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ord want to play RAW novel - Chapter 33
033화
“생각했던 것보다 일찍 찾아왔군.”
“그런데 영주님. 인원이 열 명이 넘는다면서요?”
“그러게, 생각보다 많이 온 모양이야.”
솔직히 처음 헬렌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소크라 칼리지 출신이 몇이나 이 궁벽한 곳까지 올까 싶었다.
전 수석 행정관 로베르 준남작이 칼리지 출신이라고 얼마나 유세를 떨었던가.
콧대가 높을 게 분명했기에 헬렌과 친분이 있는 졸업생 서너 명만 와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십여 명이나 올 줄은 몰랐다.
“이 모든 게 최근에 쌓은 영주님의 명성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카펜터 단장, 낯간지러우니 아부는 삼가도록.”
“어흠, 제가 없는 얘기를 했습니까? 온천 유람을 온 귀족들도 그랬습니다. 영주님의 전공이 왕도에 알려져 있다고요.”
프릴 산맥으로 들어가 리저드맨 무리를 토벌하고 난민을 구출하면서 흑마법사를 물리친 일, 최근에 영지전에서 미라보 영지군을 가볍게 격퇴한 일들이 왕도까지 소문을 탔다고 한다.
이렇다 보니 왕도의 사교계에서도 필리프 남작을 언급하는 이들이 급격히 늘었다고.
“그런데 그대들은 괜찮나?”
필리프는 슬쩍 행정관들을 보며 물었다.
자신이야 대신 일할 노예(?)들이 늘어나서 좋지만, 칼리지 출신의 고급 인재들은 그들의 잠재적 경쟁자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필리프는 행정관들이 소크라 칼리지 졸업생들에게 텃세나 파벌 다툼을 벌일까 봐 걱정했다.
그러나 이는 기우였다.
“영지가 커지고 사업들도 많이 늘었으니 어쩔 수 없지요.”
“영주님, 지식은 저들이 더 많을지 몰라도 실무는 저희가 더 잘 압니다.”
“그리고 남작가에 대한 충성심도 저희가 더 높고요.”
“새로운 부하, 아니, 인재들이 오는데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최근 늘어난 공방과 상점들을 관리하느라 야근을 밥 먹듯 하는 다론 상업관부터, 혹시 비리나 새는 돈이 없는지 감시하느라 하루에도 몇 번씩 장부를 살피는 부치니 재무관까지.
피로에 찌든 안색인 행정관들은 오히려 잘 되었다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질투를 안 한다니 다행이군.’
필리프가 내심 안도하고 있을 때.
영주성으로 오고 있던 칼리지 졸업생들도 안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길가의 사람들이 입고 있는 복장이라든가, 주택들의 상태가 나빠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쥬드 선배님. 생각보다 브란델 남작령이 건실해 보이는데요.”
“브란델 남작 덕분이라고 하더군.”
“남작이 엘디르의 사도라는 소문이 사실입니까?”
“헬렌이 보낸 편지에 의하면 그렇다고 해. 발화기나 선풍기 같은 기발한 발명품도 직접 만들었고, 온천을 발견한 것도 엘디르의 은총 때문이라던가.”
“선배님, 그뿐만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오다가 만난 용병들에게 들었는데, 드래곤 브레스라는 무서운 무기도 갖고 있다고 하더군요.”
“설마 드워프들과 친분이?”
쥬드 일행은 이곳으로 오며 필리프와 브란델 영지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그들이 가장 관심을 둔 건 영주나 영지의 역량이었다.
만약에 그저 농사만 짓는 평범한 시골 영지였다면 애초에 올 생각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
‘뛰어난 영주의 밑에서 일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도 기회가 될 터!’
그가 히죽 웃으며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영주성 입구에 당도했다.
입구에선 낯익은 이가 손을 흔들며 그들을 반겨주고 있었다.
“헬렌이구나! 오랜만이다!”
“다들 잘 지냈어요?”
“못 지냈으니 여기에 왔지. 너는 낯빛이 좋아 보이는구나.”
“호호, 그야 영주님의 비서인걸요.”
“그런데 전보다 더 예뻐졌는걸? 혹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나?”
“서, 선배님,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영주님께서 기다리시니 얼른 들어가요!”
당황한 얼굴을 한 헬렌은 모두를 필리프가 있는 접견실로 데리고 갔다.
***
접견실로 들어간 일행에게 근사한 차림에 위엄에 찬 표정을 짓고 있는 젊은이가 눈에 들어왔다.
‘저 사람이 브란델 남작인가?’
‘기사가 아니라고 들었는데, 체격이 꽤 좋은걸.’
‘직접 대장간 일을 한다니까 그럴지도…….’
다들 그에게 인사를 건네려 할 때, 주드는 이를 말리고 책장 옆에 서 있는 수수한 차림의 검은 머리 청년에게 다가가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브란델 남작님.”
“용케 날 알아봤군.”
유심히 일행을 바라보고 있던 필리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주군으로 모실 분인데 미리 알아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쥬드는 검술로 단련된 근육은 노동으로 만들어진 것과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브란델 남작이 기사라는 얘기는 못 들었기에, 그는 수수한 검은 머리에 평범한 체격의 청년이 남작일 거라 확신했다.
“근데 만나자마자 이런 시험을 치를 줄은 몰랐습니다.”
“워낙 어중이떠중이들이 많이 찾아와서 말이지. 명성이 자자한 소크라 칼리지 졸업생들의 실력을 알아보고 싶기도 했고 말이야.”
그래서 호위 기사인 테리를 그럴듯하게 차려 입히고, 자신은 시종 같은 차림을 했던 것이다.
다들 테리에게 시선이 쏠려 있었는데, 리더로 보이는 곱슬머리는 그렇지 않았다.
꽤 남다른 안목을 갖추고 있는 듯했다.
“그대의 이름이 뭔가?”
“쥬드 블랑이라고 합니다.”
“그래, 쥬드. 난 대장장이 신의 사도로 귀족 자격도 없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다. 그런 이를 정말 주군으로 모시고 싶은가?”
“오히려 좋습니다. 저희도 귀족의 자격은 없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영주님을 주군으로 모시기 딱이라 할 수 있지요.”
쥬드가 능글맞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사실 그는 왕도 대귀족의 사생아였다.
함께 온 이들도 대개 평민 출신 아니면, 신분에 결함이 있는 이들뿐.
천덕꾸러기로 취급받아 왔기에 대장장이 영주라 조롱당하는 이의 가신이 된다고 부끄러울 이유가 없었다.
사교계에서 어떤 얘기가 나오든, 자신들의 역량을 알아보고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준다면 누구든지 주군으로 모실 수 있었다.
“내 밑에 들어오면 앞으로 뼈 빠지게 일해야 할 텐데? 그래도 좋은가?”
“잉여인간이라며 손가락질당하는 것 보단 낫겠지요.”
“훗,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다.”
“후회는 급료가 쥐꼬리처럼 적으면 하겠습니다.”
쥬드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망설임이 없는 건 그의 일행들도 마찬가지.
처음에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던 그들은, 곧 기대 어린 눈빛으로 자신의 주군이 될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필리프는, 이들이 진심으로 새 출발을 각오하고 브란델 남작령에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마다하지 않고 굴려주지!’
내심 쾌재를 지른 필리프는 마음속으로 소크라 칼리지 졸업생들에게 번호를 붙였다.
‘쥬드란 녀석이 제일 똑똑해 보이니 일노예 1호. 거기 안경잽이는 계산에 밝아 보이니 일노예 2호. 퉁퉁이 넌 바닥부터 겪어야 할 것 같으니 일노예 3호…….’
나름 그들을 환대한 필리프는 일단 여독을 풀도록 한 뒤에 각자 맞는 업무를 배당해 주기로 했다.
“오늘부터 그대들은 내 가신이자 브란델 남작령의 일원이다.”
“감사합니다, 주군.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
새로운 노예, 아니, 가신들의 영입을 끝낸 필리프는 헬렌에게 쥬드 일행이 쉴 숙소를 안내해 주라 일렀다.
그런 다음 대장간에 딸린 자신의 연구실로 향했다.
연구실에 도착한 그는 그동안 틈틈이 만든 요트 모형을 살펴보며 실물 선박의 설계도를 작성해 나갔다.
옆에서 설계도 작업을 지켜보고 있던 마우가 궁금한 기색으로 물었다.
“버뮤다 리그(Bermuda rig)라는 거야. 기존의 삼각돛보다 간편하고 조작도 쉽고, 추진력도 강해서 17세기 이후로 큰 배나 작은 배 모두 사용했지.”
당연하다.
기왕 만들 것, 수천 년 동안 발전한 지구의 범선들의 장점을 최대한 적용하는 게 좋지 않겠는가.
‘마음 같아서는 수십 문의 화포를 보유한 전열함을 만들고 싶지만, 그건 시기상조니…….’
대항해시대 범선의 끝판왕은 바다 위의 요새로 불리는 전열함.
이 전열함으로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라 불릴 정도로, 세계 전역에 식민지를 거느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를 만들기에는 화포 기술도 부족하고, 배 만드는 기술은 더더욱 부족하다.
해서 현재 필리프의 목표는 라테란의 범선들보다 크고 빠른 캐랙이나 갤리온이었다.
이를 위해 가신들에게 배를 만드는 장인을 수배하라는 지시를 내려두었다.
‘그런 인력을 구하는 게 쉽진 않겠지만,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했으니까.’
능숙한 선박 기술자들과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지구의 선박 지식이 합쳐진다면 최고의 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버뮤다 리그는 배에서만 쓰지도 않아. 랜드 세일이라고 해서 육상의 풍력 자동차에도 쓸 수 있어.”
“그래, 자동차라고 꼭 구조가 복잡한 기계 장치가 필요한 건 아니니까.”
바람이 잘 불고 지형이 평탄하면 풍력 자동차도 쓸만하다.
하지만 브란델 남작령에는 그런 조건을 가진 지역이 적다 보니 필리프도 만들 생각이 없었다.
‘괜히 호기심에 쓸데없는 물건을 만들었다간 가신들, 그중에서도 부치니 재무관이 입에 게거품을 물고 달려올 게 뻔하거든.’
그렇게 필리프가 마우와 대화를 나누며 설계도를 그리고 있을 때였다.
똑똑.
“영주님, 소인 한스입니다요.”
노크 소리와 함께 문밖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펜에서 손을 뗀 필리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스가 연구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가죽 조각에 감싸인 시커먼 흑요석 조각 같은 것을 필리프에게 내밀었다.
“며칠 전 영주님이 알려주신 대로, 카르파스 마을에서 뜯어온 해초를 태운 재에 고운 모래와 석회를 섞어 태워봤습죠.”
“오, 이게 그렇게 만든 유리인가?”
“이크! 조심하십쇼. 날카롭습니다요!”
맥주병 조각처럼 거무튀튀하긴 했지만, 유리 특유의 광택은 잘 살아 있었다.
앞으로 재료 배합이나 가열 작업을 잘하면 투명한 유리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근데 수제로 유리병 만드는 건 개노가다던데…… 뭐 어차피 제조법만 알려주면 알아서 구를 노동 자원이 많으니 상관없겠지.’
지난번 리저드맨들에게서 구한 난민들의 재배치가 끝났다.
일부는 초석밭을 만드는데 배치가 되었고, 일부는 유리나 비누 공방에 투입되었다.
앞으로 배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 총병 부대 육성이나 화포 개발 등 앞으로 돈 들어갈 일이 많기에 지금부터라도 바짝 돈을 벌어놓아야 한다.
‘아, 그거?’
필리프도 지구에 있을 때 많이 봤다.
산업 스파이가 기술을 훔치거나, 기술자를 빼돌려서 원래 회사를 망하게 만들거나, 국가적인 손실을 끼친 뉴스를 볼 때마다 분통이 터지곤 했다.
‘내 땅에선 절대 그 꼴을 못 본다!’
영지전에서 승리한 이후, 공방 주변에 기웃거리는 놈들이 생겨났다.
예전엔 안 보이던 행상이라든가, 가까운 술집에 새로 고용된 웨이트리스라든가.
의심스럽긴 해도 아직 마땅한 증거가 없어 잡아들이진 않았다.
하지만 마냥 방치할 순 없는 노릇이기에 대응을 준비하고 있었다.
헛된 수작을 부리지 못하게 엿 먹일 준비를!
‘어디 한 번 훔쳐보라지. 아주 X 되게 만들어 줄 테니까. 크크크!’