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ord of another world is well fed RAW novel - Chapter 128
“란돌프 자작 영지가 가장 손해를 많이 봤다지?”
“마을 4개가 통째로 사라졌다지 뭔가.”
“영주 직할시에서도 빠져나간 인구가 제법 된다고 들었네만.”
“쯧쯧-. 꼴 좋군. 수도의 화려한 생활에 빠져서는 정작 제 영지는 제대로 돌보지도 않고 수탈이나 일삼더니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러게나 말일세. 그러니 평소에 좀 잘 했어야지. 다른 서부 영지들도 비슷하다며?”
“우리 사촌이 행상을 다니지 않나. 쭉 둘러보고 왔는데 제대로 굴러가는 곳이 없더래. 특히 공방들이 타격을 많이 입었다네?”
“공방이? 장인들은 대우가 그래도 나쁘지 않았을 텐데?”
“장인들한테만 잘했으니 문제지.”
수도 사람들은 서부에 벌어진 불운을 안쓰러워하기 보다는 비웃기 바빴다.
오죽 영지민에 대한 수탈이 심했으면 해적에 의해 기반 시설이 박살이 난 틈을 나서 기다렸다는 듯 도망을 갔을까?
“그래도 말이야, 과연 적응을 잘 할 수 있을까? 고향을 버리고 도망친 것이나 마찬가지잖아.”
“하긴. 언제 또 도망갈지도 모르는 신의라곤 없는 자들인데 원 주민들이 잘 해줄 리 없지.”
“어울리잖아. 남부의 천 것들과 신뢰를 저버린 서부의 짐승들이나.”
“푸하하! 끼리끼리 만났군, 그래!”
수도민들이 결국 제 영지민 하나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는 서부의 귀족들과 탈출을 감행한 서부인들은 물론이고 남부까지 한 번에 싸잡아서 흉을 보려 했다.
여러 왕국이 합쳐져 제국이 된 지가 벌써 수 백 년이 훌쩍 넘었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지역에 대한 차별이 남아있었다.
“자네들, 지금 뭐하나! 안톤 상회에 라비아 님의 특별 공연 영상구가 풀렸다는데!”
“뭐? 그걸 왜 지금…!”
“한정판이라고, 서둘러!”
“이런, 젠장. 그걸 제일 처음에 말했어야지!”
한참 떠들면서 맥주를 마시던 중, 또 다른 친구가 선술집 안으로 들어와 한 가지 소식을 전했다.
다른 테이블에 저마다 떠들던 사람들 중에도 소식을 듣고 슬며시 일어나 안톤 상회 방향으로 뛰기 시작하는 이들이 보였다.
그 정도로 최근 라비아의 인기는 남녀를 불문하고 치솟는 중이었는데, 아름다운 외모에 타고난 목소리도 발군이었으나 무엇보다 이를 돋보이게 하는 영상 연출은 보는 이로하여금 영상구 속으로 빠져 들어갈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곤 했기 때문이었다.
“쯧쯧-. 그리도 차별을 숨쉬듯 하던 이들이 꼬리에 불 붙은 망아지처럼 굴다니. 저 라비아 라는 이가 술탄의 비가 될 여인이라고 했던가?”
“예. 주군. 술탄과 가문의 허락 하에 지금 남부에 머물고 있다고 하옵니다.”
“정작 가장 차별을 많이 당하는 외국인을 담은 영상을 역시 차별 받는 남부인들이 팔고 있는데 입으론 욕을 하면서도 돈주머니를 푸는 꼴이라니. 재미있군.”
“원래 사람은 양면성을 가진 존재들이 아니겠습니까.”
“그저 멍청한 것이다. 포장치 말라.”
“예.”
“됐다. 여흥이 깨졌구나. 돌아가자.”
“영상구를 구해올까요?”
“쓸데없는 소리.”
“나오신 김에 도박장에 한 번 가 보시겠습니까? 그래도 황… 아니, 도련님께서 자주 가신다고 하니 주의를 주시는 것도 나쁘지…”
“됐다. 두어라.”
“허나, 주군.”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쓰임을 다하는 것이니 그 이상은 신경쓰지 말라.”
“예.”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선술집 2층 자리에 있던 사내가 남은 술을 한 입에 털어 놓고는 일어섰다.
모든 것을 발 아래 둔 것 같은 오만함과 현실에 발 붙이고 살 것 같지 않은 초연함이 동시에 존재하는 묘한 인물이었다.
“아, 그러데 궁금하긴 하군.”
“무엇이 말이옵니까?”
“남부로 이주한 제국민들이 정말로 그리 심하게 차별을 당할 것인지 말이야.”
“알아볼까요?”
“그래. 그저 어떻게 사는지만 보고 오라 이르라. 만약 정도가 심하다면 곧장 알리고.”
아들에게는 한 톨도 내어주지 않은 관심이었지만 이주를 결정한 생판 남인 이들에겐 아낌없이 주어지는 것이기도 했다.
***
“아카데미 다녀오겠습니다!”
“얘, 뛰지 말고! 그러다 넘어져!”
“우하하하! 내가 일 등이지!”
“아냐! 오늘은 내가 먼저야!”
이제 갓 열 살이 넘었으려나?
쌍둥이 아들, 딸은 요즘 늦잠을 자는 법이 없었다.
건넛마을에 새로 생긴 기초 아카데미에 가서 수업을 들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일주일에 딱 사흘만 가는 기초 아카데미에 가는 것은 요즘 아이들의 낙이었는데, 숙제를 내주는 엄한 선생님들을 무서워하면서도 즐거워하는 것이다.
“저렇게 좋을까?”
“허허. 공부는 어려워도 친구들과 노는 것도 재미있고 급식도 맛있다잖아. 당신 솜씨보다 아카데미 조리장의 솜씨가 더 나은 모양이지.”
“뭐라구요? 흥! 오늘 도시락은 없는 줄 알아요!”
“어이쿠.”
부부가 동시에 깔깔 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잘 온 것 같지?”
“그러게요. 걱정이 많았는데, 왜 그랬나 싶어요.”
“고향을 떠나는 것이 당신이나 나나 처음이니 무턱대고 겁을 먹었던 거야. 우물 안 개구리였어. 바깥에 이런 별천지가 있는 줄도 모르고.”
“우리 아이들은 이제 이 곳에서 쭉 자랄 테니까요. 얼마나 다행인 일이에요?”
“그런데 오늘 출근은 늦어? 왜 아직 나가질 않고.”
“어제 밤에 이야기 했는데 또 안들었요? 정말! 오늘은 오후에 출근이에요. 오전엔 VIP 손님들이 치수를 재러 오실 거라 최소한의 인원만 남아있는대요.”
“아, 그랬지. 참.”
이 가족은 서부에서 넘어와 에버그린에 자리를 잡은 구제민이었다.
가족의 가장은 구조선 앞에서 만난 행정관의 말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남부에서 파견되었다는 행정관은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하며 주민들을 분류하고 목록을 작성하고 구출민들을 가르치느라 눈 밑이 검게 죽어있었다.
다만, 여전히 말투는 친절하고 상냥해서 긴장하던 사내의 마음을 조금은 풀어주었다.
잠시 망설이던 남편은 거짓말을 할까 하다가 어차피 거짓말이라면 금방 들통이 날 거란 생각에 사실대로 말하기로 했다.
[저, 저는 양조장에서 일을 했고 안사람은 얼마 전까지 의상실에서 일을 하다가 지금은 아이들을 보고 있어요.] [양조장과 의상실이요? 그럼 주조사와 재단사셨군요!] [아유, 아닙니다, 아닙니다! 주조사라니요, 큰일 날 소리입니다. 그저 양조장에서 허드렛일이나 했을 뿐이지 장인에게나 붙는 이름은 감히 욕심을 내 본 적도 없어요. 안사람도 마찬가지에요. 의상실에서 보조나 하고 재단사님이 시키는대로 했을 뿐이지…] [그래도 술을 담고 옷을 만드신 분들 아니신가요?] […그건 그렇지만…] [그럼 기술자로 분류됩니다. 저기 푸른색 깃발이 걸린 배에 내일 오전에 탑승하시면 됩니다.]쾅-.
행정관이라던 자는 멋진 문양이 그려진 종이에 거침없이 무언가를 쓰더니 붉은 도장을 쿵, 찍어주었다.
까막눈이라 그게 무슨 말인지는 몰랐지마 배를 탈 때 필요하다고 하니 품에 꼭 집어 넣고 혹시나 잊어버릴새라 밤을 뜬 눈으로 지샜던 사내.
다음날 아침.
배에 무사히 오른 뒤 즐거워하며 이리저리 뛰어 다니는 아이들을 보다가, 문득 종이가 궁금해서 전날 만났던 행정관과 비슷한 옷을 입고 이는 사람에게 읽어주기를 부탁했다.
황망해하는 사내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듯 손을 벌벌 떨자 행정관이 씩 웃으며 손을 잡아주었다.
[술을 빚을 줄 알면 주조사가 맞습니다. 그러니 그리 걱정하지 마세요. 장인도 아닌데 주조사라 소개를 해도 되는지 두려운 것이지요? 우리 에버그린에서는 직업이 곧 장인의 증명이 아닙니다.] […예?] [여러 주조사들 중에 경지에 오르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면 그제야 장인이라 인정받는 것이지요. 그러니… 안티넬? 장인이 될 수 있게 그 재능을 우리 에버그린에서 마음껏 뽐내 보십시오.]행정관은 곧 바쁜 일이 있는지 사라졌지만 뱃머리에서 안티넬은 한참을 멍하게 서 있어야 했다.
열 두 살 때부터 18년을 꼬박 양조장에서 술을 빚어왔던 그.
하지만 누구도 자신을 ‘주조사’라고 불러주지 않았다.
그는 이십 년 가까운 세월동안 그저 장인의 밑에서 허드렛일이나 하는 일꾼으로 존재했을 뿐이었다.
대다수 지역에서 장인과 직업은 같은 의미로 쓰였다.
자신의 공방을 가진 장인 정도나 되어야 재단사니, 주조사니, 대장장이니 하는 단어를 당당하게 직업이라며 소개할 수 있었고 그 밑에서 일하는 이들은 모두 ‘일꾼’이나 ‘하인’, 운이 좋으면 ‘제자’ 정도로 칭해졌다.
그러니 당연히 경력을 인정받지도 못했다.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일방적인 해고를 당해 다른 공방으로 취직을 해보려고 해도 돌아오는 말은 천편일률적이었다.
– 아, 잡일꾼이었구만. 급여는 이 정도. 뭐? 싫다고? 흥! 그럼 다른 곳을 찾아 봐! 아무나 할 수 있는 잡일인데 이 정도 대우면 충분하지, 만족을 모르는 놈 같으니라고!
아무리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일을 했다고 해도 ‘장인도 아닌 놈이!’ 라는 말에는 주눅이 들고 마는 게 대다수 공방 노동자들의 현실이었다.
‘나한테 주조사라고 했어.’
여전히 증명서를 읽지는 못한다.
하지만 이 종이가 자신을 주조사라고 인정해주는 증거였다.
사내의 표정이 마구 일그러지더니 주름이 이리저리 잡히고 붉어진 눈에선 굵은 눈물이 뚝, 뚝. 끊임없이 흘렀다.
쓸모를 인정받는다는 것.
그건 어떤 이들에겐 다른 그 어떤 가치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
“후우-.”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안티넬은 부인이 싸 준 점심 도시락을 들고 오늘도 도시 중심부로 나왔다.
“큰 일이네. 양조장이 이렇게나 없다니.”
꿈에 부풀어 찾은 에버그린.
이 곳의 시장이 자신들과 같은 구제민들을 위해 작지만 아늑한 판잣집을 마련해주었고 아이들은 아카데미에도 갈 수 있게 해 주었다.
심지어 행정관이 나와서 일자리를 직접 알선해주기도 했는데 안티넬은 여전히 취직을 하지 못하고 이렇게 길거리에 나와 여기저기 들러가며 사람을 구하는지 묻고 다니는 것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였다.
에버그린에는 양조장이 없었다.
“이렇게 큰 도시에 양조장이 없다니…”
정확히 말하면 민간 양조장이 없었다.
신전에서 운영하는 와이너리와 규모가 큰 술집이나 음식점에서 자신들이 사용하기 위해 조금씩 만드는 맥주나 청주, 과실주 같은 것들은 있었지만 어디로보나 전문 양조장은 아니었다.
안사람이 재단 실력을 인정받아 서부에 있을 때보다 두 배나 많은 급여를 받게 되어 당장 먹고 살 문제는 없었지만 그래도 이대로는 안 된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없는 양조장을 만들 수도 없고, 어쩌지.”
“하나 만드시면 되지, 뭐가 문제에요?”
그 때, 갈색 머리에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한 젊은 청년이 말을 걸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