의 연주가 어떤 연주인지 분명히 알게 됐을 겁니다.”
감히 가치를 매길 수조차 없는 연주.
한서진의 무대를 처음 보는 김수호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만 같았다.
로저스는 그런 김수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악의 본뜻에 가장 가까운 연주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카네기홀에서도 놀라운 연주를 보여줬던 아이였는데 또 몰라볼 정도로 성장을 했네요.”
“그런데 저기······. 디렉터님. 지금 음악의 본뜻이라고 하셨나요? 그게 어떤 의미죠?”
로저스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Schmid⌟의 매니저에게 약간의 팁을 주기로 했다.
“모든 걸 초월하는 연주. 아마 그런 게 아닐까요?”
“네? 그게 무슨······.”
김수호가 어떤 질문을 다시 하기도 전에, 관객들의 박수를 받던 아이가 어느새 피아노 앞에 앉았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공연장.
덕분에 김수호는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아이는 커튼콜도 없이 바로 앙코르곡 연주에 들어갔다.
하나의 음표도 소홀히 하지 않고 정성스레 연주를 이어간다.
재능이 많은 나이 어린 피아니스트는 오늘 이곳 싱가포르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음악적 재능을 선보였다.
앙코르의 마지막 곡은 어둠 속에서 자신을 구해준 의료진과 구조대를 위해 직접 작곡했다는 ⌜마법의 안개⌟였다.
신비로우면서도 아름다운 선율이 에스플러네이드의 저 너머까지 울려 퍼지며······.
마침내 공연이 막을 내린다.
* * *
에스플러네이드 대기실.
도도도도. 탓!
나를 제일 먼저 맞이한 귀여운 생명체(?)는 눈이 퉁퉁 부어있는 수연이였다.
꺼이꺼이 울음을 터트리며 나를 꼭 끌어안고 있는 수연이는 “오빠! 앞으로 내가 더 잘해줄게! 그러니까······. 우리 남매는 앞으로 더 행복해질 일만 남은 거야! 오빠는 나만 믿어! 으아아앙!”이라며 영문 모를 소리를 해왔다.
수연이가 얼마나 울었는지, 내가 5분 정도 토닥거려줬을 뿐인데 기절하듯 잠이 들고 말았다.
수연이를 혹 잡아가는 아버지.
아버지 등에 업힌 수연이는 새근새근 숨을 쉬기 시작했다.
“수연이 오늘 무슨 일 있어요? 엄청 감성적인 것 같아서요.”
어머니께 영문을 물어봤더니, 수연이가 내 연주를 듣고 엄청 감명을 받았다는 것 같았다.
“그만큼 오늘 서진이 네 연주가 인상적이긴 했어. 엄마도 엄청 놀랐다니까? 관객분들 반응도 대단했었잖아.”
“그러면 혹시 어머니께 하나만 여쭤봐도 돼요?”
“응? 어떤 걸?”
“제 연주를 듣고 어떤 게 느껴지셨는지 궁금해서요. 인상적이었다면 어떤 게 인상적이었는지도요.”
“······.”
보통 때라면 하지 않았을 질문.
하지만 오늘 공연에서는 이런 질문이 꼭 필요했다.
어머니는 고민을 하시다가 내게 차분히 대답을 해주셨다.
약간의 슬픔.
그리고 그 안에 숨어있는 것 같은 깊은 고뇌.
행복과 평온, 감사함의 표현.
위안과 위로의 음악을 사람들에게 들려주고자 했던 내 마음이 느껴지셨단다.
‘예전에 밀러 아저씨가 내게 말씀해주셨던 것처럼······. 오늘 공연에서는 내 음악과 내 뜻이 제대로 전달된 것 같네······.’
덕분에 나는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잠시 후.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서둘러 로비로 나가봤다.
린 누나와 룽 선생님.
싱가포르 국립병원 의료진분들과 구조대원분들.
그리고.
‘희망의 아이’를 응원해 주기 위해 에스플러네이드를 찾아와준 고마운 사람들까지.
나는 로비에서 그들과 한동안 대화를 나눴다.
한 명, 한 명과 인사를 하며,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저녁 시간에 시작한 공연인데다 앙코르에, 관객분들하고 이야기까지 나누다 보니 밤은 금세 깊어졌다.
하염없이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기에 에스플러네이드 측에서 이 상황을 정리해주셨다.
내게 응원을 보내주시던 관객들은 하나둘 로비를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나는 호텔로 돌아가기 위해 에스플러네이드의 주차장으로······.
“어?”
“무슨 일 있습니까?”
켈리 디렉터의 질문에 간단히 대답했다.
“대기실에 핸드폰을 두고 온 것 같아서요. 정신이 없었나 봐요. 금방 다녀올게요.”
“그건 저희가······.”
“아니에요. 대단한 것도 아닌걸요. 대기실 키도 아직 제가 가지고 있고요. 5분 안에 돌아오겠습니다.”
“잠시만······.”
어떤 대답을 듣기도 전에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별것도 아닌 일인데 디렉터님께 심부름을 시킬 수는 없었다.
가볍게 뛰자 대기실까지는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열쇠로 문을 열자 어두컴컴한 방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저 멀리 문틈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저긴 무대 쪽인데?’
다행히 핸드폰은 대기실 테이블 위에 있었다.
일단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뒤에 무대 쪽과 연결된 문을 바라봤다.
갑자기 생겨난 호기심.
대기실 안에 있는 전자시계를 확인한 뒤에 무대로 나가봤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곳.
에스플러네이드 콘서트홀의 조명은 모두 꺼져있었지만, 작은 창문을 통해 미세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 덕분에 대기실에서도 빛이 보인 모양이었다.
무대 중간까지 걸음을 옮겨봤다.
신고 있는 구두 덕분에 도각도각 거리는 소리가 공연장 전체에 울려 퍼진다.
정적이 내려앉아 있는 공연장의 분위기는 참으로 신기했다.
가득 차 있던 관객석은 텅 비어있었고, 나와 함께 호흡을 맞추던 그랜드 피아노는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피아노의 건반 뚜껑을 열어봤다.
무심결에 건반을 눌러보려다가 손을 거뒀다.
문득, 이곳의 고요를 깨서는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밤중의 공연장이 주는 독특한 느낌.
이 느낌을 평생 가져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아노와 객석, 창문을 번갈아 쳐다보던 나는 대기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에스플러네이드의 공연장을 나서기 전에 뒤를 돌아봤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던 미세한 빛이 어느새 더 선명해져 있었다.
푸른색이 감도는 따뜻한 빛.
그 빛이 내려앉아 있는 곳을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나는 공연장을 빠져나갔다.
아무런 미련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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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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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시간때까지만해도 사람들로 붐비던 공연장은 적막이 내려앉아 있었다.
텅 비어있는 공연장.
아무도 없는 무대.
따뜻한 연주가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피아노도 지금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조금은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이 장소에서.
창문을 통해 우연히 들어온 한 줄기의 달빛이.
공연장의 공간을 거쳐 1층 객석에 내리 앉는다.
꽤 오랜 시간 1층 객석에 머물러 있던 달빛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위치가 변화했다.
달이 뜬 위치에 맞춰.
달빛 또한 걸음을 옮긴다.
절대로 빠르지 않게.
갑갑할 정도로 천천히.
몇 시간에 걸쳐 그 푸른 빛은 마침내 피아노까지 도달한다.
스테인 웨인 피아노는 마치 조명을 받은 것처럼 반짝였다.
달빛은 피아노의 건반을 느릿느릿 어루만졌다.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시간이 멈추어버린 듯한 이곳에서.
오직 달빛만이 소리 없이 피아노를 연주한다.
정성스럽게.
그 소리가 누군가에게 닿기를 바라면서.
잠시나마 시간을 보낸다.
12월의 어느 여름밤.
싱가포르의 만월이 미련 없이 그곳을 떠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